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이야기 - 만주의 눈으로 청 제국사를 새로 읽다 경계에서 중국을 보다 1
이훈 지음 / 너머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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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다.

저자가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라는 책을 번역한 분이었다.

그 때도 유목민이 교역을 통해 어떻게 국가로 발전했는지를 인상깊게 읽었고 번역이 참 매끄럽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만주사와 만주어를 전공한 학자였다.

청나라 보다는 만주족이라는 민족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깊이있는 교양서로 부족함이 없다.

여진이 어떻게 만주로 바뀌게 되었을까?

누르하치에 의해 통일된 이후 홍타이지가 여진의 제 부족들과 주변 민족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만주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내세웠다고 설명한다.

100만에 불과한 만주족이 1억 명이 넘는 한족을 어떻게 장악했는가,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 영토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저자는 만주족이 병영국가였음을 지적한다.

모든 만주족은 기인으로, 팔기에 속해 있고 전업군인이었다.

상무정신과 군사문화로 중앙아시아를 점령해 갔고 비록 근대화에 실패해 서구 열강에 몰락하고 말았지만 거대한 다민족 영토국가로서 오늘날 중국의 정체성은 만주족의 업적이다.

만주어에 대한 고찰도 흥미로웠다.

청의 황제들은 만주족이 거대한 한족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 만주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무엇보다 동족들을 한족과 분리거주 시켰다.

동방으로 원정을 떠난 알렉산더 대왕은 본인부터 외국의 신부들을 맞아 혼혈정책을 폈는데, 만주족의 분리 거주 정책이 수백년간 이어져 온 것이 신기하다.

그래서인지 만주족은 통념과는 달리 사라지지 않고 현재 한족 다음으로 많은, 천만 명의 인구수를 자랑한다.




<인상깊은 구절>

131p

누르하치가 여진 세계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후금이 복속된 지역을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통된 여진에 대한 후금의 지배는 영역적 지배라기보다는 복속된 인민을 후금의 중심지인 허투알라 일대로 이주시켜서 사람을 통치하는 인민 지배의 성격이 강했다.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것처럼 영역 지배의 성립이 근대국가의 출발점이라면 후금은 확실한 전근대국가였다. 보통 청나라나 만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만주족 대부분이 중국으로 이주한 1644년 이후에 만주 지역이 인구가 텅 비어 버린 공간으로 변했다고 알고 있다. 그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만주 지역은 이미 누르하치 통치기부터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정복한 만주 지역 곳곳의 인구를 건주여진의 중심지인 현재 요령성 동부에 집결시킴으로써 팔기의 몸집을 불리고 명과 정면 대결을 지속할 수 있엇다. 그 대가로 입관하기 수십 년 전부터 요령성 동부를 제외한 만주 지역 곳곳은 인구가 사라진 황무지가 되어 갔다.

133p

<만주실록>은 여허가 멸망하는 최후의 순간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멸망한 여허를 애도하거나 추념하는 데 있지 않고 청 황실이 조상의 전승을 기념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실록>이 후금과 여허 사이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왜곡 없이 사실을 전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 기록만큼 이날의 사실을 상세히 전하는 기록도 달리 없다.

135p

후금군은 사다리와 방패차를 내성 앞에 배치한 후에 긴타이시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긴타이시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우리는 漢人이 아니다. 사나이다. 너희에게 항복하느니 싸우다 죽겠다." 후금군은 즉각 공격에 돌입했다.

138p

긴타이시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후금군은 도끼로 누각을 찍어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긴타이시는 누각에 불을 질렀다.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적에 맞서다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태에서 최후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167p

홍타이지가 계승한 국가는 팔기의 연맹체였고 그것은 여덟 개의 대부족이 연합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버지 누르하치는 창업 군주였고 자신이 아들들과 조카들을 팔기의 버일러에 임명했기 때문에 권력과 권위를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아버지와 같은 창업 군주가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자신과 함께 후금의 최고 권력자였던 다이샨, 아민, 망굴타이의 양해를 받아 한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권력을 독점하지 못했고 무형의 권위도 없었다. 홍타이지가 아민과 망굴타이를 제거하고 다이샨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거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것은 1631년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홍타이지에게 필요한 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는 중국식의 정치 방식이었다.

275p

황제들은 만주족에게 무예만이 아니라 문화 면에서도 일정 수준에 이르기를 원했다. 옹정제가 만주족에게 한인 문사들을 흉내 내서 한어로 얼치기 시를 짓고 논다고 호되게 비판한 사례를 보면 황제는 만주족이 지나치게 한어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만주족이 한어에 지나치게 무지하여 한인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만주족 통치자들이 만주족에게 원한 것은 그들이 만주어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대해 한인을 통치할 수 있는 정도로 한어를 적당히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안에서 중국 문화를 접하고 수용하며 살아가면서 주 언어를 만주어로 유지하기에는 만주어 사용자의 수가 부족하고 어휘도 너무 부족했다.

