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
윤용이 지음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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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으려고 했던 책인데 드디어 읽게 됐다.

앞부분은 도기, 뒷부분은 자기에 관한 이야기고 역사와 맞물려 설명한다.

개념 정리가 명확해서 좋다.

도기는 도토, 즉 진흙으로 1000도 이하에서 만든 질그릇, 자기는 자토로 1200도 이상에서 만든 사기 그릇이다.

어떤 흙으로 만들었는지, 몇 도에서 구웠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유약 색깔에 따라 나타나는 청자의 색이 다르다.

분청사기는 뭔가 했더니, 사기가 곧 자기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안 좋은 흙을 써서 거친 질감을 감추기 위해 분장을 한 자기가 바로 분청사기이므로 저자는 개념 정리를 위해 분청자라고 부른다.

분청자라고 하니 청자라는 속성이 정확히 드러나는 듯하다.'

질그릇은 신석기 시대부터 실생활에 사용해 왔지만 제사를 드리는 제기와, 불교 의식에 쓰이는 공양구로써 질적 발전을 이룬다.

진흙으로 만든 질그릇이 삼국시대까지만 있고 없어져 버린 줄 알았더니, 조선 말까지도 실생활에 많이 사용됐다.

어려서 집에 있던 장독이 바로 질그릇이다.

제일 흥미로운 지적은, 고려 청자의 시작이 바로 오월국에서 넘어온 중국 장인들의 기술 전수였다는 사실이다.

5대 10국 시절에 강서성의 도요 주변을 지배했던 오월국이 망한 후 그 유민들이 고려로 넘어와 개성 일대에서 청자를 굽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논리를 확대시켜 중국 학자들을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한 광종 무렵으로 추정한다.

맨날 일본에 기술 전수한 얘기만 하지 중국으로부터 받은 얘기는 못 들어 봐 신선했다.

우리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기술이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문화 선진국으로부터 전수받아 발전시켰던 것이다.

차가 전래되면서 다완으로 청자가 쓰여 더욱 많은 자기가 만들어졌다.

고려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간 것도 시대의 미감이 변했기 때문이지 청자 만드는 기술이 퇴보해서는 아니라고 한다.

다른 책에서도 청자보다 백자가 훨씬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를 본 적 있다.

청자에 무늬를 넣는 상감청자는 고려의 개성적인 공예품으로 중국과는 다른 미감을 선사한다.

박물관에서 진행한 교양강좌여서 그런지 알기 쉽게 도자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준다.

도판이 선명해서 감상하기 좋았다.


<인상깊은 구절>

187p

한국의 초기 벽돌가마가 중국의 사룡구 가마터의 퇴적 층위 중 960~982년 사이에 형성된 층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중국과 한국에 발표한 바 있습니다. 연구 결과를 통해 그 당시 중국의 월주요 청자 제작자들이 한국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월주요 장인들은 고려로 건너왔을 뿐만 아니라 도기를 만드는 고려의 장인들을 훈련시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94p

우리의 청자 제작은 광종 연간 지배층의 요구에 따라 월주요 장인들의 귀화로 중부 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중국에서 이주한 장인 집단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주변에 자기를 제작할 만한 흙이 나는 지역을 우선 선정하여, 중국 청자의 제작 기법을 고려의 도기 장인들에게 전수했을 것입니다. 초기에는 이곳에 중국식 벽돌가마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의 강남 지방과 달리 춥고 기온차가 심해서, 겨울이 지나면 가마가 무너져 여러 차례 수리를 해야 했습니다. 이에 고려의 자연환경에 적합한 가마가 만들어지는데, 바로 남부 지방의 진흙가마입니다.

207p

요리의 발달은 석탄을 생활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석탄의 강력한 화력은 중국 각 지역 음식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고, 산해진미를 담기 위한 다양한 그릇의 제작도 활발해집니다. 뛰어난 예술적 안목과 재능을 가진 휘종 황제가 다스리던 이 시기는 그야말로 중국 문화의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은 도자기의 나라입니다. 1100년을 전후한 송대의 도자기는 중국 도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과물로 평가됩니다. 

