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아프리카 - 에티오피아에서 마다가스카르까지 아프리카 14개국 종단기
김성호 지음 / 시대의창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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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접한 것은 KBS 3라디오의 오디오북 코너에서였다.

아프리카 여행이라는 흔하지 않는 주제라 흥미롭게 들었는데 출근 시간이 안 맞아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러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발견했는데 584 페이지의 상당히 두꺼운 책이었다.

여행기라서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고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문장도 가독성 있게 잘 읽히는 편이지만 분량은 상당히 많은 편이라 며칠에 걸쳐서 나눠 읽었다.

눈에 잘 띄는 표지 디자인이나 눈이 피로하지 않은 한 톤 다운된 듯한 인쇄 상태가 마음에 들지만, 역시 저자 본인이 찍은 사진은 도판으로 싣기에는 많이 아쉽다.

관련 지역들을 검색하다 보니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여행기를 책으로 묶은 듯 하다.

에티오피아부터 시작해 남아공까지 동아프리카를 내려오고 위로 올라가 나미비아에서 바다 건너 마다가스카르에서 끝나는 76일의 여행기다.

짧은 휴가에 가능하면 많은 곳을 돌아보기 위해 정신없이 다니는 직장인들의 여행과는 컨셉이 전혀 다른 프로 여행가의 직업적 여행기라 읽다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나같은 사람은 따라하기 힘든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여행사에서 숙소와 교통편을 안내해 주는 편안한 여행이 아니다 보니, 더군다다 유럽에 비해 여행객을 위한 시설이 거의 갖춰지지 않은 아프리카를 배낭 여행하다 보니 좌충우돌 별별 사고가 다 있고 그런 불편함들을 별다른 불평없이 여행의 과정으로 묵묵히 감내해 가는 저자의 느긋한 태도가 독자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한다.

다만 중간중간 보이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 비교는 좀 쌩뚱맞아 공감하기 어렵기도 했다.

약력을 보니 국회의원까지 지낸 분이라 뭔가 남다른 소회가 있을 것 같긴 한데 글만 가지고는 크게 공감이 안 갔다.

아프리카 각 나라들의 놀라운 자연환경들이 아직 관광지로 많이 개발되지 않아 아쉽다.

루브르나 대영박물관 같은 유럽의 미술관 투어만 할 게 아니라 자연 유산을 테마로 여행을 하는 것도 신선하고 의미있을 것 같다.

한국인은 거의 없는 듯 하고 유럽 여행객들이 식민지 역사 탓인지 많다.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특히 정치 상황이 안정되지 못해 여전히 국민소득이 낮아 관광 자원 개발도 어려운 듯 하다.

개발이 덜 되서 멋진 자연 환경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당장 수출품을 만들기 힘든 상황이라면 관광 자원 개발에 좀더 투자를 하면 국민소득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이런 것도 어설픈 감상일까?

많이 접해 보지 못한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여행지들을 소개해 줘서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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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장가보내기 - 구혼과 처녀간택부터 첫날밤까지 국왕 혼례의 모든 것
임민혁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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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의 책이라 매우 상세하게 국왕의 혼례 절차와 그 의미를 분석하여 다소 지루하지만 예치국가라는 조선의 정체성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마도 같은 저자였던 듯 한데 다른 책에서 간택 후궁에 대한 글을 읽은 적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간택 후궁인 숙의 가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후궁이라고 하면 사가의 첩처럼 특별한 의례를 거치지 않고 좋아하는 궁녀에게 작위를 내리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의외로 승은 후궁은 많지 않고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대부분이 출신 좋은 사대부가의 간택 후궁이었다.

적장자로 왕위 계승을 한 예가 많지 않음에도 어머니가 궁녀 출신인 경우는 경종과 영조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경종은 장희빈이 폐위되긴 했으나 한 때 왕비의 자리에 있었으니,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의 컴플렉스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고려 시대에는 여러 왕비가 있었던 데 비해 조선 건국 이후 왕 역시 한 명의 정처만을 둬야 했으나 중국의 예에 비추어 1빈 2잉이라는 제 2의 처를 두었다.

