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관청기행 - 조선은 어떻게 왕조 500년을 운영하고 통치했을까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흥미로운 제목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는 좋은데, 역시 비전공자의 한계가 느껴진다.

중앙 관청 부분은 너무나 많이 알려진 내용들이라 지루했고 뒷부분 지방 관청이 오히려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근검절약을 숭상했고, 그럼에도 지방을 중앙에서 통제했기 때문에 그 운용비용을 전적으로 지방민이 알아서 부담했던 것 같다.

맨 마지막에 아전들의 농간은 민란을 야기할 정도로 심각했지만 국가에서 돈을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사적 관계에서 비공식적으로 착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옹정제가 관리들의 수탈을 막기 위해 양렴은제를 시행한 까닭을 알겠다.

조선 관청에 대해서라면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가 훨씬 우수하다.

이런 좋은 책들을 묻혀 버리고 가벼운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널리 읽히고 참 안타깝다.


<오류>

41p

원래 나인이 임금과 합궁하면 후궁의 작위를 받지만, 상궁이 임금의 승은을 입은 경우에는 작위를 받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나인이 시간이 지나 상궁이 되는 것인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48p

저경궁, 대빈궁, 연우궁(延禑宮), 선희궁, 경우궁을 옮겨와 육궁이라 불렀습니다.

-> 혼용되는 연우궁의 우는 책에 나온 禑가 아니라 祐이고, 실록의 맨 처음 용례로는 祜이다. 그러므로 연호궁이 맞다.

204p

과전은 관리로 일할 때는 받았다가 퇴직하면 나라에 되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이 직전법은 거듭되는 흉년과 임진왜란을 전후로 나라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과전은 1대에 한하여 수조권을 인정하는 제도로, 퇴직 후가 아니라 본인이 사망하면 반납했다.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주는 제도는 그 다음 제도인 직전법이다. 이것도 토지가 부족해지자 성종 때 국가가 직접 세금을 거둬 나눠주는 관수관급제로 바뀐다. 직전법은 임진왜란 전후가 아니라 명종 연간에 사라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에 도서관에서 <완당평전> 세 권을 읽고 김정희에 대해 알게 된 기억이 있다.

그 후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어 저자가 새로 책을 낸 모양이다.

580 페이지 정도의 두꺼운 책인데도 마치 소설을 읽듯 술술 잘 넘어간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저자의 필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다만 한문이나 서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글씨에 대한 미학적 설명은 많이 공감을 못했다.

너무 사변적이랄까?

직관적으로 아, 좋구나 이런 울림이 없었다.

저자가 설명한 대로 추사의 글씨는 怪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말로 하면 추상성이라고 할까?

인간 김정희에 대한 일대기를 작품과 함께 보여주는 구성이, 저자의 편안한 글솜씨 덕분에 흥미롭게 잘 읽힌다.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보다 큰 평가를 받았을 것이고, 후손들이 이렇게 잘사는 덕분에 그의 작품세계가 깊이 조망되고 있는 듯 하다.

연경에는 단 한 번 갔을 뿐인데 말년까지 편지로 교류하고 청나라에서 발간된 여러 서적과 글씨들을 구해 보는 정성이 놀랍다.

역관들이 그런 일을 담당했을 터이니, 미시사적 측면에서 조선 후기 청과의 문화 교류는 좀더 연구해 볼 주제 같다.

마네가 젊은 시절 스페인에 가서 벨라스케스 그림을 보고, 루브르 미술관에서 대가들의 작품들을 모사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김정희도 북비남첩론에 공감하여 끊임없이 옛 글씨들을 감상하고 임모하면서 연습했다.

역시 많이 보고 접해야 경지에 오르는 것 같다.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는 과정이 좀 모호한 것 같다.

검색을 해보니 효명세자 집권 시절 세력을 잡았던 권돈인 등을 공격하기 위해 안동 김씨인 김홍근 등이 그와 친한 김정희를 유배보낸 것으로 나오던데 책에는 김유근이 실어증으로 그를 도울 수 없었다고 나온다.

김유근은 김정희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나오는데, 그 역시 동조하는 입장이었나 궁금하다.

저자의 평대로 김정희는 금석학과 글씨 등에 두루두루 능한 예술인이었을 듯 하다.

한글 편지를 보면 자상하기 그지없고 초상화의 눈매도 선해 보인다.


<인상깊은 구절>

228p

우봉 조희룡은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대단한 구도의 난초 그림을 잘 그렸다.

물론 추사가 조희룡을 실제로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소지는 있다. 무엇보다 조희룡에게는 중인 출신이라는 신분적 약점이 있었다. 또 조희룡이 비록 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리고는 있었지만 추사가 보기에는 정작 그 품격을 지탱해줄 학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학문적, 정신적 깊이가 모자라면서 형식만 그럴듯한 것이 추사는 늘 못마땅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한가지, 대개 자기를 흉내 내는 사람은 낮추어보게 되는 인간 본연의 생리적 반응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을 추종하더라도 뭔가 다른 면을 갖고 따를 때 그를 더 아끼고 대견해하는 법이다. ... 추사는 영정조시대에 이룩한 진경산수와 문인화풍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그림의 본령에 다가서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추사가 사대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는 국적을 떠나 예술 자체의 높은 경지를 지향했던 국제주의자였다.

267p

그는 유배지에서도 자나 깨나 집안의 대소사와 제사를 걱정하고 편지마다 그런 내용을 담았다. 거기에는 점점 몰락해가는 귀족이 갖는 비애의 감정이 절절히 배어 있다.