240p

고려와 문화적 기질이 달랐던 원나라는 기본적으로 고려 청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고려 말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 세력들인 권문세족은 원나라의 요구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청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약해지면서 제작 기법 면에서 보다 손쉬운 방법을 쓰는 등 수고를 줄이려고 하였습니다. 상감청자에서 분청자로의 자연스러운 이행 과정은 14세기, 원이 주도했던 세계 도자의 흐름 안에서 중국적 요소를 새롭게 수용하고, 전통적 바탕 위에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인 혼란상을 극복하는 발전적 흐름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고려 지배 세력의 변화와 함께 가장 직접적인 고려 청자의 쇠퇴 원인은 왜구의 침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려 말 상감청자에서 분청자로 이행하는 과정은 바꿔 말하면 전국에서 활발하게 도자기가 만들어지고, 실용화되고, 보편화되는 과정입니다.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청자의 질은 점점 낮아집니다. 즉, 고려 청자가 비로소 서민의 일상을 담는 실용기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287p

신진사대부들은 조선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국가로 만들고자 청렴결백한 군자상을 제시하였습니다. 따라서 황희와 같은 관리들이 청백리의 표본으로 추앙받는 등 청빈한 군자상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왕실이라 하여 화려함을 추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실 또한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을 추구하였습니다.

 목면의 재배로 무명옷이 실생활에 널리 보급되었던 것도 사대부들이 추구하던 이상에 맞는 의복이었기 때문입니다.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사대부들의 가치관에 들어맞는 것으로, 무명옷의 순백 색감은 사람들에게 청렴결백의 상징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종 연간인 15세기 전반 조선의 문화는 집현전의 학자들이 이끌어 갔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고대사를 연구하였고, 특히 공자와 맹자가 살던 춘추전국 시대의 사회제도 뿐만 아니라 사용되던 그릇의 기형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중국의 문화에 심취해 그 본질에 가까이 접근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중국 고대에 사용하던 그릇에 대한 연구 역시 중국 문화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일부였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의 중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극해지면서, 중국 백자에 대한 선망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고대를 숭앙하는 복고주의가 결국 조선을 근대 사회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는가? 일부 문화계의 흐름이 아니라 국가 정책으로 저런 복고주의를 고수했으니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312p

당시의 사대부들은 아름답고 화려한 옷에 현혹되기보다는 소박하고 흰 무명옷을 낡고 헤질 때까지 빨아서 다시 입는 번거로움을 수고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청렴결백의 사상과도 일치하며, 사물의 외양보다는 그 속에 담긴 본래의 이치를 깨달은 후에야만 결백하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성리학의 이념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자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특별한 장식무늬 없이도 그 외형과 백자 고유의 빛깔에서 나오는 새하얀 아름다움을 추구한 듯합니다.

318p

16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조선의 사발이 일본의 다도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은 일본인들의 가치관과 관계가 있습니다. 조선 다완은 약간 어리숙하고 모자라 보이지만 누구에게나 정감이 드는 순박함이 있습니다. 조선 사회가 추구했던 성리학의 청빈하고 소박한 미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일본인들도 공감했던 모양입니다. 



<오류>

36p

지구의 역사는 약 45억만 년이라고 말합니다.

-> 45억만 년이 아니라 45억 년이다.

이 땅에 처음 생명체가 탄생한 시기가 대개 5만 년 전으로 보며

-> 첫 생명체 탄생은 5만년이 아니라 대략 35억년 전후이다.

드디어 7800만 년 전에 척추동물이 등장합니다.

-> 척추동물은 대략 4억 8천만년 전에 나온다.

86p

고구려의 미천왕을 죽인 장본인이 바로 근초고왕이었습니다.

-> 근초고왕이 죽인 고구려의 왕은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이다.

201p

고려가 일본과 교류를 시작한 시기는 문종(재위 1450~1452) 연간인 1051년 이후입니다.

-> 괄호 안에 재위한 임금은 고려가 아닌 조선의 문종이고, 고려 문종은 1046~1083년에 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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