"불교는 해탈을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로 구분하며, 심해탈은 아공(我空)을 깨달아 아집(我執)을 벗음으로써 가능하고, 혜해탈은 법공(法空)을 깨달아 법집(法執)을 벗음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 세간에 대해 그것을 사람 마음을 떠난 객관적 실재라고 간주하고 있는 한, 그것은 잘못된 허망분별의 망집이기에 혜해탈을 이룰 수 없다. 이 망집을 주관적 아(我)와 대비되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집착이란 의미에서 법집이라고 한다. 객관 실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그에 대면하고 있는 자아에 대한 집착 역시 심정적으로만 극복되었을 뿐 이지적 차원에서 그 뿌리는 잔존하고 있다. 일체 법의 분별이 마음의 소산이라는 것, 그 마음을 떠나 아(我)도 법(法)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심정적으로 아집을 넘어서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에 속하는 일종의 지혜인 것이다. 그것이 곧 일체 법의 공성을 자각하는 법공의 깨달음이다. pp. 219-220.
이렇게 보면 불교에 있어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이란 굳이 사후 문제가 아니라, 현생적 삶에 있어서도 발생 가능한 하나의 사건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아 또는 객관세계라고 집착하는 것이 모두 그렇게 분별 집착하는 마음을 떠나 그 자체 자기 자성을 갖고 존재하는 객관 실체가 아니라는 것, 모두가 인연화합하여 발생하는 연기적 존재하는 것을 단지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깨달아 아는 것은 바로 마음의 자기 자각이며, 그것이 곧 견성(見性: 본래 그대로의 자기 본성을 보는 일 )인 것이다. p. 221. <동서양의 인간 이해>
“칸트가 자신 철학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표현한 바에 따르면, 그는 우리 마음이 세상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우리 마음에 일치해야 인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인식은 우리 마음이 대상에 자신 범주를 부여함으로써 생겨난 현상이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오직 경험계 구조에 대한 지식이다.“<서양 윤리학사>
“서양에서 불교에 대한 연구는 16세기 서구의 스리랑카 점령이나 17세기 중국 선교 이후 마테오 리치나 칸트, 라이프니츠,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등에 의해 행해졌다.”<심층 마음의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