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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장가보내기 - 구혼과 처녀간택부터 첫날밤까지 국왕 혼례의 모든 것
임민혁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4월
평점 :
전공자의 책이라 매우 상세하게 국왕의 혼례 절차와 그 의미를 분석하여 다소 지루하지만 예치국가라는 조선의 정체성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마도 같은 저자였던 듯 한데 다른 책에서 간택 후궁에 대한 글을 읽은 적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간택 후궁인 숙의 가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후궁이라고 하면 사가의 첩처럼 특별한 의례를 거치지 않고 좋아하는 궁녀에게 작위를 내리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의외로 승은 후궁은 많지 않고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대부분이 출신 좋은 사대부가의 간택 후궁이었다.
적장자로 왕위 계승을 한 예가 많지 않음에도 어머니가 궁녀 출신인 경우는 경종과 영조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경종은 장희빈이 폐위되긴 했으나 한 때 왕비의 자리에 있었으니,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의 컴플렉스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고려 시대에는 여러 왕비가 있었던 데 비해 조선 건국 이후 왕 역시 한 명의 정처만을 둬야 했으나 중국의 예에 비추어 1빈 2잉이라는 제 2의 처를 두었다.
이것이 사대부의 첩과는 전혀 다른, 제후의 특수성이다.
첩이 가례 절차 없이 함께 사는, 이른바 야합에 의한 매우 사적인 관계였던 데 비해, 국왕의 간택 후궁은 의례를 갖춘 후 정식으로 입궁하여 사대부의 첩과는 다른 제 2의 처, 부인의 지위를 가졌다.
그래서 입궁 당시부터 종 2품의 숙의라는 높은 직첩을 주었고 정조대부터는 후계자 생산을 위해 아예 빈으로 맞이 했다.
그 예가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다.
적장자인 후계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위상에 걸맞게 제 2의 처인 숙의를 간택 후궁으로 들인 예가 조선 전기 때 많이 보인다.
태종과 세종, 문종, 단종, 예종, 성종, 중종, 선조 등 많은 왕들이 간택 후궁을 들였다.
의외로 세조가 여색에 관심이 없다고 후궁 간택을 거절했다.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도 후궁에서 중전이 되었고,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역시 숙의로 함께 입궁 후 각기 중전이 되었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역시 반정 직후 숙의로 봉해진 후 왕비가 되었다.
아무리 간택 후궁이라 하나 첩이 정실이 되는 것은 불가하다는 유학자들의 주장으로 중종 이후부터는 이런 경우가 안 보이고 특이하게 숙종이 승은 후궁인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웠으니 신하들의 반발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히 간다.
<인상깊은 구절>
92p
일부 정치 세력이 장악한 권력이 왕권을 능가할 수 없는 왕조 국가의 속성상 왕비 간택의 주체는 국왕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국왕은 독단과 자의에 의한 선택으로 특정 가문과 통혼할 수 있었다. 그 권리는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었다.
203p
군신관계는 상하의 예의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의례의 제도화는 반드시 요구되는 조건이었다. 일정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이를 매개로 인위적인 군신관계의 상하질서를 재생산 혹은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도전이 언급한 바와 같이 신분에 따른 질서를 얻는 수단이었다.
248p
왕실에서는 의례를 통해 왕실의 근원과 역사 및 정통성을 고양하고 재확인시켜 정치적으로 좀더 안정된 지지 기반을 갖추고자 했다.
281p
영조는 사친이 숙의에 봉해진 적이 있으며 그의 자식으로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로 인해 숙의 가례에 대한 인식이 특별했을 것으로 보인다. ... 영조의 이러한 숙의 가례의 인식은 정조대로 이어졌다. 정조는 선왕 영조가 후궁의 지위를 높여 숭봉하는 예에 철저했던 현실을 몸소 경험하고 그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는 자신도 종법에 어긋나는 계승관계와 즉위 후 경각에 달린 위기 상황을 경험했기에 원만한 왕통 계승과 왕실의 안정이 자손의 번성에 달려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궁 간택을 서둘렀는데, 동왕 2년에 숙의가 아닌 빈으로 후궁의 국혼을 격상시키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287p
국왕의 간택 후궁은 출신 성분의 가례의 시행 여부, 의위의 차이 등에 비추어 승은 후궁과 구별되어야 하는 신분이었다. 간택된 후궁 숙의는 제2의 처로서 부인이라 칭하고, 승은 후궁은 첩이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택 후궁인 숙의는 왕조례의 특수성과 계급성을 인정하는 방향에서 첩이 아닌 부인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302p
이들을 추모하고 예를 펴는 일은 제삿날은 물론이려니와, 이들에 얽힌 많은 추억 속의 날과 장소 및 역사적 사건 등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효제와 탕평은 영조가 평생토록 지키고자 했던 삶의 목표였다. 한편으로는 예치사회 질서의 재건에 필요한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기도 했다. 숙종의 적장자가 아니라 경종의 아우로서 왕위를 계승하여 왕권의 정통성에 하자를 안고 있었던 영조는 더욱이 미천한 후궁의 자식이었다. 거기서 닥쳐오는 왕권의 부정과 도전을 극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영조는 효제를 적극 강조하고 이를 철저히 실천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굳건한 왕권을 확립하고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며 출신의 한계를 이겨내고자 했다.
332p
이러한 신분과 지위에 따른 가례 시행상의 위격의 차별은 예의 상하와 존비, 귀천에 따라 의례의 크기를 조절하여 규정한 것이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표현된 예의 실제이나, 그 이면에는 내명부의 계급질서와 국왕과의 관계 설정에 따른 왕실 내에서의 위계질서 등을 안정된 상태에서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간택 후궁의 특별한 지위와 존엄을 가례를 통해 밝힘으로써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지위를 제고할 수 있었다. 후궁이 첩의 시각에서 일정한 예를 거치지 않고 사는 여자라면 굳이 가례를 행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를 거행한 것은 왕조례의 특수성에 따른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