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 그 성공의 비밀 - 문화는 어떻게 인간의 진화를 주도하며 우리를 더 영리하게 만들어왔는가
조지프 헨릭 지음, 주명진.이병권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50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라 지루할까 봐 걱정됐는데 생각보다 흥미로운 내용이었고, 긴 복문으로 이어지는 번역투의 문장들 때문에 가독성이 다소 떨어져 좀 힘들게 읽었다.

요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매끄러운 한국어 문장으로의 번역이 내용 전달에 아주 중요한 것 같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실험적 증거들은 다소 어려워 건너 뛰기도 했다.

책의 핵심은 문화-유전자의 공진화이다.

진화심리학이라고 하면 인종차별 내지는 남녀차별이 먼저 생각나는데 이것이야 말로 유전학을 잘못 이해한 일종의 유사과학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간의 유전자는 근본적으로 매우 단일한 종이지만, 여러 민족들이 속한 공동체의 사회규범과 문화적 관습에 의해 다른 심리 기제와 행동양식을 발전시켜 왔고,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발생한다.

유전학과 생물학을 혼동하면 안 될 것 같다.

문화가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는 종래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문화-유전자 공진화의 관점에서 반박한다.

과학적 주장들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인간은 문화적인 종이고 이것이 우리를 지구에서 가장 성공한 생명체로 만들었다.

문화적 종의 가장 큰 특성은 집단두뇌와 상호협력이다.

뛰어난 개인이 있다 해도 혼자서 혁신을 계속 이뤄낼 수 없다.

우리는 집단에 속해 있고 성공한 사람을 모방하면서 그들의 뛰어난 지식을 습득하고 개인적 경험과 재조합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혁신을 이루어 낸다.

요컨대 한 집단이 쌓아 올린 집단 두뇌를 모방을 통해 잘 습득한 후에 비로소 또다른 혁신이 가능하고 그것이 종 번식에 유용하다면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는 것이다.

문화의 핵심은 바로 누적 진화에 있겠다.

집단을 이루고 살려면 사회규범이 필요한데 이기적인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상호협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한다.

저자는 호혜의 의무를 내제화된 본능으로 설명한다.

내 이익만 챙기는 사람은 사회규범으로 억압하여 상호협력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살아남게끔 진화해 온 것이다.

우리가 흔히 도덕이나 양심이라고 말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판단력이 종의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내제화된 본능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언어는 인간의 성공에 오히려 부차적인 요소이고 서로 협력하는 과정이 먼저이고 자연스럽게 언어가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앞서 읽은 <크로마뇽인>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진 이유 중 하나가 언어가 발달하지 못해 문화적 노하우를 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는데 이 부분이 흥미롭다.

음성 언어가 발달해서 사회적으로 협력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본성이 언어를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남성이 여러 아내를 거느리게 해 왔음에도 오늘날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은 것은, 아내를 구하지 못한 남성들의 공격적인 테스토스테론으로 인해 폭력적 성향이 증가되어 사회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자연스러운 진화 방향이었다는 설명이 흥미롭다.

의도를 가지고 누군가가 강제로 정한 것이 아니라 일부일처제가 인간의 안정적인 번식에 더 유리했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그러한 배타적인 짝짓기를 선호하는 쪽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일부일처제가 본성에 어긋난다는 주장도 매우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꺼운 책이고 번역서라 가독성이 다소 떨어졌지만 문화가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공물이 아니라, 우리의 매우 핵심적인 본능이라는 것을 알게 된 좋은 시간이었다.

다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집단에 함몰되어 사회규범을 지키는 것보다 좀더 개인의 가치와 개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어떻게 사회와 조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도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런던에서 꼭 봐야 할 100점의 명화 - 내셔널 갤러리에서 테이트 모던까지
제프리 스미스 지음, 안혜영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정리하는 기분으로 다시 읽었다.

저자의 말대로 순위를 정하는 것은 그 주제에 대해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것 같다.

도판이 작은 게 다소 아쉽긴 하지만 그런대로 인쇄 상태가 좋고, 미술관 별로 정리가 되어 있어 다양한 그림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번역상의 자잘한 오류들이 많은지 좀 놀랍다.