291p

순치제는 명의 환관 조직을 부활시켜 십삼아문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한인 관료와 중국 문화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러한 성향이 반드시 개인적인 취향과 선호의 감정에 기인한 것 같지는 않다. 당시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심했던 순치제가 오랜 역사를 통해 제도적으로 황제권을 강화해 온 중국의 방식에서 만주족 지배층의 분권적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 황제 일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순치제의 중국 문화에 대한 친화적인 태도로 인해 만주족 제일주의를 고수하던 보수적인 만주족 지배층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보수적 지배층에게 다행스럽게도 순치제는 십삼아문을 설치한 후 6년이 지난 1661년 1월 7일 스물넷의 나이에 병사했다.

347p

여기에서는 정복전을 벌인 동력의 하나로 청의 군사 문화를 거론하고자 한다. 청의 정복왕조적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지배 민족인 만주족 전체가 팔기에 속한 군인이자 군인 가족이었다는 전제를 알아야 한다. 만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팔기에 속한 기인이었다. 심지어 만주족 가족에 속한 노복까지도 기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만주족의 모든 성년 남성은 전업 군인이었고, 그에 딸린 모든 가족은 군인 가족이었다. 하나의 민족 구성원 전체가 농업, 공업, 상업 등의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전업 군인으로 생계를 영위하며, 수백 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방대한 인구의 타민족을 지배한 것은 인류사에 드문 사례이다. 이 독특한 만주족의 업종과 만주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의 피지배 민족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과정이 청나라의 정복왕조적 속성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상무성을 존숭하는 관습을 만들어 냈다.

363p

칼카나 코르친 몽고의 주요 인물을 황제의 지근거리에 배치하고 시위처의 대신으로 근무시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청 황제의 신뢰를 보여 주는 표시이기도 하고, 청조와 외번 몽고인을 정서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청 제국의 질서에서 이탈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충성심을 창출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370p

청에 대한 저항이 심한 지역에서는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정복자를 자처하지 않았다. 그들은 명의 농민반란군이 빚어 낸 혼란 속에서 중국의 질서를 재건한 구원군을 자임하며 명조의 계승자로 자신을 선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복에 대해 한어로 '정복', 혹은 만주어로 '다일람비'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산해관을 통해 진입했다는 의미의 '입관'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고수했다. 그것이 중국인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족은 자신들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없애거나 개조해야 하거나 신설해야 할 부분이 아니면 가급적 명의 각종 제도를 그대로 이어서 사용했다.

417p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여야 하고 지루하며 고단한 일이다. 그래서 사전을 집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타언어를 더 잘 이해하려는 집필자의 열망에서 비롯되며, 이차적으로는 자신의 지식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는 열망과 공유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420p

만주어-영어 사전을 만든 제리 노먼의 묘비명에 그의 인생이 축약되어 있다.

"지식을 얻는 것은 놀랍도록 달콤하고 즐거운 일이다."

(책에 탐닉하는 인간의 본능인 지식욕을 이렇게 잘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싶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정말 놀랍도록 달콤한 기쁨이다! 천국은 거대한 도서관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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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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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유홍준 교수의 책답게 이름값을 한다.

책 판형도 좋고 디자인이나 종이 질감, 표지도 정말 마음에 든다.

편안한 글솜씨로 둔황 지역의 역사를 잘 버무려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준다.

중국 문화는 전공 분야가 아니라서 그런지 일본 편에 비해 미적인 설명은 적지만 대신 복잡한 5호 16국 시대를 알기 쉽게 한번에 정리해 줘서 이해하기 쉽다.

중간 중간 소개되는 한시도 참 좋다.

중국 문화의 강점이자 멋 중 하나가 한시인 듯 하다.

곡조를 붙여 부른다면 책에 나온 바대로 멋진 노래가 될 것 같다.

이민족 왕국이 유교 대신 불교를 숭상한 점도 특이하다.

서역의 많은 석굴 사원들은 쉽게 뚫을 수 있는 자연환경도 있었지만 북방 유목민들의 신앙이 불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송나라 이후로 중국은 유교화 되고 중앙아시아는 이슬람화 되어 지금은 그저 옛 문화로만 남아 있지만 중국의 역사가 가진 다채로운 불교 문화 유산가 놀랍다.

맨 마지막의 명사산과 월아천은 역사적 의미가 적어서 그런지 다소 지루했다.

시간이 된다면 답사 여행에 꼭 참석해 보고 싶다.

역사와 문화가 주제가 되는 여행이라니, 얼마나 멋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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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열전 - 영웅부터 경계인까지 인물로 읽는 고려사
박종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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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고려 인물들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다.

저자가 전공자라 기대를 했는데 다소 맥빠지는 가벼운 구성이긴 하다.

다만 고려 역시 사대관계로 원나라를 섬겼고 그것은 당시 국제질서에 맞는 보편적인 유교이념이었다는 평가가 인상적이다.