이것이 사대부의 첩과는 전혀 다른, 제후의 특수성이다.

첩이 가례 절차 없이 함께 사는, 이른바 야합에 의한 매우 사적인 관계였던 데 비해, 국왕의 간택 후궁은 의례를 갖춘 후 정식으로 입궁하여 사대부의 첩과는 다른 제 2의 처, 부인의 지위를 가졌다.

그래서 입궁 당시부터 종 2품의 숙의라는 높은 직첩을 주었고 정조대부터는 후계자 생산을 위해 아예 빈으로 맞이 했다.

그 예가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다.

적장자인 후계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위상에 걸맞게 제 2의 처인 숙의를 간택 후궁으로 들인 예가 조선 전기 때 많이 보인다.

태종과 세종, 문종, 단종, 예종, 성종, 중종, 선조 등 많은 왕들이 간택 후궁을 들였다.

의외로 세조가 여색에 관심이 없다고 후궁 간택을 거절했다.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도 후궁에서 중전이 되었고,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역시 숙의로 함께 입궁 후 각기 중전이 되었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역시 반정 직후 숙의로 봉해진 후 왕비가 되었다.

아무리 간택 후궁이라 하나 첩이 정실이 되는 것은 불가하다는 유학자들의 주장으로 중종 이후부터는 이런 경우가 안 보이고 특이하게 숙종이 승은 후궁인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웠으니 신하들의 반발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히 간다.


<인상깊은 구절>

92p

일부 정치 세력이 장악한 권력이 왕권을 능가할 수 없는 왕조 국가의 속성상 왕비 간택의 주체는 국왕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국왕은 독단과 자의에 의한 선택으로 특정 가문과 통혼할 수 있었다. 그 권리는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었다.

203p

군신관계는 상하의 예의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의례의 제도화는 반드시 요구되는 조건이었다. 일정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이를 매개로 인위적인 군신관계의 상하질서를 재생산 혹은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도전이 언급한 바와 같이 신분에 따른 질서를 얻는 수단이었다.

248p

왕실에서는 의례를 통해 왕실의 근원과 역사 및 정통성을 고양하고 재확인시켜 정치적으로 좀더 안정된 지지 기반을 갖추고자 했다.

281p

영조는 사친이 숙의에 봉해진 적이 있으며 그의 자식으로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로 인해 숙의 가례에 대한 인식이 특별했을 것으로 보인다. ... 영조의 이러한 숙의 가례의 인식은 정조대로 이어졌다. 정조는 선왕 영조가 후궁의 지위를 높여 숭봉하는 예에 철저했던 현실을 몸소 경험하고 그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는 자신도 종법에 어긋나는 계승관계와 즉위 후 경각에 달린 위기 상황을 경험했기에 원만한 왕통 계승과 왕실의 안정이 자손의 번성에 달려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궁 간택을 서둘렀는데, 동왕 2년에 숙의가 아닌 빈으로 후궁의 국혼을 격상시키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287p

국왕의 간택 후궁은 출신 성분의 가례의 시행 여부, 의위의 차이 등에 비추어 승은 후궁과 구별되어야 하는 신분이었다. 간택된 후궁 숙의는 제2의 처로서 부인이라 칭하고, 승은 후궁은 첩이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택 후궁인 숙의는 왕조례의 특수성과 계급성을 인정하는 방향에서 첩이 아닌 부인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302p

이들을 추모하고 예를 펴는 일은 제삿날은 물론이려니와, 이들에 얽힌 많은 추억 속의 날과 장소 및 역사적 사건 등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효제와 탕평은 영조가 평생토록 지키고자 했던 삶의 목표였다. 한편으로는 예치사회 질서의 재건에 필요한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기도 했다. 숙종의 적장자가 아니라 경종의 아우로서 왕위를 계승하여 왕권의 정통성에 하자를 안고 있었던 영조는 더욱이 미천한 후궁의 자식이었다. 거기서 닥쳐오는 왕권의 부정과 도전을 극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영조는 효제를 적극 강조하고 이를 철저히 실천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굳건한 왕권을 확립하고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며 출신의 한계를 이겨내고자 했다.