분명 역자 서문에서는 본인이 미술사를 전공했다고 나왔는데도 기본적인 그림 제목 번역도 틀린 곳이 많아 전공자가 번역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전공자가 역자인 경우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역주까지 따로 달아서 설명하기 마련인데 너무 간단한 고유명사들이 틀려서 황당하다.

이런 오류들을 확인하느라 독서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렸다.


<인상깊은 구절>

125p

이렇듯 완벽을 추구하는 철저하고도 섬세한 베르메르의 작업 방식은 서양 미술에 있어서 가장 찬사를 받는 작품을 탄생시킨 비결이기도 했다. 베르메르의 작품은 완벽하게 조화되었으되 어딘가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구도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영혼과 정신을 뒤흔들어 놓는 신비한 힘이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움직임이 정지된 바로 그 순간의 신비로운 고요함과 장엄함을 잘 살려냈다. 자칫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상적인 순간의 모습은 베르메르의 섬세한 묘사에 힘입어 일상의 순간을 초월해 예술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129p

샤르댕은 베르메르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매우 정돈되고 단순화된 배경을 선호했다. 그러나 샤르댕은 이 전통을 그만의 독특한 프랑스 스타일로 소화해 냈다는 평을 받는다. 그가 담아낸 단순한 일상의 풍경은 시간이 멈춰진 장중한 작품으로 탄생된다. 샤르댕이 사용한 단순화된 구도는 로코코 양식의 부셰와 같은 화가들이 화단을 지배하고 있던 당시에는 매우 기묘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그의 작품은 살롱에서 매우 유명해져 스웨덴의 여왕이나 루이 15세를 포함한 왕족이나 부유층들이 그의 작품을 구매하기에 이른다. 

147p

작품의 제작 연도에서 알 수 있듯, 퓌비 드 샤반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같은 시대에 활동을 했다. 당대를 풍미했던 야외에서 순간의 색채를 묘사하는데 주력하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그의 작품을 비교해볼 때 퓌비는 같은 시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떨어진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인상주의 화풍을 제외하고도 많은 화파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인정받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19세기 후반 예술가로서 파리에서 상당히 부유한 삶을 영유했지만,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분명한 것은 퓌비의 작품이 예술계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고 그는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다.

173p

휘슬러는 배터시 다리를 사실 그대로 재현하는 데 구애 받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예술 지상주의적인 미학 운동에 영향을 받았는데 당시의 사조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재현하는 것이나 묘사, 그리고 도덕적 관념에 구애받는 대신 예술의 심미적인 측면, 즉 구도와 색채가 조화를 이루는 순수한 미적 측면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휘슬러는 당시에 만연했던 예술 지상주의적 관점을 추상적인 요소와 함께 이 작품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오류>

15p

1547 샤를 5세의 군대에 의해 프리드리히 공작이 체포됨으로써, 궁정화가의 지위를 잃음

-> 뮐베르크 전투에서 카를 5세가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사로잡았다.

프리드리히 공작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19p

1874 제임스 휘슬러 <파랑과 빨강의 야상곡>(추락하는 로켓)

-> 1874년에 발표한 <추락하는 로켓>이라는 부제가 붙은 휘슬러의 작품 원제는 "Nocturne in Black and Gold" 로,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으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21p

살롱 도톰(파리 가을전)에서 전시실 한 칸이 르누아르의 작품으로만 전시

-> Salon d'Automne 살롱 도톤으로 써야 할 것 같다.

31p

고갱이 네덜란드 출신의 어린 여인, 메테 소피 가드와 결혼함

-> 고갱의 부인은 덴마크 출신이다.

1897 펠릭스 발로 <봄>

-> Felix Vallotton 이므로 펠릭스 발로통으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49p

1666 클로드 로랭 <아침>, 상트페트르부르크

-> 1666년에 발표된 로랭의 작품은 "Morning in the harbour"로 항구에서의 아침으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71p

디르크 보우츠 <거장 돌로로사>

-> 디르크 보우츠의 "Mater Dolorosa" 로 슬픈 성모 정도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왠 거장?

97p

부르고뉴의 공작인 필립 더 굳의 서자, 부르고뉴의 필립 공의 궁정화였던 것으로 추정됨

-> Philip the Good 은 선량공 필립으로 번역해야 하고, 그의 서자 부르고뉴의 필립은 공작이 아니라 주교이다.

