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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근초고왕
김기섭 지음 / 학연문화사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신라와 고구려에 비해 백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나라였는데 몇 년 전에 방영된 <근초고왕> 이라는 사극 때문에 궁금증이 일어 관련 책들을 찾아 보고 있다.
지난 번에 읽었던 <백제와 영산강> 에 따르면, <일본서기>의 자료를 근거로, 근초고왕 때 마한 경략이 이루어져 영산강 유역까지 지배력을 뻗쳤다고 되어 있다.
고분 등의 고고학적 증거로는 여전히 영산강 유역의 마한 소국들은 독립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대체적으로 근초고왕의 마한 경략은 사실이고 완전 지배는 아니더라도 간접 지배 내지 영향력 행사까지는 가능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목라근자로 대표되는 정벌의 주체가 근초고왕대 사람이 아니고 개로왕 시대 사람 즉 4세기가 아닌 5세기 사람으로 추론하기 때문에, 마한 경략 역시 근초고왕대가 아닌 후대 사건으로 추정한다.
오히려 근초고왕은 고구려라는 북방 세력과의 경쟁에 치중했고 그런 의미에서 요서 경략도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이 부분은 다른 책에서도 본 바 있고,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합리적인 주장이라 생각한다.
남조측 사서에 백제의 요서 경략설이 등장한 것은, 대동강 유역에 있던 낙랑군 일부가 전연으로 귀의하면서 요서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낙랑교군이 생겼기 때문으로 본다.
요서 지역은 전연에 이어 전진과 후연 등이 확고하게 지배력을 행사했던 곳이고, 더군다나 요동 지역을 광개토대왕 때 점령했기 때문에 고구려까지 끼여 있으므로 백제가 진출할 여건이 안 됐다는 것이다.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낙랑태수 호를 받은 것은, 낙랑 멸망 후 중국 귀화인들을 포섭하기 위함인데, 이 과정에서 요서에 있던 낙랑교군과의 교류가 활발한 사정을 보고, 남쪽에 치우쳐 있던 동진 측에서는 자신들이 실효 지배하던 땅도 아니고 외교적 목적에서 백제 요서 경략설을 사서에 실었다고 본다.
근초고왕 때 마한 경략이 실제 있었다고 생각하고, 요서 경략은 허구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저자 역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신뢰하지 못한다.
온조왕대 기사는 오히려 근초고왕대에 고흥이 <사기>를 편찬하면서 기록했던 당시 정세를 훗날 백제 건국 당시로 삽입됐다고 본다.
근초고왕 때의 영토가 마치 백제 건국 당시의 영토로 기록됐다는 것이다.
일리있는 지적 같다.
저자는 하남위례성을 풍납토성으로 보는데 백성들이 거주하는 북성으로 비정하고, 왕성이 있는 남성을 몽촌토성으로 본다.
보통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몽촌토성은 이를 방어하는 산성으로 보는 것 같던데 흥미로운 견해다.
고이왕부터 계왕까지 갑자기 끼어든 왕의 계보는, 미추홀에 도읍했다는 비류 전승을 들어, 아마도 이 집단을 백제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끼워 맞춘 것으로 본다.
초고왕이 고이왕과 형제이니, 초고왕부터 근초고왕까지가 하나의 세계이고, 고이왕부터 계왕이 또다른 세계이니 실제 재위한 연대 등을 맞춰 보면 두 집단은 차례로 즉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별도의 지배층 같다.
온조왕부터 계속 적자로만 즉위하는 세계의 의아함을 지적하는 부분도 일리가 있다.
건국 초기에 형제 상속 등이 이루어진 고구려나 신라 등의 예에 비춰 봐도, 처음부터 맏아들로만 이어진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 기록은 나중에 짜맞춘 느낌이 강하다.
마지막에 실린 일본측 기사들을 읽어 보면, 근초고왕이 일본에 조공하고 마치 우리가 중국에 사대하듯 일본에 신속하는 모습이라 너무나 낯설고 황당하다.
일본이라고 하면 나중에는 몰라도 삼국시대까지는 일방적으로 문화를 전해주면서 우위에 섰다고 배웠는데 말이다.
<근초고왕> 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심지어 근초고왕의 아들이 일본에 건너가 왕이 됐다고까지 그려졌다.
양국의 인식차이가 놀랍고, 그럼에도 우리가 인용할 수 있는 사료들이 일본측 기록이 훨씬 많다는 게 안타깝다.
지난번 <발해 국호 연구>에서도 느낀 바지만, 뭐든 기록으로 남기는 쪽이 승자인 것 같다.
한족이 오래 전부터 열심히 사서를 편찬하고 자신들의 시각에서 기록했으니 역사를 남기지 못한 이민족으로서는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듯하다.
박사 논문인데도 불구하고 서문에 쓴 바대로 교양서로 읽힐 수 있게끔 한자어 사용을 최소화 하고 주석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써 줘 편하게 읽었다.
사료에 근거한 이런 합리적인 역사서들이 교양서 수준으로 많이 나오면 좋겠다.
역사의 "올바른 대중화"에 학자들이 좀더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