332p

이러한 신분과 지위에 따른 가례 시행상의 위격의 차별은 예의 상하와 존비, 귀천에 따라 의례의 크기를 조절하여 규정한 것이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표현된 예의 실제이나, 그 이면에는 내명부의 계급질서와 국왕과의 관계 설정에 따른 왕실 내에서의 위계질서 등을 안정된 상태에서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간택 후궁의 특별한 지위와 존엄을 가례를 통해 밝힘으로써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지위를 제고할 수 있었다. 후궁이 첩의 시각에서 일정한 예를 거치지 않고 사는 여자라면 굳이 가례를 행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를 거행한 것은 왕조례의 특수성에 따른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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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데즈먼드 수어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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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비해 서양 중세사는 항상 모호한 안개 속 같은 기분이다.

특히 복잡한 혼인 관계와 민족국가 형성 전의 왕위 계승 문제로 확실한 실체가 보이지 않는 기분이다.

말로만 듣던 백년전쟁이 어떤 배경 속에서 누가 주도하여 어떻게 전개되고 끝났는지에 대한 자세한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정리가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다!

자세한 전투 내용은 정확히 이해를 못했고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민족국가 형성에 백년전쟁이 큰 분수령이 됐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또 중세 전쟁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끔찍한 대학살 내지는 초토화 작전인 슈보시와 점령군에게 내는 일종의 보호비인 파티스, 몸값 지불을 통한 포로 사업 등의 실체를 알게 됐다.

문득 병자호란이 생각났다.

청나라가 침입한 후 무수한 포로들을 데려가 노예로 삼거나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게 했는데 이는 병사들의 개인 재산이라 함부로 방면해 줄 수 없었다는 의미를 이해할 것 같다.

오늘날의 포로 석방 같은 개념이 적용될 수 없고 중세의 전쟁이란 일종의 재산 획득 과정으로 왕과 귀족은 영토를 얻고 병사들은 포로와 값나가는 물품들을 얻는다.

이런 약탈물도 무조건 자기 것이 되는 게 아니라 1/3은 반드시 주군에게 바쳐야 하고 주군은 또 그 위의 상위 귀족과 왕에게 일정 부분을 바쳐야 비로소 권리가 인정이 된다.

영국의 왕들은 프랑스의 대귀족을 사로잡아 얻게 된 몸값으로 전쟁 비용을 충당했다.

중세의 왕들은 고려나 조선 시대의 유학자 같은 점잖은 군주가 아니라 직접 말을 타고 전장의 일선에서 지휘하는 무사들이었다.

장 2세는 영국군에게 잡혀 엄청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슈보시는 적군의 자원을 파괴시키기 위해 인명과 재산을 전부 불태워 버리는 일종의 대학살이다.

몽골군만 끔찍한 대학살을 저지르는 줄 알았더니 중세 전쟁의 특성 같기도 하다.

백 년의 긴 기간 동안 프랑스에 영토를 두고 원정전을 펼쳤던 영국의 국력도 놀랍고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부르고뉴 궁전의 배신이 있었으며 결국 이들이 다시 프랑스 편으로 돌아오고 대포의 개발로 영국군은 축출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르고뉴 공작은 영국 대신 프랑스를 선택하는 바람에 프랑스 왕실에 합병되어 버린다.

민족국가 형성 전이니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은 듯 하다.