272p

일반적으로 화가들이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과는 반대로, 추사는 격조를 먼저 의식하고 그림을 그린 면이 강하다. 머리와 눈이 너무 앞서서 손의 일이 더 중요한 화가는 되기 힘들었다. 추사는 오히려 그런 기교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293p

"화의가 이러해야 形似의 길을 벗어난 것이 된다. 이러한 의취는 옛날 유명한 화가들 중에도 터득한 자가 극히 적었다."

304p

추사는 영이와 번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엄청란 역량을 가진 청나라가 한낱 영이, 불랑, 미리견의 공격에 무너지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이 안심이니 우리도 안심이라는 식이었다. 추사는 여전히 청나라가 문명의 이상적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추사 인식의 한계였다. 추사는 설혹 번박들이 쳐들어온다 해도 그것은 '먼 장래의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먼 장래의 일'이 너무도 빨리 현실로 다가왔다.

416p

추사의 글씨를 가우디의 건축에 비유하자면, 추사체의 본질은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의 글씨 구성의 힘에 있는 것이다.

431p

추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불이선란>의 화제에 나타난 추사의 희열과 자부심 같은 것이 오만으로 보였던 것이다. 예술가의 개성이란 인격자의 평상심과는 정녕 통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러니 참으로 어려운 것이 빼어난 자, 개성이 강한 자, 능력 있는 자의 처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457p

대부분의 역사지리학자들이 그렇듯이 추사에게도 강한 민족정신이 있었다. 추사는 흔히 청나라 학자들과의 깊은 교유 때문에 국제적 감각의 지식인, 심지어는 모화주의적 분위기에 젖어 있던 지식인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나 또한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는 민족적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고 우리 민족의 대륙적 기상과 북방적 기질을 사뭇 동경해온 분이었다.


<오류>

22p

정순왕후의 사촌오빠로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 등은

->김관주는 정순왕후의 6촌오빠다.

425p

사도세자의 형이 진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왕통으로 따지면 진종은 철종의 5대조가 되고 가통으로 따지면 4대조가 된다.

->가통으로 따지면 진종은 철종의 증조부이므로 4대조가 아니라 3대조이다.

426p

권돈인은 진종은 우리 임금(철종)의 고조에 해당하니

->고조가 아니라 증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무인의 역사, 1600~1894년
유진 Y. 박 지음, 유현재 옮김 / 푸른역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외국 학자가 쓴 한국사는 항상 신선하다.

제 3자적인 관점이 익숙한 현상과 통설들을 다르게 보는 역할을 해서 무척 흥미롭고 무엇보다 민족주의적인 당위론에 함몰되지 않아 객관적인 느낌이 들어 읽기가 편하다.

오래 전에 읽었던 던컨 교수의 <조선 왕조의 기원>과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조선의 건국 이후 혁성혁명으로 이질적인 지배층이 들어선 게 아니라 고려 시대로부터 이어져온 가문이 여전히 집권층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 책에서는 조선 건국 이전에 과거를 봐서 중앙으로 진출한 향리들은 양반, 즉 귀족이 됐으나 1392년 건국 이후는 그 통로가 막혔음을 지적한다.

이 부분이 정말 새로웠다.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고려 시대의 향리가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했다는데, 이들이 조선의 아전 계층과 같다는 얘기인가 항상 모호했었다.

고려 전에는 가능했던 중앙으로의 진출 혹은 신분 상승의 기회가 조선 건국과 함께 닫힌 셈이다.

더불어 강력한 중앙 집권제로 인해 지방에서 자율성을 유지했던 향리층은 중인 피지배층으로 떨어지고 만다.

또 양반을 분명하게 귀족이라 명시한 점도 흥미롭다.

양반은 서양의 귀족과 어떻게 다른가, 의문이었던 점이다.

저자는 태생에 의해 신분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양반을 귀족이라고 정의했다.

보통 양반이라고 하면 고정된 신분층이 아니고 관료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회 계층으로 유동성이 있다고 여겨졌는데 이 책에서 보면 양반은 조선 말기까지 그 태생에 의해 다른 계층과 구별되는 확실한 상위 신분, 즉 귀족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비록 중앙 권력은 극소수의 서울 관료 가문이 오랫동안 독점하여 마치 지방 양반들이나 무인 관료들과는 다른 신분인 것처럼 보일 정도이나, 이들은 서로 통혼했고 양자를 들일 정도로 같은 신분이라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양반의 특권인 면세를 위해 경제적 관점에서 함께 싸웠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면세층이 늘어나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고 국고가 줄어 민란이 발생하게 된다.

또 항상 의문이었던 점이, 조선은 양란을 거치면서도 체제가 전복되지 않고 어떻게 오랜 기간 존속했을까였다.

중국이라는 강력한 제국의 번국으로서 안정을 취한 점도 있겠으나 저자는 국가 자체 내에서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를 무과 급제를 통해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줬다고 본다.

과거가 실제로 관료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었다기 보다는,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종의 위신재 내지는 문화자본의 역할을 한 것이다.

관직 매매인 공명첩도 마찬가지 작용을 했다.

물론 후기로 갈수록 엄청난 인원의 무과 급제자들이 생겨 단순히 급제했다고 양반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고 무엇보다 피지배계층의 지위 상승 욕구를 충족시켜 궁극적으로는 불만 세력의 완충재가 된다.

