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Books v. Cigarettes)


조지 오웰 지음 | 강문순 옮김 [민음사]



 

자유로운 지성인의 모습을 읽다

 


  담배 조지 오웰의 편을 모은 얇은 산문집이다. 조지 오웰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으로 미국의 비평가이자 논쟁가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로부터 비롯되었다. 히친스는 자신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하여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영향력 있는 학자들도 신랄하게 까면서도’, 조지 오웰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동물농장 통해서 스탈린 독재를 비판한 사람이란 인상만 갖고 있던 조지 오웰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던 계기였던 같다.

 


     이번에 읽은 담배 소설에서 상상했던 오웰의 면모를 새롭게 들여다볼 있었던 기회였다. 특히 짧은 산문임에도 오웰의 신랄한 비판의식과 글쓰기에 대한 고민, 그리고 예술과 정치와의 관계 설정에 대한 견해 등을 뚜렷하게 발견할 있다.  특히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이 막대한 돈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은 박탈당하고 만다”(38)라고 말할 정도로 오웰에게는 비판에 성역이란 없었던 같다. 감히 톨스토이라니! 톨스토이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있을 같다. 특히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읽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톨스토이의 면모를, 그래서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하는 문제로 부인과 심각한 불화를 겪었던 톨스토이를 고려하면 오웰의 톨스토이에 대한 평가는 쪽을 다소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하여간 오웰이 비판하는 방식은 이처럼 비판의 대상에는 성역이 없었다고 보아야할 사례였다. 오웰이 중요시했던 것은 독립적인 작가로서 누릴 있는 표현의 자유였다고 있다.

 


     산문집에서는 글쓰는 사람, 특히 책을 읽고 쓰는 서평가로서의 면모가 여러 편의 글에 묻어난다. 책이 비싸서 안산다고 하는 이들의 말에 1 불평분자들이 펴대고 마셔대는 담배와 술값을 계산해서 자신이 구입한 도서들의 가격과 비교하며, 책을 사서 보는 일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일임을, 말하자면 구라치지 말라 전하는 것이다.  그냥 자신이 책읽기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솔직한 것이 대체로 낫다.  

 


      한편 오웰은 책에 소개된 여러 편의 산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책들에 대해 주관적이지만 상당히 독립적인 견해를 표명한다. 토마스 칼라일이 똑똑하긴 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영어 문장을 재능은 없었다라고 돌직구를 날리거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앞부분은 인간 사회를 가장 통렬하게 공격한다라고 말하면서도 후반에서 스위프트는 자신이 흠모하던 종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실패한다라고 주저함 없이 언급하고 있다. 아직 내가 읽은 오웰의 작품이 별로 없긴 하지만, 오웰의 신랄한 비판을 따라가다보면 통쾌한 맛을 느낄 있다.

 


     문학 혹은 보다 폭넓게 예술과 정치와의 관계를 언급하는 부분 역시 책에서 주목해볼 만한 부분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뿐만 아니라 르포르타주를 살펴보면 오웰의 삶은 자신의 글과 정말로 일치했던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점은 작가로서 오웰이 정치의 참여를 매우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이다.”(60)

 

지난 동안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었다.”(63)

 


 특히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 같이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고 책이 노골적인 정치 저작임을 인정하면서, ‘ 문학적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전체적인 진실을 말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견해를 드러낸다.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이라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많은 지식인들의 표현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면 애초에 유대인 학살은 없었다라거나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라는 지적 태만과 허무주의로 빠져버리기 쉬울 것이다. 특히 거짓 권위를 갖는 이들에 의해 유포되는 거짓 사실이 그러하고,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이 있는 말이다. 오웰의 삶은 이처럼 인간의 특정 집단들이 만들어내고 강요하는 거짓 고발하고 이를 비판하는 삶이었음을 이해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조지 오웰은 정치적이지 않을 없었던것일 게다.