<인상깊은 구절>

382p

백년전쟁에 대한 잉글랜드의 유일한 기념비는 버너스 경의 웅혼한 프루아사르 번역과 세익스피어의 사극들이다. 두 나라 사람들 간의 불편한 관계의 기원은 백년전쟁 동안 벌어진 전투, 포위전, 슈보시, 몸값 갈취, 약탈, 파티스, 프랑스에서 잉글랜드인들이 저지른 방화와 살해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에는 강력한 근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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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폭에 흐르는 중국역사 - 황제의 여인들
짜오지엔민 지음, 곽복선 옮김 / 정독(마인드탭(MindTap))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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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 위주의 책일까 봐 걱정했는데 책 수준은 괜찮다.

중국인이 쓴 중국사는 인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지루한 경우가 많은데 이 책 역시 수많은 비빈과 황제들이 등장한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아는 내용이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헷갈리고 잘 모르겠다.

조선사라고 하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당시 상황이 금방 그려지는데, 진의 후주 진숙보의 딸 선화부인과 수 양제의 사통이라는 문단이 나오면, 진숙보와 선화부인이 누구인지 찾아봐야 해서 독서 시간이 무한정 늘어지고 있다.

대신 반복해서 읽고 검색하다 보면 중국의 복잡한 역사와 수많은 인물들이 대강의 개요가 잡히는 장점이 있다.

사극이라고 하면 궁중 암투가 대부분이라 그저 사랑 얘기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오직 황제만을 바라보면서의 권력의 원천인 애정과 아들을 얻기 위한 투쟁이 여자들의 세계라고 해서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책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중국 수천 년의 역사 동안 유일한 황제로 등극한 무측천은 그런 의미에서 역사서에 길이 남을 놀라운 권력자임이 분명하다.

어린 아들과 조카의 뒤에서 정국을 좌지우지한 서태후와는 또다른 진정한 의미의 최고 권력자였던 듯 하다.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치열하게 남성본위의 세계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 투쟁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러고 보니 저자의 전작, <죽림칠현 빼어난 속물들>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번역이 비교적 매끄럽지만 간간히 어색한 번역투의 문장이 아쉽고, 제목도 야사 같은 느낌이 들어 책의 진중함을 다 못 보여 주는 것 같다.


<인상 깊은 구절>

머리말 6p

생존의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여성의 세계는 외부의 남성 세계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녀들은 지위를 갈망했다. 지위가 이러한 세계 속에서 그녀들의 존귀함과 비천함을 결정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권력을 추구하였다. 권력이 이러한 세계 속에서 그녀들의 지배력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정을 갈망하였다. 애정이 이러한 세계 속에서 그녀들의 삶의 윤택함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녀들의 개인 의지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무수한 내궁의 규칙, 규례 및 금기의 제한을 받아야 했다. ... 여인천하의 모든 여인들은 오직 한 남자, 군주만을 둘러싸고 움직여야 했다. 한 남자만을 둘러싸고 돌고 돌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던가? 우리가 흥미진진하게 느끼는 이야기들이 그 당시에는 절대로 그렇게 감동적일 리가 없었다. 삶과 죽음의 투쟁, 영혼과 육체의 충돌, 자유와 질식의 격투. 이러한 것들이 시도 때도 없이 꽃같이 아름답고 옥같이 고운 육체들을 괴롭혔다. ... 그녀들은 공동으로 소유한 유일한 남자가 안배하는 그대로 해야 했지만 동시에 그와 은근하게 힘겨루기를 해야 했다. 자기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에게서 자신에 대한 호감, 환심, 총애를 반드시 얻어내야 했으며, 하늘이 도와 그의 아들을 낳고 언젠가 봉황이 새겨진 황후의 관을 쓰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러한 길을 걸어가지 못하면 그녀들은 적막히 떠도는 밤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상인 남자는 단지 한 명에 불과하고, 황후 자리도 한 개에 불과하며 눈에 두드러지는 비빈의 자리도 몇 개에 불과한데 여인들의 수는 너무나 많아, 이러한 자리들을 얻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이기면 왕이 되고 패하면 도적이 된다'는 말 그대로 내궁 여인들의 세계와 그 바깥 남성들의 세계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녀들에게 가장 어렵고 가장 처참한 일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일부의 여인들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정치적인 조력자를 찾아내었다. 자기 처지에 안주하며 냉담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며 지내는 여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처한 국면을 좌지우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운명에 자신의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깊고 깊은 내궁에 있는 여인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성공만이 허용되며 실패는 허용되지 않았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자식이 없다면 그 여인은 치명적인 재앙을 맞거나 치욕을 당하는 것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 

