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인간만큼

노예 같은 인간은 없다.

- 괴테







소설가 포스터는 『소설의 이론』에서 “플롯(plot)이란 사건이 전개되거나 반전될 때 사건 간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연관 관계”라고 정의한다. 그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단순한 정보 나열과 플롯 문장을 대비하여 예시로 들었다. ‘왕이 죽었고 왕비가 죽었다.’ 이 문장에는 단지 정보가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다음 문장과 비교해 보자. ‘왕이 죽었다. 그러자 왕비가 슬픔에 빠져 죽었다.’ 두 번째 문장에는 플롯이 반영되었다. 플롯 문장에는 사건들의 필연적 연관 관계인 ‘그러자’ ‘슬픔에 빠져’가 추가되어 내용 범위가 좁혀졌다. 곧, 왕비가 죽은 이유가 설명되어 첫 번째 문장에 비해 다른 가능성이 배제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정보만 나열된 문장을 접했을지라도, 다른 가능성이 배제된 두 번째 문장으로 파악하고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두 가지 정보가 어떤 의미를 가진 한 가지 정보로 통합되면, 플롯은 기억하기도 쉽고 남에게 전달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질수록 더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우리 상상 속에서 우연이라고 하면 무질서한 영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플롯을 들은 사람은 다른 가능성, 예컨대 ‘왕비는 정말 왕이 죽은 사실을 슬퍼했을까?’라는 의심조차 안 하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플롯은 마치 진실인 양 우리 마음과 신념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 플롯으로 정보가 전달되면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또 다른 중요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사건들의 필연적 연관 관계로 내용의 범위를 좁히는 우리 습성을 검증하기 위해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이를 ‘린다 문제’라고 이름붙이고 다음과 같이 실험했다. 먼저 린다라는 사람의 특징을 실험 참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린다는 31세의 독신 여성이며, 머리가 매우 좋고 본인 생각을 뚜렷하게 이야기하는 성격이다. 그녀는 철학을 전공했으며, 사회정의와 인종차별에 깊이 관여했고, 반핵 시위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설명한 후 린다가 (1) '페미니스트'일 확률이나 (2) '은행원'일 확률, (3) '은행원이면서 페미니스트'일 확률을 예측해보라고 했다. 실험 결과는 응답자 85%가 (1) ‘페미니스트’ > (3) ‘은행원이면서 페미니스트’ > (2) ‘은행원’ 순서로 린다 직업의 가능성을 예측했다. 응답자들의 예측 결과는 합리적이지 않다. 린다가 '은행원이면서 페미니스트'일 확률은 '페미니스트'이거나 '은행원'일 확률의 교집합에 속하기에 ‘페미니스트’나 ‘은행원’ 확률보다 더 클 수 없기 때문이다. 

 
















카너먼은 린다 문제와 비슷한 또 다른 실험도 했다. 실험대상자들에게 내년에 두 가지 재난이 각각 일어날 확률을 예측해보라고 했다. 먼저, 첫 번째 재난은 (1) 내년에 북미 어딘가에서 거대한 홍수가 일어나서 1,000명 이상이 익사한다. 두 번째 재난은, (2) 내년에 캘리포니아에 지진이 일어나서 그 여파로 거대한 홍수가 일어나 1,000명 이상이 익사한다. 실험 결과는 (2)가 일어날 확률이 (1)보다 높다고 판단한 사람이 더 많았다. (2)는 ‘원인’을 설명하며, 캘리포니아라는 특정 지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1)은 단순하게 사실만 나열했으므로 (2)를 더 설득력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린다 문제’처럼 (2)는 조건부 확률이기에 (1)보다 가능성이 클 수 없다. 우리는 사실의 ‘이유’나 ‘원인’이 부가되면, 즉 플롯을 접하면 더 그럴듯하게 느끼며, 사실에 더 가깝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플롯 짓기 오류는 인간이 날것의 진실보다 압축된 이야기를 편애하는 성향과 연관 있다. 이 오류는 단순한 사실도 억지로 설명하려드는 인간 한계를 보여준다. 이유를 덧붙여 설명하면 납득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 잘못된 이해일 수 있다. 

















