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자기 여행 : 에도 산책 - 일본 열도로 퍼진 조선 사기장의 숨결 일본 도자기 여행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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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도자기 여행 시리즈를 읽으면서 도자기, 즉 식기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도자기라고 하면 박물관에 있는 고려청자 같은 유물인 줄만 알았지 우리 실생활에 쓰는 그릇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릇에 관심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식당에 가면 스테인리스 그릇에 밥을 주고 좋은 레스토랑에 가도 예쁜 식기는 본 기억이 없다.

어제 간 커피숖도 아메리카노 한 잔에 6천원을 받는 곳인데 아무 문양도 없는 투박한 흰색 컵을 주길래 깜짝 놀랬다.

커피맛은 차치하고라도 이 정도 가격의 커피를 마시려면 그래도 좀 괜찮은 컵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다.

책에도 그런 말이 나온다.

맛은 기본이기 때문에 요리의 완성은 식기라고.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도자기, 곧 그릇은 바로 우리가 영위하는 문화라는 것을 깨달았고 우리의 고려청자, 조선백자가 박물관에서나 자랑스러워 하는 전통유산에 그치지 않고 일본이나 유럽처럼 여전히 우리가 향유하는 경쟁력 있는 공예품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책에 실린 수많은 일본의 자기들을 보면서 눈이 호강했고 감탄의 연속이었다.

유럽이나 중국의 화려한 도자기와는 또다른 개성적이고 훌륭한 작품들이 참 많았다.

수많은 도자기 사진들을 실은 저자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다만 색감이 좀 어두운 점이 아쉽다.

일본어가 익숙치 않아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나 지명 읽을 때 좀 어려웠다.

저자도 기왕이면 많은 가마들을 소개시켜 주려다 보니 약간 난삽한 느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성실하고 재밌는 일본 도자기 책이다.

우리도 이런 훌륭한 식기 문화가 일반화 됐으면 좋겠고 이번 일본 여행 때 여기 소개된 미술관과 그릇샵들을 방문해 보고 싶다.

오사카에 갔을 때도 저자의 책을 읽고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갔었다.

이번에도 도쿄에 가면 책에 나온 미쓰비기념미술관과 이데미츠 미술관에 갈 생각이다.


<인상깊은 구절>

183p

결코 포기하지 않은 다미키치의 불굴의 의지도 칭찬할 만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타지 사람을 오직 추천 서신 하나만으로 믿고 끝까지 책임을 진 당시 일본 사회 승려나 사기장들의 신심도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혼탁한 세상이기는 했지만 신뢰가 사회 밑바당에서 그 만큼 중요한 가치로 존재하고 작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43p

아마도 후루타 오리베의 이런 인기와 질시에 쉽게 순응하지 않는 호방함, 전국의 다이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도 사범이라는 사실 등이 막부에 부담이 되어 스승 센노 리큐와 마찬가지로 할복 명령을 받게 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262p

로산진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요리와 그릇의 일체, 요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릇 연구에 평생 매진했고, 결국 그런 그릇을 직접 만들고자 도예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요리 미학의 종점은 맛이 아니라 (맛은 기본이고)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느냐로 완성되는 것이다.

276p

가토 다쿠오는 자신의 책에서 1961년 테헤란의 박물관에서 러스터와 처음 만난 것을 회고하면서 '나는 현란하게 빛이 나는 러스터웨어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래서 내 손에 저 도자기를 꼭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기술했다. 그의 손자로 역시 도자기를 굽고 있는 가토 료타로는 "할아버지가 백혈병 투병 이후 자신은 오래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은 후에 무언가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매우 강했다"로 회상한다.

 그는 책에서 '나는 누구도 하지 않았던 무엇인가를 하기 원했다. 러스터웨어 복원이라는 아주 특별한 꿈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일찍 세상을 떠날까 봐 걱정했지만 이처럼 일에 몰두하고 즐긴 덕택에 그는 88세까지 살았다. 삼채와 러스터의 준 축복이었다.

297p

버나드 리치는 도자기를 예술과 철학 그리고 디자인 및 공예의 결합으로 보았다. 게다가 도자기를 라이프 스타일 그 자체로 생각했다.

311p

일본에는 '미타테'라는 고유의 미적 수사가 있다. '미타테'는 '다시 본다', 즉 '새롭게 본다'는 뜻이다. 사물을 처음 보듯 새롭게 보는 것이 미타테의 핵심 속성 가운데 하나다. 

 다도의 가치 또한 미타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차를 끓이며 정성을 다해 한 잔을 따라 내는 다도는 매번 반복되는 행위이지만 처음이라는 마음가짐을 지키지 않고서는 좋은 차를 우려내기 힘들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중들의 작품이 갖는 소박한 외연 안에 잠재된 깊은 예술적 가능성을 찾아내기 위해 미타테의 관점으로 이들을 보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야니가 무네요시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민예운동의 핵심이다.

482p

쓰타야 서점의 기본 철학은 '책이 아닌 라이프 스타일을 판다'는 것이다. 그런 철학이 시대에 걸맞은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쓰타야 서점에서는 심지어 일본도도 판매한다. 일본도에 관한 책들 옆에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일본도들이 놓여 있다.

 사실 시대는 모든 것이 섞이고 융합하는 '울트라 퓨전'으로 가고 있다. 도자기라고 해서 인사동 구석에만 있을 필요는 없다. 팔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관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504p

이토록 대대적인 외국 시찰단 파견은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일본은 서구 문물 배우기에 절실한 반면 우리는 서양을 철저히 배척하겠다며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일본이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던 그 해에 말이다!



<오류>

102p

가와다 사토미의 꽃으로 둘러싼 용 그림 도기 상자

->설명과 사진이 매치되지 않는다. 사진은 꽃과 여우 그림이다.

244p

자신에게 다도의 가르침을 배웠던 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잔당과의 내통을 이유로

->이에야스는 1대 쇼군이고 2대 쇼군은 그의 아들인 히데타다이다.

400p

'숀즈이'는 명나라 마지막 숭정 연간에 구워진 청와백자 도자기의 일종을

->청화백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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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전쟁 378~1515
찰스 오만 지음, 안유정 옮김, 홍용진 감수 / 필요한책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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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분량인데 너무너무 힘들게 읽었다.

예쁜 책표지만 보고 가벼운 중세 전쟁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무려 19세기에 출간된 책이었다.

저자가 1860년생인데 1885년에 이 책이 나왔다고 하니 겨우 스물 다섯 살의 나이로 쓴 책이고, 옥스퍼드 대학도 아직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찾아 보니 1920년에 같은 주제로 좀더 자세하게 쓴 책이 나왔다.