99p

인스부르크에서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인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를 완성함

-> 프랑수아 1세라고 하면 프랑스 왕을 떠올리기 쉬우므로, 페르디난트 1세라고 표기해야 할 듯하다.

103p

1350 루카스 크라나흐 디 엘더 <파리스의 심판> 카리스뤼에

-> 카리스뤼에가 어딘가 한참 찾았다. Karlsruhe 즉 카를스루에다.

104p

남편이 죽은 뒤 덴마크의 크리스티나는 브뤼셀로 가서 헝가리인인 메리 숙모와 살았다.

-> 헝가리인 마리아가 아니라 헝가리의 러요시 2세에게 시집 간 Maria von Osterreich 이다. 합스부르크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으로, 헝가리의 마리아라고 번역해야 한다. 헝가리인이 아니다.

113p

카라바조는 그 중 한 점은 거부되었지만 <산 마태오의 외침>과 <산 마태오의 순교>는 잘 그려진 것으로 받아들여졌음

->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로, 성 마태오의 소명이라 번역해야 한다. 외침이라니, 정말 전공자가 번역한 게 맞을까?

116p

카를 1세는 많은 작품을 사들인 수집가로 유명했는데

-> 영국의 찰스 1세를 가리킨다. 영어식으로 번역해야 정확히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같은 인물을 찰스 1세로 표기해서 헷갈린다.

137p

<베르나르 가를 행진하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완성함

-> 베르나르 가를 행진하다니, 도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원제는 "Napoleon Crossing the Great Saint Bernard pass" 이다. Great St. Bernard pass 는 길거리가 아니라 알프스 산맥에 있는 험준한 통로이다. 보통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으로 번역한다. 

141p

터너, <다이도 빌딩 카르다고>

->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 같다.

143p

터너가 가장 존경한 화가는 풍부한 색채로 빛의 효과를 그려내던 클로드 모네였으며, 존경해 마지 않던 그를 뛰어 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는~

-> 터너는 1775년 출생해 1851년 사망했다. 모네는 1840년생이다. 터너가 존경한 이는 자신이 죽을 무렵 아직 화가로 데뷔하지도 않은 모네가 아니라 클로드 로랭이다. 정말 전공자가 번역한 게 맞을까?

145p

1824 <찰스 5세 내정자의 파리 입성과 루이 13세의 서약>이 살롱전에서 호평을 받음

-> <찰스 5세 내정자의 파리 입성> 과 <루이 13세의 서약>은 다른 그림이다.

그리고 "Entrance of Dauphin, future Charles 5, to Paris"  가 원제로 "미래의 샤를 5세인 왕세자의 파리 입성"이라 번역해야 할 것 같다. 찰스 5세 내정자는 또 뭔가?

149p

에드워드 부르메 존스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

-> Edward Burne-Jones , 즉 에드워드 번 존스이다. 부르메 존스라니. 

151p

27살의 젊은 고흐는 자신에게 권총을 발사했고, 이틀 후에 세상을 떠남

-> 37세에 사망했다.

165p

12월 초 밀레이는 1850년에 모자가게 점원으로 근무하며 그와 만나 이 그림이 완성되고도 한참 후인 1860년에 그와 결혼한 엘리자베스 시달을 오필리아의 모델로 작업을 시작했다.

-> 엘리자베스 시달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부인이고, 존 에버릿 밀레이는 러스킨의 부인인 에피와 결혼했다.

166p

이 <최후의 심판의 날>은 세 작품으로 이뤄진 최후의 심판 시리즈 중 하나로 천국의 모습은 왼편에, 최후의 심판이 중간, 그리고 이 작품이 오른편에 위치한다.

-> 이 작품은 트립티크로 되어 있는데 중간 그림의 제목이 "The Last Judgement" 이고 오른편이 "The Great Day of His Wrath"이다. 그러므로 신의 분노의 날, 혹은 진노의 날이라고 하면 더 확실하게 전달이 될 것 같다.

170p

리차드 대드 <펠러의 대성공>

-> 이 작품의 제목은 "The Fairy Feller's Master-Stroke" 이다. 펠러가 사람 이름인가 했더니만,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요정 나뭇꾼의 절묘한 솜씨>로 번역되어 있다. 즉, feller 나뭇꾼이라는 뜻이었다. 정말 이렇게 밖에 번역이 안 되는 것일까?

