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 마한 소국과 백제
양기석 외 지음 / 학연문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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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백제와 영산강> 만 해도 그런대로 읽을 만 했는데, 이 책은 매우 어렵다.

일단 한자가 많고 특히 고대 지명이나 인명 같은 고유명사가 한자로만 표기되어 읽기가 어려웠고, 아직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 주제들에 대한 각자의 이론을 주장하는 형식이라 나같은 일반인이 읽을 수준이 아닌 것 같다.

그만둘까 고민하면서도 책바다에서 빌린 게 아깝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말 근초고왕 당시에 전남 지방이 정복됐는지, 마한의 실체는 무엇인지, 언제까지 존속했는지가 너무 궁금해 끝까지 읽게 됐다.

앞으로는 교양서 수준으로 좀더 쉽게 쓰여진 책을 읽어야겠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기 49년조의 기사와 <양직공도>의 명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측 기록은 거의 없는 듯하여 아쉽다.

근초고왕 때 목라근자와 사사노궤가 영산강 유역을 정복했고 한성에 내려온 근초고왕 부자는 전북 지역으로 비정되는 4개의 읍을 점령했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4세기에 이미 마한이 백제에 복속됐는데, 고고학적 자료로는 5세기 후반까지 마한의 독자적인 옹관묘 같은 고총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 실효 지배는 아닌 것으로 본다.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의 차이에서 여러 논쟁이 생기는 듯하다.

오히려 신공기 기사만 봐서는, 일본에서 군대를 보내 가라 7국과 침미다례라는 영산강 유역을 정복했고 백제에게 다스리게 하여 백제가 왜에 조공했다는 식이다.

임나일본부에 관한 얘기지 백제의 마한 정복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측에서는 마한 정복의 주체가 왜가 아니라 백제였다고 해석하는 것 뿐이다.

침미다례는 과연 어디인가, 양직공도에 나오는 신미제국과 같은 곳인가 등에 관한 논의도 활발하다.

가야 7국은 과연 이 때 정복되었는가? 그렇다면 목라근자는 육로로 경상도에서 전남 지역으로 왔는지, 해로로 왔는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학술적인 주장들이 많았지만 어설프게라도 약간의 얼개는 알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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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근초고왕
김기섭 지음 / 학연문화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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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고구려에 비해 백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나라였는데 몇 년 전에 방영된 <근초고왕> 이라는 사극 때문에 궁금증이 일어 관련 책들을 찾아 보고 있다.

지난 번에 읽었던 <백제와 영산강> 에 따르면, <일본서기>의 자료를 근거로, 근초고왕 때 마한 경략이 이루어져 영산강 유역까지 지배력을 뻗쳤다고 되어 있다.

고분 등의 고고학적 증거로는 여전히 영산강 유역의 마한 소국들은 독립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대체적으로 근초고왕의 마한 경략은 사실이고 완전 지배는 아니더라도 간접 지배 내지 영향력 행사까지는 가능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목라근자로 대표되는 정벌의 주체가 근초고왕대 사람이 아니고 개로왕 시대 사람 즉 4세기가 아닌 5세기 사람으로 추론하기 때문에, 마한 경략 역시 근초고왕대가 아닌 후대 사건으로 추정한다.

오히려 근초고왕은 고구려라는 북방 세력과의 경쟁에 치중했고 그런 의미에서 요서 경략도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이 부분은 다른 책에서도 본 바 있고,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합리적인 주장이라 생각한다.

남조측 사서에 백제의 요서 경략설이 등장한 것은, 대동강 유역에 있던 낙랑군 일부가 전연으로 귀의하면서 요서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낙랑교군이 생겼기 때문으로 본다.

요서 지역은 전연에 이어 전진과 후연 등이 확고하게 지배력을 행사했던 곳이고, 더군다나 요동 지역을 광개토대왕 때 점령했기 때문에 고구려까지 끼여 있으므로 백제가 진출할 여건이 안 됐다는 것이다.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낙랑태수 호를 받은 것은, 낙랑 멸망 후 중국 귀화인들을 포섭하기 위함인데, 이 과정에서 요서에 있던 낙랑교군과의 교류가 활발한 사정을 보고, 남쪽에 치우쳐 있던 동진 측에서는 자신들이 실효 지배하던 땅도 아니고 외교적 목적에서 백제 요서 경략설을 사서에 실었다고 본다.