말하자면 이 책은 중세 전쟁의 개요인 셈이다.

의외로 많은 리뷰가 쓰여 있고 다들 흥미로운 책이라고 한데 비해 나에게는 너무 어렵고 직관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됐다.

중세는 특히 내가 약한 시대이기도 하고, 전쟁사는 거의 처음 읽는 분야라 더 그런 듯 하다.

얼마 전에 읽은 <백년전쟁 1337-1453>도 어렵게 읽었는데 다시 재독을 해봐야겠다.

감수자가 전공 학자라 정말 꼼꼼하게 세세하게 주를 달아줘 중세 서양사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출판사의 성의가 넘치는 책이다.

그에 비해 번역체의 어색함은 어쩔 수 없이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전쟁을 단순히 국가 간 폭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전략과 전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특히 봉건제 하에서 중세 전투가 근대 국가의 총력전과 어떻게 다른지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더불어 보병과 기병의 전투 대형 변화, 쇠뇌와 미늘창, 장궁, 파이크라는 장창 등 무기의 변천사 등도 흥미롭게 읽었다.

스위스라고 하면 막연히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에서 양치고 살 것 같은 평화로운 이미지인데 어떻게 그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유럽의 용맹한 용병이 되었는지, 장창부대의 놀라운 전투력과 정신력에 감탄했다.

수많은 중요 전투들이 예시로 등장하는데 거의 다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라 일일이 찾아 보느라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렸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중세라는 사회 구조에 대해 감을 좀 잡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 깊은 구절>

25p

고트족은 그들의 튼튼한 창과 좋은 말 덕분에 자신들이 밀집한 로마 군단을 돌파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트족은 전쟁의 지배자가 되었고, 중세 시대 모든 기사들의 직계 조상이 되었으며, 앞으로 천년 동안 계속될 전장에서의 기병이 가지는 지배적 우위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 게르만족 지도자들은 단순히 로마 제국에서 주는 직위와 명예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충성을 바쳤다.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 불과 6년이 지난 시점에 4만 명의 고트족, 그리고 다른 게르만족 기병대가 지신들의 지도자에게 복종하면서 동로마 제국 안에서 군사력을 제공했다. 

(대규모 전쟁의 승리 이후에 게르만족이 보인 이러한 경향은 의아할 수도 있으나 당시 로마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 중 하나였고 전쟁에서 졌어도 여전히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아직 제대로 된 통일 국가로서 성립하지 못한 게르만족의 한계 또한 작용했다. 그래서 게르만족의 로마를 향한 열망과 인식은 전쟁 후 포이데라티의 형태로 나타난다.)

34p

유스티니아누스 형제의 군대와 그들의 성취는 모든 면에서 진정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거둔 승리들은 스스로 얻은 것이며, 패배들은 대부분 황제의 참담한 정책기인했다. 황제는 지휘권을 여러 사람에게 분배하기를 고집했고 이로 인해 군사적인 복종은 지킬 수 있었지만 군사적 효율성을 잃고 말았다. 게르만의 코미타투스 (종사제) 체제, 그리고 개개의 병사들과 개인적으로 엮인 지도자가 이끄는 전쟁 공동체 체제는 제국의 군대 안에 깊이 스며들었다. 6세기의 군주들은 직속 사령관에 대한 병사들의 충성심이 너무 높아져 자신들에 대한 충성심보다 더 커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황제는 군대를 이끄는 장군과 불화가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이는 많은 경우 매우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49p

이러한 승리들을 가져다 주고 유럽 대륙을 야만과 북쪽과 동쪽의 이교 문화에 다시 빠져들지 않도록 막아준 힘은 갑옷 입은 기병대였다. 만약 동시대인과 후계자가 이들을 평범한 전사로만 추켜세웠다면, 그리고 그 이상의 군사적 효율성에 대한 소구점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400년 동안 봉건 기사도가 지속된 역사는 이들이 중세 시대 말까지 얻어낼 수 있었던 승리들 덕분이었다.

76p

7세기에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와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아랍인들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을 때, 그들이 거둔 승리는 무기가 월등해서도, 조직력의 탁월함 덕분도 아니었다. 운명을 믿는 자들의 광신적인 투지는 무장과 훈련 면에서 더 우월한 군대와도 맞설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이 새로운 영토에 자리 잡으면서 과거의 폭발적인 투지는 사라졌지만. 이전에 자신들이 무찔렀던 적들에게서 전략과 전술을 배우는 일에는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는 이 칼리파 군대의 본보기가 되었다. 레온 황제가 저술하기를, 그들은 무장과 전술 면에서 '대부분 로마의 관습을 따랐다.' 그들은 제국의 장군들처럼 갑옷으로 무장한 창병에 주요한 역할을 부여했다. 

83p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기사의 전문성에 기반한 자부심이 풍부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기사도 자체에 대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승리를 거두기 위한 전사의 조건에 용기가 포함되기는 하지만 유일하거나,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다루지 않았다. 레온은 대규모 전투 없이 진행된 군사 전술을 가장 낭비가 적고 만족스러운 전쟁의 완성으로 보았다. 그는 남자들이 싸움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호전적인 열정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멍청한 야만족의 특성이자 전투 지휘를 하며 허세를 부리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치명적인 자질이라고 보았다. 그는 책략과 매복, 그리고 후퇴하는 척하는 방법을 매우 선호했다. 가능한 우위를 접할 수 있는 요소를 우선적으로 확보하지 않은 지휘관은 레온의 가장 큰 멸시 대상이었다. 이와 더불어 오직 상대편 군대의 숫자와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방책으로 軍使 에게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지 지시를 내리는 일을 지적인 자부심으로 삼았다. 10세기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해했던 것처럼 '전쟁의 기술'은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학문적 가치를 지닌 책략이었고 16세기까지 이에 맞설 만한 상대가 없었다.

101p

군사 무기를 사용하는 기술적인 요령은 비잔티움 군대가 다른 호전적인 이웃들에게 발휘한 지배력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한 우월함의 원천은 이들이 지닌 과학과 규율, 전략과 전술, 전문적이면서도 국가에 속한 군대, 그리고 군사 교육을 받은 상위 계층이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귀족이 단순히 왕에게 아첨하는 역할만 할 때, 외국의 용병들이 이사우리아인 궁병과 아나톨리아인 기병을 대체했을 때, 전통적인 로마의 조직이 단순한 중앙집권화에 자리를 내주었을 때, 아무리 전투 기계를 다루는 뛰어난 기술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비잔티움 제국의 쇠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십자군전쟁이 시작하면서 드러난 서유럽 기사들의 용맹은 무슬림 제국과 스비아토슬라프 1세가 달성하지 못한 과업(비잔틴 제국 정복)을 성취하도록 했다.