175p

조르주 쇠라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 "Bathers at Asnieres"  즉,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다.

191p

마티스는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과, 베네치아의 로자리오 예배당의 장식을 시작했고 죽는 순간까지 이 일에 전념함

-> 베네치아가 아니라 프랑스의 방스에 있는 로자리오 예배당이다.

225p

1635 피터 폴 루벤스 <사냥하는 샤를 1세의 초상화> 파리

-> 아무리 찾아봐도 1635년에 완성한 <Charles 1 at the Hunt> 즉, 사냥하는 찰스 1세의 초상화, 특히 파리의 루브르에 있는 작품은 루벤스가 아니라 반 다이크의 그림이다.

227p

와토는 왕립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된 후 그 기념으로 <카테라 섬의 순례>를 그림

-> "Pilgrimage to Cythera" 카테라 섬이 아니라 키테라 섬의 순례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lobe00 2019-12-1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ter를 master로 보셨나봄요^^;; 이런 오류가 많으면 신뢰도가 확 떨어지는데 아쉽네요ㅡ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
윤용이 지음 / 돌베개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부터 읽으려고 했던 책인데 드디어 읽게 됐다.

앞부분은 도기, 뒷부분은 자기에 관한 이야기고 역사와 맞물려 설명한다.

개념 정리가 명확해서 좋다.

도기는 도토, 즉 진흙으로 1000도 이하에서 만든 질그릇, 자기는 자토로 1200도 이상에서 만든 사기 그릇이다.

어떤 흙으로 만들었는지, 몇 도에서 구웠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유약 색깔에 따라 나타나는 청자의 색이 다르다.

분청사기는 뭔가 했더니, 사기가 곧 자기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안 좋은 흙을 써서 거친 질감을 감추기 위해 분장을 한 자기가 바로 분청사기이므로 저자는 개념 정리를 위해 분청자라고 부른다.

분청자라고 하니 청자라는 속성이 정확히 드러나는 듯하다.'

질그릇은 신석기 시대부터 실생활에 사용해 왔지만 제사를 드리는 제기와, 불교 의식에 쓰이는 공양구로써 질적 발전을 이룬다.

진흙으로 만든 질그릇이 삼국시대까지만 있고 없어져 버린 줄 알았더니, 조선 말까지도 실생활에 많이 사용됐다.

어려서 집에 있던 장독이 바로 질그릇이다.

제일 흥미로운 지적은, 고려 청자의 시작이 바로 오월국에서 넘어온 중국 장인들의 기술 전수였다는 사실이다.

5대 10국 시절에 강서성의 도요 주변을 지배했던 오월국이 망한 후 그 유민들이 고려로 넘어와 개성 일대에서 청자를 굽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논리를 확대시켜 중국 학자들을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한 광종 무렵으로 추정한다.

맨날 일본에 기술 전수한 얘기만 하지 중국으로부터 받은 얘기는 못 들어 봐 신선했다.

우리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기술이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문화 선진국으로부터 전수받아 발전시켰던 것이다.

차가 전래되면서 다완으로 청자가 쓰여 더욱 많은 자기가 만들어졌다.

고려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간 것도 시대의 미감이 변했기 때문이지 청자 만드는 기술이 퇴보해서는 아니라고 한다.

다른 책에서도 청자보다 백자가 훨씬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를 본 적 있다.

청자에 무늬를 넣는 상감청자는 고려의 개성적인 공예품으로 중국과는 다른 미감을 선사한다.

박물관에서 진행한 교양강좌여서 그런지 알기 쉽게 도자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준다.

도판이 선명해서 감상하기 좋았다.