근초고왕 때 마한 경략이 실제 있었다고 생각하고, 요서 경략은 허구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저자 역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신뢰하지 못한다.

온조왕대 기사는 오히려 근초고왕대에 고흥이 <사기>를 편찬하면서 기록했던 당시 정세를 훗날 백제 건국 당시로 삽입됐다고 본다.

근초고왕 때의 영토가 마치 백제 건국 당시의 영토로 기록됐다는 것이다.

일리있는 지적 같다.

저자는 하남위례성을 풍납토성으로 보는데 백성들이 거주하는 북성으로 비정하고, 왕성이 있는 남성을 몽촌토성으로 본다.

보통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몽촌토성은 이를 방어하는 산성으로 보는 것 같던데 흥미로운 견해다.

고이왕부터 계왕까지 갑자기 끼어든 왕의 계보는, 미추홀에 도읍했다는 비류 전승을 들어, 아마도 이 집단을 백제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끼워 맞춘 것으로 본다.

초고왕이 고이왕과 형제이니, 초고왕부터 근초고왕까지가 하나의 세계이고, 고이왕부터 계왕이 또다른 세계이니 실제 재위한 연대 등을 맞춰 보면 두 집단은 차례로 즉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별도의 지배층 같다.

온조왕부터 계속 적자로만 즉위하는 세계의 의아함을 지적하는 부분도 일리가 있다.

건국 초기에 형제 상속 등이 이루어진 고구려나 신라 등의 예에 비춰 봐도, 처음부터 맏아들로만 이어진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 기록은 나중에 짜맞춘 느낌이 강하다.

마지막에 실린 일본측 기사들을 읽어 보면, 근초고왕이 일본에 조공하고 마치 우리가 중국에 사대하듯 일본에 신속하는 모습이라 너무나 낯설고 황당하다.

일본이라고 하면 나중에는 몰라도 삼국시대까지는 일방적으로 문화를 전해주면서 우위에 섰다고 배웠는데 말이다.

<근초고왕> 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심지어 근초고왕의 아들이 일본에 건너가 왕이 됐다고까지 그려졌다.

양국의 인식차이가 놀랍고, 그럼에도 우리가 인용할 수 있는 사료들이 일본측 기록이 훨씬 많다는 게 안타깝다.

지난번 <발해 국호 연구>에서도 느낀 바지만, 뭐든 기록으로 남기는 쪽이 승자인 것 같다.

한족이 오래 전부터 열심히 사서를 편찬하고 자신들의 시각에서 기록했으니 역사를 남기지 못한 이민족으로서는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듯하다.


박사 논문인데도 불구하고 서문에 쓴 바대로 교양서로 읽힐 수 있게끔 한자어 사용을 최소화 하고 주석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써 줘 편하게 읽었다.

사료에 근거한 이런 합리적인 역사서들이 교양서 수준으로 많이 나오면 좋겠다.

역사의 "올바른 대중화"에 학자들이 좀더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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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마뇽 -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현생인류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김수민 옮김 / 더숲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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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읽는 과학책이고 너무너무 재밌었다.

좋은 책은 내용의 수준과는 별개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조상인 크로마뇽인, 그리고 그 주변을 수만 년간 함께 지켰던 조용한 이웃 네안데르탈인에 관한 멋진 서사시가 펼쳐진다.

제목은 크로마뇽인이지만 절반은 네안데르탈인에 관한 이야기이고 사라져 버린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나 흥미롭다.

네안데르탈인들은 아프리카를 벗어나 먼저 유럽으로 가서 오랫동안 빙하기를 이겨내며 번성했으나 4만 5천년 전쯤 크로마뇽인들이 건너오면서 점점 사냥 영역을 뺏기기 시작했고 갈수록 혹독해지는 빙하기를 견디지 못해 멸종하고 만다.

저자는 이들에게 "조용한 이웃"이라는 표현을 썼다.

네안데르탈인들은 10만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소수의 무리를 지어 찌르는 나무창을 이용해 사냥을 하면서 생존해 왔다.

이들을 조용한 이웃이라 부르는 이유는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음성 표현은 가능했겠으나 크로마뇽인들처럼 구체적으로 감정이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를 이루지 못했고 정보 교환이 안 되어 기술적 혁신도 불가능했다.

그들은 혹독한 빙하기에서는 살아 남았으나 훨씬 똑똑한 이웃이 아프리카를 건너오자 결국 자신들의 영역을 내주고 변방으로 쫓겨나 멸종하고 만다.