108p

지휘 체계의 기반은 전문적인 경험보다는 사회적 지위였기에 가장 큰 분견대를 끌고 왔거나 가장 높은 계급에 위치한 자는 본인이야말로 총사령관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노련한 군인들은 전장에서 겨우 몇 개의 창만을 쥘 뿐, 상관의 지휘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용맹함이 기술과 경험보다 앞설 때, 전술과 전략은 모두 사라진다.

114p

심지어 두 세력이 실제로 근접해 있더라도 전투를 시작하려면 때때로 사령관이 가진 능력보다 더 높은 능력이 필요햇다. 그들이 서로를 발견했을 때, 그들 사이에 모라바 강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적군을 마주하고 강을 건너는 것은 13세기의 사령관에게는 능력치를 아득히 벗어나는 임무였다.

118p

황제의 엄격하고 위엄있는 카리스마로도 복종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보다 약한 통치자들에게는 이러한 과제가 거의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대다수의 군주들은 다른 종류의 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사기 면에서 제국의 군대보다는 열등했지만 규율 면에서는 더 다루기 쉬웠다. 바로 12세기 중반 이후부터 용병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고귀한 목표와 용기 같은 가치를 몰랐고 종교와 이웃의 적이었으며 유럽 내에서는 미움 받아 마땅했지만, 군주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였다. 전쟁이 단순한 변경 침입에 그치지 않고 봉건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긴 시간 지속되는 양상이 되지 그저 봉건 군대에만 기대는 게 불가능해져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용병대에게 지급할 많은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의 문제는 늘 명확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각 기사들의 복무 대신 징수한 병역면제세였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소작인들 또한 각 기사의 병역면제세를 채워줌으로써 자신은 징병의 의무를 벗어날 수 있었다. 

 호전적인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넉넉한 수의 용병을 이용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전제정은 군주가 거느리는 강력한 세력이 국가에 대한 열망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하기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당시 유럽의 폭군은 고용한 외국인 병사들을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다.

133p

스위스인은 초기 로마인처럼 강한 애국심을 지니면서도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전투 계획 면에서는 어설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두 나라 모두 (군사적인 면에서) 진정으로 훌륭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두 나라 군대 모두 꺾일 줄 모르는 용맹과 고귀한 자기희생의 열정, 그리고 극심한 흉포함, 냉정함, 상대에 대한 무자비함이 뒤섞여 있었다. 또한 독립전쟁에서 맛본 승리 덕분에 호전적인 자부심을 지녔고, 정복과 약탈을 목적으로 전쟁에 나섰다. 적들에게 이들은 무자비하고 잔인한 존재였다. 그런데 국가적 이익이 아니라 그저 싸우기 위해 전투에 나설 때에는 살육을 일삼는 그런 잔악함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기 마련이다. 피에 굶주린 로마인들이 전장에서 보인 역겨운 행태는 16세기의 수많은 전장들에서 스위스 용병이 보인 불필요한 잔혹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스위스 연방군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로 정비를 완료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군인으로서의 영광이 인생을 가치있게 만든다고 믿으며 두 번 다시 출정하지 못할 것처럼 싸웠다. 그들은 모두 동족 또는 이웃 사람들로, 각자의 고향 마을이나 출생지를 상징하는 깃발 아래 굳건히 서 있었다.  이렇게 태생적으로 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의 결집력을 높이기 위한 피곤한 동원 훈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 스위스 사령관들은 모두 동등한 수준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만약 한 사령관이 다른 사령관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계급보다는 인간적인 힘이 우위에 있어야만 했다.

"자비는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체가 남지 않을 때까지 무차별적으로 살육했다. 오스트리아군 보병대는 가장 용감한 기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하며 충격에 빠졌고 스위스 연방군의 잔혹함에 질려버렸다. 이들은 스위스연방군의 무시무시한 무기에 맞아 죽으니 물에 빠져 죽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167p

아마 어떤 지휘관이라도 병사들이 이런 식으로 수치스럽게 도망치리라고 처음부터 예상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 그래도 강력한 적을 상대로 결속력이 떨어지는 군대를 이끌고 있었음에도 극히 정교한 움직임이 필요한 작전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샤를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후방으로 빠지는 전략적인 움직임'은 병사들이 정말로 퇴각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병사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한 최대한 피해야 한다. 

 스위스군에게는 거시적인 전략이 전무했다. 일단 적군에 맞서 팔랑크스 대형을 만들어 어떤 적이든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돌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86p

스위스 군대는 자신들이 군사적 규율에 따르는 집단이 아니라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민주적 집단이라고 여겼다. 이들은 스스로를 무적이라 생각하며 헛된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명령은 무시했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면 상관에 대한 표면적인 복종까지 집어던졌다. 비코카 전투에 앞서 이들은 "지휘관, 연금 수령자, 두 배의 급료를 받는 자들이여 어디에 있는가? 이리 나와서 한 번이라도 돈을 정당하게 벌어보라고 하자. 그자들은 오늘 맨 앞에서 전투를 치러봐야 하리라."라고 외쳤다. 그 오만한 요구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바로 요구가 실제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지휘관과 대들은 앞으로 나와서 종대의 맨 앞줄을 구성했다. 이들은 전투 중에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으며 선봉대를 지휘했던 운터발덴의 빈켈리트는 창에 맞아 가장 먼저 전사한 지휘관이 되었다. 짐승 같은 괴력과 눈먼 투지만이 유일한 장점인 스위스군은 이제 전쟁의 새로운 흐름을 공부한 과학적인 지휘관들이 이끄는 군대와 맞서야 했다. 한때 유럽에서 숭배되었던 파이크 전술은 이제 너무나 전형화되는 바람에 한물 가버렸고 스위스군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보병대라는 자랑스러운 지위를 잃게 되었다.

217p

잔 다르크의 공적은 새로운 전술적인 시스템의 도입이 아니라 민중의 열망을 일깨워 잉글랜드가 더 이상 프랑스 영토에 발붙이지 못하게 했음에 있다. 작은 국가가 큰 국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점령당한 국가의 국민이 나태하고 게으르지 않으면 장악하기가 어렵다. 만약 점령당한 큰 나라의 국민이 나태함을 털고 일어난다면 -상대방의 군사력이 더 우월하다 하더라도- 점령은 불가능해진다. 

