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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라는 유산 - 영조와 조선의 성인군주론
김자현 지음, 김백철.김기연 옮김 / 너머북스 / 2017년 11월
평점 :
좋은 책은 독자를 흥분시킨다.
번역투의 문장이 가독성을 다소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주 재밌고 흥미롭게 읽었다.
존 던컨 교수가 쓴 "조선 왕조의 기원"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흥분이다.
저자가 한국 사람이면서 미국에 가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특별한 이력의 학자라 더 흥미로웠다.
문장이 만연체고 번역투라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 부분도 있었는데 역자 후기를 보니 문학을 전공한 저자의 스타일인 모양이다.
학술서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보여 주는 책 같다.
전공자가 너무나 꼼꼼하고 세심하게 역주를 달아 줘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성인군주라고 하면 그저 수사적인 문구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영조가 이러한 이상적 군주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새삼 알게 됐다.
그 뒤를 이은 정조 역시 할아버지의 노력을 이어받아 관료와 백성의 어버이이자 스승으로서 자리잡은 듯 하다.
전에는 유교적 명분론이 말 뿐인 허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오늘날의 자유 민주주의와 같은 체제 이데올로기이자 국가를 수호하는 가치가 아니었나 싶다.
숙종과 영조 정조가 망한 명나라를 왜 붙들고 제사를 지냈는지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이해가 됐다.
우리 조상들이 그저 얼빠진 명분론자였던 게 아니었고, 신유학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지탱하는 실제적인 힘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영조는 명 황실의 후계자 노릇까지 자처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해서 관료들과 충돌했다.
제후국이라는 독특한 지위가 어쩔 수 없이 종주국의 권위를 끌어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형 시해 의혹 속에서 즉위한 영조는, 미천한 신분의 어머니라는 컴플렉스를 안고 평생을 정통성 확보에 주력했다.
사극와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영조의 집요하고 철저한 강박적인 성향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그러졌다.
아들이 그러한 정통성 논쟁을 해결해 주길 바랬지만 역량 부족이었을 뿐 아니라, 불행히도 정신병을 얻고 만다.
다행히 손자는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갔으니, 결과적으로 영조와 영빈 이씨, 이 비정한 부모의 결단은 성공한 듯 하다.
균역법 시행을 위한 관료들과의 줄다리기도 흥미롭게 읽었다.
하나의 법을 제정하고 시행하기 위해 얼마나 격렬한 논쟁이 있었는지, 또 통치자의 강력한 의지와 긴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가장 재밌는 부분은 역시 사도세자 편이다.
오래 전에 봤던 MBC 사극 "대왕의 길"에서 박근형이 의심많고 노회한 영조 역을 잘 소화했었다.
작가가 정말 성실하게 사료를 읽었던 모양이다.
드마라 속의 에피소드들이 책에 많이 나온다.
또 5부의 사도세자 편에서는 최근에 본 영화 "사도"의 장면들도 많이 등장한다.
이미지로 그려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오류>
176p
'노론 4대신' - 곧 김창집, 이이명, 이관명, 조태채
->노론 4대신은 이관명이 아니라 이건명이다. 이관명은 이건명의 형이다.
227p
"박필주는 효종의 외손자 중 하나로 친척이었고 명문 출신에 왕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효종의 서녀 숙녕옹주가 금평위 박필성에게 하가했고 소생 없이 일찍 사망했다. 박필주는 박필성과 같은 집안 사람이고 효종과 가족관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