저자는 크로마뇽인들이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로 기술혁신과 더불어 영적 믿음을 꼽고 있다.

동굴 벽화로 대변되는 이들의 예술적, 종교적 활동은 서로 협력하면서 거친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인간은 협력할 줄 알았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 생존할 수 있었고 언어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영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함께 추구하면서 격려했다.

인간의 예술적 재능과 종교적 속성은 수십 만년의 빙하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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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선택한 미술
이언 칠버스 외 엮음, 박유진 외 옮김 / 지식갤러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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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이 크고 두꺼운 책이라 어떻게 읽나 약간 긴장했는데, 도판이 대부분이고 설명도 지루하지 않아 편안하게 읽었다.

무려 구석기 시대 벽화부터 시작하는 인류의 긴 미술 역사를 다룬 책들은 연대 나열인 경우가 많아 지루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비교적 짜임새가 있고 무엇보다 도판이 너무 훌륭하다.

68000원이라는 책값이 이해되는 수준의 도판이라 감상하기 좋았고, 도서관에 비치가 되어 있어 감사하다.

영국에서 간행된 책이라 그런지 책에 실린 명화들이, 영국 미술관 소장품들이 많았다.

확실히 자국에 명화들이 많아야 직접 원작을 보고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현대 미술 쪽은 소략되어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22p

이집트 회화는 당대의 세계관 내에서 전적으로 기능적이었다. 미술가들은 엄격히 정해진 일련의 기준에 따라 주어진 대상을 능숙하게 묘사하면 그만일 뿐, 독창성이나 미학적 고려, 자기표현 등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화가들은 다른 기술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위가 썩 높지 않았고, 아마도 팀을 이루어 작업했을 것이다. 이집트인은 사후세계의 존재를 철썩같이 믿고, 대부분의 예술적 열정을 사후세계 준비에 바쳤다. 이런 작업에 투입된 어마어마한 노력과 비용은 예술의 황금기였던 제 18왕조의 왕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웅장하고 화려한 벽 장식과 보물로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24p

현대인의 눈에는 이집트 무덤의 부장품이 호화롭고 예술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집트인은 결코 그럴 의도가 없었다. 고대 이집트의 장례 의식에 포함된 모든 요소는 하나의 공통된 목적, 즉 사후세계에서 사자를 보호하고 거행한다는 목표에 따랐다. 그림도 사실적으로 보이거나 미적인 즐거움을 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사자를 위해 마련된 의식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이런 관습은 거의 고대 이집트의 역사 전반에 걸쳐 유지되었다.

32p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성기에 제작된 회화와 조각은 서양 문명의 기본 토대를 이루었다. 후세에 와서는 이 시기를 모방하기도 힘들 만큼 탁월한 업적을 남긴 시대로 회상했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미술품은 고상하고 당당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보여, 그 뒤를 이은 조악한 양식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스와 로마인은 놀랄 만큼 자연주의적인 정원 풍경화나 정물화에서든 사실성을 포착하려는 열정을 공유했다.

42p

서로마에서는 기독교 화가들이 성서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미술작품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찬양하며 자연주의, 감정, 상상력을 드러냈다. 반면 동로마에서는 이런 접근방식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기독교 미술은 신과 직접 소통하는 수단으로 양식화되고 엄숙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엄격히 통제되었다. 자연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미술가에게 일말의 독창성이나 자기표현을 기대하는 일도 없었다. 대신 미술가의 바람직한 역할은 가장 훌륭한 성상(icon)을 최대한 정확하게 모사하여, 그 성상의 영향력을 널리 전파하는 일이었었다. 러시아의 가장 신성한 성상인 <블라디미르의 성모>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수세기에 걸쳐 수없이 반복적으로 모사되었다.

 동로마에서는 교회가 일체감을 유지하고 이단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심각한 쟁점 중 하나는 성상의 사용 문제로, 일각에서는 성상을 우상 숭배라고 비난했다. 성상 금지령이 철회된 후에도 성상의 내용과 양식이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어떤 미학적 관심사보다도 신학적 정확성이 중요시되었다. 

