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이야기 - 만주의 눈으로 청 제국사를 새로 읽다 경계에서 중국을 보다 1
이훈 지음 / 너머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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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다.

저자가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라는 책을 번역한 분이었다.

그 때도 유목민이 교역을 통해 어떻게 국가로 발전했는지를 인상깊게 읽었고 번역이 참 매끄럽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만주사와 만주어를 전공한 학자였다.

청나라 보다는 만주족이라는 민족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깊이있는 교양서로 부족함이 없다.

여진이 어떻게 만주로 바뀌게 되었을까?

누르하치에 의해 통일된 이후 홍타이지가 여진의 제 부족들과 주변 민족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만주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내세웠다고 설명한다.

100만에 불과한 만주족이 1억 명이 넘는 한족을 어떻게 장악했는가,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 영토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저자는 만주족이 병영국가였음을 지적한다.

모든 만주족은 기인으로, 팔기에 속해 있고 전업군인이었다.

상무정신과 군사문화로 중앙아시아를 점령해 갔고 비록 근대화에 실패해 서구 열강에 몰락하고 말았지만 거대한 다민족 영토국가로서 오늘날 중국의 정체성은 만주족의 업적이다.

만주어에 대한 고찰도 흥미로웠다.

청의 황제들은 만주족이 거대한 한족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 만주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무엇보다 동족들을 한족과 분리거주 시켰다.

동방으로 원정을 떠난 알렉산더 대왕은 본인부터 외국의 신부들을 맞아 혼혈정책을 폈는데, 만주족의 분리 거주 정책이 수백년간 이어져 온 것이 신기하다.

그래서인지 만주족은 통념과는 달리 사라지지 않고 현재 한족 다음으로 많은, 천만 명의 인구수를 자랑한다.




<인상깊은 구절>

131p

누르하치가 여진 세계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후금이 복속된 지역을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통된 여진에 대한 후금의 지배는 영역적 지배라기보다는 복속된 인민을 후금의 중심지인 허투알라 일대로 이주시켜서 사람을 통치하는 인민 지배의 성격이 강했다.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것처럼 영역 지배의 성립이 근대국가의 출발점이라면 후금은 확실한 전근대국가였다. 보통 청나라나 만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만주족 대부분이 중국으로 이주한 1644년 이후에 만주 지역이 인구가 텅 비어 버린 공간으로 변했다고 알고 있다. 그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만주 지역은 이미 누르하치 통치기부터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정복한 만주 지역 곳곳의 인구를 건주여진의 중심지인 현재 요령성 동부에 집결시킴으로써 팔기의 몸집을 불리고 명과 정면 대결을 지속할 수 있엇다. 그 대가로 입관하기 수십 년 전부터 요령성 동부를 제외한 만주 지역 곳곳은 인구가 사라진 황무지가 되어 갔다.

133p

<만주실록>은 여허가 멸망하는 최후의 순간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멸망한 여허를 애도하거나 추념하는 데 있지 않고 청 황실이 조상의 전승을 기념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실록>이 후금과 여허 사이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왜곡 없이 사실을 전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 기록만큼 이날의 사실을 상세히 전하는 기록도 달리 없다.

135p

후금군은 사다리와 방패차를 내성 앞에 배치한 후에 긴타이시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긴타이시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우리는 漢人이 아니다. 사나이다. 너희에게 항복하느니 싸우다 죽겠다." 후금군은 즉각 공격에 돌입했다.

138p

긴타이시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후금군은 도끼로 누각을 찍어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긴타이시는 누각에 불을 질렀다.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적에 맞서다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태에서 최후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167p

홍타이지가 계승한 국가는 팔기의 연맹체였고 그것은 여덟 개의 대부족이 연합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버지 누르하치는 창업 군주였고 자신이 아들들과 조카들을 팔기의 버일러에 임명했기 때문에 권력과 권위를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아버지와 같은 창업 군주가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자신과 함께 후금의 최고 권력자였던 다이샨, 아민, 망굴타이의 양해를 받아 한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권력을 독점하지 못했고 무형의 권위도 없었다. 홍타이지가 아민과 망굴타이를 제거하고 다이샨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거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것은 1631년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홍타이지에게 필요한 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는 중국식의 정치 방식이었다.