고려의 사대외교를 비난한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관이 20세기적 관점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 때 득세한 환관 등 하층민 출신의 권력자들이 과연 역사에 신분철폐라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느냐는 생각해 볼 문제같다.

무신 정권기에 고려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인상깊은 구절>

144p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한 시기에 고려 출신 환관들이 원나라에서 크게 득세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려의 주요 정책은 물론이고 국왕의 즉위와 폐위까지 원나라 황제와 황실의 제가를 받게 하는 원나라의 고려 지배 방식이 환관 득세의 원인을 제공했다. 고려 국왕은 국내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고려인 출신 환관을 통해 황제와 원나라 고위 관료에 접근했다. 원나라 황실에 요청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황실 사정을 잘 아는 고려 출신 환관을 통해 접근했다.

162p

<춘추좌전>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이소사대를 유교의 예의질서로 규정했다. 즉,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의 관계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 이익을 주고받는 호혜적인 상호보완의 관계였다. 유교이념에 충실한 당시 지식인들은 사대관계에 대해 유교의 예의질서가 국가 간의 관계로 확대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대관계를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본 신채호의 생각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대두한 20세기 초의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김부식은 동아시아의 보편 이념인 유교이념으로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려 했다. ... 이과 같은 형제맹약은 보주를 고려의 영토로 확정하기 위해 고려가 취한 실리적인 사대외교이지 굴종적인 사대외교가 아니었다. 김부식은 형제맹약을 결정한 인종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금나라와의 사대를 직접 견문한 김부식의 시각은 오늘의 우리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자주와 사대의 단순한 잣대로 평가하는 방식을 뛰어넘어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70p

고려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에 깔고 있는 문명의식은, 고려는 중국과 문화 수준이 대등한 나라라는 뜻의 소중화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참고로 소중화는 조선시대에 더 많이 사용된 개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등장으로 조선 지식인들은 중화문명의 맥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조선이야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라며 소중화임을 자처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사용된 소중화 개념은 중국 한족을 중화문명의 중심으로, 주변국을 오랑캐로 간주하는 중국 중심의 화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즉, 천자국 중국의 문명을 동경하고 그것을 제후국 조선에 실현하려는 노력이 소중화 의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고려의 문화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뜻의 소중화 개념과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176p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창조적이고 자존감 넘치는 자의식에서 비롯된 점도 없지 않았지만, 크게는 고려 중기 이후 문물과 예악이 풍성하고 뛰어난 인재가 배출된 전성기 고려의 시대적 산물이기도 했다. 고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원천인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춘 몽골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179p

13세기 전반 몽골 항쟁기를 거친 고려는 13세기 후반에 몽골의 제후국으로 전락한다. 이에 따라 '고려는 중국과 다른 또 하나의 천하 중심'이라는 다원적 천하관과 '고려는 중국과 문명 수준이 대등하다'는 소중화 의식은 변절을 강요당한다.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그 분기점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규보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고려 중기 지식인의 문명의식 자체가 크게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194p

<제왕운기>는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보았고 중국과 구별되는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했는데, 연구자들은 그동안 이 점에만 주목했다. 한편,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원나라와의 우호관계가 시작된 원종과 충렬왕의 역사를 강조했다. 특히 충렬왕 대에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고려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이승휴가 원나라의 고려 지배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대해 적대적인 서술을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단군조선을 강조한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일까? 이승휴가 다원적인 역사인식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단군조선과 원나라를 함께 강조한 그의 역사서술은 결코 모순적이지 않다.

 이승휴의 다원적인 역사인식은 여러 경로를 통해 형성된 것이지만, 두차례 원나라 사행이 그의 세계관과 역사인식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 분명하다. <제왕운기> 속에는 단군을 강조하는 자주의 측면과 원나라를 상국으로 인식하는 일종의 사대적 측면의 역사서술과 인식이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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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사
이공범 지음 / 지식산업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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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너무너무 재밌는" 책이다.

개설서가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걸까, 감탄하면서 읽었다.

고대 사회의 지배계층과 사회경제 원리, 신분제, 특히 복잡한 남북조 왕조들의 흥망성쇠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고 있다.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을 읽으면서 남북조 시대에 관심이 생겼고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당시 시대상에 대한 개념이 생긴 것 같다.

마지막에 실린 사회경제 부분은 전문적인 설명이 많아 다소 지루하고 어려웠지만 개략적인 틀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됐다.

한자가 거의 모든 용어에 다 병기되어 뜻을 이해하기 쉬웠다.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 보고 싶은데 아쉽게 검색이 안 된다.

지금까지 중국사는 일본이나 서구에서 나온 책만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과문한 탓이었나 보다.

중국이 어떻게 호한융합되어 오늘날의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는지 그 과정이 자세히 나오고 균전법이 무엇인지 5호 16국 시대를 이룬 배경은 무엇인지, 또 문벌귀족이란 어떻게 형성이 됐고 몰락했는지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책바다에서 어렵게 빌린 보람이 있다.

