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 그의 삶과 시대
모리스 로사비 지음, 강창훈 옮김 / 천지인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은 너무 인상적인데, 평전이라 한 개인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 지루해 처음에는 몰입이 힘들었다.

마치 표트르 대제 평전을 읽을 때의 지겨움과 비슷하달까?

전투가 벌어지면 그 전투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넘어가면 좋겠는데 무수히 많은 지명과 인물들이 등장해 지루해지는 식이다.

그렇지만 곧 책에 빠져 들었고 분량도 360 페이지 정도로 많지 않아 뒤로 갈수록 흥미롭게 읽었다.

개인적인 일생에 관한 사료가 적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역사 속 이미지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서양 학자의 눈으로 본 쿠빌라이는 단순히 중국 문명에 경도된 외국인 지배자가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려는 보편주의자의 모습을 보인다.

마치 청나라의 위대한 황제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한족의 군주와는 매우 다른 느낌이고 책에서 강조한 바대로 실용주의적이고 관용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한족을 차별하고 노예화 시켰다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비중국계에게 실무를 맡겨 이들을 우대하는 포용성에 초점을 맞춘다.

오늘날의 전문가 집단, 이를테면 금융인, 상인, 장인, 의사 등이 우대받는 사회라는 게 무척 색다르게 느껴진다.

고려 이야기도 나와 흥미로웠다.

그는 대몽골 제국을 통합하는 군주가 되고 싶으면서도 중국을 포용하는 유교적 통치자의 모습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통합성이 원나라를 제국으로 유지시켰던 것 같다.

일본과 동남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무리한 공공사업 등으로 적자에 시달렸으며 당시로서는 너무 오래 산 나머지 말년에는 오판을 계속해 그의 사후 원나라는 겨우 75년을 지속했을 뿐이다.

이런 것에 비하면 청나라의 후계자들은 훨씬 노련했던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42p

남송이 존속하려면 탈세를 막아야 했다. 이전 중국 왕조들과 같은 패턴으로, 남송 역시 황실 구성원들 사이에서 만연한 권력에 대한 무절제와 욕심 때문에 신음하고 있었다.

164p

일부는 마음속으로 여전히 남송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몽골의 통치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몽골이 정복한 영토들 가운데 남송만큼 인구가 조밀한 곳도 번영한 곳도 없었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쿠빌라이의 정책 덕분에 몽골은 이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으며, 이것은 결코 평가절하해서는 안 되는 성공 스토리이다. 몽골인, 비몽골인을 막론하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의 성공적인 남송 통치는 눈부신 것이다.

171p

일본 해적들은 몽골이 고려를 정복하자,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행위가 더는 관철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습격을 중단했다. 따라서 고려인들로서는 몽골이 일본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계획에 동참할 이유가 없었다.

176p

두세충과 하문저가 이끄는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함으로써 더 이상의 군사 행동 없이 원하는 바를 얻고자 했다. 얼마 전의 승리에 고무되어 자신들을 구해준 신들을 굳게 믿게 된 일본 당국은 이 불운한 사절단을 처형함으로써, 일본과 중국 왕조 사이에 벌어져 있던 간극을 더욱 벌였다. 이는 몽골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공격 가운데 하나였다. 쿠빌라이는 이 괘씸한 행위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177p

자신의 입지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 고려, 일본과는 대조적으로, 권좌를 내놓으라고 주장할 수 있는 적대적 도전자 한 사람이 반기를 들었다. 쿠빌라이는 고려와 일본에서 몽골의 영토적, 경제적 이득을 구체화하고 팽창하려 했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그의 적이 쿠빌라이의 몽골 선조들이 획득한 영토를 분할해 빼앗고자 했다. 그의 주요 경쟁자는 몽골인이었을 뿐 아니라 대칸 우구에이의 자손으로 황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 위협은 훨씬 컸다. 쿠빌라이가 동아시아의 이웃들에게 요구한 것은 자신을 통치자로 형식상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일단 이러한 서약이 이루어지고 나면, 동아시아 나라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반면에 중앙아시아는 쿠빌라이의 영지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동족인 몽골인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이 광대한 영토를 제어하거나 적어도 평화롭게 유지하지 않는다면, 북서중국에 있는 쿠빌라이의 변경은 내륙아시아 유목민들이 해마다 중국 농민들을 괴롭혀 온 방식인 게릴라식 공격에 시달리게 될 터였다. ... 전통적인 몽골 본토는 중앙아시아의 공격으로부터 매우 취약했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원래부터 보유하고 있던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211p