 


     개인적으로 책의 백미는 오웰이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걸리버 여행기 언급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유토피아로서의 천국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단테의 신곡 일부 읽으면서 느꼇던 것이지만, 천국에 올라간 유일한 사람으로서 단테가 유령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부터 여행하며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른다. 단테가 묘사하는 지옥은 너무나 디테일하고 끔찍한 반면, 이들 일행이 천국에 이르면 천사가 노래를 부르고, 밝은 빛이 있는 곳으로 묘사하는 정도다. 마디로 천국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싱겁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느 쪽이든 서양인들이 상상한 세계이긴 하지만, 천국에는 유독,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상상력이 발휘되지 못한 영역이었다. 조지 오웰 역시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오웰이 표출하는 신랄함의 백미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천국은 대개 어느 누구도 매력을 느끼지 않을 곳으로 그려진다. (…) 하지만 천국을 묘사할 때면 곧바로 황홀과 더없는 기쁨과 같은 단어에만 의존할 , 단어가 어떤 내용을 담는지 설명하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주제로 가장 중요한 글이 테르툴리아누스가 유명한 글일 텐데, 글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천국에서 누릴 있는 주된 기쁨은 저주받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70-71)

 


이렇게 짧은 편의 산문에서 작가의 캐릭터가 확연히 드러난다. 지금 떠올려보니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줄곧 보여주는 신랄함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있다. 히친스에게 영감을 주었던 지점은 바로 오웰이 외부의 모든 대상을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력으로 평가하고 바라보는 자유인 정신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로 노예와 자유인 대해 고민하고 언급했던 철학자 스피노자를 히친스가 역시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대상의 권위나 사회의 규범이 제한하는 범주를 벗어나 스스로 따져보고 판단하겠다는 자유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히친스라는 걸출한 비평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오웰의 면모를 얇은 산문집에서 들여다볼 있었다.

 



 


 



"전체주의가 지성인들에게 거대한 압력을 행사하는 곳은 문학과 정치가 교차하는 바로 이 지점이다."
(28면) - P28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이다."
(60면) - P60

"책을 쓰는 일은 고통스러운 병과의 지루한 싸움처럼 끔찍하고 진 빠지는 일이다. 저항하거나 이해할수도 없는 귀신에 홀리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니다." - P65

"훌륭한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65면) - P65

"테르툴리아누스는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것 중 주된 기쁨은 저주받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71면) - P71

"작가가 주체적으로 당의 기구뿐만 아니라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굴복하는 것은 작가라는 자아의 파괴를 부른다."
(86면)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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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원고 - 논픽션 대가 존 맥피, 글쓰기의 과정에 대하여
존 맥피 지음,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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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째 원고

맥피(John McPhee) 지음 |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내가 쓰는 단어 하나하나가 모조리 자신이 없고 결코 빠져나올 없는 곳에 갇혔다는 느낌이 든다면, 절대로 써내지 못할 같고 작가로서 재능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면, 글이 실패작이 빤히 보이고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면, 당신은 작가임이 틀림없다.”(257)

 


     글쓰기로 몸부림을 치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만한 증상을 열거하고나서, 그러니까 당신은 작가임이 틀림없다라고 믿기지 않는 결론을 내린 사람은 맥피라는 논픽션 작가다. 그가 이렇게 언급했던 것인지 궁금하다면 논픽션 쓰기 따라 읽어가다보면 공감하게 되는 지점이 나올 같다. 책은 글쓰기의 비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픽션 글쓰기의 대가 맥피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다른 논픽션의 대가이자 퓰리처상 수상자 하트가 논픽션 쓰기라는 책에서 였다.  

 


해설 내러티브 논픽션의 대가


맥피는 정확하고 신중한 스코틀랜드 남자다. 옷차림새도, 행동거지도 쓰는 스타일을 닮아 단정하다.

 


     하트가 논픽션 쓰기에는 맥피에 대한 언급이 책의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차례 나온다. 심지어 페이지 이상을 위에 인용한 것처럼 맥피라는 인물에 대해 묘사하고, 그의 글을 여기저기 인용하고 있다. 도대체 맥피라는 인물이 누구이길래, 이처럼 하트 자신이 저술하는 책에서 이렇게 칭송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눈여겨보았던 부분은 맥피가 글의 구조를 설계할 사용했던 다양한 도표들을 가져와 자신의 책에서도 중요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 만나게 번째 원고 저자의 면모에도 관심이 갔고, 이와 더불어 저자가 활용하던 글의 구조 설계 과정에 주목해보게 되었다. 책이 끝나는 부분에서 저자가 언급하듯이 논픽션, 특히 저자가 언급하는 창의적 논픽션은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진 최대한 활용하는 글쓰기. 책의 앞부분에 앤더슨이란 사람이 맥피의 정신에서 언급하듯이 맥피에게 글쓰기의 고충은 상당부분 글의 구조를 설계하는 데에 있다. 이번 독서는 무엇보다 저자가 논픽션 글쓰기를 , ‘구조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그렇게 구조 집착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찾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도 했다 .