 이 그림은 비잔틴 미술의 특징적인 양식을 일찌감치 예고하고 있다. 납화법을 이용해 인물에 풍부한 광채를 더했지만, 화가의 관심사는 심미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이다. 그의 주된 목표는 '신의 어머니'로서 성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성서에서 말로 전하는 바를 성상에서는 색으로 전달한다. 그것은 신의 현현, 즉 신이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 787년, 제7차 공의회, 기독교예배에서 성상 숭배를 복원하는 결정에 관하여-

79p

인문주의는 내세가 아닌 현세에세 인간 개개인이 성취한 바를 강조하는 철학으로, 중세 기독교 정신으로부터의 의미심장한 일탈을 나타냈다. 

 종교적 감수성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13세기의 수사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신봉자들이 촉발했는데, 그들의 설교에서는 예수의 고통과 인간성을 강조했다. 고전의 부흥과 아울러 그런 새로운 방식의 기독교는 새로운 유형의 미술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 미술은 더 사실적으로 보였을 뿐 아니라, 경외감과 신비감을 조성한 비잔틴 미술의 양식화된 신 이미지와 달리 예수의 진짜 인간성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잔틴 미술에서는 기독교적 이미지를 일부러 인간의 실세계와 동떨어져 보이도록 신비롭게 묘사했지만, 지오토와 두초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기독교 이야기를 사실적이며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서술적 장면에서는 물질계가 갈수록 더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가운데 감정적이며 극적인 새로운 현장감이 더불어 나타났다.

 시에나와 피렌체 두 화파 모두 계속 비잔틴 미술의 초탈성과 경직성에서 멀어지며 더 훌륭한 자연주의, 표현력, 인간성을 추구했다. 14세기 말에는 유럽 궁정들 간의 교류가 늘어남에 따라 국제고딕이라는 새로운 궁정풍 양식이 출현했다.

55p

많은 이교도 부족들이 주류의 고전기 미술과는 전혀 다른 생동감 넘치는 문화를 자랑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도기 및 프레스코화를 지배하던 자연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이교도 부족의 장인들은 무기와 장신구처럼 작고 휴대가 간편한 물건에 관심을 기울렸다. 회화가 전면에 나선 것은 오로지 기독교로 개종하여 종교적 텍스트가 필요했을 때뿐이었다.

65p

스테인드글라스가 중시되면서 벽화를 그릴 장소는 줄어들었지만, 필사본의 수요는 여전히 높았다. 새로운 후원자들이 등장했고, 특히 부유한 귀족의 궁전에서 주문이 많았다. 이들은 역사와 로맨스 등 보다 다양한 범위의 세속적인 주제들의 작품을 원했고, 종교 문헌도 초심자용의 <성무일도서> 처럼 기존과는 다른 종류를 요구했다.

101p

피렌체나 베네치아와 달리 로마는 은행업, 제조업, 상업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순례자들을 그 도시로 끌어 모아 부를 창출하려면 교황의 권위가 필요했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의 말에 따르면, 로마는 교황청이 1309년 아비뇽으로 이전된 후 '허물어지고 황폐'해졌다. 하지만 또다시 교황의 영구적 근거지가 된 로마는 15세기부터 번영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교황들은 로마가 옛 영광을 되찾도록 그 도시를 회복시키는 일에 힘썼다.

 바티간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주변 지역이 재건의 초점이었다. 재산세 감면이 건축 붐으로 이어지면서 빌라 파르네시나 같은 화려한 별장과 대저택들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무수한 의뢰를 받은 미술가들은 그 새로운 장소들을 장식했다.

 초기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자연의 명료하고 정연하 묘사를 목표로 삼은 데 반해,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들은 자연을 관찰하되 우아하게 다듬고 이상화한 이미지 보여준다. 철저히 현실에 입각한 자연주의는 완화되고, 우아함을 중요시하는 태도로 대체되고, 형태와 색의 온건한 변환을 통해 미묘하게 표현되었다. 그런 변화를 개시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가장자리와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드는 '스푸마토'라는 유화 기법을 개발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수학적으로 계획한 선 원근법이 가장 중요했지만, 전성기 르네상스에서는 '공기' 원근법이 특징이 되었다. 미술가들은 멀리 있는 물체가 지평선 쪽으로 갈수록 더 흐릿하고 파랗게 보이게 하는 대기의 작용을 오랫동안 모방해왔지만, 레오나르도는 '공기 원근법'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그것의 회화적 용법을 충분히 발전시켰다.

158p

많은 화가들이 이런 파격적인 기법을 모방했으나 카라바조가 보인, 안정적으로 구도를 잡는 동시에 웅장하면서도 대담하고 강렬하면서 엄숙하게 묘사하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드물었다

227p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날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시를 읽고, 훌륭한 그림을 보아야 한다."