<인상깊은 구절>

187p

한국의 초기 벽돌가마가 중국의 사룡구 가마터의 퇴적 층위 중 960~982년 사이에 형성된 층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중국과 한국에 발표한 바 있습니다. 연구 결과를 통해 그 당시 중국의 월주요 청자 제작자들이 한국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월주요 장인들은 고려로 건너왔을 뿐만 아니라 도기를 만드는 고려의 장인들을 훈련시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94p

우리의 청자 제작은 광종 연간 지배층의 요구에 따라 월주요 장인들의 귀화로 중부 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중국에서 이주한 장인 집단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주변에 자기를 제작할 만한 흙이 나는 지역을 우선 선정하여, 중국 청자의 제작 기법을 고려의 도기 장인들에게 전수했을 것입니다. 초기에는 이곳에 중국식 벽돌가마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의 강남 지방과 달리 춥고 기온차가 심해서, 겨울이 지나면 가마가 무너져 여러 차례 수리를 해야 했습니다. 이에 고려의 자연환경에 적합한 가마가 만들어지는데, 바로 남부 지방의 진흙가마입니다.

207p

요리의 발달은 석탄을 생활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석탄의 강력한 화력은 중국 각 지역 음식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고, 산해진미를 담기 위한 다양한 그릇의 제작도 활발해집니다. 뛰어난 예술적 안목과 재능을 가진 휘종 황제가 다스리던 이 시기는 그야말로 중국 문화의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은 도자기의 나라입니다. 1100년을 전후한 송대의 도자기는 중국 도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과물로 평가됩니다. 

240p

고려와 문화적 기질이 달랐던 원나라는 기본적으로 고려 청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고려 말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 세력들인 권문세족은 원나라의 요구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청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약해지면서 제작 기법 면에서 보다 손쉬운 방법을 쓰는 등 수고를 줄이려고 하였습니다. 상감청자에서 분청자로의 자연스러운 이행 과정은 14세기, 원이 주도했던 세계 도자의 흐름 안에서 중국적 요소를 새롭게 수용하고, 전통적 바탕 위에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인 혼란상을 극복하는 발전적 흐름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고려 지배 세력의 변화와 함께 가장 직접적인 고려 청자의 쇠퇴 원인은 왜구의 침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려 말 상감청자에서 분청자로 이행하는 과정은 바꿔 말하면 전국에서 활발하게 도자기가 만들어지고, 실용화되고, 보편화되는 과정입니다.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청자의 질은 점점 낮아집니다. 즉, 고려 청자가 비로소 서민의 일상을 담는 실용기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287p

신진사대부들은 조선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국가로 만들고자 청렴결백한 군자상을 제시하였습니다. 따라서 황희와 같은 관리들이 청백리의 표본으로 추앙받는 등 청빈한 군자상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왕실이라 하여 화려함을 추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실 또한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을 추구하였습니다.

 목면의 재배로 무명옷이 실생활에 널리 보급되었던 것도 사대부들이 추구하던 이상에 맞는 의복이었기 때문입니다.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사대부들의 가치관에 들어맞는 것으로, 무명옷의 순백 색감은 사람들에게 청렴결백의 상징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종 연간인 15세기 전반 조선의 문화는 집현전의 학자들이 이끌어 갔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고대사를 연구하였고, 특히 공자와 맹자가 살던 춘추전국 시대의 사회제도 뿐만 아니라 사용되던 그릇의 기형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중국의 문화에 심취해 그 본질에 가까이 접근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중국 고대에 사용하던 그릇에 대한 연구 역시 중국 문화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일부였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의 중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극해지면서, 중국 백자에 대한 선망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고대를 숭앙하는 복고주의가 결국 조선을 근대 사회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는가? 일부 문화계의 흐름이 아니라 국가 정책으로 저런 복고주의를 고수했으니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312p

당시의 사대부들은 아름답고 화려한 옷에 현혹되기보다는 소박하고 흰 무명옷을 낡고 헤질 때까지 빨아서 다시 입는 번거로움을 수고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청렴결백의 사상과도 일치하며, 사물의 외양보다는 그 속에 담긴 본래의 이치를 깨달은 후에야만 결백하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성리학의 이념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자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특별한 장식무늬 없이도 그 외형과 백자 고유의 빛깔에서 나오는 새하얀 아름다움을 추구한 듯합니다.

318p

16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조선의 사발이 일본의 다도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은 일본인들의 가치관과 관계가 있습니다. 조선 다완은 약간 어리숙하고 모자라 보이지만 누구에게나 정감이 드는 순박함이 있습니다. 조선 사회가 추구했던 성리학의 청빈하고 소박한 미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일본인들도 공감했던 모양입니다. 