쿠빌라이는 차별적인 관행들을 일소하고 중국인 왕조 치하에서 그리 잘 대접받지 못했던 전문 직업군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는 비록 농민들을 공정하게 대하고 농업 생산을 부양했지만,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상인, 의사, 과학자는 더 큰 혜택을 입었으며 조정으로부터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중국 통치에 그들이 힘을 실어주기를 진정으로 바랐다. 몽골인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은 대토지를 소유한 엘리트층이었다. 기존에 중국을 지배했던 학자 관료의 태반이 이 계층에서 배출되었다. 과거 시험을 치룰 수 없었던 중국인 엘리트층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일부는 몽골인들에게 복종하며 복무했고, 어떤 이들은 공공 생활을 접고 은둔하거나 예술에 탐닉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인느 정부 조직들을 존속시켜 학자 관료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애썼다.

222p

특히 태묘는 유학자 엘리트를 포섭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가장 잘 반영한다.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조상 숭배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태묘의 건설은 쿠빌라이가 제례를 조상 숭배와 연결지으려 했음을 증명해준다. 비록 그 자신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중국인들이 조상 숭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분명 보수적인 몽골인들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반대 세력이 불만을 보여도 쿠빌라이는 무시해버렸다. ... 쿠빌라이는 조상들이 인간 세상의 일들을 중재해줄 수 있으며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중국인들의 믿음을 지켜주었지만, 의례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대신 중국인 참모들과 왕자들을 참석시켰다. ... 쿠빌라이는 다음과 같은 점을 거의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 고전을 잘 배우고 중국 규범과 예를 잘 익히며, 중국인 교사로부터 유교와 기타 중국의 종교들을 잘 배워 흡수하기만 하면, 몽골인은 중국인의 신망을 얻을 수 있어며 자신은 그들의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중국 신민들로부터 신임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금을 이러한 방식으로 교육시켰다. 그가 유학자들의 지지를 얻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알릴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쿠빌라이는 중국 작품의 몽골어 번역을 시도했다. 그의 실용주의적 성향은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번역하고자 한 자료들은 몽골 엘리트들에게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인 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유교 문헌의 번역도 지원해야 했다. ... 쿠빌라이는 신유학을 열렬히 지지하는 박식한 학자들을 기용하여 후원하기도 했다. 점차 영향력을 더해가는 이 집단의 환심을 계속 사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몽골인들에게 종사하기를 거부한 반면, 일부는 북에서 온 유목민들의 '문명화'를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 쿠빌라이와 몽골 조정을 더욱 기쁘게 한 것은, 허형의 가르침이 실용적인 업무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신유학자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글이나 언설 속에서 탈속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았다. 그가 몽골 조정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일이나 '고차원적인 무언가'에 빠져들이 않았다"는 데 있었다.

246p

쿠빌라이가 이처럼 종교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인 것은, 아마도 이들 기독교 현자들을 기용하여 자신의 신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서였다기보다는 중국 영토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인재들을 모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폴로 형제에게 그와 같이 요청한 것은 전문가를 얻기 위한 책략이었다. 기독교인을 채용하고자 했을 뿐, 자신의 신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마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폴로 형제와 기독교 당국에게 자신의 신민들이 기독교로 인도될 수 있도록 학식 있는 유럽인들이 도와주기를 원한다는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283p

그는 종종 자신을 당 태종과 같은 중국 역사 속의 위대한 황제들과 비교했다. 양자를 결합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미지를 개선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아주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지역 사람들에게는 그는 만국 통용 문자를 선전하고 중국 내 외국 장인들을 후원하는 세계주의자였다. 그가 원대의 문화에 불어넣은 세계주의는, 중국보다 더 광대한 영토의 통치자로서의 그의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301p

문화적 또는 국가적 측면에서 몽골인들에게 반대했던 그들은 나름대로 실리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은둔하여 회화, 희곡 등 사적인 활동에 몰두하는 이들도 있었다. 몽골에 가담하는 것을 피하고 개인적인 지적 관심사를 쫓아 학문에 매진한 이들도 있었다. ... 비록 소수의 남송 지식인들이 몽골에 종사하긴 했지만, 쿠빌라이는 남부의 일부 영향력 있고 저명한 학자들의 협력은 이끌어내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남중국 지식인들이 납세의 의무를 다 하는 한 그들에게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지만, 북중국에서 그랬던 것만큼 그들을 장악하지도 그들의 충성을 얻어내지도 못했다.

