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인종의 경계를 묻다 스켑틱 SKEPTIC 24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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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주제는 좀 지루했다.

초능력자라고 주장하는 유리 겔라의 허상을 밝혀낸 것으로 유명한 제임스 랜디 마술사가 92세의 나이로 사망 후 추모 기사가 실려서 기대했는데 깊이가 부족해 아쉽다.

과학은 도덕적일 수 있는가, 가치중립적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진화 자체가 다양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종교 대신 도덕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주장은 신선하다.

다양성과 자유의 확대야 말로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도덕의 진보 방향이고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한다.

도그마에 갇혀 있는 종교는 21세기의 보편적 도덕성을 획득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제일 관심있는 주제는 책의 제목인 인종에 관한 내용이었다.

얼마 전에 읽은 "1만 년의 폭발"이라는 책에서는, 공정함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과학적 진실을 감추고 있다면서 인종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한때 페미니즘에 경도된 적이 있어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는 문화적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었다.

간단히 말해 여자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남자와 육체적으로 같은 성취를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현재는 명백한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하고 남녀 구분이 없다면 올림픽 100미터 세계신기록을 여자가 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이해한다.

인종의 명백한 분류보다는 평균키의 차이나 피부색, 모발처럼 집단적 구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

인종에 관한 주제를 읽을 때마다 과학에서 말하는 인종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화적 의미의 인종이 다른 게 아닐까 싶다.

기준이 다르니 본질을 등한시하고 논쟁만 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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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시대, 종교를 생각한다 스켑틱 SKEPTIC 23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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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자의 가장 큰 적은 종교인 것 같다.

그 외 자잘한 적들로는 대체의학, 지구평면설, UFO 등등이 있다.

스켑틱 잡지를 한꺼번에 빌려 읽어서 그런지 비슷한 내용이 계속 반복돼서 감상문 쓰기가 힘들다.

전체적으로는 거의 다 동의하는 내용들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믿음과 계시로서의 종교는 21세기 과학을 대체할 수 없고, 점점 더 무신론의 시대로 변해갈 것 같기는 하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과학을 단순한 기술 발달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과학 만능주의라는 말도 나왔을 것이다.

스켑틱 시리즈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과학은 단순한 발견이나 기술 발달이 아니라 사고 체계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세상을 이해할 것인가?

자연의 신비라는 자연과학적 진리를 밝히려는 탐구 정신인 것 같다.

그러므로 신이라는,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증명할 수 없는 절대자를 전제한 종교, 특히 인격신을 가정한 기독교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도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의 주장을 빌려 과학과 종교가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영역이라고 논쟁을 회피하려는 모습도 보이지지만 전략적으로를 옳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양립 불가능한 명제 같다.

절대자를 상정하고 그에 복종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는 종교적 행위를, 책에서는 인간이라는 집단 수준의 적응이라고 표현했다.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를 보면서 호모 사피엔스의 DNA 에 예술과 종교 유전자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종교가 인간의 사회를 안정시키고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존속해 온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종교가 과학과 합리주의의 발달에 따라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과거보다 확실히 종교적 영향력은 약화됐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UFO 와 외계인, 대체의학 등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다.

어쩌면 인간의 정신 활동이 계속 되는 한, 우리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예술 작품에 격한 감동을 느끼고 많은 비용을 지불하듯 종교도 그런 형태로 존재할지 모른다.

교회가 사라지는 21세기에 미술관이 현대인의 예배소가 되고 있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원인을 찾으려는 인간의 속성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자연현상에 대한 첫번째 원인으로서 절대자를 창조해 냈다는 의견도 있다.

확실히 인간은 왜? 에 대해 궁금해 한다.

정확한 답이든 아니든 나름대로 현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음모론도 인과관계를 원하는 인간의 속성 탓에 만연해 있는 것이리라.


"실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의 과학은 아직 원시적이고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기도 하다"

스켑틱 잡지의 첫 장에 나오는 인류 최고의 천재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어쩌면 과학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줄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는 경구에다가 과학과 합리주의 정신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는 말을 끼워 넣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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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왜 사라지는가 - 인류가 잃어버린 25개의 오솔길
하랄트 하르만 지음, 이수영 옮김, 강인욱 해제 / 돌베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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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고 거창한 제목에 비하면 내용이 너무 평이해서 기대치에 못 미쳐 아쉽다.

저자 약력을 보니 전문적인 연구자가 아니라 대중서 수준으로 책을 낸 듯 한데 오히려 강인욱 교수의 해제가 격에 안 맞는 느낌이다.

제목은 문명의 흥망성쇠인 반면, 실제 내용은 덜 알려진 주변 지역의 문명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 알려진 4대 문명권 외에도 여러 지역에 크고 작은 문명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 큰 지구에 당연히 다양한 문명의 시작이 존재했을 것이다.

특히 발칸 반도 지역의 도나우 강 문명권은 이 책에서 처음 접해 신선하다.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중국만 해도 황하 이외의 지역에 다양한 문명이 존재했다고 한다.

흥미로웠던 내용은, 베링 해협이 육교로 이어져 있을 때 시베리아를 건너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것 외에, 대서양의 빙하를 따라 유럽 대륙에서 서쪽으로 이주한 정황 증거가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빙하기였다고 하지만 과연 대서양 횡단이 2만 년 전에 가능했을까?

저자는 물범 사냥꾼들이 빙하에 임시 거주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흘러갔다고 추정한다.

유전자 풀이나 아메리카 대륙에 남아 있는 석기 등을 예로 들지만 쉽게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다.

페루에 남아있는 하얀 피부의 원주민 차차포야족 이야기도 흥미롭다.

