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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
한정희.최경현 지음 / 돌베개 / 2018년 1월
평점 :
한중일 3국은 유교 문화권이나 중화문명의 향유자로서 유불선 사상을 받아들여 문화에 녹여 왔다.
저자들은 이러한 사상적 토대가 미술사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더불어 17세기부터는 서학의 수용 과정도 같이 탐색한다.
복희, 여와로부터 20세기 상해파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를 시대별로 잘 설명하고 있어 사상사와 미술사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본문에 언급된 그림들이 빠지지 않고 도판에 모두 수록되고 매우 선명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중국이 유교와 불교, 도교가 다양하게 나타난 반면, 역시 한국은 성리학 일변도라 수용폭이 좁은 게 아쉽고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거리상 떨어져 있어서인지 독자적인 미술사를 갖고 있는 점이 신선하다.
특히 우키요에 부분은 소략됐으나 실학을 바탕으로 당시 유행하던 실경산수화 열풍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됐고, 나중에 따로 관련 책을 더 읽고 싶다.
서예는 잘 모르지만 문자 예술 측면에서 관심이 생기고 특히 명청대 중국 수묵화의 다채로움은 눈길을 확 끈다.
미술의 긴 역사와 동아시아 그림을 잘 엮어 낸 좋은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207p
'성리학자는 도덕성을 갖춘 군자가 되기 위해서 독서나 수양을 통해 순간적인 욕망이나 불순함을 억제하는 금욕주의적 태도를 지속해야 한다'는 도덕적 실천의 철학적 근거를 여기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으로 격물치지를 제시하였으나, 대개 학문적 접근에 치중하면서 지식의 습득에만 그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 주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성리학은 僞學이라 박해를 받았으며, 원대에 이르러 관학이 되고 주희가 새롭게 해석한 <사서집주>가 과거시험 교재로 채택되어 명대 문인들의 주요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일상과 문예창작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이와 같이 조선 건국 초기에 성리학은 백성을 통치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治人之學이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 사림 계열 성리학자들에 의해 점차 修己之學으로 바뀌어갔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수기의 전제 조건인 인간의 본성, 즉 사단칠정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는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는 태극론이 주로 논의되며 차별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 특히 이이는 주자에 대한 맹신을 거부하고 왕도정치의 시작을 기자로 설정하여 주체적인 입장에서 조선식 성리학을 토착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람 계열의 성리학자들은 대의와 의리를 중시하면서 일상에서 도학의 실천을 통한 자율적인 향촌사회 운영과 가족 질서의 수립에 중점을 두었다. ...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금욕주의적 수양론을 배경으로 단아하고 기품 있는 백자가 생활 공예품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또한 16세기에는 사림 계열을 중심으로 주자를 존경하고 그의 행적을 일상에서 적극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연 풍광이 빼어난 곳에 다수의 서원이 건립되어 향촌 자치기구로서 기능하였다.
241p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중국인보다 주자에 대한 존경이나 추숭이 매우 각별했다. 이는 주희가 무이산에 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함과 동시에 구곡계를 주유하며 지은 <무이도가>를 통해 심신 수양의 성리학적 자연관을 적극 수용하고 실천하려는 일련의 역사적 행보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258p
감옥에서 출옥한 1575년 서위는 55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살인자라는 낙인 때문에 재기가 불가능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60-70대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며 심리적으로 처절하게 무너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 이러한 그림들에 자신의 굳은 지조와 절개를 드러내기보다는 가난하고 무기력한 모습이 투영되면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사군자의 권위를 상실하면 전혀 다른 형태로 표현되었다. 특히 그의 매화나 대나무 그림 위애 적힌 제시들에 등장하는 눈, 비, 바람 등은 사군자의 강인한 생명력을 증명해주는 보조적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림 속의 매화나 대나무는 군자의 당당함이나 강인한 의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초라한 모습으로 묘사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 화면에 거침없이 휘두른 필묵이 만들어낸 추상적 조형성은 현대회화에서 순간의 행위를 통해 우연의 효과를 추구했던 액션페인팅과 매우 유사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283p