327p

쿠빌라이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아흐마드, 노세영, 상가 등 세 명의 대신에 의존했다. 이들은 강제로 세수를 늘림으로써 중국인들의 원성을 샀다. 그럴 때마다 쿠빌라이는 학자 관료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결국에는 환멸을 느껴 이들을 해고하거나 처형했다. 중국인들의 적대감은 일시적이고 득 될 것이 없는 반이슬람교도 정책을 야기하기도 했다. 세 명의 대신과 불교도 등 새로운 지도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쿠빌라이의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359p

칭기스 칸의 어머니 호엘룬부터 차비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해온 몽골 여성들과 달리, 쿠빌라이의 딸들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들은 여성에게 가혹한 속박을 가하고 여성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중국의 문화적 기준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아니면 쿠빌라이의 딸들은 단순히 정치에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366p

그는 당시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인구가 많은 제국을 단순히 착취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통치하고자 했다. 유목적인 유산을 이어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비전을 지녔던 그는, 타문화에 대한 배려가 거의 드물었던 시기에 다종다양한 신민들의 행복을 지키고 그들의 이익을 촉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수많은 위대한 통치자들의 제국처럼, 그의 제국도 그의 사후 오래 가지 못했다. 외국 원정 실패, 과도한 재정 적자, 그리고 개인적인 퇴보가 쿠빌라이의 위대한 비전을 뒤흔들었다. 할아버지 칭기스 칸을 비롯한 그의 몽골 선조들은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 전체를 통합하여 통치하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후계자들도 이러한 비전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세계 제국을 향한 쿠빌라이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의 영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오류>

50p

구육의 미망인 오굴 카이미쉬는 차가타이의 아들 부리와 손잡고 

->부리는 차가타이의 아들인 바이다르의 아들, 즉 차가타이의 손자다.

178p

쿠빌라이의 사촌 카이두는

->카이두는 우구데이의 손자로, 쿠빌라이의 당조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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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영웅들 - 우리가 몰랐던 세계사 속 작은 거인
문수인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거창한 제목에 비해서는 주마간산 식 나열이라 아쉽지만, 모르는 동남아 위인들에 대해 알게 된 좋은 시간이었다.

270페이지 정도의 얇은 분량이고 저자가 전문학자가 아니라 마치 신문 연재 기사를 읽듯 가벼운 필체로 서술하고 있어 쉽게 읽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역사 속 위인들에 국한하지 않고 현대사의 인물들도 소개하고 있어 흥미롭다.

말레이시아의 외과의 출신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메드는 신문에서도 본 기억이 난다.

올해 93세인데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가 됐다는 기사를 보고 놀랬다.

이런 노익장도 가능하구나 싶다.

식민주의 경험이 있다 보니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를 세운 이들이 주로 등장한다.

마지막에 실린 필리핀의 스페인 지배 시절 독립 운동가 호세 리잘이 기억에 남는다.

스페인에 유학한 의사였고 소설가였으며 간디처럼 비폭력 투쟁을 주장했으나 서른 다섯의 나이로 총살되고 만다.

같은 시기에 무장 독립을 주장했던 보니파시오는, 어처구니 없게도 식민 당국인 스페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료인 아기날도 세력에 의해 처형당한다.

동남아는 그저 휴양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오랜 역사를 가진 유구한 전통의 나라이고,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는 현대사도 무척 흥미롭다.

뒤에 소개된 참조 도서를 읽어봐야겠다.


<인상깊은 구절>

266p

리콴유는 국가 통치에 있어 엄격성은 유별났다. "공산주의자든, 종교적 극단주의자든, 우월주의자든 상관없다. 재판 없이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가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는 파괴된다." ...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 언론에 대해서도 강경했다. "언론의 자유는 싱가포르가 최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실용주의자에 속할 것이다. 내가 관심을 두고 살펴보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질적인 아이디어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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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근현대사 - 제국 지배에서 민족국가로
오승은 지음 / 책과함께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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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이다.