(괴테의 이 말은 문화적 인간의 정의이고,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토다)

234p

모리스 드니는 있는 그대로의 재현보다 암시를 중시했다. 드니의 작품은 추상 미술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그는 작품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질서에 따라 배열되는 색들로 뒤덮인 평면이다."

248p

"기쁨은 실제로 보는 사람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못하지만 자연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지적으로든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광경을 바라보는 데에서 생기는 듯 보인다." - 에드먼드 버크

(예술의 숭고미, 장엄미 같은 의미일까?)

 난파선에 대한 두려움은 에드먼드 버크가 서술한 숭고함에 관한 이론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즉 보는 사람에게 안전한 장소에서 재해나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는 현장을 감상하는 미학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재난 현장을 그림으로 그리고 감상하는 것은 우리가 가학적 욕구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 자연에 대한 두려움, 장엄함, 고양된 감정 등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323p

당대에는 입체주의를 과학과 철학의 진보적 이론을 해석하거나 논평하려는 시도로 보는 시각이 유행했으나, 피카소와 브라크는 결코 그럴 의도가 없었고 오히려 그러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입체주의가 당시 변화하는 풍토에서 자양분을 얻은 것은 분명했지만, 피카소가 단언했듯이 "입체주의는 회화의 한계와 제약 속에서 머무를 뿐, 결코 그 너머로 나아갈 생각이 없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단 한 번도 혁명적인 사상이나 기술을 작품의 소재로 삼은 적이 없었다. 그들이 고안해낸 기법은 대단히 급진적이었지만, 그들이 그린 대상은 화가들이 늘 그래왔듯이 풍경, 사람, 악기, 과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이었다. 두 화가 모두 미술상으로부터 엄청난 재정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동일한 주제를 반복해서 그릴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다른 입체주의 화가들은 생계를 위해 공개시장에서 작품을 팔아야 했으므로 좀더 눈길을 끄는 주제를 택할 때가 많았고, 입체주의에서 파생한 미래주의나 보티시즘 화가들은 항공 같은 소재에서 영감을 얻었다.

341p

프로이트 자신은 초현실주의와 아무런 공감대가 없었고 이 운동과 결부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프로이트는 한 가지 측면에서 초현실주의 미술가들과 결정적으로 생각이 달랐다. 프로이트가 꿈에 집착했던 주된 이유는 정신분석가들이 충분한 기술과 경험한 갖추면 환자들의 꿈을 분석하여 깊은 통찰과 치유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꿈이란 그 자체로 풍요롭고 복잡한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359p

다양한 잡지들이 넘쳐나는 거리 가판대, 현혹적인 포장과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슈퍼마켓,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스타들을 내세운 화려한 영화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영화관 등을 통해 일반인들이 대중문화에 접근하기가 한층 용이해졌다. 이 새로운 경제적, 문화적 민주주의 속에서 일상생활이 대중적인 이미지들로 포화 상태에 이르다보니, 이제 이런 이미지들 자체가 화가들과 대중의 관심을 놓고 경쟁할 하나의 예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

375p

지난 200년간 미술가들은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주변세계를 그대로 재현한다는 기본 개념에서 탈피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무수한 방식을 개발해왔다. 그 결과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미술, 다다, 초현실주의, 팝아트, 그리고 1960년대 이래의 설치, 비디오, 행위 미술 같은 한층 새로운 예술 형태들이 탄생했다. 이런 새로운 미술적 표현방식은 현대 미술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쳐 일부 비평가들은 더 이상 회화를 별도로 구분되는 범주로 보지 않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회화를 그저 미술가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활동 스펙트럼 중 하나로 여길 뿐이다. 일각에서는 심지어 회화를 시대착오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 회화는 여전히 수많은 열혈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표현주의와 다다 이후 '사실적 차원'으로의 복귀를 알리는 사실주의 회화를 지칭하기 위해 '신즉물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구상 회화는 무척이나 다양한 범위의 양식과 주제를 망라하여, 1천 년 넘게 지배적인 미술 양식으로 군림해왔다. 현대에 들어 구상 회화의 가장 뛰어난 해석자 중 하나는 존 싱어 사전트다. 그가 초상화가로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 미술이 대두하고 있었으나, 그의 양식은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스 같은 초창기 대가들의 작품을 반영했다. 조각가인 오귀스트 로댕은 사전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반 다이크"라고 표현했다