카너먼 실험은 우리가 쉽게 편견에 빠질 수 있기에 자신 판단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은 플롯 짓기를 통해 문제 범위를 특정 인과관계로 축소시켜 세상을 실제보다 덜 무작위적인 것처럼 만든다. 이처럼 사실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 욕구는 주변 환경을 이해함으로써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장 프랑수아 마르미옹은 “인간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이유 대부분은 주변 환경을 통제하려는 욕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물리학자 레너드 믈로디노프는 우리가 자신 삶을 통제하거나 적어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자신 상황을 통제하길 원한다. 사람들은 스카치위스키 반병을 마시고도 자동차를 운전하지만, 자신이 탄 비행기가 조금만 흔들려도 기절한다.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은 우리 자아상과 자존심에 중요하다. 연구에 따르면, 절망감과 통제력 상실이 스트레스는 물론이고 질병과도 관련 있다. 모든 통제권을 박탈당한 실험쥐들은 발버둥을 포기하고 곧바로 죽는다. 병원의 중요한 검사에서 환자에게 검사 순서를 결정하는 무의미한 권한을 주는 것마저도 환자 불안 수준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구는 우리가 우연보다 필연을 선호하는 성향 때문이다. 사건이 우연하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통제할 수 없다. 반면 우리가 사건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건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건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 때문에 우연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기업들은 우연보다 필연을 선호하는 우리 성향을 이용하여 마케팅을 한다. 예컨대, ‘7명의 리더가 전하는 행복의 조건’이나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위한 6가지 법칙’과 같은 자기계발서가 끝없이 나온다. 우리 삶이 문제없이 잘 흘러가려면 반드시 정해진 필연의 길이 있으며, 이를 따라가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비즈니스 세계는 사업가의 숫자가 많기에 그중 한 사람이 우연히 탁월한 실적을 올릴 가능성도 커진다. 우리는 전체 사업가의 숫자를 셀 수 없을뿐더러 아예 볼 수도 없다. 우리는 오로지 승자만 볼 수 있다. 똑같이 혹은 그보다 더 월등하게 노력했음에도 실패한 사람들은 조용히 사라진다. 따라서 우리는 승자만 보게 되며, 그래서 우연을 잘못 인식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인가? 우리는 모든 것이 본인에게 달렸다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신이 더 똑똑하거나 더 부유하거나 더 날씬하지 않은 것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 운명의 통제권을 갖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대부분이 자기 통제 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리 통제 밖에 있다. 부도 명성도 건강도 통제할 수 없다. 본인 성공과 자식 성공도 마찬가지다.

















역사책을 보면 분명한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있기에, 세상은 우연이 아닌 필연의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항변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진주만 폭격을 설명할 때, 일본 정부가 미국과의 모험적 전쟁을 선택한 이유를 미국의 대일 석유금수조치로 설명한다. 석유금수조치는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접수한 데 따른 대응조치였음을 설명한다. 물론 일본의 인도차이나 접수는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패배한 덕분으로 설명하고, 아울러 일본의 중국 대륙 정복 좌절에 따른 대안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나아가 이 모든 일의 원인으로 1930년대에 일어난 권위주의와 군국주의를 설명한다. 이 시기 권위주의와 군국주의는 대공황과 관련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가 불공평했다는 당시 인식을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은 항상 필연으로 보이는 이유는, 수많은 우연 가운데 실현된 사건 하나를 보고 이를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건 하나가 발생하기 전에 그와 관계된 수백만 개, 심지어 수십 억 개 사실들이 쏟아진다. 그렇지만 일이 터지고 나면 우리는 그 가운데 단 몇 개 사실만을 가지고 사건을 이해해 버린다. 한 분야의 사건은 역사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수 있는 우연의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우연한 일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우연을 우연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기껏해야 입으로만 우연을 인정할 뿐, 속으로는 이 모든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을 다진다. 기본적으로 우리 뇌는 ‘우연’이라는 설명으로 대충 넘어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약한 신호만 보아도 거기서 패턴과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 그리하여 우연한 만남을 인연으로 착각한다. 서로 사랑하는 두 연인은 자신들 만남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중한 만남에 대해서는 우연을 부정하고 필연으로 가장(假裝)하려 한다. 반면에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피하고 싶은 상황이라면 우연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예컨대, 시험 당일 심한 배탈이 나서 시험을 망쳤다면, “재수가 나빠서 시험을 망쳤어”라고 말하지 필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소망하는 일이 생겼을 때만 필연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조건 지어진 존재다[불교 용어로 말하면 연기(緣起)다]. 세상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늘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 힘에 늘 휘둘리며 살고 있다. 이런 상태를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다른 것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 힘만으로 움직이는 독립된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지 않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뿐 우리는 속박을 받고, 조건 지어져 있다. 이런 관점은 개인 자율성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연에 의해 생기는 일은 인간 통제력을 넘어선다. 인간은 이 경우에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인간이 내리는 결정 중 상당수는 의식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서 일어나는 자동적 과정의 결과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부분이 대부분 사람이 상상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존재를 차지하는 비율은 본성(nature)+양육(nurture)=100퍼센트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형성되며,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될지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인생 문제를 결정할 때,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신념과 가치관, 성향을 근거로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기본적으로 우리 결정은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지금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곤혹스러울지 모르지만, 다른 방법은 생각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공정하다고 생각해서 부의 재분배를 위한 조세제도를 지지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공정하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분명히 우리는 이 문제를 충분히 숙고한 뒤에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타고난 성향, 우리가 습득한 정보와 사고의 결합이다. 본성과 양육의 결합인 것이다. 다른 것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스스로 충분히 자각할 만큼 나이가 들면, 인격과 인생관을 결정하는 핵심요인은 이미 결정이 끝나 있다. 

