<오류>

36p

지구의 역사는 약 45억만 년이라고 말합니다.

-> 45억만 년이 아니라 45억 년이다.

이 땅에 처음 생명체가 탄생한 시기가 대개 5만 년 전으로 보며

-> 첫 생명체 탄생은 5만년이 아니라 대략 35억년 전후이다.

드디어 7800만 년 전에 척추동물이 등장합니다.

-> 척추동물은 대략 4억 8천만년 전에 나온다.

86p

고구려의 미천왕을 죽인 장본인이 바로 근초고왕이었습니다.

-> 근초고왕이 죽인 고구려의 왕은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이다.

201p

고려가 일본과 교류를 시작한 시기는 문종(재위 1450~1452) 연간인 1051년 이후입니다.

-> 괄호 안에 재위한 임금은 고려가 아닌 조선의 문종이고, 고려 문종은 1046~1083년에 재위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 청화자기 - 대륙의 역사와 문화를 담는 그릇
황윤.김준성 지음 / 생각의나무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이렇게 재밌을 수가!

전에 읽었던 책인데 최근 중국 청화자기에 대한 번역서를 읽고 좀 어려워서 쉬운 책으로 다시 보려고 선택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재밌고 유익하고 도판 질도 좋아 감탄하면서 읽었다.

자기에 대한 설명보다도 중국 역사 발전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와 닿았는데 저자가 역사학 전공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뒷부분에 참조 서적을 보니 역시나, 내가 감탄하면서 읽었던 책들이 나왔다.

아마도 이런 책들을 요약한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300 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송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자기의 변천사는 물론, 역사의 발전 과정도 너무나 흥미롭게, 그것도 본질적인 설명을 곁들여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

중국은 궁극적으로 유럽의 대항해 시대 같은 무역국가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땅덩어리가 워낙 넓고 물자가 풍부했으므로 안정적인 유교적 농업국가를 지향했다.

전통사회에서는 그것이 잘 작동했지만 유럽이 바다로 배를 띄우면서 치고 나가자 전세가 역전되어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몰락하고 만다.

청나라까지만 해도 중국의 자기는 세계 최고였고 완벽을 향해 나아갔으나, 결국 근대화 이후 서양 자기에 밀리고 말았다.

중국 문화권 아래 있었으면서도 서양의 팽창정책에 맞춰 변신한 일본의 경우가 매우 특이한 사례 같다.

보통 조선처럼 함께 찌그러지기 마련인데 말이다.

도판이 너무나 선명하고 중국 자기의 아름다움에 말 그대로 넋을 잃었다.

그림보다 더 영롱하고 완벽한 균형과 대칭을 이루는 기형물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자기는 고려 청자나 조선 백자에 비해 너무 장식성이 강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잘 몰라서 한 소리였던 것 같다.

우아함과 빼어난 기형, 그리고 선명한 발색 등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저자들의 문장력이 좋아 좋은 내용을 어렵지 않게 잘 전달한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역사문고 28
윤선태 지음 / 주류성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라 쉽게 읽을 줄 알았는데 절반도 다 이해를 못한 것 같다.

고고학 자료 분석은 내 수준에서는 너무 어렵다.

사비 시기에 발견된 목간을 통해 당시 백제 도성 환경을 분석한 책인데 솔직히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다.

서문에서 백제가 왜 멸망했는가를 질문하고, 맺음말에서 소중화를 추구하다 오만 때문에 망했다고 하는데 별로 공감이 안 간다.

백제가 중국을 따라하고자 열심히 문화를 답습하고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였는데도 자신들이 야만시 한 신라 때문에 멸망했다는 말이 앞뒤가 안 맞는 느낌이다.

소중화라는 오만에 차서 망한 게 아니라 외교 면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신라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닌가?

능산리에서 발굴된 목간을 토대로 백제가 도성을 도교적 세상을 구현하려 했다는데 이런 것들도 너무 비약처럼 들려 공감이 안 간다.

목간의 존재는 곧 문자행정인데 고대 국가 성립에 필수적인 요건이었고, 한반도에서는 이런 첨단문화를 중국에서 직접 수입했다기 보다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했던 낙랑과 대방군을 통해 받아들인 것으로 본다.