위험한 국면을 만회하고, 시대의 조류를 거슬러 움직이면서, 황제와 가깝다는 편리를 이용하여, 남자들의 지배를 격파하고, 국가의 지배자로 변하여, 남자들을 다스리고, 여인들을 다스리며, 모든 세상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면서, 자기 자신을 주재했던 황후 비빈들도 있었는데, 그 지배 방식은 장기간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었다. 황후의 관에서 황제의 관으로 바꾸어 쓰려뎐 시도는 당나라 시대 몇몇 황후 비빈이 용감하게 시도한 경우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생명과 명예를 모두 잃어 버렸다. 혈로를 뚫고 황제위에 올라간 사람은 무측천 한 사람뿐이며, 이로써 천고에 길이 빛나는 여황제가 되었다. 그 대가는 일천여 년에 걸친 여론의 공격이었다. 

규율을 벗어난 자는 반드시 징벌을 받았다. 징벌은 인위적인 것도 있고, 운명적인 것도 있었다.

11p

비록 중국의 조상들이 '여자는 재능이 없어야 덕이 있다'라는 말을 전해 주었지만, 왕왕 현실은 오히려 반대의 현상을 보여 주었다. 군주들이 재능 있는 여인들에게 쉽게 끌렸기 때문이다. 군주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 국가 이익을 위해선 덕 있는 여인을 필요로 하였지만, 자신의 개인 감정을 위해서는 재능 있는 여인을 필요로 하였다. 역사상 가장 이름을 날렸던 몇몇의 황후비빈들은 모두 재녀였다. 여성의 재능은 여러 가지인데 제일 보편적인 것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문예적 재능이었으며, 비교적 이목을 끌었던 것은 노래와 악기를 잘 다루고 춤을 잘 추는 것이었다.

19p

내궁의 엄격한 등급은 궁정 생활을 관리하는 데 유리하였다. 궁궐의 여인들이 승진할 수 있는 계단을 제시하여 주고 있었으며, 최선을 다하여 군주를 모시도록 촉진하였다.

38p

천하의 여성들을 선택하는 특권을 지닌 군주들이 재혼하는 여자를 처나 첩으로 맞아들였다는 것은 당시 시대의 조류가 정절을 엄격한 사회도덕으로 삼지 않았으며, 여자의 재혼이 남녀 쌍방의 체면을 깎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처녀를 중시한 것은 송, 명의 이학이 흥성하면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여인의 몸값과 정절 여부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스스로 존귀함이 있어야  다른 이의 존귀함을 얻게 되는데, 여인의 존귀함은 한 남편만을 죽을 때까지 섬기는 데 있었다. ... 남성이 재혼녀를 맞아 들이는 것은 가문을 더럽히는 것이었다. ... 혼인관계에 있어 비교적 원시적이었던 청의 통치자들도 중원으로 들어 온 후에는 신속하게 정절 관념을 받아들였으며, 원래보다 더 엄격하게 실행하였다.

44p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행운을 얻더라도 그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열등감이 있는 법이다. 가문의 계보를 위조하여 자기의 신분을 높여 사회의 인정을 받기를 갈망하였다. ... 비천한 여인을 황후로 삼는 것은 아무튼 어쩔 수 없는 형세에서 임시변통으로 취하는 계책이었지, 정통 여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었으며, 대단히 큰 사회적 압력을 받는 일이었다.

50p

주우규는 음란에 빠져있던 아버지를 찔러 죽였다. 주온은 30년 넘게 세상을 주름잡았던, 수많은 영웅호걸들도 감히 맞설 수 없었던 인물이었는데, 최후에는 윤리도덕을 위반한 것으로 인해 갑자기 죽게 되었다.