 


     다른 논픽션 작가들이 맥피를 많이 언급하고, 참고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구조에 대한 고민, 연구 무엇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우선 독자들이 저자가 설계한 구조를 눈치채지는 못하게 하라고 주문한다. 정도의 선에서 구조를 세운 다음 키워드를 뽑아 기록하고, 분류된 자료를 가지고 견실한 도입부를 쓰라는 것이 주요한 골격이다. 논픽션인 만큼 글에 등장할 인물과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대상으로 한다. 대개 논픽션의 경우 연대기적으로 사건을 기술할 같지만, 맥피가 제시하는 구조의 설계도 그림은 마치 소설의 플롯 구성처럼  플래시 플래시 포워드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단순한 연대기적 구성을 탈피하고 있다. 따라서 글의 시작 역시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배치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 직전에서 마치 영화를 보듯이 바로 독자들의 눈길을 붙들고 나아갔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플래시 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언론에서 주로 사용하던 사건 보도 형태의 기사 작성 형식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맥피가 울프와 함께 논픽션 글쓰기의 파격을 도입했던 저널리즘 시대 배경 속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은 전통적으로 소설에 집중했던 잡지 <뉴요커> 역시 60-70년대를 거치며 논픽션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전속 필자를 많이 발굴했던 분위기와 겹치는 것으로 확인할 있다. 물론 저자가 처음부터 논픽션 작가가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시나 소설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본 뒤에야 자신이 논픽션에 보다 흥미를 지니고 스스로에게 적합한 장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사람인 까닭에 단어도 나아가지 못하고 마비상태와 마주하게 되었을 , 자신의 경험도 들려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서 연필과 종이를 들고 아무 데나 누워서 뭔가가 떠오르면 휘갈기라는 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진행이 안될 때까지 계속 써내려 가라 . 그런 다음 다시 컴퓨터에 앉아서 종이에 적은 내용을 파일로 옮기면 된다는 것이다.

 


     책의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기록하는 대목보다,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곁들이는 대목에서 저자 자신을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논픽션 작가인 만큼 자신이 놓았던 사항들에 대해 팩트 체크를 하는 과정에서 생긴 들이나, 편집자들과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긴장을 유지하며 옥신각신 하는 이야기, 혹은 은근한 유머들을 웃으면서 따라가다 보니 어느 맥피라는 인물이 앞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세기 넘게 글을 써오면서도 여전히 글쓰기 마비 상태 겪기도 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글쓰기의 본질과 고단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글쓰기 비법이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2000년도 전에 시학에서 제시해 놓은 것들의 다양한 변주들에 불과하다는 점과, 여기에 이르는 길은 자기가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닐까.

 


     책에서 아마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저자의 당부는 글쓰기는 선별이다라는 표현일 것이다. 무엇을 넣고 무엇을 것인가의 문제다. 선별과정은 글쓰기 소재를 취재하는 현장에서 노트에 낙서를 하는 동안에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취재 대상을 인터뷰할 때도 받아 적은 말의 대부분은 생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도입부를 쓰거나 초벌 원고를 쓰기만 한다면, 때부터 집필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저자는 알려준다. “수정이야말로 집필 과정의 본질이다”(260)라고 하면서 말이다. 책의 제목은 번째 원고인데, 여기에는 저자의 개인적인 애착이 담겨있다. 저자는 번의 퇴고를 거쳐 손에 주어진 번째 원고에서 보다 나은 단어나 어구를 대체할 표현을 찾는다고 한다. 저자는 과정을 가장 즐겨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단어는 이미 알고 있지만, 보다 적확한 단어 혹은 어구를 찾아내어 수정하기 위해 단어들을 사전에서 다시 검토하는 과정이 바로 저자가 번째 원고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자신의 속에서 찾아낸 요소들로 마치 두서 없이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정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프린스턴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이야기나, 이제는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텍스트 에디터 프로그램 사용 에피소드, 그리고  자신을 닮아 딸들이 모두 글쓰기와 관련된 삶을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이들의 관계 역시 전체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글쓰기의 비법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오히려 다른 글쓰기 책에서 언급하는 요령들 개를 책에서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책은 글쓰기, 특히 논픽션 분야의 글쓰기 대가가 자신의 글쓰기 인생에서 건져 올린 글쓰기의 면면을 솔직하고 간결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가 도입부를 썼던 표현처럼 견실한 쓰고자 여전히 노력하는 대가의 방법론을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중에서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저자가 글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글에 대해 이렇게 엄정한 기준으로 사실을 확인한 세상에 내놓는 일은 뿐만 아니라 잡지사나 출판사의 신뢰와 권위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공인들이 사실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아니면 말고 태도로 발언하고, 이를 그대로 받아 적고 글을 써내는 일부 언론의 모습과 분명히 비교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책이 독자에게 주는 가장 격려는 아마도 글의 머리에 인용했던 저자의 선언이 것이다. 바로 당신이 글쓰기에 좌절해본 사람이라면 당신은 작가임에 틀림없다는 . 글쓰기의 비밀은 바로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저자는 책에서 일깨워준다.   