많은 부분을 옮겨 적었는데 절반이 날아가 버려 허탈하다.

알라딘의 임시 저장 시스템이 불안정한 것 같아 불만이다.



<인상깊은 구절>

29p

청담파의 주벌은 정권쟁투의 결과이지 사마의 자신이 청담 귀족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마의는 위 왕실의 법가정책, 중앙집권정책에 반대하고 귀족중심의 정치를 수행하려는 처지였으며 이것이 당시 귀족의 지지를 받아 뒤에 사마씨 왕조 창건의 바탕이 되었다.

32p

손오 정권에는 당시 화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제도가 있었다. 그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세병제이다. 이는 오의 장군들이 부자형제 사이에 휘하 군병을 세습적으로 계승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오 일대를 통해서 반세기 동안 제도로서 존속하였다. 장군이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군사를 세습적으로 계승하면 그 군대는 장군의 사병적 성격이 짙어져서 각 군단이 강한 독립성을 띠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것이 제도로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은 무력을 바탕으로 하는 손오 국가는 사병 집단의 연합체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병 집단을 영도하고 있는 자는 회화 유역의 호족과 강남 토착 호족이었다는 것은 물론이다.

39p

진 사마씨가 위의 선양을 받게 된 것은 무제 사마염의 조부 사마의가 그 진영 안의 귀족 세력을 흡수하여 그것을 정치기반으로 삼은 데 있다. 따라서 진 왕조는 전쟁의 영웅이 일으킨 위 왕조와는 처음부터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진 무제는 관용, 仁恕 하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그 개인의 성격보다는 왕조의 귀족적 성격에서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

53p

천하대란의 불가피성을 통찰한 그는 동해왕 월을 설득해서 그 동생인 왕징과 종제인 왕돈 두 사람을 각각 형주와 양주 자사로 추천하고 스스로는 태위로서 중앙에 위치하여 일문이 몰락하지 않게끔 남도 준비공작을 완료한 것이다. 왕도가 사마예를 받들고 남하한 것도 왕연의 계획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강남에서 경제, 군사적으로 가장 주요한 양주와 형주를 왕씨 일족이 장악 지배하고 있는 바탕 위에서 왕도가 서진 왕족 출신인 사마예를 추대함으로써 명분과 정통성과 실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화북의 전란이 강남지방까지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 서진의 강남의 행정, 군사기구는 그대로 존속하고 있어서 그 최고권을 장악한 사마예는 쉽게 강남 지역을 제압할 수 있었고, 양주, 형주와 같은 요충지는 北來 인사들에게 민정, 군사권을 위임하여, 일단 강남 통치의 골격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위에서 말한 오주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력으로 보강하고 북방에서 남하 피난한 북방의 호족과 전 관료 등 사대부 계층을 수용하여 문무관에 임명함으로써 그 통치기구를 강화하여 북래 인사들을 결집해서 집단세력을 형성하는 중추가 되었다. 사마예 군부의 상층부는 북래 출신의 문무관으로만 구성되었으므로 그 기초가 박약하여 강남 제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예의 군부는 처음부터 강남 토착 호족을 포섭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사마예가 건업에 이진한 초기에는 강남 토착 호족들의 태도는 매우 냉담했으나 왕도는 강남 호족의 대표격인 고영, 하순을 포섭함으로써 강남의 명족 또는 호족의 지지를 얻어 그 구분에 흡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남의 호족 측에서도 삼국의 오가 멸망한 뒤, 이 지역 출신의 호족, 사대부들은 官界로부터 거의 배제되고 또 북방 명족으로부터 여러 가지 면에서 경시되어 왔다. 이런 강남 호족의 현실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진 왕실 일족이라는 정통성과 명분을 갖고 있는 사마예의 군부에 참여해서 문,무관직에 취임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예의 군부는 토착 세력의 저항 없이 강남에 세력을 부식하고 오히려 그들은 그 군부 세력 확대와 강화에 적극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71p

황제의 친임을 받고 있었던 단양윤 서잠지, 이부상서 강잠 등 문치파는 북벌에 찬성하나 오히려 무략으로 명성이 높았던 무장 심경지는 "밭 가는 것은 노에 묻고 길쌈은 비에 물어야 하는데 지금 폐하께서는 남의 나라를 치는데 백면서생들과 꾀하고 있으니 어찌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전론에 반대하였다. 

73p

효무제는 말년에 물욕이 많아져서 이임해서 수도로 돌아온 州鎭 장관에게 헌납을 강요했다. 이리하여 送故의 錢物은 실제로 황제에게 그 일부가 헌납되었다. 여기에서 주진 장관은 사적 수탈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백성을 피폐시키고 나아가서 지방 관아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였다. 효무제는 재고(황제의 私庫), 상고(황제 직속의 公庫)의 확충으로 사적 재정을 확보하면서 대사나 측근의 한문 출신 관료를 구사하여 직접적으로 국가 재정을 장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황제와 그 측근에 의한 재정 운영은 전통적 행정기구에서 유리한 황제 독주에 기울어지기 쉽고 여기에 대사의 횡포 등의 발생은 사회의 반발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帝權 의 존립기반 자체를 위태로게 하였다.