71p

극히 적은 사례를 제외하고는 절대적으로 남자가 중심이었던 사회에서 황후와 비빈들은 절대 금기로 여기는 군주 자리를 감히 차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수렴청정은 모후가 어린 황제를 보호하는 제도의 일종이다. 그러나 모후에게 별도의 동기가 있게 되면, 수렴청정은 어린 황제의 인격에 대한 모욕과 유린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자기의 친아들이 아닌 경우에는 이러한 변태적인 일이 상당수 발생하였지만, 친아들에 대해서는 드문 일이었다.

98p

역사적 비극들은 서로 간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 대해 별다른 감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심으로 편안해 하였다. 개인적인 비극들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피해를 입는 자는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104p

서출에서 적통으로 된 황위 계승자에 대하여, 통치그룹은 그가 능히 전체 국면을 고려하여 정치 원칙으로 모자 관계를 확립하고 일반적인 핏줄의 윤리관계에 얽매이지 않기를 희망하였다. 동시에 그는 그의 지위와 권력이 생모로부터가 아니라 적모로부터 왔다는 것과 그가 유일하게 지켜야 하는 정해진 친족 질서는 황위 계승자라 불리는 것임을 이해해야 했다.

111p

진정한 생명의 의지처는 남편이 아니며 전정한 정신의 버팀목은 종교가 아니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아들의 신분에 걸려 있었다. 황후비빈이 볼 때 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아들을 대신해 거론할 것이 못되었다. 아들은 그녀들의 모든 것이었다. 만일 중년에 아들을 잃으면 더욱이 외아들을 잃는다면 비록 주변이 이전과 다름없이 같을지라도 그녀들 자신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정신상태에 빠져 들거가게 된다.

116p

군주는 그녀들에게 높은 사회적 지위를 제공하지만 이러한 지위를 장기간 보전할 수 있을지 여부는 상당 부분 그녀들에게 아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 아들은 황후비빈들의 끝없이 누릴 수 있는 재산이었으며, 비교할 데 없는 정치적 보장이었다.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에 기대어 평생의 복을 누릴 수 있었다. 후대를 낳아 기르는 것은 본래 동물들의 천성이지만, 황후비빈에게 있어서는 정치적인 충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녀들은 아들을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이러한 고귀한 어머니의 사랑도 오히려 그녀들의 자기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남편 앞에서는 날로 사라져가는 얼굴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버림과 냉대를 받는다 할지라도, 아들에게는 절대로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166p

남존여비의 전통문화 속에서 훈육을 받기 때문에 여성은 어려서부터 무의식 중에 감화되어 강렬한 의존 심리를 갖게 된다. 그 지위가 얼마나 높든, 권력이 얼마나 크든, 또한 얼마나 많이 독립적인 성격을 갖든 잠재의식적으로 남성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게다가 객관적으로 보면 당시의 사회는 남자 중심의 세계였기 때문에 남성의 도움과 밀어줌이 없다면 그녀들의 지위는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근본적으로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기초를 세울 수 없었다. 도덕으로 자기를 잘 다스리는 태후는 감정의 갈등에 빠져들어 가는 것을 힘을 다하여 피하면서 정치상의 몇몇 파트너만을 구하였다. 그러나 애정을 중시하는 태후는 아주 쉽게 정치 파트너를 남자노리개로 변하게 하거나 또는 남자노리개를 정치적 파트너로 변하게 하였다.

340p

사람이 생활하는 즐거움 중 최대의 즐거움은 인간관계가 정말로 찰떡궁합일 때이다. 무릇 군주의 총애를 얻는 여인들은 어쨌든 군주와 가장 잘 어우러진 여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융합이 이루어지려면 수많은 요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철저한 이해, 심령상의 교통, 정취상의 의기투합이 있어야 한다. 군주와 육신의 욕망을 넘어 정신적 교감이 있는 정감을 가진 황후와 비빈들은 모두 남다른 소질을 갖추고 있어 군주의 심사를 지극히 잘 살필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쌍방 모두 진정을 드러내 감히 자신의 진실한 정감을 표현하며 마음먹고 유쾌한 교류를 하게 된다. 그들의 관계는 간단한 부부관계나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 승화된 친구관계가 된다.


