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왜곡과 날조로 뒤엉킨 사이비역사학의 욕망을 파헤치다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평점 :
사이비 역사학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반론을 펴기 시작했다.
맨 마지막 장에 실린대로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논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는 역사적 자료만 찾아서 나열하기 때문에 연구라 볼 수 없고, 그래서 아예 대응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상대를 역사학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사란 것이 결국은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광대한 영토를 꿈꾸는, 어찌 보면 제국주의적인 대중의 욕망과 맞물려 마치 그것이 진짜 역사인 양 오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들에 대해 보다 공식적인 반대의 책들이 많이 나와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 줘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논쟁많은 여러 주제들에 대해 알기 쉽고 명료하게 정리해 준다.
요즘은 도판 상태가 다들 좋은 것 같다.
책에 실린 지도의 선명함에 놀랬다.
1) 칠지도는 백제 왕이 일본에게 하사한 것이 아니라 외교적 선물이다.
2) 신라 왕실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은 7세기 신라 왕족들의 족보 만들기에 불과하다.
3) 광개토왕비에 나온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는 실제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니라 고구려인의 눈으로 본 자국위주 역사관일 뿐이다. 고구려인에게는 신라나 왜나 둘 다 똑같은 외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왕비는 탁본 뜨기도 매우 힘든 아주 오래 된 거대한 비석으로 일본군 중위가 글자를 지우고 말 수준이 아니다.
일본군이 오기 전에 이미 청나라인들이 뜬 탁본들이 많다.
4) 김춘추는 요즘 시각처럼 매국노가 아니라 풍전등화의 신라를 외교적 힘으로 구해낸 뛰어난 지도자다.
5) 근초고왕 당시의 요서 진출은 남조 역사서에만 등장하는데, 실제로 지배권을 행사했다기 보다, 낙랑 유민들이 이주한 지역과의 교류였거나, 한인 이주 집단이 백제 영토 내로 들어 온 것을, 마치 요서 지역을 점령한 것인 양 부풀려 남조에 고한 것이다.
6) 낙랑군은 이덕일씨의 주장과는 달리 평양에 위치했고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역사는 접하기가 쉽기 때문에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대중에게 어필하지만, 원하는 쪽으로 입맛에 맞춰 해석하는 게 아니라, 논리와 증거가 필요한 엄연한 과학이고 학문이다.
<인상 깊은 구절>
93p
일각에서는 역사학의 연구 목적이 우리나라의 현재 정치적, 외교적 이익에 부합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만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어차피 고대사는 사료가 적고 정확한 실상을 알 수 없으니 우리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 역사학은 현재의 가치관이나 당장의 정치적, 외교적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를 만들어 내는 분야가 아니다. ... 역사 연구가 현실의 이해관계에 무조건 부합해야 한다고 하는 일각의 주장은 엄연히 '퇴행적' 현상일 뿐, 결코 '진보적' 가치와 동일시될 수 없다.
173p
김춘추가 대야성전투 이후 외교적 해결책을 제안했을 때, 다른 정치 파벌에서조차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은 신라 지배층들이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 상황임을 공통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 결국 김춘추만이 아니라 신라 지배층 전체가 백제를 멸망시켜야만 신라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듯 독자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신라는 주변국을 이용해 부족한 힘을 보충해서 살아남고자 했다.
175p
이때 연개소문이 대당 온건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까닭에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대당 강경 노선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80p
신라는 거의 매년 당에 사신을 보냈지만, 그중에서도 김춘추는 최고위급 인물이었기에 당에서도 상당히 후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김춘추는 당 태종과 개인적 친분을 맺는 데 성공해 태종의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다. ... 백제를 멸망시키고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한 포로를 거느리고 당으로 돌아갔을 때 당 고종이 "어찌하여 이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 신라의 외교 방침은 자주나 사대 가운데 그 어떤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책을 보여 준다. 오히려 신라라는 국가 관점에서 본다면 김춘추의 외교는 정말 자주적이며 실리적이다. 이 시기에 고구려나 백제, 왜, 당은 신라 입장에서 모두 외세였으며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고구려, 신라, 백제라는 삼국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216p
김씨 부인 세대 역시 당나라에서 나고 자란 교포 4세로서 중국과의 관계를 더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소호 금천씨와 김일제를 선조로 내세우는 점도 재당 신라인의 입장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요동(한반도)' 출신이기는 하지만, 먼 연원은 중원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묘지명에서 '신라' 김씨가 아니라 당나라 수도인 '경조' 김씨라고 한 점을 봐도 이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나라 사람이었다.
300p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의 아픔을 딛고 6세기에 다시금 꽃을 피웠으며, 관산성전투로 인해 오랜 회심이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다시금 중흥의 기치를 드높였다. 역사에서 구조와 여건은 좌시할 수 없는 요소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백제는 장기간 패권을 유지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 속에 처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 끊임없이 절치부심한 흔적을 엿볼 수도 있다. 이것이 백제사를 감상하는 한 지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다. 겉보기에는 그저 적막한 어둠일 뿐이지만, 이미 그 아래에서는 뜨거운 기운을 품은 해가 나설 채비를 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전성기의 화려함에만 매몰되기보다는, 그 공동체가 그다지 빛나 보이지 않는 시기의 면모까지도 아울러 살펴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321p
짐짓 9000년의 역사를 아우르는 유라시아의 규모로 역사와 영토 부풀리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정작 당대의 역사를 가장 크게 규정하던 냉전 질서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둔감한 점은 흥미롭다. ... 역사 속 자료는 풍성해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주장에 맞는 자료만 골라서 인용해 서술한다면, 그걸 보는 사람은 마치 실제 역사가 그렇게 존재했다고 착각하기 쉽다. ... 역사 연구자라면 누구나 과거 자료를 뒤지면서, 자기주장 바깥에 흘러넘치거나 오히려 반대되는 증거를 심심찮게 만난다. 그것들을 직면하면서 자기주장을 끊임없이 상대화하고, 그럼으로써 연구자 스스로 역사의 이해와 사고의 폭을 넓히는 것이 역사학의 기능이다. 일관된 논리로 매끈하게 작성된 한 개인의 회고록을 역사가들이 좀처럼 믿지 않는 이치와 같다. 이는 <환단고기>를 비롯한 사이비 역사가들의 글을, 기존 사학계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연구'로 대접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이다.
<오류>
172p
김춘추를 지지하던 선덕여왕(재위 632-347)
->347년이 아니라 647년이다.
210p
미추이사금은 석씨의 마지막 임금인 첨해이사금이 죽고서
->석씨의 마지막 임금은 12대 첨해가 아니라, 16대 흘해이사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