74p

문벌귀족은 이런 제도로 보장된 고관 중위에 안주하여 현학이나 풍류를 추구하는 데 열중하고 吏治와 같은 실무는 오히려 경멸하였다. 여기에서 吏務 는 대각의 영사, 주서, 감수, 전첨 등 법을 아는 下吏 에게 위임하였다. 따라서 문벌귀족은 한편으로는 고위 고관을 차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무에서 이탈하고 있으면서 황제 권한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미 송초 이래로 황제가 군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문벌귀족에게 명목상 고위직을 주고 국가의 중추적 실권은 한문 한인을 발탁, 등용하여 이들에게 위임하였다. 한인 대명보는 안팎의 여러 잡사를 담당하여 재상인 강하왕 의공과 안사백 등 귀족관료들은 공명만을 지켰을 뿐이다.

83p

남조 역대 왕조는 끊임없는 찬탈혁명과 황족 종친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정국이 항상 불안정하여 정치의 권요에 참여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더 나은 영달을 가져오는 것보다 오히려 일신일족의 파멸을 가져오는 위험성이 더 많았다. 덧붙여서 송의 효무제와 같이 황제권력을 신장하기 위해서 귀족 세력을 억압하는 탄압 정치를 시행할 때는 귀족들의 지위는 매우 불안하게 되었다. 정치 사회적 지위가 보증된 문벌귀족은 거꾸로 불안과 위기에 직면하게 된 정황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런 역사현상에서 그들이 터득한 인생철학은 '명철보신'이었다. 명철보신을 처세훈으로 하는 그들에게 정치라는 현실세계에서 도피하여 학문이나 시문 담론의 문화세계가 새로운 삶의 장이 되었다. 명철보신의 처세훈은 당시의 지식인에 풍미하고 있었던 현학과 결합하여 현허를 숭상하고 이치를 멸시하여 정치에 관심을 잃고 행동할 의욕을 잃은 무기력한 남조 사대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벌귀족은 한편으로는 고관 고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실제 이치에서는 이탈하고 있었다.

96p

무제의 근본 생각은 귀족제도를 존중하지만 귀족제의 존중은 귀족적 교양의 존중이지 현실의 문지의 존중이 아니라는이다. 따라서 문지가 낮더라도 귀족적 교양을 갖춘 자를 임관 등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무제의 새로운 정책은 학관 시험제도를 장려하게 되어 후세의 과거제의 유력한 연원의 하나가 되었다. 즉위한 뒤 곧바로 구품중정법이 설치된 이후 겨우 명맥만 유지한 데 지나지 않았던 수재, 효렴제를 다시 중시하여 시험으로 관리 등용하는 제도를 채택하였다. 비록 관리 등용제로서는 부차적 위치를 차지했을 뿐이지만, 이 시험제도는 당대에서 시작되어 송대에 확립된 과거제의 선구가 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08p

양말 후경의 난과 진초 혼란기를 거치면서 명문세족들은 일족이 패망하거나 타향에 유랑하는 등의 인적 손실과 그 취약한 기생적 경제 기반의 괴멸은 이들의 정치 사회적 실력을 잃게 만들었다. 진대에 들어와서는 명문세족 출신들은 정권의 중추부에서 밀려나고 그 대신 남방의 토호나 한문층으로 대치되고 명문세족들의 잔영은 문화적 전통의 상징으로서 하나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후경의 난으로 남조 귀족제는 종말을 고하고 진대에서는 남방 토착세력인 토호, 한문층의 신흥 계급이 귀족제의 틀을 깨고 새로이 정치, 사회, 군사적으로 현저하게 대두한 시대이다.

109p

5호 16국 시대의 외민족의 정권수립을 일반적으로 말하는 외민족 침입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한족 왕조의 외민족에 대한 군사적 침략에서 결과한 중국 내지에 강제 이주된 외민족이 한족 왕조의 분열과 약체화를 틈타서 민족적 자각과 한족의 경제적 착취, 정치적 모순에 항거해서 스스로의 정권을 수립하였다고 풀이된다. ... 이런 동향이 마침내 수당시대에 완숙되어 호한의 혼혈로 內遷호족은 한족에 완전히 동화되어 한족화하고 생활문화의 각 방면에서도 호한의 구별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호한 양세계의 통합이 펼쳐진 것이다. ....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 한의 통치자가 호족세력을 분산시키고 변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들의 변경 지대 거주를 용인한 것이다.