 비록 프랑스 영토에서의 잉글랜드군 축출은 군사 전략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 크게 보이지만, 15세기의 프랑스군 지휘관들이 마침내 잉글랜드군의 주도권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228p

워릭 백작의 전체 업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훌륭한 지휘관이라기보다는 배후에서 조종하는 데 뛰어난 정치적 인물, '그의 시대의 가장 교묘한 사람'이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250p

세르비아와 헝가리군에는 페르시아나 맘루크 군대와 같은 믿음직한 보병대가 없었다. 규율이 잘 잡힌 예니체리군 앞에서 이들은 어설프게 무장한 혼란스러운 무리에 불과했다. 전투가 아무리 예측할 수 없이 흘러도 예니체리는 말뚝 뒤에서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었고, 과연 쓰러지기나 할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지 못한 몇몇 전투에서는 적어도 자신의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부대의 명예를 지켰다. 처절했던 앙카라 전투에서는 튀르크군이 도망가고 나서도 한참 후까지도 버티면서 죽음을 택했다. 이들보다 더 굳건한 부대는 유럽의 어떤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류>

101p

1세기에 유명했던 비네아(vinea)와 투석기 발리스타(balista)는 10세기에도 여전히 명성을 자랑했다.

->발리스타의 철자는 ballista 이다.

112p

시몽 드 몽포르는 프랑스 귀족 출신이나 어머니가 잉글랜드 레스터 백작이었던 어머니 쪽 가문을 승계하였으며

-> 역주에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본문에 나온 시몽 드 몽포르가 아니라 그 아버지 대 시몽 드 몽포르이다.

대 시몽 드 몽포르의 어머니가 3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몬트의 딸 알미시아였고 아들인 대 몽포르가 5대 레스터 백작위를 계승했으며 본문에 나온 시몽 드 몽포르는 그 아들로, 6대 레스터 백작이다.

234p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전쟁으로 잉글랜드 왕 제임스 4세가 교전 중 전사했으나 전투는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났다.

-> 제임스 4세는 잉글랜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이다. 잉글랜드 왕은 헨리 8세였다.

235p

1492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와 브리타니 공이 전쟁을 벌이자 브리타니 공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적이 있다.

-> 브르타니 공, 즉 프랑수와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1485-88) 중 1488년에 사망했고 딸인 안 드 브르타뉴가 뒤를 이었으나 1491년 샤를 7세가 쳐들어와 강제로 혼인했다. 브르타뉴를 지키기 위해 헨리 7세가 군대를 파병해 1492년에 에타플 조약이 체결되어 배상금을 지불하고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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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경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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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 페이지에 달하는 긴 분량의 책이라 시간이 꽤 걸렸다.

앞의 덴마크 편은 부인이 덴마크인이고 아이들이 학교를 다녀서인지 정말 그 사회를 들여다보는 깊이있는 분석들이 흥미로웠는데, 뒤로 갈수록 가벼운 여행기 수준이라 몰입도가 다소 떨어졌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글을 잘 쓰는 칼럼니스트고 번역도 저자의 유머 코드를 잘 살려서 매끄럽다.

다른 리뷰를 보니 번역이 형편없다는데 문장 연결이 안 되는 비문 투성의 책들을 아직 못 접해 본 모양이다.

스칸디나비아의 큰 형님 격인 스웨덴에 대한 분량이 가장 많고 복지제도와 사회주의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다.

아이슬란드가 북유럽 연합에 낀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고 (화산과 빙하는 꼭 한 번 보고 싶다!) 노르웨이가 석유 때문에 중동 산유국과 같은 벼락 부자가 됐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석유가 북해에서 쏟아지는 노르웨이와 다른 나라들은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우리가 참조해야 할 모델이 노르웨이는 분명히 아닌 듯 하다.

역사책을 보면 덴마크 왕실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지배한 적도 있어 오늘날의 작은 영토와 맞지 않는 듯 해 참 이상했는데 영토를 빼앗기고 쪼그라든 슬픈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잔에 아직도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위로하면서 주변국들과 잘 지내고 복지국가를 만든 긍정성이 놀랍다.

아직도 만주는 우리 땅을 외치고 일본과 철천지 원수인 불같은 성정의 한국인과는 매우 다른 민족인 듯 하다.

핀란드는 이 나라들과 언어나 민족이 다르고 훨씬 오랜 기간 지배를 받았으며 소련과 대적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지킨 놀라운 국가였다.

sisu 라는 그들의 정신력이 정말 매혹적이다.

북유럽이라고 하면 복지국가를 지구상에 실현시킨 최고의 이상형인 줄 알았는데 국가관료주의와 획일성, 높은 세율, 보조금에 기대려는 인간의 심성 등이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여전히 세계 어느 국가보다 사회 안전망이 잘 되어 있는 곳이겠으나 자유와 평등이 사실 양립하기 어려운 대립적인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정규재 칼럼니스트가 어떤 토론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은 고단한 것이다.

이 말이 스칸디나비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인 것 같다.

스웨덴과 덴머크, 노르웨이의 왕실은 민주주의의 최첨단에 있는 이런 국가들과 참 어울리지 않는데 저자 역시 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또 북유럽 다섯 국가의 연합체를 제안하는데 마치 한중일이 유럽연합 같은 공동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인구수가 너무 적어서인가 이 나라들도 이민자들과의 통합을 골머리를 썩고 있다.

요즘 문제가 되는 난민이 아니라 우리나라처럼 자국민이 꺼리는 일을 하러 오는 비서구계 이민자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합해져 큰 문제가 되고 총기 사건도 종종 일어나는 모양이다.

다섯 개나 되는 많은 나라들을 이렇게 깊이 있게 분석하고 지루하지 않고 신나는 여행기를 쓸 수 있는지 감탄했다.

모름지기 이 정도는 되야 여행기라고 출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 비하면 요즘 범람하는 여행기들은 발로 쓴 게 아닐까 싶다.


<인상깊은 구절>

40p

과거에 누린 유럽의 열강 자리에서 내려온 덴마크는 안으로 틀어박혀 현저히 줄어든 영토 안에서 얼마 되지 않는 자원을 끌어모았고, 다시는 그쪽으로 욕심을 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다음으로 실행에 옮긴 전략은 '긍정적 편협주의'라고 볼 수 있다. 덴마크는 잔이 반이나 찼다는 세계관을 취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잔이 '그때' 반이 차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세계관이 오늘날까지 떠들썩하게 치켜세워지는 덴마크 사회의 성공 비결로 보인다. ... 덴마크인은 이런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당시의 고통스러운 상실을 위로받았다. 덴마크인은 지금도 누구보다 잘하는 일을 배우는 중이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원을 감사히 생각하며 최대한 활용하고, 공동체의 소박한 즐거움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들의 덴마크스러움을 기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독일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것.

