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 - 유럽의 현재와 과거, 미래가 공존하는 기억의 장소들
통합유럽연구회 지음 / 책과함께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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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페이지나 되는 분량이라 긴장하고 읽었는데 주제가 박물관 미술관이라 그런지 쉽게 잘 읽힌다.

유럽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쓴 박물관 이야기라 당시 시대 배경과 역사적 의의를 잘 설명해 주고 있어 도움이 많이 됐다.

특히 루브르나 대영박물관 같은 흔히 알려진 유명 미술관 외에도 현대에 세워진 박물관들이 흥미롭다.

독일에는 분단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기 위해 <눈물의 궁전>, <독일역사박물관> <테러의 지형도> 같은 독특한 박물관들이 많다.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키고도 유럽 통합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이해된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당시 큰 전투를 기념하는 베르됭 기념관과 캉=노르망디 기념관도 인상적이고, 이민자들을 위한 국립이주사박물관이나 마르세유에 있는 유럽지중해박물관, 네덜란드 국립해양박물관 등도 독특한 컨셉이 기억에 남는다.

중세 문화를 보여주는 클뤼니 박물관이나 바티칸 박물관 같은 고전적인 박물관도 역시 관심이 간다.

아쉬운 점은 역시 도판이다.

박물관 소개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역사에 중점을 둔 책의 컨셉상 화려한 도판을 싣기는 어려웠겠으나 컬러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어 매우 아쉽다.

한 국가의 국민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왜 역사를 배우고 박물관을 세우는가?

유럽 연합이 탄생한 후 유럽인을 위한 박물관이 많이 세워지고 있는데 이것은 유럽인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 역시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기 위해 역사를 배우고 조상들의 유물이 있는 박물관에 간다.

아직은 세계시민주의 같은 거창한 목표에 도달하기는 어렵겠으나 역사와 국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책의 중간에,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북한의 3대 세습과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이 있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대한 분노의 표현인 듯 한데, 명백하게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과 3대째 부자 세습을 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비정상적인 독재자를 어떻게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까?

탄핵이 되어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해서 당선 과정마저 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가치 판단이 진행 중인 현대 정치사에 대한 섣부른 평가는 한 권의 책에서라면 매우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05p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상속녀였던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는 모든 예술품을 국가에 기증했다. 그녀는 예술적 감수성이 대단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토스카나대공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로렌가와 예술품 양도협정에 서명하며 몇 가지 조항을 내걸었다.모든 예술품은 가문이 아닌 국가에 귀속되어야 하고, 피렌체 시민들의 공익에 보탬이 되어야 하며,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항들이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우피치는 단순히 가문의 영광을 빛내기 위한 전시 공간이 아닌 국가 소유의 미술관이자 시민들의 교육기관 그리고 외국인 관광을 촉진하는 경제적 자원으로 인식된 것이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미술품이 토스카나공국의 외부로 반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조항을 넣음으로써 새로운 왕가에 의한 컬렉션의 해체를 막았다.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 입구에 안나 마리아 루이자의 초상이 걸려 있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1p

프랑스의 국난 극복과 영광의 재현 과정에 초점을 맞춤에 따라 각각의 살상 무기들에는 단순한 전쟁 도구가 아닌 국난 극복의 수단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이 부여된다. 

 특히 전쟁 포스터들은 전시동원 체제의 단면을 보여주면서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강조하는 포스터 속 구호들은 20세기 전반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감정들을 현재에 다시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상징들은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노동자와 군인이 함께 걸아가는 그림 아래 적힌 "함께 우리는 승리한다"라는 구호는 계급보다 민족을 강조함으로써 국민 정체성을 강화한다. 

202p

정체성이나 정통성을 찾는 개인이나 집단이 주로 역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기초하지 않은 정체성과 정통성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갖는 데 한계가 있으며, 가변적이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란 흔히 말하듯 '재미있는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 집단적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며, 개인과 집단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이들을 권위로 치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매우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도구다. 역사를 둘러싸고 국가 혹은 집단 간에 치열한 논쟁과 갈등이 벌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의 이러한 기능은 대중과의 소통 과정에서 이루어지며, 중등학교를 비롯한 각종 교육기관과 박물관은 역사와 대중이 만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두 공간은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열려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활용을 의도하는 개인이나 집단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게 간주된다. 박물관은 다양한 형태의 유물 수집, 보존, 연구라는 전통적인 기능을 넘어서 상설 및 특별전시, 각종 역사 및 문화 관련 행사, 박물관 학습, 디지털 정보 제공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힘으로써 역사의 대중화라는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209p