118p

염민의 호족 살육책은 정치적으로는 호한을 아우르는 통일 보편적 국가를 수립하고 사회적으로는 종족주의를 초월한 호한 융합이라는 역사적 추세를 거역하는 지극히 반동적이고 성공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때문에 이 정책은 화북사회의 혼란을 부추겼을 뿐이고 이런 사회 혼란을 틈탄 인심 동요는 후조국의 내란에 무력간섭 하고 있던 선비족 모용준이 하북에 침입해서 염민을 사로잡아 참살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202p

이들은 이미 강북의 본적지를 떠나 남쪽에 거주하고 있지만 여기에 그 출신 군명을 부쳐 이른바 교군을 만들어 각각 중정을 두어 일족 향당을 품정하여 관료진출의 기반을 만들었다. 아무런 경제적 기반 없이 타향에 머물러 살고 있는 이들은 오로지 정권에 기생하여 관료적 귀족, 귀족적 관료로서 지위를 사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수단이었다. 물론 관료라는 특권적 지위는 그들에게 토지나 기타 재산을 이룰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도 있었으나 그것은 극히 드물었다고 보인다.

207p

누층적 통혼집단은 사회적 신분을 계기로 형성된 것이고 또 이런 통혼 형태는 누층적 사회 신분 구성을 유지, 존속하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이다. 이리하고 남조의 혼인은 신분내혼제로서 '士庶不婚'을 큰 틀로 하면서 당시 분화된 통혼집단의 계층적 존재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209p

심약이 양 무제에게 혁명의 조기 결행을 권행하는 진언에, "사대부들이 반용부봉(용을 붙잡고 봉황을 따라간다, 훌륭한 사람을 쫓아 따라간다는 뜻) 하는 것은 척촌지공(조그마한 공)으로 복록을 보전하고자 함입니다"라는 어구가 있다. 여기에는 무제 거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심약 등을 포함해서 옹, 형주의 호족, 토호층이 문벌제의 굴레를 뚫고 정치, 사회적으로 상승하려는 염원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213p

서진 말부터 화북이 혼란에 빠지고 이 혼란을 틈타서 이민족인 오호가 화북에 각각 왕조를 세워 한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오호의 이민족 국가에게 고래로부터 화북에서 정착하고 우수한 문화를 지니고 절대 다수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존재는 실제 통치문제로서 경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족은 오호 국가에게 세를 공급하고 역역에 종사하는 필요불가결의 존재였다. 이런 한족을 지배하고 그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제지의 유력자인 호족의 경제력과 향촌에 대한 규제력을 이용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호 여러 국가가 이민족 정권이기 때문에 한족을 압박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한인 호족이나 명족을 존중하고 위진 시대의 사족의 호적을 부활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오호 여러 군주들은 그들 국가의 통치이념과 정책 입안 및 시행 등에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는 한족 사대부를 등용해서 그들을 국가건설에 참여시키고 있다.

 한편 한족측에서도 서진 말기 문벌귀족의 경쟁과 궁중음모 등으로 혼란한 관계에서 뜻을 이룰 수 없었던 한족의 사인 가운데는 오히려 이민족의 신흥 실권자에게 소망을 걸고 그 밑에 들어가서 호족 군주의 모주가 된 자도 적지 않았다. 오호의 군주들은 이런 세력에 대해서 끝까지 반항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는 무력으로 억압하고 항복 귀순한 자에게는 종래의 사회적 지위 즉 사의 신분과 그에 따른 특권을 승인하고 호족국가의 관료로 받아들였다.

215p

호족 군주들이 한족 사대부들을 그 통치기구에 흡수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호족 군주의 대부분이 한문화에 상당히 깊은 영향을 받아 학문과 교양을 습득하고 이해한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호족 군주들은 한족적 사상의 바탕 위에서 전제군주 체제와 중농주의적 국가창건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여기에서 이 국가이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유교의 정치사상을 표방하게 되고 이 실천을 위해서 유학의 지식을 갖추고 있는 인재가 필요하였다. 이런 요구에 응하는 적격한 인재들이 곧 한족 사대부들이다. 여기에서 오호시대의 한족 사대부들은 종족적 압박도 받지 않고 오히려 관료로 등용되어 향당의 지도자로서 재지 세력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223p

고환과 제휴한 산동의 명문 호족들은 적극적으로 향병을 초모하여 무력집단을 구성하고 그 將이 되어 전투에 참가하는 등 종래의 문벌귀족처럼 선조의 古骨을 팔아서 영화에 안주하려는 자세와는 판이하게 다르며 그들에게서는 세상의 난국을 헤쳐 나가려는 용기와 강한 의욕을 찾아볼 수 있다.