이미 가치가 하락해 버린 무과 급제를 갈망하는 하층민의 욕구를 부르디외의 이론을 빌려와 지체현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여전히 중앙 귀족들은 문과 급제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무과 역시 위상이 살아 있었다.

조선이 얼마나 내부적으로 안정된 사회였는지 새삼 깨달았고 일본에 의한 강제 개방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통제력을 가진 국가로써 기능했을 듯 하다.

조선 사회 계층과 이동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책이고 무엇보다 번역이 정말 훌륭하다.

뒤에 꼼꼼하게 단 역자주는 말할 것도 없고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이 거의 없이 아주 매끄럽다.

기본적으로 역자의 문장력이 좋은 것 같다.

230 페이지 정도의 작은 분량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무엇보다 조선 사회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훌륭한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7p

조선 후기에 소수의 벌열 가문이 중앙 문관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그 밖의 양반들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 이때 중앙관직에서 소외된 몇몇 가문들은 무과를 통해서 정치적으로 문반보다 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던 무반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관이 되는 대가로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과 문관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삼남지방에 거주하는 양반들도 중앙정치의 장에서 그들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무관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처럼 문반과 차이가 나는 무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남지방의 귀족가계와 중앙의 문무관 후계가문들은 여전히 서로를 귀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한국의 역사학자와 외국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정치적 참여를 하고자 하는 사회적 세력을 국가가 수용하지 못해 통일신라가 멸망했다거나 조선과 같이 체제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계급은 현대 미국에서 사용하고 있듯이 직업과 그에 따른 수입이라는 기준을 사용해서 다른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으나 특권이라는 요소는 계급을 정의하는 데 고려하지 않았다. 

16p

필자는 조선 초기의 최상위층이 고려의 귀족층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조선의 귀족들은 문과를 통해 상당한 명예와 주요 지위를 얻을 수 있었을지라도 지방에서 실질적으로 세습적 지위를 누렸던 향리 같은 기득권층을 권력구조에서 제외함으로써 고려의 귀족보다 더욱 엄격하게 권력을 독점하였다. 조선의 귀족 신분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었고, 1392년에 귀족의 지위를 얻지 못한 그룹은 이후에도 귀족이라는 지위는 얻을 수 없었다. 조선이 개국하기 이전에 최상위층에 속하게 된 귀족층들은 그들이 포함된 최상위층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과거급제, 관품 혹은 관직 등이 없어도 되는 세습적 지위를 영구화했다. ... 한국에서 대다수 역사학자들이 사회적으로 新鄕, 구체적으로는 요호부민의 등장을 봉건질서의 해체에 중요한 부분으로 보고 있지만, 서구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양반층이 중심이 된 구체제의 안정이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조선의 정규군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여러 봉기들을 진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스템 아래에서 그들은 서구나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에나 공화정을 요구하기보다 근면한 성리학적 군주가 당색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왕정을 요구했다.

31p

무관 지도자들은 기존의 관료구조를 버리거나 문관들을 숙청하지 않는 대신 무관 독재자들 자신이 문관의 지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후 13세기를 거치면서 무관들은 문관들과 협력하며 혼인관계를 맺었고 문무관을 구별하는 오래된 사회적 차별은 모호해져, 귀족가문에서 문무관리가 모두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 1506년과 1623년 두 차례의 반정으로 국왕이 폐위되었던 사실은 군의 실질적 통수권이 임금으로부터 유력한 대신들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당시 개혁적인 신진사대부 관료들은 대부분 문무과가 과하게 시행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왕과 공신들은 이 시험들이 단지 일종의 자격을 조금씩 나누어줌으로써 사람들을 달래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이를 장려했으며 실행에 옮겼다. ... 16세기 조선의 주된 근심은 백성들의 빈곤이었는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노비로 전락하여 군대에 병사들이 제대로 충원되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15세기 조선의 건국과 중앙집권화 정책은 지방 향리와 같은 사회집단을 희생시켜서 국가와 양반에게 이익을 주려는 것이었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양반들이 국가와 양인 납세자들의 희생을 통한 이득을 보기 시작했다. ... 무과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무술 실력을 갖추어야 했지만, 급제자들이 일반 병사들과 확실히 구별되었던 특징은 지휘관과 관리로서의 가능성이었다. 무과 장원급제자들은 무관직보다는 문반직 6품에 해당하는 품계를 받았는데, 이는 이들 급제자들이 병법과 경서 그리고 법전을 기반으로 한 광범위한 지식을 가진 군대 지휘권자가 될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이전 세기에 이루어졌던 국가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과급제자들은 해박한 지식을 가진 장군이나 관리자가 아닌 군사훈련만 익힌 병사로서 인식되었다. ... 중앙귀족들은 서북지역을 양반이 없는 곳으로 간주했고 문화적으로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여 지역차별을 하였다. 17세기부터는 북쪽지방 출신들이 문무과시험에서 경쟁력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북쪽지방이 문화적으로 세련되어지고 여러 왕들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 인재들을 활용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 기본적으로 양반에게 중요한 것은 이후 어떤 관직에 진출하느냐가 아니라 양반이라는 사회적 지위 그 자체였다.