"모든 도입부는 -어떤 종류이건 간게 - 견실해야 한다.
뒤에 나오지 않는 내용을 약속해서는 안 된다."
(105면) - P105

"1000개의 디테일이 모여 하나의 인상이 된다."
(114면) - P104

"내 조언은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을 사수하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150면) - P150

"글쓰기는 선별이다." (172면)

"내가 쓰는 단어 하나하나가 모조리 자신이 없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 갇혔다는 느낌이 든다면, 절대로 써내지 못할 것 같고 작가로서 재능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면, 내 글이 실패작이 될 게 빤히 보이고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면, 당신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257면) - P257

"수정이야말로 집필 과정의 본질이다."
(260면)
"집필 과정에서 내가 즐기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 네 번째 원고 작업이다."
(263면) - P263

"창의적 논픽션은 없는 걸 지어내는 게 아니라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298면)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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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름다움이 있다」를 읽고

창작과비평 187(봄호) ‘작가조명

오연경(문학평론가) 지음 | [창비]



이번 호에서 황인찬 시인을 인터뷰한 글을 읽으면서 새롭게 눈여겨 것은 시인 역시 자신이 쓰는 시의 정체성을 묻는다 점이었다. 시인은 최근에 시를 봐도 그렇고 다른 시를 봐도 그렇고 시의 화자를 시인과 분리할 있나’ ‘이게 시인가, 에세이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말한다. 시인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고민인가 싶기도하다. 황인찬 시인을 만나면 시인에게 시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이제 등단한 10년이 시인이 바라보는 시의 정체성 그동안 어떤 변화라도  생겨났는지도 물어보고 싶다.


      인터뷰 기사 처음부터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 나온다. 시인 역시 좋은 이라는 단어로 자신이 써내려가는 시를 바라보고 있는 했다. 과연 이러한 형용사와 부사가 제한하는 한계에 대해 시인은 어떤 이유로 고민하게 되었을까 궁금해하는 동안, 어느 시인은 리듬이나 이미지 같은 장치보다는 쓰기행위 하나만 남게 된다, 라고 말한다. 내게는 시인이 시를 대함에 있어 좋은 이라는 형용사와 부사를 이제는 지우고, 시의 본질만을 보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러한 고민도 역시 등단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란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는 분투의 흔적으로 보인다. ‘쓰기라는 행위만 남는 지점이 시의 본질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같다.


     이번 인터뷰기사를 읽고 황인찬 시인을 새로 알게 무지한 독자이지만, 새로운 또한 나에게는 소소한 기쁨이기도 하다. 오인경 평론가도 지적하듯이 시를 읽고 바로 파악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평론가 역시 이상과 김수영의 시를 예로 들며 난해함 문제를 제기했다. 황인찬의 시가 어렵지 않은 단어와 단순한 구문을 사용하지만, 의미가 단순하지 않고 잡히지 않는다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시인의 시는 난해한 시가 주는 소통 불능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다고 했다. 독자의 정서적 몰입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독자를 고려할 황인찬 시인의 시가 지니는 독특함과 매력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황인찬 시인에게 가지 물어보고 싶은 점이 바로 지점에 있다. 오인경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은 평이하면서도 풍부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내는시작을 위해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시작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점이 독자와의 소통 가능성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작업인지도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을 가지게 이유는 시인이 본인의 시에 대해 어떤 효과가 있다면 아주 다행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이상이나 김수영 시인이라면 무슨 상관인가라고 대답했을 같다. 다행이라는 표현에는 어쩌면 독자를 너무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궁금해졌다. 최근의 시에서 많이 보이는 화자 거의 일치하는 시인 입장에서 본다면, 시인의 독자에 대한 배려 혹시 독자에게 주어진 자유의 영역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주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의미의 파악이 쉽지 않은 시인의 시를 많은 독자가 읽고 있다는 점은 이것이 나의 기우임을 말해준다