오래 전에 유럽에서 건너 온 이주민들이 페루의 고지대에 격리되어 살다 보니 원주민과 섞이지 않고 흰 피부 형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증명이 됐다고 하는데 과연 이들은 언제 어떤 경로로 건너오게 됐을지 궁금하다.


<오류>

125p

지도에서 알타이 산맥으로 표시된 부분은 쿤륜 산맥을 잘못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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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평전 - 이탈리아 성당 기행
최의영.우광호 지음 / 시공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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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생각보다 두꺼워 약간 긴장했는데 내용은 너무 평이해서 솔직히 많이 아쉽다.

여행 에세이는 잘 쓰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에세이로서 읽을 만한 수준이 되려면 문장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일류 소설가나 에세이스트가 아니라면 어려울 것이고,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려면 단순히 사진 찍는데 그치지 않고 저자가 많이 공부하고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냥 본인의 블로그에나 올릴 만한 감상문 수준으로 책을 낸다.

대신 사진기가 워낙 좋아져서 그런지 도판들의 수준은 나날이 좋아지는 것 같다.

이 책도 여행지 사진들은 비교적 훌륭하고 인쇄 상태도 좋은 편이라 책 자체는 예쁘다.

다만 안의 내용이 아쉽다.

"성당 평전"이라는 제목에 부합하려면 단순한 감상문에 그치면 안 될 것 같고 각 성당에 대한 좀더 많은 지식이 필요해 보인다.

여행기의 정석은 역시 유홍준씨의 답사기인 듯하다.

아무래도 본인의 전공 분야이니 깊이 면에서는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을 듯한데 쉬운 문체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책에서는 이탈리아 곳곳의 성당들을 소개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부터 있어 온 성당들이나 마치 절을 보는 느낌이다.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그 자체로써 문화재인 셈이다.

피렌체나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등 몇몇 유명 성당 이름만 알았는데 이탈리아 각지에 이렇게 많은 성당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구글 지도로 검색하면서 읽다 보니 이탈리아 지리에 대한 기본 개념이 잡히는 느낌이다.

유명 성당을 보면 건축물 자체의 위상보다는 거기에 어떤 명화가 있는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명화를 미술관에 전부 모아 놓는 것보다는, 만들어질 당시의 원래 목적에 맞게 제자리에 있는 편이 더 의미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자가 가톨릭 신자이다 보니 성당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도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다만 20세기에 성 비오 성인의 오상을 실재적인 기적으로 받아들인 점 등을 보면 결국 종교도 미신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모양이다.


<오류>

423p

특히 이 성당은 카롤링거 왕조의 루이 3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속국이었던 바르바로사의 황제 프리드리히의 대관식이 열린 곳이다.

-> 바르바로사는 지역 이름이 아니라 붉은 수염이라는 애칭이고 프리드리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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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 근대의 문을 연 최후의 중세인 클래식 클라우드 26
이길용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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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팟캐스트에서 연재할 때부터 예술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컨셉이 신선해 흥미롭게 들었는데, 막상 책으로 나오니 편집이나 읽기는 좋은 반면, 깊이 면에서는 늘 아쉽다.

분량의 한계일까?

아마도 본격적인 교양서가 아니라 방송용으로 대중에게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수준에 포커스를 맞춘 탓이겠지만 책보다는 팟캐스트에서 김태훈과 게스트 이야기 듣는 게 더 재밌는 듯하다.

이번 책의 주인공은 예술가가 아니라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다.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 가 보면서 그의 생애와 주장을 돌아보는 컨셉이다.

도판이나 편집이 아주 예쁘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라 보기는 좋다.

내용도 이해하기 쉽지만 깊이 면에서는 아무대로 아쉽다.


루터는 오직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했다.

오랜 시간 동안 유럽 사회를 장악해 온 가톨릭의 사제 계급이 아닌, 성경 읽기를 통한 개별적인 신과의 대면을 통해 오직 신의 자비와 은총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만인사제주의를 주장했다.

성경을 읽으려면 문자 해독이 가능해야 하므로 루터는 공교육을 강조했다.

당연히 그리스어나 히브리 원전이 아닌 독일어 번역, 그것도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독일어 문어체 확립에 노력했고 때마친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술 덕분에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저자는 이런 사회적 변화에 주목한다.

앞세대의 위크클리프나 얀 후스 등이 참신앙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다가 화형대의 불꽃으로 사라진 반면 루터는 인쇄술의 발달이라는 시대의 변화를 잘 이용해 유럽 세계를 뒤흔든 주역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성전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이 면벌부 판매로 변질되면서 로마의 착취에 대항하고자 했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지원도 큰 방어막이 됐다.

보름스 회의에서 루터는 제국 추방령을 당하는데, 그가 살해될 것을 걱정한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를 납치해 바르트베르크 성에 안전하게 데려다 놓은 후, 그 10개월 동안 신약성서 번역이 이루어진다.

이런 위정자들의 보호가 없었다면 그도 얀 후스처럼 화형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루터는 농민 반란에 단호하게 반대했고 수많은 이들이 잔인하게 진압됐다.

루터는 한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가라기 보다는, 페스트와 전쟁의 시대에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고 신의 구원을 받을 것인가, 신과의 개인적인 관계 설정에 몰두한 신실한 종교인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저자는 루터를 개인주의 시대인 근대를 연 최후의 중세인이라고 표현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변되는 스콜라 철학이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을 받아들여 이성으로서 세상을 보는 자연신학을 추구했던 반면, 루터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영적 체험과 계시를 통해서만 비로소 구원이 가능하다는 일종의 신비주의를 주장했다.

저자는 출세의 도구로 삼았던 유학을 남송 때 철학적 관념론으로 승화시킨 주희와 루터를 비교한다.

약간 뜬금없는 것 같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실체보다는 관념론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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