72p

균역법 시행이 논의될 때 양반에게도 세금을 징수할지 여부가 논란의 중심이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양반들은 세금을 면제받는 것이 자신들의 신분상 특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조는 최초로 양반에게 세금을 걷는 것을 찬성한 왕이었으나... 조일전쟁 직전의 무과가 1592년 조일전쟁 당시 왜군에게 대적했던 조선의 초기 군사력을 향상시키는 데 특별한 효과가 없었던 것처럼, 조일전쟁 이후의 무과도 만주인들과 싸우는 전장에서의 효울성을 높이는 데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 1681년 청나라가 난을 진압하고 마침내 명나라에 충성하던 대만을 통치하게 되자, 조선은 18세기까지 청에 대한 적개심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군사적으로 맞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 만약 일본군이 진압하지 않았다면 동학농민군은 정부를 압박하여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빈번히 시행되었던 대규모의 무과들이 군대를 유지해서 작은 규모의 봉기들을 무산시키는 데는 효과가 있었을지라도, 사회적 불만이 위험수위에 다다랐던 19세기 말로 갈수록 그 효용성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미 살펴본 것처럼 외세의 군사적 위협이 줄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선 후기 대규모 무과가 자주 치러진 이유로 볼 수 없다. 조선 후기까지 대규모 무과를 존속시켰던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은 내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유능한 무관들을 필요로 했고, 19세기까지 조선은 성공적으로 필요한 무관을 선발하고 있었다. ... 무과급제자들의 평균연령이 30대 초반이었음을 볼 때 무과급제는 당시 사람들에게 여전히 이루기 힘든 성취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남성들이 대부분 10대에 결혼하여 30세 즈음에는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던 사실에 근거해 본다면, 무과에 급제하려면 보통 10년 이상 공부하고 수련을 해야 하므로 근근히 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무과급제는 더욱더 달성하기 어려운 과업이었을 것이다.

119p

정치적으로 소외된 양반들이 당당하게 관직에 오르는 방법이자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수단으로써 무과급제를 바라보는 일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많은 가문의 후손들은 스스로가 걸출한 가문의 후손임을 주장하기 위해 족보를 점점 더 세밀하게 고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그중에는 중국에서 기원한 조상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가문도 있었다. ... 소양을 갖춘 귀족들이 계속해서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고 합격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이 시험 자체의 권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권위는 당시로서는 확실히 가치가 떨어져 버린 관직에 이름을 올리는 일과 구분되었다. ... 이렇게 압도적인 개성의 상업적 역할은 1882년 이후 조선이 무역 상대국들에게 경제적 침탈을 당하기 전까지만 계속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며 개성상인들이 변화된 조선의 근대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중앙에서는 해당 지방에 '상무'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싶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풍이 성장하여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커졌고, 서원에 사액을 요구하던 문사가 앞장서서 성리학적인 문화와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 필요하다면 조선 초기의 중앙이나 영호남 지방 양반가와 연결고리를 상상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선이 초기에 영호남에서 북부로 옮긴 이주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나 병사, 피지배층의 범죄자 등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몇몇 족보는 위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관서지방민들은 중앙의 소수 양반가문이 장악한 관료사회라는 장벽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이 장벽은 영호남 지방의 양반들조차 극복하지 못한 것이었다. ... 조선 군사체계의 주안점은 전반적으로 군사의 징집과 훈련보다는 과세제도로 옮겨갔다. 무예가 뛰어난 자들이 나중에 정말 무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가와 관계없이 무과는 그들에게 그저 국가에서 인정하는 신분증명서를 발급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150p

조선사회사 연구자들이 양반을 관직에 종사하는 중앙관료가 아닌 세습되는 신분집단으로 간주한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한 예로, 송준호는 향반 출신의 무과급제자들 및 무관들이 문무와 관계없이 다른 지방 양반들과 사회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밝혔다. 이러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양반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으로, 출생은 그러한 지위를 취득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더 나아가 별다른 관직이 없는 향반 전체도 대체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위를 얻고 있었다. ... 이에 대한 답례로 지방의 양반은 자신들의 연줄인 한양의 양반에게 많은 선물을 했으며, 이는 나라에서 주는 급료만으로는 사치스러운 삶을 향유하기 힘들었던 한양 양반들의 수입을 충당해주는 역할을 했다. ... 관직을 가진 중앙의 양반들조차 결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습되는 정치적 분열, 피비린내 나는 숙청, 학파와 사승관계에 따른 서원의 파벌화 등, 양반사회는 특히 정치적으로 결집력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에서는 훨씬 큰 동질성을 보인다. 중앙과 지방 귀족층은 모두 자신들의 토지와 노비에 대한 경제적 특권을 지키는 동시에 군역을 면제받으려 했다. ... 조선 후기 문무과 급제자들은 극소수 가문들이 통혼권을 유지하면서 중앙 관직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조선 후기에는 어떠한 양반가에서도 서얼이라는 이유로 혈통상 문제가 있는 (중인이나 향리, 평민, 노비 등은 말할 것도 없이) 가문의 자손을 양자로 맞아들이는 것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생각해보면, 중앙 문관, 중앙 무관, 영호남 지방의 양반가문들 내에서 서로 양자가 오고간 것은 이 세 집단이 서로를 동등한 양반 신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164p