앞서 읽은 책에서도 백제가 낙랑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성장했고 멸망 후 그 문화와 유민들을 받아들여 강력한 고대 국가 체계를 수립했다고 했다.

선진문화와의 교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다.



<인상깊은 구절>

13p

김유신은 668년 당군을 지원하기 위해 고구려 원정에 오른 김흠순과 김인문을 격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忠信 으로 살아남았고, 백제는 오만으로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교만이 가득 차 위태하다. 지금 너희들은 우리의 올바름으로 저들의 그릇됨을 치는 것이니 충분히 뜻을 이룰 수 있다. 하물며 대국에 의지하여 천자의 위광을 밝힘에랴!"

(과연 삼국통일을 이끈 지도자의 말답게 명분도 있고 패기도 있다. 전선으로 떠나는 부하 장수들을 격려하는 대장군의 기개와 마음씀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56p

이러한 봉니들은 낙랑군과 소속현이 서북한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상호 활발하게 문서를 수발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앞서의 편철간이나 봉니들은 당시 낙랑군이 한의 內郡 과 별 차이 없는 문서행정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4군의 진출로 인해 한국고대사회는 매우 일찍부터 중국의 목간문화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이미 한반도의 정치체들도 한사군과의 교류와 교역에 직접 목간을 사용하였다. 이를 알려주는 유물이 경남 창원의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창원 다호리 유적 전시회를 관람했던 기억이 난다. 문자 생활을 증명해 주는 붓과 삭도 등이 발굴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배경 지식이 부족해, 그 유물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고 시시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57p

이들 삼한의 정치체들이 사용한 한자는 내부적인 목적이 아니라, 중국 군현과의 교섭을 위한 것이었다. 낙동강 수계에 위치한 창원의 다호리지역도 중국 군현과의 교역로에 접해있었던 정치체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빨리 목간을 사용하는 서사문화를 수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한국고대의 목간문화 수용은 중국 군현과의 관계에서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역시 고대에도 교류를 통해 빨리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쪽이 살아남았던 모양이다)

58p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낙랑, 대방군과 대치하고 있었고, 강력한 중국세력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중국을 모델로 하는, 중국문화의 전반적인 수용을 통한 국가체제 확립을 지향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이미 3세기에 중국에서 문서를 관리하던 직책인 '주부'라는 관직을 받아들여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다. 적어도 4세기에는 고구려사회에 중국의 전적이 유통되고, 문서행정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書寫 장면들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144p

능산리목간이 출토된 지점은 도성의 입구였던 나성대문 바로 밖이다. 이곳은 지방인들이 도성과 만나는 접점이었다. 수많은 지방거주자들이 지방에서 생산된 많은 물자들이 이 나성대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고대사회에서는 물적 기초가 '人身'이었기 때문에, 공사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통행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특히 도성은 왕이 거주하는 궁궐이 있고, 그 출입이 '궁위령'으로 감시 통제되는, 국가권력이 집주한 핵심공간이라는 점에서, 도성의 입구인 나성대문 역시 엄격한 출입통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59p

고대국가의 도성은 독특한 도시경관과 상징적인 장엄의례를 통해 국가권력의 위엄과 중심을 연출해낸다. 도성은 마치 거대한 '극장'과 같다. 도성이라는 '무대장치'에서 베풀어진 장엄의례는 세금을 운반하여 상경하는 지방인에게도, 도성에 거주하는 관인에게도, 똑같이 거대한 권력을 체감케 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국가에 대한 충성과 복속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163p

전통시대 중국의 왕조국가에서는 국가의지를 문서로 관철하는 '문서주의'를 일찍부터 채택하여, 문서행정이 고도로 발달하였다. 국왕문서나 관부 사이의 문서수발이 상행, 평행, 하행 문서로 질서정연하게 위계화 되었고, 문서양식만으로도 황제를 정점으로 한 권력구조가 확연히 드러났다

 또 당의 공식령에는 각 문서의 투식 및 수발과정을 법률로 명시하여, 문서의 객관성과 공공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문서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려면 관료에 대한 합리적인 업무 분담과 그에 따른 문서의 생산을 법령을 통해 통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고대의 문서행정은 '율령'에 의거해 문서로 국가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고대국가의 공문서는 관료가 임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령에 따라 생산, 폐기, 보존되며, 이 과정 자체가 법령에 따라 정기적으로 조사, 통제된다.