     문득 내가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나는 시를 알려고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시인이 이러이러한 시를 쓰게 배경과 시인의 마음가짐, 혹은 시적 상황을 상상해보려는 노력 없이 나는 이해 바랐던 것은 아닐까. 구절이라도 주의를 기울여 곱씹어 적도 없이 시가 어렵다고 했던 것은 무엇보다 나의 문제인 탓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쩌면 시를 읽을 직관과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결론은 나는 시에 닿으려는 노력도 안하면서 시가 어렵다고 하는가였다. 리뷰를 쓰다 보니 어쩌다 나의 고백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황인찬 시인과 오연경 평론가가 언급하는 처럼 난해함과 소통 불능의 문제는 시가 안고 가는 본질적인 딜레마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시인이란 뭘까, 라는 의문도 불쑥 솟아 오른다. 인터뷰 기사에 나온 단어들을 이용해서 나름의 정리를 해보면, 시인이란 시대의 가운데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동시에 당대의 집단 무의식과의 싸움을 밤새 계속 해나가는 야곱과도 같은 이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누가 이기는지는 결코 없는 상황이다. 단편적이고 부분적이나마 시를 점점 접하게 되면서 시를 읽는 이란 어쩌면 삶의 놀라움 배우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감수성, 삶에 대한 감수성을 예민하게 하고, 이를 몸에 새기는 일이라고 말이다. 반대로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예민해진 감수성을 몸에 새기고, 난해함과 소통 불능을 넘어설 있는 여지가 마련되는 것이 아닐까.  마치 자전거를 배우고 수영을 배우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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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 담배 쏜살 문고
조지 오웰 지음, 강문순 옮김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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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품격에 대한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공격은 지성인 자신들로부터 나온다.”(37)
– 조지 오웰 <책 대 담배>

지하철에서 눈에 들어온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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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싸움 - 인류의 진보를 이끈 15가지 철학의 멋진 장면들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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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은 철학의 출발점이다

 

 

생각의 싸움에서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로 상징되는 철학의 시작과 함께 철학이 다다른 반대편의 극한으로 니체를 소개한다. 신화의 언어로 이루어진 고유명사로 만물을 설명하며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던 시대에서 보통명사로 자유롭게 비판하고 따져 묻기 시작하며 철학이 탄생되었다. 이런 변화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로부터 처음 확인할 수 있다. 고유명사로 세계를 설명하면서도 해소되지 않는 지적 갈증을 자각했다는 것, 그리고 감히 알려고 시도한순간이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책에서는 이렇게 발생한 철학이 이르게 된 곳의 경계를 니체의 철학으로 설정한다. 철학의 본령인 자유로운 비판과 따져 묻기의 대상을 모든 철학 자체에 적용하여 회의하고 질문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니체는 우리가 삶의 일부처럼 여겼던 도덕이 애초부터 그 자체로 옳은 것이 아니며, 언제든 새 도덕이 만들어 질 수 있다’(62)고 주장한다. 도덕의 상대성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묻고 따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니체는 여기에서 나아가 우리 각자가 도덕적 주체로서 각자의 도덕을 만들고 자신의 윤리를 만들라’(63)고 주문하며, 이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강조했다. 심지어 니체는 최초로 도덕을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도덕비판의 임무를 부여하기도 했다


     니체는 이러한 도덕이,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 왔던 가치와 추구하던 의미의 진공상태를 니힐리즘으로 표현한다. 우리 손에 붙들고 있던 의미와 가치가 근거 없음을 영원회귀라는 새로운 각도에서 제시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동안의 도덕과 사회 규범 및 가치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목적지를 지정해주고 있었다면(-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 니체는 이 목적지를 우리 각자가 정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칸트가 언급한 의무론적 윤리학의 맥락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곧 행동의 규칙만 제시하며, 규칙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 니체는 각자가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택할 방식으로 행동하라’(72)라고 주문한다. 매 순간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삶을 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각자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이 어떠한 것이더라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만의 윤리를 만들고 이에 따르는 삶이다