관직의 가격이 연 천 석을 수확한 이의 한 달 수입과 맞먹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 명확하게 중앙 정계에 몸담지 않았던 후손들이 각각의 족보에는 중앙관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 그들은 평범한 소작농이거나 가난한 양반은 아니었다. 곡식을 기부한 비양반층들은 관직이나 직위 그 자체에 체화된 보상에 더욱 끌렸을 것이다. 양반과 평민 사이의 간극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분명했을 확률이 크다. 특히 귀족층이라는 유리한 위치에서 봤을 때, 양반이 아닌 자들이 그 자리로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매관을 통해 얻은 관직에 비교적 경외심을 가졌던 평민들조차 자신들이 관직을 산다고 해서 양반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불행히도 조선 후기에 아무기 관직을 돈으로 산다고 해도 진정한 양반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많지는 않더라도 관직이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몇몇 양반들에게는 비양반층의 시각에서 볼 때에 아직 그들이 명망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 많은 지방 향리들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면서 동시에 문화적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향리들 중 지식층은 단순히 그들의 고유한 역사와 그들의 역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기보다 양반과 기원이 같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고려 왕조대에 지방 향리들도 과거에 통과하면 중앙 공직에 들어가 중앙 귀족사회에 합류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물론 이렇게 양반이 되었던 가문의 자손들은 자신의 가문이 지방 향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척했다. 뿐만 아니라 향리 지식층들은 그들 또한 양반과 다를 바 없이 유교적 예를 중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유로 세습적 지방 향리들은 직위를 세습했던 경아전들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유교적 예우를 양반들에게 받고자 했다. 이러한 주장과는 상관없이 귀족층은 계속 기술직 중인과 지방 향리를 하대하였다. ... 신헌이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위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을 상대적으로 하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와의 외교관계에서는 조선 대표로 훨씬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문관들이 임명되었던 사실을 보면 이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헌의 이런 행보는 조선 후기 무관의 궁극적 성과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즉, 소수의 문관 출신 가문들이 압도적이었으며 따라서 무관에 대한 제재가 심했던 궁중에서, 유장으로 낼 수 있었던 최대의 성과였던 것이다. 양반 무관이 유장으로서 군주를 충실히 섬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한다면, 조선의 전체적인 관직체계 안에서 무관들이 이런 이상에 환멸을 느낄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무관들은 각자 적절하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 이와 같이 19세기 한양의 무인 귀족층은 국가 내부의 반란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국가에 계속해서 공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p

19세기에 귀족들의 향청 지배가 약화되었고 수령이 향임을 일방적으로 임명하면서, 수령과 향리들이 백성과 지역의 자원들을 착취하는 문제는 예전보다 더욱 악화되었다. 향리에 대한 인사권이 전적으로 수령에게 있었던 만큼 세습적인 향리가문들도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양반이라는 호칭은 조선 개국 이전에 중앙관직에 오른 사람들에게만 가능했는데, 조선 개국 이전에 중앙관직자가 되지 못한 이들은 본질적으로 얻을 수 없는 호칭이었다. 

203p

지배층은 자신들과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회의 차이를 유지하려고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데, 부르디외는 교육받은 정도와 그리고 신분에 따라 습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능력을 발휘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능력이 발휘되는 방식은 '상징적 의사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마지막에 이것의 의미와 가치는 능력을 갖춘 당사자와 그 능력을 소비하는 당사자가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 문화적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분에 따라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피지배층이 사회계층에 대해 도전하지 않도록 하면서 흔쾌히 신분에 대한 성취를 인정해주고 있다. ... 군주가 무과에 표시한 두터운 신망을 생각할 때에 피지배층들이 무과에 급제하기 위해 투자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220p

국가와 귀족들이 피지배층의 '성리학화'를 장려했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은 비록 피지배층 사이에서 형식적인 예절로 적용되었지만 잠재적으로 피지배층에게 문화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판소리와 한글소설에서 그려진 피지배층의 영웅적인 모습은 성리학적인 미덕이 더 이상 귀족들만이 아니라 피지배층에게도 공유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무과제도는 국가의 주요한 제도로서, 무관직이나 중앙관직에 새로운 관원을 모집하는 본래의 기능은 유지하면서도 점차 다양한 사회 기반을 가진 지원자들에게 직위를 수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중의 기능은 전체적으로 피지배층과 권력에서 도태된 양반들의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현존하는 정치사회적인 구조의 안정을 보장해주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극소수의 양반들은 계속해서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최고의 사회신분은 누리고 신유학적 가치와 수사에 기반을 둔 관료문화를 고수하였으며, 농업경제에서 상업화로 진행되는 가운데 확대되어 가던 자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 대다수 사람들은 법적인 규제와 도덕적 지침의 자연적 수호자인, 왕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국가는 새로운 집단이 충분한 자원을 대안이나 일련의 스키마 주변에 수집하는 것을 못하지 않는 한, 피지배층의 신분이 상승하여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고려 후기와 달리 조선 후기에는 귀족층과 평민의 입장에서 지배층을 거역하는 혁명적인 세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19세기 무렵의 봉기는 과도한 세금, 만연한 관의 부정, 현실 속의 계급차별에 반발해서 일어났는데,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왕조를 대체하거나 왕정을 없애려는 방법을 생각한 것은 극소수뿐이었다. 이후 조선에 공화정이 도입된 것은 고종이 1919년에 서거하고, 1910년 일본에 병합되고 난 이후였다. ... 지방 귀족들이 여전히 현존하던 사회체계 내에서 혁명세력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반면, 가치가 낮아진 신분이라도 구하려던 피지배층은 자신들에게 백패나 홍패와 같은 임명증서를 내주던 국가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문화자본을 가진 이들은 누구나 충분히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조선 후기의 국가를 법적인 규제와 도덕적 지침의 자연적 수호자로 여겼다. 교육의 기회가 한참 배제되었던 소작농들조차 비록 부패한 귀족과 관리가 아주 많기는 했지만,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나라의 수장인 왕을 탓할 이유가 없었다. ... 물론 무과에 급제하거나 혹은 가치가 낮아진 그 어떠한 자리라도 대다수의 피지배층들은 그 자리를 얻는 방법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기까지 많은 수의 평민들은 18세기 영조와 같은 군주들의 경장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조세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다. ... 한국의 근현대사 과도기를 거치며, 박성빈의 신분상승에 대한 바람이 초라하게 마무리된 반면, 그 아들인 박정희는 최고의 국가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대격변이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241p