<오류>

51p

우문윤은 무제 우문경의 큰 아들로~

->우문경이 아니라 우문옹이다.

106p

유송의 문제 유애융의 비빈이며~

->유애융이 아니라 유의륭이다.

119p

한 소제는 즉위한 후에 장자 유오를 태자로 삼았으며, 그의 생모인 왕(王)비(妃)를 첩여로 책봉하였다.

->한 소제가 아니라 한 원제다.

320p

후당 장종(이사원. 5대 10국 시기 후당의 두 번째 황제로 진왕 이극용의 양아들)

->장종은 이극용의 친자로 이름은 이존욱이다. 이극용의 양자인 이사원은 다음 왕인 명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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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궁궐을 아는 사전 1 - 창덕궁 후원 창경궁 우리 궁궐을 아는 사전 1
역사건축기술연구소 지음 / 돌베개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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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처음 읽었을 때는 전각 이름이 너무 복잡하고 많아 읽기는 했지만 창덕궁과 창경궁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궁궐이 궁금한 이유는 건축학적 의미보다는, 전각 이름이 역사책에서 등장할 때 어디를 가르키는 말인지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건축학적 지식에 포커스를 맞추는 책은 좀 지루한데 이 책 역시 앞서 읽은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보다는 건물에 페이지를 많이 할애하고 있다.

반복해서 자주 읽으니 동궐도의 복잡한 그림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됐다.

동궐도가 없었으면 우리 궁궐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미약했을까 싶다.

궁궐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역시 후원이다.

동궐의 후원을 거닐며 자연의 변화를 완상하고 많은 시를 남긴 조선 국왕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언젠가는 한시를 배워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대중 매체가 없던 시절이니 자연의 아름다움을 오늘날 보다 훨씬 풍부하게 느끼고 살았을 듯 하다.

경복궁과 덕수궁에 대한 2권이 아직 소식이 없어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217p

정조는 대보단 제사를 가장 열성적으로 치렀다. 재위 24년 동안 한 해도 친제를 거른 일이 없었고, 어떤 해는 무려 다섯 차례 이상 대보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후 순조, 헌종, 철종도 대보단 제사는 왕실의 다른 제사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친제를 거행했다. 고종은 대보단 친제에서는 선왕들에 지지 않았다. 특히, 경복궁에 거처하는 동안 일부러 궁을 나서서 창덕궁 깊숙이 자리 잡은 대보단까지 와서 친제를 거행했다. ... 조선 국왕이 이미 멸망한 명나라 황제를 위한 제사를 치르는 것이 과연 꼭 필요한 일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현재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숙종 이후 조선의 역대 국왕에게 있어서 대보단 제사는 단순한 제사를 넘어서 조선 국왕의 어깨에 드리워졌다고 자부하는 유교적 통치 이념의 실천 덕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류>

65p

1778년 정조 2년 맏아들 문효세자의 빈을 맞기 위해 초간택을 할 때~

->1778년에는 문효세자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이 당시 초간택은 정조의 후궁을 맞기 위함이었다. 이 때 선발된 이가 홍국영의 여동생인 원빈 홍씨다.

123p

효명세자의 글 중에는 옥화당에서 누이동생 명원공주와 지낸 일을 언급한~

->명원공주가 아니라 명온공주다.

340p

순조 때는 효명세자 생모인 수빈 박씨 빈소도 이 곳에 모셨다.

->수빈 박씨는 순조의 생모이고, 효명세자는 순조의 정비 순원왕후의 아들이다.

377p

1816년(순조 16) 12월 15일, 혜경궁 홍씨가 경춘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혜경궁은 양력 1816년 1월 13일 혹은 음력 1815년 12월 15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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