흥미로운 주제를 보여주는 제목에 끌려서 선택했다.

복잡하게만 느껴지던 동유럽사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적은 분량 탓인지 소략하는 느낌이지만, 동유럽 지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세울 수 있었다.

동유럽은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끼어 수많은 민족들이 뒤얽혀 살아 왔으나 이 거대한 제국들이 사라진 후 민족국가라는 새로운 정치체제 수립에 진통을 겪고 거기에 소련식 사회주의까지 더해져 몹시도 복잡한 역사를 이뤄왔다.

마지막 장에서 모든 문제의 근본은 신자유주의, 동등한 관계를 맺지 않는 서유럽 중심주의로 기술하고 있지만 너무나 피상적인 느낌이다.

지정학적 특성을 언급할 수는 있겠으나 국제사회에서 타국의 배려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같다.

민족주의는 비단 극우 파시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좌파 사회주의에서도 매우 유용한 전략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117p

산적들은 18~19세기 발칸 민요에서 의적으로 묘사되기도 했으나, 실상은 무슬림 관리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기독교 농민들을 착취하는 도둑이었다.

219p

어떤 정권이 됐든 폭력적, 억압적 수단에만 의존해서 권력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정통성이란 통치권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근본적 믿음으로, 이것이 확립돼야 국민이 법을 지킬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집권세력이 내린 명령과 지시사항이 하부로 내려가 효율적으로 집행될 수 있게 된다. 특히 20세기 대중정치의 시대에서는 정통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건이었다.

241p

헝가리 혁명 진압은 개혁파의 요구가 좌절됐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흐루쇼프 개혁정책의 한계와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개혁을 표방했지만 제국주의 정책 기조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277p

동유럽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업, 가난, 경제적 계층화'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신자유주의'라는 민주주의 파괴자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둔갑하면서 생긴 결과였다.

286p

포퓰리즘 정당의 주요 공략 대상은 체재이행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실존적 가난과 심리적 공포다. 우파는 동유럽 사회가 두 개의 적대적 집단, 즉 가난하고 힘없는 다수의 민중과 기득권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고 보고, 자신들은 부패한 엘리트들에 맞서 민중의 보편의지를 대변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대중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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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탄생 - 퇴계 이황부터 추사 김정희까지
김권섭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제목 때문에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저자가 전문 학자는 아닌 탓에 선비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아니고, 모범이 될 만한 여러 이름있는 선비 열전이다.

기대보다는 내용이 알차서 열심히 읽었다.

한시 소개를 많이 했는데 제대로 음미하지 못해 아쉽다.

한시는 한글로 번역을 해 놔도 기본적인 소양 부족으로 즐기기가 어렵다.

역사책에 나오는 이황이나 이이, 정철, 정약용, 김정희 등 유명 선비들도 그저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인 것은 아니고 감정을 가진 섬세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감수성도 예민한 모양이다.

사적인 편지글에 담긴 희노애락이 마음에 와닿는다.

부모와 아내, 형제, 자식들,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긴 애틋한 마음이 인상깊다.


<인상깊은 구절>

101p

"성수침은 노년에 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아들 성혼에게 "죽고 사는 것은 常理이다. 한 번 돌아감은 실상 쉬운 일이다."라며 태연히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더니 그대로 운명했다. 벼슬에 초연했던 사람답게 죽음마저도 태연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137p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주변에서 피란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내가 하늘처럼 섬기던 어른을 잃은 지 이미 8년이나 되었는데, 이만해도 목숨이 질기지 않느냐. 하물며 이런 큰 난리를 만나 산소 곁에서 안 죽고 어디 가서 살아 보고자 할 것이냐. 나는 이미 뜻을 결정했다." 라고 결연한 뜻을 보였다. 임금이 의주로 피란 갈 때 그녀는 율곡의 신주를 모시고 파주로 갔다.

307p

"평생 동안 몸을 붙일 곳도 없어 사방으로 떠돌며 빌어먹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몸이야 곤궁했어도 불후의 명시를 남겼으니 한때의 부귀로 어떻게 그와 같은 명예를 바꿀 수 있으랴!"

324p

"고산은 <알겠다고 세상을 떠나가 버린 아들은/나의 8년 동안의 손님이었음을>이라고 적었다."


<오류>

123p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둘째 사위가 율곡의 5대조이다."