65p

고도의 숙련을 요하는 산업 역시 훨씬 더 앞서간다. 숙련도가 높은 직무일수록 직원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워 신뢰는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위급 컨설턴트, 건축가, IT 전문가, 화학공학자는 일을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기가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든다. 그래서 신뢰가 훨씬 더 중요해진다. 이 때문에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처럼 신뢰 수준이 높은 사회가 제약, 전자공학 같은 선진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이 분야의 외국 기업들을 유치할 수 있는 것이다. ... 덴마크인은 언제나 신뢰 수준과 사회적 결속력이 높았으며 복지국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고 주장한다. 이 진영의 최우선 과제는 그들이 보기에 지속 불가능한 덴마크의 사회복지 혜택을 줄이고 세율을 낮추는 것으로, 이들은 경제 평등 회복보다는 돈 잘 버는 기업들을 독려해 덴마크의 낮은 생산성 증가율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이들은 북유럽의 사회복지제도가 덴마크와 다른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이 오늘날 누리는 경제 평등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더 광범위한 사회저 평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적 평등은 공공 부문과 높은 세율이 정착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 바이킹은 덴마크의 뛰어난 평등의식의 가장 유력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은 세금이 열심히 일할 의욕을 꺾고 야망과 혁신을 가로막으며, 복지제도가 빈대 근성을 가진 무기력한 하층 계급을 양산하고,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 한 끗 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사, 심지어 유전학을 들먹이며 북유럽의 기적을 설명하는 편이 훨씬 더 흡족하다.

(높은 세금은 정말 일할 의욕을 확실하게 꺾고 탈세를 양산한다. 자영업 해 본 분들은 무슨 얘기인지 알 것이다. 정부의 바램과는 달리 세금을 많이 책정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온갖 방법들을 동원하여 실제로 많이 걷기도 힘들 뿐더러, 그도 저도 못하는 평범한 자영업자들은 결국 근로 시간을 줄여 버린다.)

89p

많은 덴마크인에게 높은 세금은 집단적 희생의 궁극적 상징처럼 보인다.

"나 세금 많이 내, 라는 자부심의 문제입니다. 자선처럼 지위의 표현이죠. 그래서 외스테르브로(코펜하겐의 중산층 보헤미안들이 사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 30%가 적녹연맹당(덴마크의 극좌 주요 정당)에 투표하는 겁니다."

(불행히도 한국은 세금을 많이 내는 계층이 사회적 자부심을 느낄 수 없는 분위기로, 그 정도로 돈을 벌면서 겨우 그거 내냐는 온갖 비난만 받을 뿐이다. 고소득자들 세율이 소득의 절반이 넘는데도 여전히 집단적 희생의 상징으로 보기는 커녕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들을 질시하고 비난할 뿐이다. 복지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더더 많은 세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들 나는 아직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여유가 없고 내 위의 계층부터는 더 내야 한다고 믿는다)

"덴마크는 심하게 높은 세금으로 골치를 썩는 나라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온갖 방법으로 탈세 한다. 이 모든 조세 제도는 도덕성에 기대서는 지속 불가능하리라 본다. 세금 부담은 이미 너무 커서 덴마크인은 자신들의 나라를 침략자로부터 지키기보다 차라리 침략당하길 바란다. 잃을 재산이 없기 때문이다."

101p

공립기초학교가 덴마크의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핵심 요소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덴마크의 학교들이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의 잠재적 성과를 중하위권 학생들을 위해 희생시킨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수업 수준을 낮춰 최하위권 학생들을 수업에 참여시키고 시험은 등한시한다. 이런 말을 하면 정신나간 반동주의자처럼 들린다는 점을 알지만, 실제 교육은 뒷전이고 사회성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부부는 결국 아이들을 사립학교로 전학시켰다. 

131p

덴마크인은 자랑하는 사람을 특히 경멸하는데, 평등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사 시대 사회와 비슷한 수렵채집 사회는 대단히 평등합니다. 누군가 더 지배적 위치에 서기 시작하면 놀림감이 되거나 비웃음을 당하거나 무리에서 배척당합니다. 이를 반우월 전략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더 평등한 사회를 유지하는 거죠."

 아마 이 때문에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고, 그렇게 이룬 성공을 과시하는 행동을 그토록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144p

그는 덴마크인이 광신적 애국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스웨덴, 독일과 이웃한 작은 나라이기에 국가 정체성을 표출해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며, 그래서 점점 더 국기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529p

스웨덴에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내고는 있지만 여전히 북유럽 나라들이 다른 어떤 유럽 나라들보다 더 큰 동지의식을 갖고 있으리라. 끊임없는 다툼에도 불구하고 북유럽 지역은 발칸반도의 전철을 밟을 것 같지는 않다. "아시겠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가 아닙니다."

 사실 스웨덴의 위대한 사회민주주의 여정은 수십 년 전에 실패로 끝났다. 당시 스웨덴의 경제 상황은 악화됐고, 이에 스웨덴 정부는 상당히 급진적인 민영화 계획을 도입했으며 세금과 복지 혜택의 범위를 줄였다.

"이 복지국가 스웨덴은 지나치게 관료주의적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정부에서 일합니다. 수천 명이 실업수당으로 살 수 있다는 실은 물론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런 의존 시스템은 바람직하지 못하죠. 저는 스웨덴을 떠났고 제 일을 해서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540p

이러한 계층 이동성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학교다, 수준 높은 무상 교육 제도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자주권은 북유럽 지역의 경제 평등과 폭넓은 사회복지 안전망만큼이나 중요하다. 스칸디나비아의 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일 뿐 아니라 교육의 기회는 모두에게 무상으로 주어진다. 이것이 북유럽 예외주의의 토대다.

543p

이민자 통합이 시간은 걸릴 것이다. 미국은 수 세기 동안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과 북유럽의 실용주의가 공포와 편견을 극복하기를 기대해보자.


<오류>

127p

"오스카상을 받은 영화감독 빌레 아우구스트가 대표적입니다."

-> 빌레 아우구스트는 <정복자 펠레>를 만든 감독인데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두번 받은 기록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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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 - 유럽의 현재와 과거, 미래가 공존하는 기억의 장소들
통합유럽연구회 지음 / 책과함께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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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페이지나 되는 분량이라 긴장하고 읽었는데 주제가 박물관 미술관이라 그런지 쉽게 잘 읽힌다.