황종희는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는 대신에 신하의 권한은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서구의 입헌군주제와 유사한 논리로 근대 계몽주의적 요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결론적으로 중국 실학은 전제군주에 대한 비판에설 출발하였기 때문에 체제 개혁을 다루었으며, 이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실학에는 없는 내용으로 커다른 차이를 보인다. ... 하지만 중국 실학에서는 최고 목표인 正德이 실현되어야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는 이용이 가능해지고, 마침내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지는 후생의 단계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경제적 이윤이나 생산력 증가를 도덕 기준과 동일시하는 이윤후생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였다. ... 일본의 실학은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실업의 학문'으로 조선이나 중국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에서 성리학은 조선이나 중국처럼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불교, 양명학, 난학 등과 같은 학문의 하나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 때 조선인에 의해 일본에 전래된 성리학은 인간이 지켜야 할 일상의 윤리 규범 정도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실학은 성리학의 부정정 측면을 다루며 대안을 제시하려는 정치적 요소가 전혀 없으며, 국가 발전이나 백성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했던 순수 학문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327p
서학에 대한 조선 왕실의 부정적 입장과 소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서구 과학 서적이나 문물 등의 수용은 실학자들 사이에서 개인적으로만 이루어졌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황실과 막부라는 공적 영역에서 서학을 수용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특히 조선에서 서양화법의 수용이 지체되었던 이유도 이러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일부 유학자의 천주교 교리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자생적 신앙으로 발전하였고... 천주교가 일반 백성에게 확산되고 유교 제례를 부정하는 등 신앙의 독자적 고유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1801년 신유교옥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는 조선 사회를 위협하는 반역 세력으로 규정되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 왕실과 서교의 정면 충돌은 서구 제국의 문호 개방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쇄국정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876년 일본에 의해 조선의 문호가 강제로 개방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336p
"서양 학문의 장점은 측량과 계산에 있고, 단점은 천주를 숭상해 인심을 현혹시키는 것이다"라고 서술한 내용이 주목된다. 이는 동시기 중국 문인들의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대변한 것으로, 기독교 화보집이 포교라는 신앙적 측면보다 서양 회화와의 조우라는 미술사적 측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는 사실에 좀 더 설득력을 더해준다. ... 이처럼 안면에 서양화법을 적용하는 획기적인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전신사조를 중시하는 초상화 전통, 즉 인물의 정신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모습도 객관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불변의 원칙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들은 서양화법으로 안면의 사실성이 배가된 새로운 형식의 초상화를 칭찬하였는데, 이는 증경의 새로운 초상화법이 그들의 높은 인격적 자존감을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351p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전통 산수화에 본질적은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그리는 사람의 인품이나 마음이 그림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문인화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선교사 화가들의 사망과 귀국으로 중서합벽의 그림이 빠르게 소멸한 것은 황제의 개인적 취향과 후원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서양화법은 부분적인 수용에 머물며 삼국의 전통회화를 대체하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서양화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서구의 과학, 의학, 역학, 지리 등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흥미나 관심을 배경으로 서학 또는 난학이라는 학문의 일종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372p
이처럼 고관의 후원으로 고증학이 저변화되었다는 사실은 민간에서 성장한 고증학이 체제를 유지하는 교학의 범주에 편입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 동시기에 이만수, 정약용, 홍석주 같은 대부분의 사대부는 성리학을 추숭하였기 때문에 고증학의 반주자적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名物 훈고의 문헌 실증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며 소극적이거나 보수적이었다. ... 이는 고증을 의리 해명을 위한 수단 또는 방벙이라 생각한 것이며, 청대 고증학자들이 고증을 本, 의리를 末이라고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견해이다.
407p
화단에서는 19세기 후반 이후 상해에서 조지겸이 금석화파를 개척하였고, 오창석은 그러한 화풍을 계승하여 화훼화를 雅俗共賞의 현대적 문인화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모두 전각과 서예에서 일가를 이룬 다음 그러한 성취를 회화 창작에 적용한 것이었지만, 근대 한국화단에서는 서예나 전각에 대한 선행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오창석의 화풍을 표현 기법으로 수용하는 정도에 머무는 한계를 보였다.
<오류>
151p
북위에서 338년 조성된 건무4년명 금동여래좌상이 대표적이다.
->건무는 북위가 아니라 후조 석륵의 연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