박물관의 현대사 전시는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대중이 접하는 역사란 과거 사료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주관적인 분석과 해석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시대의 증인들이 아직 살아 있는 현대사의 경우는 역사학자의 권위가 크게 약화된다. 그 이유는 특정 시대를 직접 경험한 개개인이 곧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집은 현대사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여 관람객에게 정보를 전달하거나 역사학자의 해석을 학습시키기보다는 전시물을 보고 스스로 느끼게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국가는 역사 없이, 역사로부터 얻은 경험 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민족이나 전통으로 표현되는 집단정체성은 흔히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인간은 놀랍게도 허구와 상상에 의존하여 집단의 결속을 추구한다. 인간의 이성은 적어도 집단의식에서만큼은 감성에 압도당하는 듯이 보인다.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에게서 볼 수 없는 대규모 집단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허구를 믿는 능력 때문이고, 이것이 인간을 지구의 지배자로 만든 비결이었다.

252p

가톨릭이 교회의 권위 회복에 집중하는 동안 신대륙 발견과 지동설을 둘러싼 갈릴레이와 교회의 갈등이 알려지면서 유럽은 자연스럽게 계몽 시대로 진입했다. 교황은 과학의 발전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장식의 극대화를 추구한 바로크 예술과 건축에 대한 지원은 멈추지 않았다. 바티칸 미술관은 교회가 예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후원한 역사적 성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바티칸박물관은 단순히 교회 유물뿐만 아니라 서양 문명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298p

15세기 유럽에서는 성직자, 왕과 제후 그리고 귀족과 도시민들, 길드와 여러 단체들의 예술작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도시민들의 부는 예술작품 생산을 촉진했으며, 가구, 스테인드글라스 창, 식기와 게임 도구 등 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제작되었다. 15세기 내내 부르고뉴인들은 네덜란드와 부르고뉴, 이어서 스페인 사이에 예술가들의 작품활동을 고무했다. 

301p

고전고대와 중세 예술품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17~18세기 일부 특권층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예술품 전시를 공개하는 교육적 기능과 역할이 강조되는 근대적 박물관과 문화재,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특히 '가르치는 국가'의 이념을 선포한 프랑스대혁명 후 근대 박물관은 국가가 주도하여 관장하는 곳이 되었다. 

 19세기는 공공박물관의 전성기였으며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전시를 통한 교육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상주의의 확대 및 세계무역의 발달과 더불어 도시가 빠르게 번영하면서 도시민들의 교육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이를 수용하는 데 있어 근대 박물관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 클뤼니박물관은 프랑스의 박물관들의 지지와 후원 아래 서양 중세에 대한 이해와 유럽인의 정체성에 대한 개념과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열정적이고 지속적인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관심과 손길은 클뤼니박물관의 위치를 돈독하게 할뿐더러 이 박물관의 다양하고 풍분한 컬렉션은 존재감을 돋보이게 한다.

319p

집단투쟁, 군대, 특히 족외혼으로 꾸려진 가정은 새로운 국가에서 정착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1920년대부터는 학교가 부모를 따라 이민 온 아이들을 새로운 사회에 통합시키고 적응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중국적제도가 시행된 1889년부터 국적을 쉽게 얻게 된 이민자들은 프랑스 정착에 한결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후 세대를 거치며 프랑스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나라가 되었다.

<스포츠>와 <종교>, <문화> 또한 이민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스포츠에서는 1998년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우승을 이끈 알제리 이민자의 아들 지단이 결정적인 장면을 연출했따. 한편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이슬람은 '세속국가' 프랑스에서 이민자들의 정체성을 강하게 내비치는 요인이다.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신도 수가 많은 이슬람은 급속히 증가하는 모스크의 건설과 대외 긴장관계로 세속주의자들과 상당한 갈등을 겪고 있다.