174p

연령등급제는 중국 고대 국가에서 인신지배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로서 한대의 使男, 未使男 의 구분에서 시작하여 인두세를 지탱하다가, 당 중기 이후 토지를 기준으로 한 양세법이 실시되면서 소멸된다.

196p

최근까지 보고된 고고학적 자료로 알 수 있듯이, 부분적으로 청동기시대 이래의 유적이 확인되지만, 그 밀도는 인접한 지역에 비해 현저히 낮다. 또 현재의 부여시가지 일원의 저지대는 대부분 사비이전 시기의 유구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저습지 퇴적츰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사비도성은 대규모의 저습지 개발을 통한 계획적인 신도시 건설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사비도성은 바둑판의 눈금처럼 정연한 크기의 도로구획을 만들고, 그에 조응하여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11p

당나라가 이러한 '신구'와 '우이'로 백제 정복군단의 명칭을 삼았다는 것은 당시 이 지명들이 백제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216p

7세기 백제에는 자신을 중화로, 주변국을 번이로 인식하는 중화사상이 존재하였다고 생각된다.

 최근 7세기 말 백제패망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왕씨나 백제귀족들이 일본 대보령의 제국적 세계관 확립에 깊이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즉 백제를 고대일본의 번국으로 위치시키고, 동시에 고대일본의 변경에 거주하였던 에미시나 하야토 등을 이적으로 차별화하였던, 고대일본의 중화의식이 백제계 귀화인들에 의해 고안,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백제인들이 <니혼쇼키> 편찬시에 제출한 '백제삼서'를 보면, 일본천황에 대한 백제왕의 신종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탐미다례를 '남만'으로, 역대 백제왕이 일본천황에 대해 스스로를 '서번'으로 비칭하는 등 백제인이 만든 자료 속에서 중화사상에 기초한 이적, 제번 등의 의도적인 화이 구분 의식이 확인된다는 점이 주요 근거로 제시되었다.

221p

나당연합군보다 힘이 약해 백제가 멸망했다거나, 나당연합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백제가 멸망했다는 말은 일견 타당하지만, 궁극적으로 백제가 왜 그렇게 밖에 대처하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속시원한 답은 아니다. 앞서 분석한 목간자료로 볼 때 백제는 분명 김유신이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오만'으로, 아니 백제의 입장에서는 '자부심' 때문에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된다.

 <양서>에 전하는 이 삽화는 백제의 사절단이 단순히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勢 의 유불리를 따지며 잔머리를 굴리는 조공객들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눈물 속에는 명분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문명인'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패악 무도한 후경에게 굴복하지 않은 백제 사신의 통곡은 양의 지식인들을 감동시켰고, 이 삽화는 그래서 남게 되었다. 이 백제의 양심은 단지 사서에서 읽었던 올곧은 선비를 흉내낸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식도 중국 귀족문화에 대한 백제 귀족의 오랜 답습과 온축이 없었다면 나타날 수 없었다.

 서예가로 유명한 소자운의 글씨를 양에 간 백제 사신이 금화 수백만을 주고 얻어왔다는 <남사>에 전하는 일화도 당시 백제 지배층이 중국 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얼마나 동경하였고, 그 문화에 얼마나 심취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양의 무덤양식을 그대로 베낀 무령왕릉은 또 어떠한가!

 이처럼 웅진, 사비시기 백제지배층은 일상의 삶에서 죽음까지 중국의 그것과 하나도 차이가 나지 않게 보이도록 노력하였다. 백제는 한성기부터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웅진기에 와서는 자신들을 중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 '소중화'의 문명인으로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척도제와 연령등급제가 큰 시차 없이 백제에 그대로 수용되고 실시된 것도 그 한 예이다.

(그렇게 열심히 중국을 모방하고 섬겼으면 사대하는 나라에서 군대를 몰고 와서 나라를 멸망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국문화에 경도된 점은 이해되나 소중화 운운과 백제 멸망은 이어지지가 않는 느낌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오늘날 신라를 중국에 사대하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킨 매국노 취급하는 것도 얼마나 코메디인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