 1천 년 넘게 인간은 스스로 보거나 상상하는 바를 그리고 표현해왔다. 심지어 약 1만 5천 년 전의 수렵, 채집인들조차 프랑스의 라스코 벽화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우리를 매혹시키는 놀라운 동물 그림들을 남겼다. 재현적인 그림들은 애초에 숭배, 오락, 장식, 지위 표시, 자료 기록 등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든 간에, 지금껏 알려진 거의 모든 문명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세기 내내, 그리고 21세기 들어 무수히 많은 새로운 예술 형태와 양식, 매체가 등장하는 와중에도, 주변세계의 일부를 그림의 형태로 보존하고 변형하며 창조해내려는 인간의 욕구는 여전히 위대한 예술 작품들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오류>

201p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5살 된 손자 루이 15세가 잇다.

->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손자가 아니라 증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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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과 문신 - 한국 중세의 무신 정권
에드워드 슐츠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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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치 위주의 한국사에서 독특했던 시대가 바로 고려 무인 시대가 아닌가 싶다.

일본과는 다르게 한 번도 무인이 정권을 잡은 적이 없었는데 유독 고려 후반에 무인 정권이 탄생했고 몽골의 침략과 함께 사라졌다.

무인 정권을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한 외국인 학자의 저술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어떤 책에서는 무인 정권이야 말로 천민이 사회 진출을 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했던 역동적인 발전의 시대였다는 평가도 있었고 고 반대로 무질서하고 백성들이 착취당한 혼란의 시대였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 책은 단순하게 선악의 문제로 당시 시대를 보지 않고 무인 정권 중에서도 특히 최씨 정권이 어떻게 60년 동안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간단히 말해 최충헌은 기존의 문신 기구를 잘 통제하여 자신의 권력 기구에 포섭했기 때문에 나름 고려 사회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그 전의 권력자들처럼 무력만 휘둘렀다면 또다른 야심가에게 곧바로 무너졌을 것이고 사회는 더욱 혼란에 처했을 것이다.

최충헌은 자신이 직접 문신의 고위직을 겸임했고 과거를 통해 유능한 문신들을 등용해 행정을 맡겼으며 본인은 많은 사전과 식읍을 얻었으면서도 그 외 지방 세입은 국고로 귀속시켜 나라의 재원으로 사용해 재정을 안정시켰다.

정권 초기에는 농민 반란이 잦았으나 조세 경감 등을 통해 지방을 안정시켰고 이런 바탕 위에서 몽골 항쟁 40년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반면 그는 천민들의 사회 진출은 엄금하여 신분제도가 흔들리는 것을 막았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극소수의 천민에게는 관직을 허용했으나 이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고 간단히 말해 최충헌은 기존 고려 사회의 질서를 그대로 사수하고 그 안정적인 토대 위해서 본인이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60년 정권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최충헌은 이성계처럼 새 나라를 열 시대정신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몽골이라는 거대한 외세의 침략이 없었다면 최씨 정권은 일본의 막부처럼 계속 권세를 이어갔을까?

최충헌과 그 아들 최우의 놀라운 장악 능력과는 달리 뒤를 이은 후계자들 최항과 최이의 부족한 자질 때문에 결국은 무너지고 기존의 왕정으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본다.

최충헌이 자신의 왕조를 세우기에는 고려가 중국이라는 거대한 배후에 사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한반도에 새 왕조가 생기는 시기는 모두 중국의 혼란기였다.

역시 외국 학자라 민족을 떠나 객관적인 눈으로 판세를 본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고 무신 정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알게 돼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다만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 때문에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게 아쉽다.



<오류>

259p

명종, 신종의 외가인 정안 임씨와 희종, 강종의 외가인 강릉 김씨는 무신 집권기 동안 잠재력을 지녔다.

-> 명종, 신종의 외가 즉 어머니 공예왕후 임씨는 정안(장흥) 임씨가 맞지만, 그 아들들인 명종과 신종의 처가는 강릉 김씨가 아니라 왕족인 강릉공 왕온의 딸들이다. 김씨라고 칭한 것은 족내혼임을 숨기기 위해 모계의 성을 따랐다고 되어 있다. 강릉 김씨를 정안 임씨와 같은 수준에서 볼 수 없을 것 같다.

314p

이의방은 전주 이씨 출신이며 그의 형제 이준의는 뒤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직계 조상이다.

->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준의가 아니라 다른 형제인 이린이 이성계의 6대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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