     이 지점에서 떠올린 소설의 한 대목이 있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이 제2차 대전 직후 쓴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 의 한 대목이다. 이 소설은 연합국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도시 쾰른을 배경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쟁으로 각자 의지할 가족 없이 홀로 된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게 되고 서로 가까워진다. 폭격으로 삶의 터전이 사라져버린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삶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지금 여기의 삶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삶을 받아들였고, 바로 이 자리에서 그의 삶이 집약되어 고통과 행복이 넘치는 짧은 순간의 영원을 경험했다.”(천사는 침묵했다, p158). 이 지점은 생각의 싸움에서 저자가 니체의 철학을 소개한 지점과 연결을 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이 대목은 니체가 물었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응답처럼 보였다. 삶의 기반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기존에 있던 삶의 규범과 도덕은 이제 필요가 없게 되었다. 두 남녀의 삶에 대한 의지만이 새로운 규범이며 도덕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는 주체는 바로 이 두 사람 자신들이었다


     생각의 싸움1장에서는 철학의 시작과 끝이라는 경계의 양 끝을 보여주었다면, 2장에서는 이 경계의 사이 어딘가에서, ‘이성’, 곧 로고스로 대변되는 앎의 과정이 어떻게 서양의 근대 철학을 시작한 철학자들에게 나타났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확실한 앎이란 가능한가, 그리고 이 앎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의 싸움을 벌였던 이들이다. 이런 근대 철학과 공통적인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던 것은 중세를 지배해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근대 철학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합리적 의심을 기반으로 공고하던 기존의 철학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 국면 역시 만물을 가능케 한 요소를 이라고 본 탈레스에게 왜 그러한지 비판적으로 따져 물었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근대 철학자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으로 대변되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따져 물었던것이다


     2장의 처음에 소개된 베이컨은 영국 경험론의 전통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경험적 지식, 자연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며 귀납법의 전통을 세웠다. 세계에 대한 지식들로부터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규칙을 찾아내고 다시 이 규칙을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런 맥락에서 기존의 진리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베이컨과의 충돌이 불가피 했으며, 이 대결 구도에서 나온 것이 바로 신기관이었다


     베이컨은 지식을 얻는 과정을 방해하는 우상 네 가지를 언급했다. 이는 학문의 선입견이자 편견이기도 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 종족의 본래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동굴의 우상은 각각의 개인이 갇힌 틀에서 생겨나는 인식의 오류를 지칭하며, 시장의 우상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생겨나는 문제들을 설명해준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허구적인 권위에 기대는 인간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베이컨은 이런 다양한 우상들을 극복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새롭고 유용한 앎을 얻고 이를 확장해나갈 수 있음을 믿었던 철학자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는 대륙의 합리론 전통을 마련한 철학자다. 베이컨(경험론)이 근대 철학의 방법론적 원리를 마련한 사람이라면, 데카르트(합리론)는 확실한 앎의 토대를 세운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데카르트는 이 목표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수학과 과학에 주목했다. 반면 감각을 통한 앎을 확실한 지식의 토대에서 배제했다. 이 부분은 앎에 이르는 과정에서 베이컨과 다른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대신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실마리를 생각하는 나의 존재로부터 찾는다. 곧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바로 이것이 첫 번째 확실한 앎이 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확실한 나의 존재를 발명해내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흐름은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흄은 데카르트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천착했지만, 방법론적으로는 경험론의 전통에 있다. 이를테면 추론이라는 실험적 방법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시도에 적용한 것이다. 확실한 앎의 토대를 마련한 데카르트와 달리 흄은 세계에 대한 앎을 얻을 때 확실한 참이란 원리적으로 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성의 우월성에 입각한 확실한 앎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이를 깨부수었기 때문에 흄은 회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험론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검은 스완의 사례처럼 모든 스완은 하얗다는 귀납추리의 진술이 잠정적, 확률적, 개연적으로만 참이며, 필연적으로 참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여, 세계 인식에 대한 귀납적 추론의 한계를 지적했다. 저자는 흄의 관심이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에서 시작하여, 어떤 토대 위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공동체의 윤리로 나아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이 책에서는 이런 내용을 소개하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 일부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했다