유럽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쓴 박물관 이야기라 당시 시대 배경과 역사적 의의를 잘 설명해 주고 있어 도움이 많이 됐다.

특히 루브르나 대영박물관 같은 흔히 알려진 유명 미술관 외에도 현대에 세워진 박물관들이 흥미롭다.

독일에는 분단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기 위해 <눈물의 궁전>, <독일역사박물관> <테러의 지형도> 같은 독특한 박물관들이 많다.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키고도 유럽 통합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이해된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당시 큰 전투를 기념하는 베르됭 기념관과 캉=노르망디 기념관도 인상적이고, 이민자들을 위한 국립이주사박물관이나 마르세유에 있는 유럽지중해박물관, 네덜란드 국립해양박물관 등도 독특한 컨셉이 기억에 남는다.

중세 문화를 보여주는 클뤼니 박물관이나 바티칸 박물관 같은 고전적인 박물관도 역시 관심이 간다.

아쉬운 점은 역시 도판이다.

박물관 소개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역사에 중점을 둔 책의 컨셉상 화려한 도판을 싣기는 어려웠겠으나 컬러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어 매우 아쉽다.

한 국가의 국민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왜 역사를 배우고 박물관을 세우는가?

유럽 연합이 탄생한 후 유럽인을 위한 박물관이 많이 세워지고 있는데 이것은 유럽인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 역시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기 위해 역사를 배우고 조상들의 유물이 있는 박물관에 간다.

아직은 세계시민주의 같은 거창한 목표에 도달하기는 어렵겠으나 역사와 국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책의 중간에,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북한의 3대 세습과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이 있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대한 분노의 표현인 듯 한데, 명백하게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과 3대째 부자 세습을 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비정상적인 독재자를 어떻게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까?

탄핵이 되어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해서 당선 과정마저 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가치 판단이 진행 중인 현대 정치사에 대한 섣부른 평가는 한 권의 책에서라면 매우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05p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상속녀였던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는 모든 예술품을 국가에 기증했다. 그녀는 예술적 감수성이 대단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토스카나대공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로렌가와 예술품 양도협정에 서명하며 몇 가지 조항을 내걸었다.모든 예술품은 가문이 아닌 국가에 귀속되어야 하고, 피렌체 시민들의 공익에 보탬이 되어야 하며,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항들이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우피치는 단순히 가문의 영광을 빛내기 위한 전시 공간이 아닌 국가 소유의 미술관이자 시민들의 교육기관 그리고 외국인 관광을 촉진하는 경제적 자원으로 인식된 것이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미술품이 토스카나공국의 외부로 반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조항을 넣음으로써 새로운 왕가에 의한 컬렉션의 해체를 막았다.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 입구에 안나 마리아 루이자의 초상이 걸려 있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1p

프랑스의 국난 극복과 영광의 재현 과정에 초점을 맞춤에 따라 각각의 살상 무기들에는 단순한 전쟁 도구가 아닌 국난 극복의 수단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이 부여된다. 

 특히 전쟁 포스터들은 전시동원 체제의 단면을 보여주면서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강조하는 포스터 속 구호들은 20세기 전반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감정들을 현재에 다시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상징들은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노동자와 군인이 함께 걸아가는 그림 아래 적힌 "함께 우리는 승리한다"라는 구호는 계급보다 민족을 강조함으로써 국민 정체성을 강화한다. 

202p

정체성이나 정통성을 찾는 개인이나 집단이 주로 역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기초하지 않은 정체성과 정통성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갖는 데 한계가 있으며, 가변적이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란 흔히 말하듯 '재미있는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 집단적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며, 개인과 집단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이들을 권위로 치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매우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도구다. 역사를 둘러싸고 국가 혹은 집단 간에 치열한 논쟁과 갈등이 벌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의 이러한 기능은 대중과의 소통 과정에서 이루어지며, 중등학교를 비롯한 각종 교육기관과 박물관은 역사와 대중이 만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두 공간은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열려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활용을 의도하는 개인이나 집단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게 간주된다. 박물관은 다양한 형태의 유물 수집, 보존, 연구라는 전통적인 기능을 넘어서 상설 및 특별전시, 각종 역사 및 문화 관련 행사, 박물관 학습, 디지털 정보 제공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힘으로써 역사의 대중화라는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209p

박물관의 현대사 전시는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대중이 접하는 역사란 과거 사료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주관적인 분석과 해석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시대의 증인들이 아직 살아 있는 현대사의 경우는 역사학자의 권위가 크게 약화된다. 그 이유는 특정 시대를 직접 경험한 개개인이 곧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집은 현대사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여 관람객에게 정보를 전달하거나 역사학자의 해석을 학습시키기보다는 전시물을 보고 스스로 느끼게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국가는 역사 없이, 역사로부터 얻은 경험 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민족이나 전통으로 표현되는 집단정체성은 흔히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인간은 놀랍게도 허구와 상상에 의존하여 집단의 결속을 추구한다. 인간의 이성은 적어도 집단의식에서만큼은 감성에 압도당하는 듯이 보인다.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에게서 볼 수 없는 대규모 집단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허구를 믿는 능력 때문이고, 이것이 인간을 지구의 지배자로 만든 비결이었다.

252p

가톨릭이 교회의 권위 회복에 집중하는 동안 신대륙 발견과 지동설을 둘러싼 갈릴레이와 교회의 갈등이 알려지면서 유럽은 자연스럽게 계몽 시대로 진입했다. 교황은 과학의 발전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장식의 극대화를 추구한 바로크 예술과 건축에 대한 지원은 멈추지 않았다. 바티칸 미술관은 교회가 예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후원한 역사적 성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바티칸박물관은 단순히 교회 유물뿐만 아니라 서양 문명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298p

15세기 유럽에서는 성직자, 왕과 제후 그리고 귀족과 도시민들, 길드와 여러 단체들의 예술작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도시민들의 부는 예술작품 생산을 촉진했으며, 가구, 스테인드글라스 창, 식기와 게임 도구 등 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제작되었다. 15세기 내내 부르고뉴인들은 네덜란드와 부르고뉴, 이어서 스페인 사이에 예술가들의 작품활동을 고무했다. 

301p

고전고대와 중세 예술품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17~18세기 일부 특권층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예술품 전시를 공개하는 교육적 기능과 역할이 강조되는 근대적 박물관과 문화재,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특히 '가르치는 국가'의 이념을 선포한 프랑스대혁명 후 근대 박물관은 국가가 주도하여 관장하는 곳이 되었다. 