 이주사박물관의 상설전시에서는 식민지 출신 이주민의 역사가 다른 유럽 지역 출신 이주민의 역사와 특별히 다르게 취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초대 관장이 말한 "그들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다"라는 취지의 발언이 어느 정도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329p

필진은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학자로 구성되었으며, 양국의 언어로 동시에 출간되었다. 양국의 국가수반 모두 공동 교과서가 "양국의 더 친밀하고 긍정적인 관계" 개선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고 자찬했다. 프랑스는 공동 역사교과서 집필이 "프랑스와 독일 간 화해를 다짐하는 상징적인" 일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우리도 일본과 이런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웃과 친하게 지내기란 참 어려운 일인데 두 나라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놀랍다)

335p

변화가 제한적이었던 까닭은 베르됭기념관은 프랑스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1차 세계대전에 관한 것인 반면, 캉-노르망디 기념관은 1940년 6월 22일 파리가 나치에 함락당하고,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비시 괴뢰정부가 수립되는 등 프랑스가 큰 위기를 겪었던 2차 세계대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캉-노르망디기념관의 콘셉트 변화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독일에 의한 점령 시기에서 독일과의 화해로 나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며 예산도 국가와 민간부문의 공동 재원 마련으로 형성되었던 만큼 아직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 있는 민간부문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알 수 없었던 것이다.

(4년 점령도 여전히 적개심이 남아 있다면 36년 식민 지배는 앞으로도 쉽게 화해하기가 어렵긴 할 것 같다 ㅠㅠ)

343p

연방의회는 통일 독일 수도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중심부에 대규모의 돌무덤과 같은 추모 조형물을 세움으로써 전 세계에 그들 스스로 자초한 서구 문명의 파국과 단절을 상징적으로 질료화하는 동시에 독일이 저지른 일을 잊지 않겠다는 기억에의 의지를 다시 한 번 국내외에 알리게 되었다. 이로써 독일 통일로 인해 불안해하는 이웃나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독일의 위상을 높이는 등 중요한 '정치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본이 식민 지배나 난징 대학살 등에 대해 이 정도의 강력한 반성을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일까?)

351p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말~21세기 초 '기념비적인 조형물'을 통해 한 시대를 기억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선보임으로써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홀로코스트 투어리즘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비판 또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세월호도 그렇게 되려나?)

378p

과학은 주로 자연에 대한 심도 깊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과 부유층에 의한 체계적인 지식이지만, 기술은 편리성을 추구하는 장인계층의 경험과 사고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사실상 별개의 분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18세기 말 상업 발달로 형성된 자본이 기계력과 공장제 생산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와 결합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는데,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자본이 융합되었다.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학문이 수도원과 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했지만 과학은 학회라는 집단을 통해 발전했다. 하지만 교회가 아닌 사상적 집단에 대한 통제와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에 대한 종교계의 억압 및 실험을 도입한 갈릴레이의 현시적 변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적 전통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학회는 곧 소멸되었다.

385p

그레구아르 신부는 과학기술박물관이라는 장소가 프랑스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기술공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산업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문화적 개념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산업을 박물관과 연계시킨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박물관을 인간 정신행위의 산물이 결집된 장소라고 했던 근대 계몽주의의 백과전서식 정신에 기반하여, 과학박물관은 문화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 그리고 유희적 기능을 종합적으로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19p

뮈셈이 바라본 소통과 상호작용의 장인 지중해는 난민들의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 되고 있다. 아무리 뮈셈이 박물관의 구성을 통해 유럽과 지중해 문명의 상호작용을 자연스럽게 설명하면서 관람객에서 다가간다고 할지라도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민족주의적인 세계관, 다양한 문화의 공존을 불편하게 여기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이 대중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를 일순간에 제거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434p

유럽이 하나라고 하는 공동체적 '유럽 인식'은 공동의 역사의식과 정체성 없이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법과 규정만으로는 장기적인 결속을 다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유럽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유럽인이라는 인식을 통해 앞으로 공동체의 발전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향후 공동체 발전을 주도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통합의 동인을 분명 정치적, 경제적 통합 논리만으로 설명하는 데 많은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450p

박물관과 유로피아나라는 2개의 플랫폼은 모두 지식 자체가 아니라 지식에 대한 열망을 강조하며, 이곳에서 벌어지는 담론들의 유용성이 사회적 관계에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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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9-01-16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둘러보네요. 여전히 즐독하시는군요. 건강히 잘 지내시길요^^

marine 2019-01-16 16:20   좋아요 0 | URL
아, 반갑습니다~~
열심히 읽고 싶은데 사는 게 바빠 한동안 못 보다가 새해맞이로 열심히 읽고 있어요^^

여울 2019-01-1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직장생활은 어떠신지요^^ 즐거운 독서되길 바랄께요~~~^^

갈릴레이 2019-03-28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감상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