조선 초기 과거제는 관념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천민을 제외한 모든 사회계층에게 열려 있었던 사실을 강조하고 문과에 합격했던 비양반계층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등극하게 되면 그들은 후손들이 특권을 영속적으로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따라서 비양반층이 경쟁에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있다. ... 본질적으로 훈구파와 사림파는 사회적 배경이 다르다고 하기보다는 학문적 성향과 정치적 수사법에 있어서 신유학의 신봉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



<오류>

105p

특히 외척이었던 안동김씨와 평양조씨 같은 가문이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평양조씨가 아니라 풍양조씨다.

207p

화성능행도병의 4천 낙양헌방방도

->낙남헌방방도이다.

218p

소녀의 부친은 개국공신이었던 권근으로, 살아남은 딸을 남이 장군과 혼인시켰다.

->권근의 손자인 권람의 딸이 남이와 혼인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왜곡과 날조로 뒤엉킨 사이비역사학의 욕망을 파헤치다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이비 역사학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반론을 펴기 시작했다.

맨 마지막 장에 실린대로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논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는 역사적 자료만 찾아서 나열하기 때문에 연구라 볼 수 없고, 그래서 아예 대응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상대를 역사학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사란 것이 결국은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광대한 영토를 꿈꾸는, 어찌 보면 제국주의적인 대중의 욕망과 맞물려 마치 그것이 진짜 역사인 양 오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들에 대해 보다 공식적인 반대의 책들이 많이 나와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 줘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논쟁많은 여러 주제들에 대해 알기 쉽고 명료하게 정리해 준다.

요즘은 도판 상태가 다들 좋은 것 같다.

책에 실린 지도의 선명함에 놀랬다.


1) 칠지도는 백제 왕이 일본에게 하사한 것이 아니라 외교적 선물이다.

2) 신라 왕실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은 7세기 신라 왕족들의 족보 만들기에 불과하다.

3) 광개토왕비에 나온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는 실제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니라 고구려인의 눈으로 본 자국위주 역사관일 뿐이다. 고구려인에게는 신라나 왜나 둘 다 똑같은 외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왕비는 탁본 뜨기도 매우 힘든 아주 오래 된 거대한 비석으로 일본군 중위가 글자를 지우고 말 수준이 아니다.

일본군이 오기 전에 이미 청나라인들이 뜬 탁본들이 많다.

4) 김춘추는 요즘 시각처럼 매국노가 아니라 풍전등화의 신라를 외교적 힘으로 구해낸 뛰어난 지도자다.

5) 근초고왕 당시의 요서 진출은 남조 역사서에만 등장하는데, 실제로 지배권을 행사했다기 보다, 낙랑 유민들이 이주한 지역과의 교류였거나, 한인 이주 집단이 백제 영토 내로 들어 온 것을, 마치 요서 지역을 점령한 것인 양 부풀려 남조에 고한 것이다.

6) 낙랑군은 이덕일씨의 주장과는 달리 평양에 위치했고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역사는 접하기가 쉽기 때문에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대중에게 어필하지만, 원하는 쪽으로 입맛에 맞춰 해석하는 게 아니라, 논리와 증거가 필요한 엄연한 과학이고 학문이다.


<인상 깊은 구절>

93p

일각에서는 역사학의 연구 목적이 우리나라의 현재 정치적, 외교적 이익에 부합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만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어차피 고대사는 사료가 적고 정확한 실상을 알 수 없으니 우리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 역사학은 현재의 가치관이나 당장의 정치적, 외교적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를 만들어 내는 분야가 아니다. ... 역사 연구가 현실의 이해관계에 무조건 부합해야 한다고 하는 일각의 주장은 엄연히 '퇴행적' 현상일 뿐, 결코 '진보적' 가치와 동일시될 수 없다.

173p

김춘추가 대야성전투 이후 외교적 해결책을 제안했을 때, 다른 정치 파벌에서조차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은 신라 지배층들이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 상황임을 공통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 결국 김춘추만이 아니라 신라 지배층 전체가 백제를 멸망시켜야만 신라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듯 독자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신라는 주변국을 이용해 부족한 힘을 보충해서 살아남고자 했다.

175p

이때 연개소문이 대당 온건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까닭에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대당 강경 노선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80p

신라는 거의 매년 당에 사신을 보냈지만, 그중에서도 김춘추는 최고위급 인물이었기에 당에서도 상당히 후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김춘추는 당 태종과 개인적 친분을 맺는 데 성공해 태종의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다. ... 백제를 멸망시키고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한 포로를 거느리고 당으로 돌아갔을 때 당 고종이 "어찌하여 이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 신라의 외교 방침은 자주나 사대 가운데 그 어떤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책을 보여 준다. 오히려 신라라는 국가 관점에서 본다면 김춘추의 외교는 정말 자주적이며 실리적이다. 이 시기에 고구려나 백제, 왜, 당은 신라 입장에서 모두 외세였으며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고구려, 신라, 백제라는 삼국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216p

김씨 부인 세대 역시 당나라에서 나고 자란 교포 4세로서 중국과의 관계를 더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소호 금천씨와 김일제를 선조로 내세우는 점도 재당 신라인의 입장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요동(한반도)' 출신이기는 하지만, 먼 연원은 중원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묘지명에서 '신라' 김씨가 아니라 당나라 수도인 '경조' 김씨라고 한 점을 봐도 이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나라 사람이었다.