 19세기는 공공박물관의 전성기였으며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전시를 통한 교육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상주의의 확대 및 세계무역의 발달과 더불어 도시가 빠르게 번영하면서 도시민들의 교육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이를 수용하는 데 있어 근대 박물관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 클뤼니박물관은 프랑스의 박물관들의 지지와 후원 아래 서양 중세에 대한 이해와 유럽인의 정체성에 대한 개념과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열정적이고 지속적인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관심과 손길은 클뤼니박물관의 위치를 돈독하게 할뿐더러 이 박물관의 다양하고 풍분한 컬렉션은 존재감을 돋보이게 한다.

319p

집단투쟁, 군대, 특히 족외혼으로 꾸려진 가정은 새로운 국가에서 정착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1920년대부터는 학교가 부모를 따라 이민 온 아이들을 새로운 사회에 통합시키고 적응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중국적제도가 시행된 1889년부터 국적을 쉽게 얻게 된 이민자들은 프랑스 정착에 한결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후 세대를 거치며 프랑스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나라가 되었다.

<스포츠>와 <종교>, <문화> 또한 이민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스포츠에서는 1998년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우승을 이끈 알제리 이민자의 아들 지단이 결정적인 장면을 연출했따. 한편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이슬람은 '세속국가' 프랑스에서 이민자들의 정체성을 강하게 내비치는 요인이다.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신도 수가 많은 이슬람은 급속히 증가하는 모스크의 건설과 대외 긴장관계로 세속주의자들과 상당한 갈등을 겪고 있다.

 이주사박물관의 상설전시에서는 식민지 출신 이주민의 역사가 다른 유럽 지역 출신 이주민의 역사와 특별히 다르게 취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초대 관장이 말한 "그들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다"라는 취지의 발언이 어느 정도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329p

필진은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학자로 구성되었으며, 양국의 언어로 동시에 출간되었다. 양국의 국가수반 모두 공동 교과서가 "양국의 더 친밀하고 긍정적인 관계" 개선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고 자찬했다. 프랑스는 공동 역사교과서 집필이 "프랑스와 독일 간 화해를 다짐하는 상징적인" 일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우리도 일본과 이런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웃과 친하게 지내기란 참 어려운 일인데 두 나라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놀랍다)

335p

변화가 제한적이었던 까닭은 베르됭기념관은 프랑스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1차 세계대전에 관한 것인 반면, 캉-노르망디 기념관은 1940년 6월 22일 파리가 나치에 함락당하고,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비시 괴뢰정부가 수립되는 등 프랑스가 큰 위기를 겪었던 2차 세계대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캉-노르망디기념관의 콘셉트 변화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독일에 의한 점령 시기에서 독일과의 화해로 나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며 예산도 국가와 민간부문의 공동 재원 마련으로 형성되었던 만큼 아직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 있는 민간부문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알 수 없었던 것이다.

(4년 점령도 여전히 적개심이 남아 있다면 36년 식민 지배는 앞으로도 쉽게 화해하기가 어렵긴 할 것 같다 ㅠㅠ)

343p

연방의회는 통일 독일 수도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중심부에 대규모의 돌무덤과 같은 추모 조형물을 세움으로써 전 세계에 그들 스스로 자초한 서구 문명의 파국과 단절을 상징적으로 질료화하는 동시에 독일이 저지른 일을 잊지 않겠다는 기억에의 의지를 다시 한 번 국내외에 알리게 되었다. 이로써 독일 통일로 인해 불안해하는 이웃나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독일의 위상을 높이는 등 중요한 '정치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본이 식민 지배나 난징 대학살 등에 대해 이 정도의 강력한 반성을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일까?)

351p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말~21세기 초 '기념비적인 조형물'을 통해 한 시대를 기억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선보임으로써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홀로코스트 투어리즘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비판 또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세월호도 그렇게 되려나?)

378p

과학은 주로 자연에 대한 심도 깊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과 부유층에 의한 체계적인 지식이지만, 기술은 편리성을 추구하는 장인계층의 경험과 사고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사실상 별개의 분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18세기 말 상업 발달로 형성된 자본이 기계력과 공장제 생산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와 결합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는데,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자본이 융합되었다.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학문이 수도원과 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했지만 과학은 학회라는 집단을 통해 발전했다. 하지만 교회가 아닌 사상적 집단에 대한 통제와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에 대한 종교계의 억압 및 실험을 도입한 갈릴레이의 현시적 변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적 전통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학회는 곧 소멸되었다.

385p

그레구아르 신부는 과학기술박물관이라는 장소가 프랑스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기술공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산업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문화적 개념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산업을 박물관과 연계시킨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박물관을 인간 정신행위의 산물이 결집된 장소라고 했던 근대 계몽주의의 백과전서식 정신에 기반하여, 과학박물관은 문화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 그리고 유희적 기능을 종합적으로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19p

뮈셈이 바라본 소통과 상호작용의 장인 지중해는 난민들의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 되고 있다. 아무리 뮈셈이 박물관의 구성을 통해 유럽과 지중해 문명의 상호작용을 자연스럽게 설명하면서 관람객에서 다가간다고 할지라도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민족주의적인 세계관, 다양한 문화의 공존을 불편하게 여기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이 대중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를 일순간에 제거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434p

유럽이 하나라고 하는 공동체적 '유럽 인식'은 공동의 역사의식과 정체성 없이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법과 규정만으로는 장기적인 결속을 다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유럽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유럽인이라는 인식을 통해 앞으로 공동체의 발전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향후 공동체 발전을 주도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통합의 동인을 분명 정치적, 경제적 통합 논리만으로 설명하는 데 많은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450p

박물관과 유로피아나라는 2개의 플랫폼은 모두 지식 자체가 아니라 지식에 대한 열망을 강조하며, 이곳에서 벌어지는 담론들의 유용성이 사회적 관계에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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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9-01-16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둘러보네요. 여전히 즐독하시는군요. 건강히 잘 지내시길요^^

marine 2019-01-16 16:20   좋아요 0 | URL
아, 반갑습니다~~
열심히 읽고 싶은데 사는 게 바빠 한동안 못 보다가 새해맞이로 열심히 읽고 있어요^^

여울 2019-01-1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직장생활은 어떠신지요^^ 즐거운 독서되길 바랄께요~~~^^

갈릴레이 2019-03-28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감상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중세 유럽의 문화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49
이케가미 쇼타 지음, 이은수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짧은 분량의 일본 문고들을 보면 확실히 일본 사람들은 오타쿠적인 기질이 있고 우리보다 훨씬 더 서양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으며 무엇보다 대단한 출판 대국인 것 같다.

trivia 라는 시리즈 제목처럼 사소해 보이지만 궁금한 세부적인 것들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풀어 놓는다.