     데카르트와 흄의 철할 일부를 소개해 놓은 이 책에서도 앎에 대한 두 철학자의 상반된 입장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합리론(이성론)과 경험론이라는 근대 유럽의 두 흐름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이들의 철학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밀레토스 학파(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의 본령(비판의 자유와 따져 묻기)을 결합하여 그 결실을 맺기 시작한 사례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칸트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이성론과 합리론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종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칸트는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와 헤겔에 이르는 이성론의 계보에 있다. 따라서 칸트는 철학의 큰 두 흐름을 단순히 절충하는 입장이 아니라, 이성론의 입장에서 이성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칸트가 두 근대 서양철학의 흐름을 통합했던 것은 무엇보다 인식론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인식의 기원부터 고민했던 것이다


     이성론에서의 앎(지식)은 선험적 지식에 해당한다. 이러한 선험적 지식의 판단은 주어 안에 술어의 내용이 포함된 분석 명제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확실성은 보장받을 수 있으나 앎의 확장성에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경험론에서의 앎은 주어 안에 있지 않은 특성이나 성질이 첨가되어 술어에 나타나는 종합 명제로 제시된다. 이것은 감각 경험을 통한 수용으로 이루어진 앎이므로 확장성을 지니지만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흄은 앎을 얻을 때 확실한 참을 주장할 수 없으며(곧 확실한 앎은 원리상 불가능하다), 관념들의 다발인 상상에는 그릇이 없다고 언급했다. 반면 칸트는 앎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를 외부 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각자 우리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각자의 인식이 있으며, 이 인식의 활동에는 흄과 달리 각자의 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 틀을 통해 들어온 것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칸트가 이야기하는 이란 인식의 프리즘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프리즘을 통한 가시광선의 색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는 우리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지만 이 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이 내 안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틀이 모두 동일하지 않으면 앎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떠오른다. 칸트 역시 아름다움에 관한 인식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인정했다. 각자의 내부에 있는 저마다의 틀은 각자에게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표상이 저마다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만 칸트의 인식은 보편 타당해야한다고 보았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이 개인 안에서 얻어지는 인식의 확실성에 대한 부분이 내 안에서 충돌하고 있지만 칸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을지가 궁금하다. 우리는 앎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하며 이야기할 수 있을까



(추가적인 감상과 정리)


이번 독서에서는 무엇보다 데카르트로 시작하여 흄, 칸트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철학이 낯설고 아직 그 철학의 지형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하다. 아직 이들의 삶 일부와 불과 몇 페이지에 소개된 철학을 맛보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다만 여러 철학자들의 면모를 좀 더 알게 되고, 내게 조금 더 익숙하거나 흥미를 가진 대상과 연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가령 흄의 도덕 철학에 대한 관심, 특히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은 스피노자의 문제의식과도 연결이 되며 견주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흄이 제시한 인상과 관념의 개념, 그리고 관념 연합의 작동 메커니즘은 칸트의 표상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칸트가 언급한 제시재현에 대한 이해는 회화와 사진 예술로도 확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표상을 받아들이는 감성과 표상을 다듬고 이를 자발적으로 생산하는 지성의 요소는 현대의 시각 이미지에 대한 이해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또한 저자는 칸트의 입장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생물학의 시도를 짧게나마 소개하는 대목에도 주목해보았다


     또 흄의 경우 자연주의자로서의 면모에 대한 설명은 아직 모호하게 다가왔다. 원리상 인간이 확실한 앎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 흄이 자연 전체가 한결같다고 주장한 앎은 어떻게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등등에 관한 내용은 추가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한편 저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언급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앎의 확실한 토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살펴본 진짜 삶과 우리가 (그렇다고) 확신하는 삶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우리는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흄이 제시한 관념 연합으로 이루어진 세계, 곧 상상의 세계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실체가 없는 무대 없는 연극같은 관념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낸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어디까지 둘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처럼 이번 독서에서는 철학이란 모든 앎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식으로서의 앎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모든 현상과 대상을 이해하는 앎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니체는 이 과정을 바로 네가 하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씨앗은 인식의 확실성이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한 칸트의 인식론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밟고 있는 데카르트의 초상화 - 제2장에서 보여주는 이성에 입각하여 벌이는 '앎의 싸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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