224p

정치의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는 귀족이라도 황제의 역린을 건드리면 지위 박탈은 물론이고 주살을 면치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성제대에서 후주대까지 권세를 휘둘렀던 조정은 무성제에게 아첨함으로써 전대 효소제 때의 불우한 처지를 만회하고 또 본질적으로 제권에 기생하는 은행의 무리와 결합하여 반대당을 제거하는 등 귀족의 지위는 왕조에게 완전히 규제되어 귀족으로서 자율성을 잃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247p

<당률>의 부곡, 객녀에 대한 여러 규정을 통관하면, 그들은 노비와는 달리 인격을 갖고 있으나 주인에 대한 예속은 노비와 같으며, 대우는 노비보다 약간 양호한 편이고 또 그들은 인신매매한 것이 아니고 주가의 의식 급여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천하게 여겨졌으나 사가의 노비보다는 상급 천인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4p

대규모의 수리관개 사업에 공권력이 필요하게 된 것은 그 방대한 노동력의 동원과 편성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많은 노동력의 동원과 편성은 도저히 민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권력에 의한 수리관개 시설의 설치로 경지화된 전토는 이때 대량으로 유입된 북래 난민들에게 분여되었을 것이고 이런 농민을 독립, 자영 농민으로 육성하여 안정된 소농 경영을 이루어 국가의 정치, 경제적 기초 확립에 공헌하였을 것이다.

297p

지방관의 불법이 끊이지 아니한 직접 원인으로는 이때까지 북위에서는 관리에 대한 녹봉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리들은 인민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또는 상인들과 결탁해서 상행위를 하여 가산을 불리고 아울러서 녹봉에 대신하는 비용을 조달하고 있었다.



<오류>

66p

유유는 손은亂 토벌에서 무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이어서 환현을 멸망시키고 전연과 후진을 평정하여 새로운 왕조 수립의 기초를 닦았다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 송의 유유가 토벌한 것은 전연이 아니라 모용초의 남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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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월지 - 중앙아시아의 수수께끼 민족을 찾아서
오다니 나카오 지음, 민혜홍 옮김 / 아이필드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월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은 오늘날의 민족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고대 세계에서만 존재하고 지금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흉노도 실체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아득한 고대의 종족인데 그보다 더 먼저 중국 서쪽에 진출했던 월지는 너무나 모호하다.

이 책에 따르면 아무다리야 강 유역에 살던 월지인들이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에 의해 동쪽으로 쫓겨 가 감숙성 일대에 정착하고 교역을 펼치다가, 새로운 세력은 흉노에 밀려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갔고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그리스인의 도시 박트리아를 멸망시키고 먼저 살던 원주민과 합해져 북인도로 내려가 쿠샨 왕조를 건설했다고 한다.

월지는 기마민족으로 호전적이었고, 간다라 미술을 만들고 상업 활동을 한 이들은 박트리아에 원래 살던 이들이라고 본다.

동쪽에 살던 월지가 흉노에게 밀려 서쪽으로 가 쿠샨 왕조를 만든 게 아니라, 원래 그 땅에 살던 월지가 중국에 진출했다고 다시 되돌아 와 쿠샨 왕조를 세웠다는 것이다.

저자는 월지의 언어가 곧 박트리아어, 쿠샨어라고 본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박트리아라는 그리스 식민도시를 멸망시킨 것은 스키타이인이라고 한다.

중국측 기록에는 월지라고 되어 있고, 반고가 쓴 <한서>에는 새족이라 나온다.

저자는 스키타이가 곧 월지라고 생각한다.

스키타이가 새족, 혹은 색족을 가르킨다는 말도 다른 책에서 본 적이 있다.

과연 스키타이와 월지는 동일 종족일까?

혹은 스키타이인이 월지는 아닐지라도 서방측 기록에서 박트리아를 멸망시킨 종족은 월지가 맞다고 본다.

흥미로운 주장이고 다른 책도 참조해 봐야겠다.


<인상 깊은 구절>

17p

현재까지 연구된 바로는 흉노어는 고대 투르크어에 속하며 흉노는 투르크계 민족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26p

연대의식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보호하는 법을 망각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줄도 모른다. 그들은 휘장, 의복, 승마, 무술 등으로 남들을 속이면 그럴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들 대부분은 후방에 있는 부녀자들보다 더 겁쟁이들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타나서 무엇인가를 요구해도 그들은 물리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군주는 자기를 뒷받침해줄 보다 용감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게 되고, 많은 수의 가신과 추종자들을 고용한다. 

38p

월지의 주요 세력은 파미르 고원의 서쪽, 즉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남부에서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감숙의 서부에는 소수의 월지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쪽으로 이동한 월지를 '대월지', 감숙 서부의 월지를 '소월지'라고 부른다. 한 무제가 원교근공의 동맹 상대로 선택한 것은 대월지였다.

44p

서방측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중엽 박트리아에 살던 그리스인의 도시가 시르다리야 강 건너편에서 침입해온 유목민족에게 멸망했다고 한다. 그리스인에게서 박트리아를 빼앗은 유목민족은 스키타이인이며, 페르시아식 표현으로는 '사카'라고 불렀다. 어쩌면 장건은 그 유목민족의 흔적을 좇아 아무다리야 유역, 즉 박트리아로 들어갔는지 모른다. 

(박트리아를 빼앗은 스키타이인이 바로 대월지인가?)