사실 다른 주제들, 이를테면 영국 집사나 메이드, 귀족들의 삶, 정원문화 등은 아주 재밌고 유익했는데 이 책은 밀도 면에서 다소 떨어지긴 하다.

분량도 230 페이지로 짧은데 한 쪽은 정리를 한답시고 이상한 도해와 요약문을 실어서 난삽하다.

고등학교 문제집도 아니고 왠 요약본인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인들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당시 시대상을 쉽게 설명해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국가의 치안이 발달하고 이성적인 개인들이 사는 오늘날과 전통사회는 확실히 매우 달랐던 것 같다.


<인상 깊은 구절>

24p

현대 사회에서도 자연 재해와 화재, 그리고 그에 따라 일어나는 기근과 혼란은 극복할 수 없는 비극이다. 하물며 간단한 기계 장치와 인력, 동물의 힘에 의존하며 정보전달 수단도 발전하지 않았던 중세 세계에 있어서 재난은 거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중세의 사람들은 대처하기 힘들고 원인조차 알 수 없는 강대한 부조리함에서 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내려진 신의 경고 또는 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교회와 수도회는 이러한 재난을 교묘하게 자신들의 강론에 도입하였다. 현실적인 문제를 봐도 당시 사람들이 재난에 대해 취할 방도가 신에 대한 속죄밖에 없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기도와 의식은 사람들의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교회와 수도회가 행하는 빈민 구제는 재난으로 인해 집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을 구원해주었다. ... 사람들은 기근을 신의 시련이라 생각하여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식과 청빈한 생활을 장려했다. 이는 실제로 기근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특훈이기도 했다.

30p

중세 초기에 일어나는 범죄에 대한 대처는 국왕이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각 지자체가 주최한는 재판소에 판결과 형의 집행을 맡겼다. 또한 무력으로 자신의 영역을 소지하는 자가 자신의 영역을 외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지 의무이기도 했다. 설령 빈곤한 집안의 가장이라 해도 자유민으로서의 신분이 보증되어 있다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권리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경찰권이 발달하지 못했고 재판에 죄인을 출두시키려면 원고 측과 그 친족이 추적해야만 했던 상황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복수를 무조건 허락해버리면 피해자 간에 피튀기는 혈투가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착안해낸 것이 보호 구역이라고 하는 일종의 안전 지역이었다.

32p

중세 세계의 형벌은 범죄자를 갱생하여 범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범죄를 억제하는 형태였다. ... 조사능력이 부족했던 중세 세계에서는 공정한 판결이 내려졌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고문에 의한 자백과 결투 재판, 신명 재판 등이 통용되고 있었다. 이 시대는 징역 같은 자유형은 없었으며 감옥은 재판이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범죄자를 구속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위생이 불량하고 식량 사정이 나빴던 감옥 생활은 수감된 범죄자를 크게 괴롭혔다. 

182p

로마 가톨릭 교회를 시작으로 하는 그리스도 교회는 그 신앙을 확대하기 위해서 예부터 내려온 이교적 신들에 대한 신앙을 타파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고대 신앙을 축소하여 자신들의 가르침 안에 도입함으로써 고대 신들을 믿던 민중을 그리스도 교도로 개종시켰다. 원래 우상 숭배가 금지된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와 마리아상을 세우게 된 것도, 부활설제 수목을 이용하는 것도 이교적 신앙 의식을 도입한 여파이다. 유일신 외에 성인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신앙도 이러한 이교적 문화의 흔적 중 하나였다. 성인은 각 지역마다 숭배하던 신들의 흔적 또는 민간 설화 등의 주인공이다. 그들에 대한 전승은 그리스도교적 훈화로 바꿔치지 당했으며 그 기적은 신의 힘이 초래한 것으로 변했다.

190p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유럽을 지배했던 중세는 다수의 신학자들이 세계와 사상의 모순을 해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연구와 해석을 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다고 일컫어지는 연옥도 그러한 신학자의 몽상에 의해 태어난 새로운 세계였다. 연옥의 존재는 신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커다른 구원을 가져왔다. 그리스도교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는 고리대금업조차 생전의 선행에 따라서 정화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것이다. 또한 당연하게도 죄를 씻고 연옥에 들어가도록 중개해주는 성직자들의 지배력이 강화되었으며, 수입 또한 증가하게 되었다.

192p

그리스도교에서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해낸 위대하고도 선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는 수많은 부조리함과 악의가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고통을 신이 자신들에게 내린 원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여 그 모순을 해소하려고 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악을 짊어져야 하는 존재를 몽상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악마였다. ... 다양한 자연재해와 전염병도 종종 신의 분노가 아니라 악마의 소행으로 여겼다. ... 현대 시점에서 보자면 히스테리와 정신 착란 부류라 생각되지만 당시 사람들은 악마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악마 퇴치는 어디까지나 의식에 지나지 않지만 정신적인 안정을 주어 실제로 효과도 봤다. 

196p

애초에 기사는 혈통으로 이루어진 귀족 계급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직무에 의해 귀족 계급으로 편입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206p

광대는, 태어나면서부터 핸디캡을 안고 있는 인간을 왕과 영주가 소유물로 삼은 경우와, 그들의 몸짓과 언동을 흉내 내는 직업 광대가 있다. 광대는 멍청하다는 인식이 있기에 왕이라 해도 무례한 발언이나 비판이 허락되었다. 교회는 순진무구를 가장하여 저속한 기예를 하는 직업 광대를 악덕한 존재로 치부한다. 

224p

싸우는 사람들이 권력자였던 사회에서 전쟁은 일상이었다. 그러나 현대에서 보는 국가 간의 섬멸전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중세 전쟁은 대부분이 소규모였다. 페데(사적 전투)라 불리는 복수권을 방패로 삼는 약탈은 많은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중세시대를 관통하는 경제 활동으로 행해졌다. 하지만 국가라는 틀이 강해지자 십자군 등의 종교 전쟁, 국내외의 주권 분쟁도 벌어지게 된다. ... 이문화권과 이단에 대한 공격을 제외하면 전쟁은 유희적인 면도 보였다. 야전이라면 회전할 지역과 시간을 지정하여 상대하고 일몰이 되면 자신의 진지로 물러났다. 또한 몸값을 받을 수가 있기에 전투 중에 사망한 것만 아니라면 기사는 산 채로 생포됐다. 경기같은 느낌이 나는 야전에 비해 농성전은 지혜와 무력을 집중하는 총력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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