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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오래 전에 도서관에서 <완당평전> 세 권을 읽고 김정희에 대해 알게 된 기억이 있다.
그 후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어 저자가 새로 책을 낸 모양이다.
580 페이지 정도의 두꺼운 책인데도 마치 소설을 읽듯 술술 잘 넘어간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저자의 필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다만 한문이나 서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글씨에 대한 미학적 설명은 많이 공감을 못했다.
너무 사변적이랄까?
직관적으로 아, 좋구나 이런 울림이 없었다.
저자가 설명한 대로 추사의 글씨는 怪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말로 하면 추상성이라고 할까?
인간 김정희에 대한 일대기를 작품과 함께 보여주는 구성이, 저자의 편안한 글솜씨 덕분에 흥미롭게 잘 읽힌다.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보다 큰 평가를 받았을 것이고, 후손들이 이렇게 잘사는 덕분에 그의 작품세계가 깊이 조망되고 있는 듯 하다.
연경에는 단 한 번 갔을 뿐인데 말년까지 편지로 교류하고 청나라에서 발간된 여러 서적과 글씨들을 구해 보는 정성이 놀랍다.
역관들이 그런 일을 담당했을 터이니, 미시사적 측면에서 조선 후기 청과의 문화 교류는 좀더 연구해 볼 주제 같다.
마네가 젊은 시절 스페인에 가서 벨라스케스 그림을 보고, 루브르 미술관에서 대가들의 작품들을 모사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김정희도 북비남첩론에 공감하여 끊임없이 옛 글씨들을 감상하고 임모하면서 연습했다.
역시 많이 보고 접해야 경지에 오르는 것 같다.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는 과정이 좀 모호한 것 같다.
검색을 해보니 효명세자 집권 시절 세력을 잡았던 권돈인 등을 공격하기 위해 안동 김씨인 김홍근 등이 그와 친한 김정희를 유배보낸 것으로 나오던데 책에는 김유근이 실어증으로 그를 도울 수 없었다고 나온다.
김유근은 김정희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나오는데, 그 역시 동조하는 입장이었나 궁금하다.
저자의 평대로 김정희는 금석학과 글씨 등에 두루두루 능한 예술인이었을 듯 하다.
한글 편지를 보면 자상하기 그지없고 초상화의 눈매도 선해 보인다.
<인상깊은 구절>
228p
우봉 조희룡은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대단한 구도의 난초 그림을 잘 그렸다.
물론 추사가 조희룡을 실제로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소지는 있다. 무엇보다 조희룡에게는 중인 출신이라는 신분적 약점이 있었다. 또 조희룡이 비록 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리고는 있었지만 추사가 보기에는 정작 그 품격을 지탱해줄 학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학문적, 정신적 깊이가 모자라면서 형식만 그럴듯한 것이 추사는 늘 못마땅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한가지, 대개 자기를 흉내 내는 사람은 낮추어보게 되는 인간 본연의 생리적 반응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을 추종하더라도 뭔가 다른 면을 갖고 따를 때 그를 더 아끼고 대견해하는 법이다. ... 추사는 영정조시대에 이룩한 진경산수와 문인화풍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그림의 본령에 다가서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추사가 사대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는 국적을 떠나 예술 자체의 높은 경지를 지향했던 국제주의자였다.
267p
그는 유배지에서도 자나 깨나 집안의 대소사와 제사를 걱정하고 편지마다 그런 내용을 담았다. 거기에는 점점 몰락해가는 귀족이 갖는 비애의 감정이 절절히 배어 있다.
272p
일반적으로 화가들이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과는 반대로, 추사는 격조를 먼저 의식하고 그림을 그린 면이 강하다. 머리와 눈이 너무 앞서서 손의 일이 더 중요한 화가는 되기 힘들었다. 추사는 오히려 그런 기교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293p
"화의가 이러해야 形似의 길을 벗어난 것이 된다. 이러한 의취는 옛날 유명한 화가들 중에도 터득한 자가 극히 적었다."
304p
추사는 영이와 번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엄청란 역량을 가진 청나라가 한낱 영이, 불랑, 미리견의 공격에 무너지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이 안심이니 우리도 안심이라는 식이었다. 추사는 여전히 청나라가 문명의 이상적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추사 인식의 한계였다. 추사는 설혹 번박들이 쳐들어온다 해도 그것은 '먼 장래의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먼 장래의 일'이 너무도 빨리 현실로 다가왔다.
416p
추사의 글씨를 가우디의 건축에 비유하자면, 추사체의 본질은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의 글씨 구성의 힘에 있는 것이다.
431p
추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불이선란>의 화제에 나타난 추사의 희열과 자부심 같은 것이 오만으로 보였던 것이다. 예술가의 개성이란 인격자의 평상심과는 정녕 통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러니 참으로 어려운 것이 빼어난 자, 개성이 강한 자, 능력 있는 자의 처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457p
대부분의 역사지리학자들이 그렇듯이 추사에게도 강한 민족정신이 있었다. 추사는 흔히 청나라 학자들과의 깊은 교유 때문에 국제적 감각의 지식인, 심지어는 모화주의적 분위기에 젖어 있던 지식인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나 또한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는 민족적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고 우리 민족의 대륙적 기상과 북방적 기질을 사뭇 동경해온 분이었다.
<오류>
22p
정순왕후의 사촌오빠로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 등은
->김관주는 정순왕후의 6촌오빠다.
425p
사도세자의 형이 진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왕통으로 따지면 진종은 철종의 5대조가 되고 가통으로 따지면 4대조가 된다.
->가통으로 따지면 진종은 철종의 증조부이므로 4대조가 아니라 3대조이다.
426p
권돈인은 진종은 우리 임금(철종)의 고조에 해당하니
->고조가 아니라 증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