->태조의 둘째 사위는 심종이다. 율곡의 5대조는 이명신인데, 심종의 사위다. 즉, 태조의 사위가 아니라 태조의 둘째 딸의 사위이다.

181p

"1551년에 왕자(훗날의 선조)를 낳은 명종이 은사를 내려"

->훗날의 선조가 아니라 순회세자이다.

288p

"석주는 조카 심기원을 불러 자기가 써 두었던 글을 모두 전해 주었다."

->심기원은 석주 권필의 조카가 아니라 제자다.

436p

"왕통을 따지면 진종은 철종의 5대조가 되고 (철종-헌종-순조-정조-진종), 가통으로 치면 4대조(철종-전계대원군-은언군-진종)가 된다."

->왕통을 따지면 진종은 헌종-익종-순조-정조-진종으로 5대조가 되고, 가통으로 치면 전계대원군-은언군-진종으로 3대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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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라는 유산 - 영조와 조선의 성인군주론
김자현 지음, 김백철.김기연 옮김 / 너머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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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독자를 흥분시킨다.

번역투의 문장이 가독성을 다소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주 재밌고 흥미롭게 읽었다.

존 던컨 교수가 쓴 "조선 왕조의 기원"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흥분이다.

저자가 한국 사람이면서 미국에 가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특별한 이력의 학자라 더 흥미로웠다.

문장이 만연체고 번역투라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 부분도 있었는데 역자 후기를 보니 문학을 전공한 저자의 스타일인 모양이다.

학술서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보여 주는 책 같다.

전공자가 너무나 꼼꼼하고 세심하게 역주를 달아 줘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성인군주라고 하면 그저 수사적인 문구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영조가 이러한 이상적 군주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새삼 알게 됐다.

그 뒤를 이은 정조 역시 할아버지의 노력을 이어받아 관료와 백성의 어버이이자 스승으로서 자리잡은 듯 하다.

전에는 유교적 명분론이 말 뿐인 허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오늘날의 자유 민주주의와 같은 체제 이데올로기이자 국가를 수호하는 가치가 아니었나 싶다.

숙종과 영조 정조가 망한 명나라를 왜 붙들고 제사를 지냈는지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이해가 됐다.

우리 조상들이 그저 얼빠진 명분론자였던 게 아니었고, 신유학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지탱하는 실제적인 힘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영조는 명 황실의 후계자 노릇까지 자처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해서 관료들과 충돌했다.

제후국이라는 독특한 지위가 어쩔 수 없이 종주국의 권위를 끌어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형 시해 의혹 속에서 즉위한 영조는, 미천한 신분의 어머니라는 컴플렉스를 안고 평생을 정통성 확보에 주력했다.

사극와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영조의 집요하고 철저한 강박적인 성향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그러졌다.

아들이 그러한 정통성 논쟁을 해결해 주길 바랬지만 역량 부족이었을 뿐 아니라, 불행히도 정신병을 얻고 만다.

다행히 손자는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갔으니, 결과적으로 영조와 영빈 이씨, 이 비정한 부모의 결단은 성공한 듯 하다.

균역법 시행을 위한 관료들과의 줄다리기도 흥미롭게 읽었다.

하나의 법을 제정하고 시행하기 위해 얼마나 격렬한 논쟁이 있었는지, 또 통치자의 강력한 의지와 긴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가장 재밌는 부분은 역시 사도세자 편이다.

오래 전에 봤던 MBC 사극 "대왕의 길"에서 박근형이 의심많고 노회한 영조 역을 잘 소화했었다.

작가가 정말 성실하게 사료를 읽었던 모양이다.

드마라 속의 에피소드들이 책에 많이 나온다.

또 5부의 사도세자 편에서는 최근에 본 영화 "사도"의 장면들도 많이 등장한다.

이미지로 그려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오류>

176p

'노론 4대신' - 곧 김창집, 이이명, 이관명, 조태채

->노론 4대신은 이관명이 아니라 이건명이다. 이관명은 이건명의 형이다.

227p

"박필주는 효종의 외손자 중 하나로 친척이었고 명문 출신에 왕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효종의 서녀 숙녕옹주가 금평위 박필성에게 하가했고 소생 없이 일찍 사망했다. 박필주는 박필성과 같은 집안 사람이고 효종과 가족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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