300p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의 아픔을 딛고 6세기에 다시금 꽃을 피웠으며, 관산성전투로 인해 오랜 회심이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다시금 중흥의 기치를 드높였다. 역사에서 구조와 여건은 좌시할 수 없는 요소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백제는 장기간 패권을 유지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 속에 처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 끊임없이 절치부심한 흔적을 엿볼 수도 있다. 이것이 백제사를 감상하는 한 지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다. 겉보기에는 그저 적막한 어둠일 뿐이지만, 이미 그 아래에서는 뜨거운 기운을 품은 해가 나설 채비를 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전성기의 화려함에만 매몰되기보다는, 그 공동체가 그다지 빛나 보이지 않는 시기의 면모까지도 아울러 살펴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321p

짐짓 9000년의 역사를 아우르는 유라시아의 규모로 역사와 영토 부풀리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정작 당대의 역사를 가장 크게 규정하던 냉전 질서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둔감한 점은 흥미롭다. ... 역사 속 자료는 풍성해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주장에 맞는 자료만 골라서 인용해 서술한다면, 그걸 보는 사람은 마치 실제 역사가 그렇게 존재했다고 착각하기 쉽다. ... 역사 연구자라면 누구나 과거 자료를 뒤지면서, 자기주장 바깥에 흘러넘치거나 오히려 반대되는 증거를 심심찮게 만난다. 그것들을 직면하면서 자기주장을 끊임없이 상대화하고, 그럼으로써 연구자 스스로 역사의 이해와 사고의 폭을 넓히는 것이 역사학의 기능이다. 일관된 논리로 매끈하게 작성된 한 개인의 회고록을 역사가들이 좀처럼 믿지 않는 이치와 같다. 이는 <환단고기>를 비롯한 사이비 역사가들의 글을, 기존 사학계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연구'로 대접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이다. 


<오류>

172p

김춘추를 지지하던 선덕여왕(재위 632-347)

->347년이 아니라 647년이다.

210p

미추이사금은 석씨의 마지막 임금인 첨해이사금이 죽고서

->석씨의 마지막 임금은 12대 첨해가 아니라, 16대 흘해이사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
한정희.최경현 지음 / 돌베개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중일 3국은 유교 문화권이나 중화문명의 향유자로서 유불선 사상을 받아들여 문화에 녹여 왔다.

저자들은 이러한 사상적 토대가 미술사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더불어 17세기부터는 서학의 수용 과정도 같이 탐색한다.

복희, 여와로부터 20세기 상해파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를 시대별로 잘 설명하고 있어 사상사와 미술사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본문에 언급된 그림들이 빠지지 않고 도판에 모두 수록되고 매우 선명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중국이 유교와 불교, 도교가 다양하게 나타난 반면, 역시 한국은 성리학 일변도라 수용폭이 좁은 게 아쉽고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거리상 떨어져 있어서인지 독자적인 미술사를 갖고 있는 점이 신선하다.

특히 우키요에 부분은 소략됐으나 실학을 바탕으로 당시 유행하던 실경산수화 열풍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됐고, 나중에 따로 관련 책을 더 읽고 싶다.

서예는 잘 모르지만 문자 예술 측면에서 관심이 생기고 특히 명청대 중국 수묵화의 다채로움은 눈길을 확 끈다.

미술의 긴 역사와 동아시아 그림을 잘 엮어 낸 좋은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207p

'성리학자는 도덕성을 갖춘 군자가 되기 위해서 독서나 수양을 통해 순간적인 욕망이나 불순함을 억제하는 금욕주의적 태도를 지속해야 한다'는 도덕적 실천의 철학적 근거를 여기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으로 격물치지를 제시하였으나, 대개 학문적 접근에 치중하면서 지식의 습득에만 그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 주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성리학은 僞學이라 박해를 받았으며, 원대에 이르러 관학이 되고 주희가 새롭게 해석한 <사서집주>가 과거시험 교재로 채택되어 명대 문인들의 주요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일상과 문예창작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이와 같이 조선 건국 초기에 성리학은 백성을 통치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治人之學이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 사림 계열 성리학자들에 의해 점차 修己之學으로 바뀌어갔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수기의 전제 조건인 인간의 본성, 즉 사단칠정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는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는 태극론이 주로 논의되며 차별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 특히 이이는 주자에 대한 맹신을 거부하고 왕도정치의 시작을 기자로 설정하여 주체적인 입장에서 조선식 성리학을 토착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람 계열의 성리학자들은 대의와 의리를 중시하면서 일상에서 도학의 실천을 통한 자율적인 향촌사회 운영과 가족 질서의 수립에 중점을 두었다. ...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금욕주의적 수양론을 배경으로 단아하고 기품 있는 백자가 생활 공예품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또한 16세기에는 사림 계열을 중심으로 주자를 존경하고 그의 행적을 일상에서 적극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연 풍광이 빼어난 곳에 다수의 서원이 건립되어 향촌 자치기구로서 기능하였다.