275p

황제들은 만주족에게 무예만이 아니라 문화 면에서도 일정 수준에 이르기를 원했다. 옹정제가 만주족에게 한인 문사들을 흉내 내서 한어로 얼치기 시를 짓고 논다고 호되게 비판한 사례를 보면 황제는 만주족이 지나치게 한어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만주족이 한어에 지나치게 무지하여 한인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만주족 통치자들이 만주족에게 원한 것은 그들이 만주어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대해 한인을 통치할 수 있는 정도로 한어를 적당히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안에서 중국 문화를 접하고 수용하며 살아가면서 주 언어를 만주어로 유지하기에는 만주어 사용자의 수가 부족하고 어휘도 너무 부족했다.

291p

순치제는 명의 환관 조직을 부활시켜 십삼아문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한인 관료와 중국 문화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러한 성향이 반드시 개인적인 취향과 선호의 감정에 기인한 것 같지는 않다. 당시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심했던 순치제가 오랜 역사를 통해 제도적으로 황제권을 강화해 온 중국의 방식에서 만주족 지배층의 분권적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 황제 일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순치제의 중국 문화에 대한 친화적인 태도로 인해 만주족 제일주의를 고수하던 보수적인 만주족 지배층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보수적 지배층에게 다행스럽게도 순치제는 십삼아문을 설치한 후 6년이 지난 1661년 1월 7일 스물넷의 나이에 병사했다.

347p

여기에서는 정복전을 벌인 동력의 하나로 청의 군사 문화를 거론하고자 한다. 청의 정복왕조적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지배 민족인 만주족 전체가 팔기에 속한 군인이자 군인 가족이었다는 전제를 알아야 한다. 만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팔기에 속한 기인이었다. 심지어 만주족 가족에 속한 노복까지도 기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만주족의 모든 성년 남성은 전업 군인이었고, 그에 딸린 모든 가족은 군인 가족이었다. 하나의 민족 구성원 전체가 농업, 공업, 상업 등의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전업 군인으로 생계를 영위하며, 수백 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방대한 인구의 타민족을 지배한 것은 인류사에 드문 사례이다. 이 독특한 만주족의 업종과 만주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의 피지배 민족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과정이 청나라의 정복왕조적 속성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상무성을 존숭하는 관습을 만들어 냈다.

363p

칼카나 코르친 몽고의 주요 인물을 황제의 지근거리에 배치하고 시위처의 대신으로 근무시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청 황제의 신뢰를 보여 주는 표시이기도 하고, 청조와 외번 몽고인을 정서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청 제국의 질서에서 이탈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충성심을 창출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370p

청에 대한 저항이 심한 지역에서는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정복자를 자처하지 않았다. 그들은 명의 농민반란군이 빚어 낸 혼란 속에서 중국의 질서를 재건한 구원군을 자임하며 명조의 계승자로 자신을 선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복에 대해 한어로 '정복', 혹은 만주어로 '다일람비'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산해관을 통해 진입했다는 의미의 '입관'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고수했다. 그것이 중국인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족은 자신들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없애거나 개조해야 하거나 신설해야 할 부분이 아니면 가급적 명의 각종 제도를 그대로 이어서 사용했다.

417p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여야 하고 지루하며 고단한 일이다. 그래서 사전을 집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타언어를 더 잘 이해하려는 집필자의 열망에서 비롯되며, 이차적으로는 자신의 지식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는 열망과 공유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420p

만주어-영어 사전을 만든 제리 노먼의 묘비명에 그의 인생이 축약되어 있다.

"지식을 얻는 것은 놀랍도록 달콤하고 즐거운 일이다."

(책에 탐닉하는 인간의 본능인 지식욕을 이렇게 잘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싶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정말 놀랍도록 달콤한 기쁨이다! 천국은 거대한 도서관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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