72p

서방 사료에는 박트리아 왕국이 그 후 약 1백 년 동안 번영을 누리고, 기원전 2세기 중반 북방에서 침입한 스키타이(사카)에게 멸망했다고 한다. 그것이 한문 사료에 나오는 대월지의 서천 및 대하의 정복에 대응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93p

나는 스트라본이 말한 동방의 스키타이(사카)인이 기원전 160년경 흉노에게 쫓겨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하를 정복한 대월지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대월지와 '塞'를 스트라본이 박트리아 왕국을 멸망시킨 4부족의 하나로 동정하려고 시도했지만 확실성이 없었다. 새족의 존재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지만, 만일 실재했다고 해도 사료에 나타난 것은 대하의 정복과는 관계가 없다.

 반면, '대월지-=스키타이(사카)'라고 하면 동서의 역사기록은 잘 맞아떨어진다. 아이하눔 유적의 발굴결과에서 시사하는 '그리스인 도시의 멸망=기원전 145년경'의 시기도 스트라본이 기록한 박트리아 왕국의 멸망과 <사기>, <한서>에 나오는 '대월지의 대하 정복' 기사와 아무런 모순점이 없다. 기원전 129년경 장건이 아무다리야 남쪽의 대하에 이르렀을 때 이미 대월지는 그곳을 정복했으며,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은 멸망한 후였다. 그곳의 토착민인 대하인은 집과 도시를 만들어 정착하고 도시마다 소군장을 세워 통치하고 있었다. 대하의 인구는 100만에 달했고, 전쟁보다는 상업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112p

분명히 박트리아어는 박트리아 정착민의 말이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언어를 가진 유목민도 존재한다면 혹시 그 유목민이 쿠샨인이 아닐까? 만약 쿠샨인의 원래 고향이 아무다리야 유역이라고 한다면 월지와의 관계는 어찌될까? 월지의 이동은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민족 이동이 아니라, 본래 중앙아시아에 본거지를 둔 월지가 동방에 진출해 있다가 철수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흡후(야구브)가 유목민 고유의 지배제도를 가리키는 용어라면, 귀상(쿠샨) 흡후는 결코 정착민인인 대하인을 가리키지 않는다. 따라서 쿠샨인은 대월지, 또는 적어도 그 일부였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다. 그렇다면 혹시 쿠샨인은 유목민으로서 상업적 재능이 뛰어난 대하인과 함께 중국과의 무역에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동방으로 진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209p

동아시아 유목세계에 이러한 새로운 동물 디자인이 도래한 것에 대해 번커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 의해 박트리아 주변의 유목민족이 동쪽으로 밀려났던 데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기마민족이었다, 그 가운데 중국 서북 변경을 정복하고 지배한 세력이 월지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중국 북변에 호복기사 전수를 보급시키고 동물 의장 벨트 등을 가지고 들어갔다. 

211p

귀상 흡후가 다른 흡후를 병합하고, 간다라와 인도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기마민족의 무력과 기동성이 필요하다. 이는 '장사에는 재주가 있지만 무용이 없다'는 대하의 정착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쿠샨 왕조의 주체는 유목민 월지일 것이다. 그러나 간다라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쿠샨인의 성격을 고려할 때 그들에게서 중국 서북 변경의 유목민이었다는 흔적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아무다리야 유역(박트리아)의 주민일 가능성이 크다. (박트리아어을 사용했다는 점, 죽은 사람의 입속에 화폐를 넣는 습속이나 복장 등에서 그렇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월지와 쿠샨 왕조 모두 아무다리야 유역을 본거지로 한 동일한 유목민 집단이었다. 그들의 일부분은 기원전 3, 4세기경 유목민족으로서 중국의 서부 변경에 진출하여 유목보다도 상업활동에 전력을 쏟았다. 그러던 중 흥세력 흉노에게 패해 기원전 2세기 중반, 원래 거주지인 아무다리야 유역으로 세력을 옮겼다. 그 후 남방으로 눈을 돌려 박트리아, 그리스인의 흔적을 쫓아서 인도와 관계를 맺었고, 인도를 통해 지중해의 로마 세계와 연결을 갖게 되었다.

 이상이 내가 본 쿠샨 왕조의 발흥 배경이다. 쿠샨 왕조는 로마와 인도, 중국을 잇는 국제무역 중개업으로 거대 제국으로 성장했다. 동서 문화를 융합하는 간다라 불교미술이 탄생한 것도 그런 쿠샨 제국이 처해 있던 국제적 환경 때문이었다. 따라서 월지와 쿠샨인은 실크로드를 빛나게 했던 최초의 기마유목민족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박트리아 지방의 유목민족이 동쪽으로 쫓겨가 그들 가운데 일부가 중국 서북 변경을 정복하게 되는데 흔히 그들을 월지민족으로 본다. 비록 알렉산더에 의해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강력한 기마민족이었던 그들은 중국 북변에 호복과 기사 전술을 보급시키고 지배력을 강화해나간다. 그리고 훗날 그 동쪽에서 굴기한 흉노와 이 지역의 패견을 놓고 일대 접전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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