241p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중국인보다 주자에 대한 존경이나 추숭이 매우 각별했다. 이는 주희가 무이산에 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함과 동시에 구곡계를 주유하며 지은 <무이도가>를 통해 심신 수양의 성리학적 자연관을 적극 수용하고 실천하려는 일련의 역사적 행보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258p

감옥에서 출옥한 1575년 서위는 55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살인자라는 낙인 때문에 재기가 불가능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60-70대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며 심리적으로 처절하게 무너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 이러한 그림들에 자신의 굳은 지조와 절개를 드러내기보다는 가난하고 무기력한 모습이 투영되면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사군자의 권위를 상실하면 전혀 다른 형태로 표현되었다. 특히 그의 매화나 대나무 그림 위애 적힌 제시들에 등장하는 눈, 비, 바람 등은 사군자의 강인한 생명력을 증명해주는 보조적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림 속의 매화나 대나무는 군자의 당당함이나 강인한 의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초라한 모습으로 묘사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 화면에 거침없이 휘두른 필묵이 만들어낸 추상적 조형성은 현대회화에서 순간의 행위를 통해 우연의 효과를 추구했던 액션페인팅과 매우 유사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283p

황종희는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는 대신에 신하의 권한은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서구의 입헌군주제와 유사한 논리로 근대 계몽주의적 요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결론적으로 중국 실학은 전제군주에 대한 비판에설 출발하였기 때문에 체제 개혁을 다루었으며, 이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실학에는 없는 내용으로 커다른 차이를 보인다. ... 하지만 중국 실학에서는 최고 목표인 正德이 실현되어야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는 이용이 가능해지고, 마침내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지는 후생의 단계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경제적 이윤이나 생산력 증가를 도덕 기준과 동일시하는 이윤후생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였다. ... 일본의 실학은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실업의 학문'으로 조선이나 중국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에서 성리학은 조선이나 중국처럼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불교, 양명학, 난학 등과 같은 학문의 하나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 때 조선인에 의해 일본에 전래된 성리학은 인간이 지켜야 할 일상의 윤리 규범 정도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실학은 성리학의 부정정 측면을 다루며 대안을 제시하려는 정치적 요소가 전혀 없으며, 국가 발전이나 백성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했던 순수 학문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327p

서학에 대한 조선 왕실의 부정적 입장과 소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서구 과학 서적이나 문물 등의 수용은 실학자들 사이에서 개인적으로만 이루어졌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황실과 막부라는 공적 영역에서 서학을 수용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특히 조선에서 서양화법의 수용이 지체되었던 이유도 이러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일부 유학자의 천주교 교리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자생적 신앙으로 발전하였고... 천주교가 일반 백성에게 확산되고 유교 제례를 부정하는 등 신앙의 독자적 고유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1801년 신유교옥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는 조선 사회를 위협하는 반역 세력으로 규정되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 왕실과 서교의 정면 충돌은 서구 제국의 문호 개방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쇄국정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876년 일본에 의해 조선의 문호가 강제로 개방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336p

"서양 학문의 장점은 측량과 계산에 있고, 단점은 천주를 숭상해 인심을 현혹시키는 것이다"라고 서술한 내용이 주목된다. 이는 동시기 중국 문인들의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대변한 것으로, 기독교 화보집이 포교라는 신앙적 측면보다 서양 회화와의 조우라는 미술사적 측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는 사실에 좀 더 설득력을 더해준다. ... 이처럼 안면에 서양화법을 적용하는 획기적인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전신사조를 중시하는 초상화 전통, 즉 인물의 정신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모습도 객관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불변의 원칙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들은 서양화법으로 안면의 사실성이 배가된 새로운 형식의 초상화를 칭찬하였는데, 이는 증경의 새로운 초상화법이 그들의 높은 인격적 자존감을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351p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전통 산수화에 본질적은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그리는 사람의 인품이나 마음이 그림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문인화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선교사 화가들의 사망과 귀국으로 중서합벽의 그림이 빠르게 소멸한 것은 황제의 개인적 취향과 후원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서양화법은 부분적인 수용에 머물며 삼국의 전통회화를 대체하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서양화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서구의 과학, 의학, 역학, 지리 등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흥미나 관심을 배경으로 서학 또는 난학이라는 학문의 일종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372p

이처럼 고관의 후원으로 고증학이 저변화되었다는 사실은 민간에서 성장한 고증학이 체제를 유지하는 교학의 범주에 편입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 동시기에 이만수, 정약용, 홍석주 같은 대부분의 사대부는 성리학을 추숭하였기 때문에 고증학의 반주자적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名物 훈고의 문헌 실증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며 소극적이거나 보수적이었다. ... 이는 고증을 의리 해명을 위한 수단 또는 방벙이라 생각한 것이며, 청대 고증학자들이 고증을 本, 의리를 末이라고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견해이다. 

407p

화단에서는 19세기 후반 이후 상해에서 조지겸이 금석화파를 개척하였고, 오창석은 그러한 화풍을 계승하여 화훼화를 雅俗共賞의 현대적 문인화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모두 전각과 서예에서 일가를 이룬 다음 그러한 성취를 회화 창작에 적용한 것이었지만, 근대 한국화단에서는 서예나 전각에 대한 선행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오창석의 화풍을 표현 기법으로 수용하는 정도에 머무는 한계를 보였다.


<오류>

151p

북위에서 338년 조성된 건무4년명 금동여래좌상이 대표적이다.

->건무는 북위가 아니라 후조 석륵의 연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