문화역사학자 잭슨 리어스는 미국 문화를 우연의 윤리의식과, 통제와 책임 윤리의식이 벌이는 각축장으로 보았다. 우연의 윤리는 우리 삶이 인간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난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세상이 반드시 개인 통제력에 따른 보상을 주지는 않기에, 인생에는 우연의 인정과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음과 같은 구약성서 <전도서> 내용은 이런 윤리의식을 잘 표현한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았다.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라고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라고 음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명철한 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갖춘 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는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반면 통제와 책임 윤리는 인간 선택을 중심에 놓는다. 리어스는  자기통제 윤리가 복음주의 개신교 내부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면서, 결국 그 계열의 지배적 사상이 되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는 성공을 행운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통제와 책임 윤리의 핵심이다. 힘써 일함으로써 내 스스로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당당한 자격을 한껏 강조한다. 내가 많은 세속적 재화(소득과 재산, 권력과 명예)를 손에 넣는 데 스스로 책임이 있다면, 그러한 ‘취득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성공은 미덕의 증표다.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다. 스스로가 자기 운명의 책임자이며 통제 불능의 힘에 몰려가는 희생자가 아니라고 여기도록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삶에 대한 통제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논리로 기능한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지 못하도록 한다. 말하자면 최고 자리에 올라앉은 사람과 바닥에 떨어진 사람은 모두 다 그럴 만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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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5-17 18: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수많은 필요조건 중 임의의 판단에 따라 선별된 소수의 요인들로 그 사건을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건이 상황과 선택의 결과라고 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불변의 법칙을 통해 확정적인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확률적으로 보다 다는 결론에 가깝게 가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그나마 최선인 것 같네요...

북다이제스터 2023-05-17 19:01   좋아요 1 | URL
저는 학교 때 그리고 회사에서 상관관계 분석이나 인과관계 분석, 다변량 분석까지 배우고 활용히면서 확률적 ‘필연’을 믿었지만, 요즘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어차피 선별된 변수조차 우연의 세계에서 누락을 배제한 아주 소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은 제 공부가 좀 부족하여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호시우행 2023-05-17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진리!!

북다이제스터 2023-05-18 18:00   좋아요 0 | URL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23-05-18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에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라는 책도 추가하고 싶네요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5-18 17:58   좋아요 2 | URL
맨 밑에 있는 책이 공정하다는 착각 입니다. 근래 표지가 바뀌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23-05-18 18:20   좋아요 0 | URL
앗! ㅎㅎㅎ 역시 북다이제스터님bb 영알못이라 마지막 책이 무슨 책인가 했습니다ㅎ

유전과 양육, 자유의지와 선택. 참 흥미로운 주제인 거 같습니다. 이에 관련된 재밌는 책 혹시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ㅎ?

<자유의지>라는 책은 품절되었네요. 도서관에서 빌려봐야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5-18 18:30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주제는 아마도 <운명의 과학>에 다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ㅎ
근데 내용을 좋아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추천드립니다. ^^

고양이라디오 2023-05-18 18:44   좋아요 1 | URL
<운명의 과학> 재밌을 거 같습니다! 추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