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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사
이공범 지음 / 지식산업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읽는 "너무너무 재밌는" 책이다.
개설서가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걸까, 감탄하면서 읽었다.
고대 사회의 지배계층과 사회경제 원리, 신분제, 특히 복잡한 남북조 왕조들의 흥망성쇠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고 있다.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을 읽으면서 남북조 시대에 관심이 생겼고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당시 시대상에 대한 개념이 생긴 것 같다.
마지막에 실린 사회경제 부분은 전문적인 설명이 많아 다소 지루하고 어려웠지만 개략적인 틀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됐다.
한자가 거의 모든 용어에 다 병기되어 뜻을 이해하기 쉬웠다.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 보고 싶은데 아쉽게 검색이 안 된다.
지금까지 중국사는 일본이나 서구에서 나온 책만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과문한 탓이었나 보다.
중국이 어떻게 호한융합되어 오늘날의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는지 그 과정이 자세히 나오고 균전법이 무엇인지 5호 16국 시대를 이룬 배경은 무엇인지, 또 문벌귀족이란 어떻게 형성이 됐고 몰락했는지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책바다에서 어렵게 빌린 보람이 있다.
많은 부분을 옮겨 적었는데 절반이 날아가 버려 허탈하다.
알라딘의 임시 저장 시스템이 불안정한 것 같아 불만이다.
<인상깊은 구절>
29p
청담파의 주벌은 정권쟁투의 결과이지 사마의 자신이 청담 귀족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마의는 위 왕실의 법가정책, 중앙집권정책에 반대하고 귀족중심의 정치를 수행하려는 처지였으며 이것이 당시 귀족의 지지를 받아 뒤에 사마씨 왕조 창건의 바탕이 되었다.
32p
손오 정권에는 당시 화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제도가 있었다. 그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세병제이다. 이는 오의 장군들이 부자형제 사이에 휘하 군병을 세습적으로 계승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오 일대를 통해서 반세기 동안 제도로서 존속하였다. 장군이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군사를 세습적으로 계승하면 그 군대는 장군의 사병적 성격이 짙어져서 각 군단이 강한 독립성을 띠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것이 제도로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은 무력을 바탕으로 하는 손오 국가는 사병 집단의 연합체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병 집단을 영도하고 있는 자는 회화 유역의 호족과 강남 토착 호족이었다는 것은 물론이다.
39p
진 사마씨가 위의 선양을 받게 된 것은 무제 사마염의 조부 사마의가 그 진영 안의 귀족 세력을 흡수하여 그것을 정치기반으로 삼은 데 있다. 따라서 진 왕조는 전쟁의 영웅이 일으킨 위 왕조와는 처음부터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진 무제는 관용, 仁恕 하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그 개인의 성격보다는 왕조의 귀족적 성격에서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
53p
천하대란의 불가피성을 통찰한 그는 동해왕 월을 설득해서 그 동생인 왕징과 종제인 왕돈 두 사람을 각각 형주와 양주 자사로 추천하고 스스로는 태위로서 중앙에 위치하여 일문이 몰락하지 않게끔 남도 준비공작을 완료한 것이다. 왕도가 사마예를 받들고 남하한 것도 왕연의 계획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강남에서 경제, 군사적으로 가장 주요한 양주와 형주를 왕씨 일족이 장악 지배하고 있는 바탕 위에서 왕도가 서진 왕족 출신인 사마예를 추대함으로써 명분과 정통성과 실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화북의 전란이 강남지방까지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 서진의 강남의 행정, 군사기구는 그대로 존속하고 있어서 그 최고권을 장악한 사마예는 쉽게 강남 지역을 제압할 수 있었고, 양주, 형주와 같은 요충지는 北來 인사들에게 민정, 군사권을 위임하여, 일단 강남 통치의 골격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위에서 말한 오주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력으로 보강하고 북방에서 남하 피난한 북방의 호족과 전 관료 등 사대부 계층을 수용하여 문무관에 임명함으로써 그 통치기구를 강화하여 북래 인사들을 결집해서 집단세력을 형성하는 중추가 되었다. 사마예 군부의 상층부는 북래 출신의 문무관으로만 구성되었으므로 그 기초가 박약하여 강남 제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예의 군부는 처음부터 강남 토착 호족을 포섭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사마예가 건업에 이진한 초기에는 강남 토착 호족들의 태도는 매우 냉담했으나 왕도는 강남 호족의 대표격인 고영, 하순을 포섭함으로써 강남의 명족 또는 호족의 지지를 얻어 그 구분에 흡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남의 호족 측에서도 삼국의 오가 멸망한 뒤, 이 지역 출신의 호족, 사대부들은 官界로부터 거의 배제되고 또 북방 명족으로부터 여러 가지 면에서 경시되어 왔다. 이런 강남 호족의 현실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진 왕실 일족이라는 정통성과 명분을 갖고 있는 사마예의 군부에 참여해서 문,무관직에 취임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예의 군부는 토착 세력의 저항 없이 강남에 세력을 부식하고 오히려 그들은 그 군부 세력 확대와 강화에 적극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71p
황제의 친임을 받고 있었던 단양윤 서잠지, 이부상서 강잠 등 문치파는 북벌에 찬성하나 오히려 무략으로 명성이 높았던 무장 심경지는 "밭 가는 것은 노에 묻고 길쌈은 비에 물어야 하는데 지금 폐하께서는 남의 나라를 치는데 백면서생들과 꾀하고 있으니 어찌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전론에 반대하였다.
73p
효무제는 말년에 물욕이 많아져서 이임해서 수도로 돌아온 州鎭 장관에게 헌납을 강요했다. 이리하여 送故의 錢物은 실제로 황제에게 그 일부가 헌납되었다. 여기에서 주진 장관은 사적 수탈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백성을 피폐시키고 나아가서 지방 관아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였다. 효무제는 재고(황제의 私庫), 상고(황제 직속의 公庫)의 확충으로 사적 재정을 확보하면서 대사나 측근의 한문 출신 관료를 구사하여 직접적으로 국가 재정을 장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황제와 그 측근에 의한 재정 운영은 전통적 행정기구에서 유리한 황제 독주에 기울어지기 쉽고 여기에 대사의 횡포 등의 발생은 사회의 반발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帝權 의 존립기반 자체를 위태로게 하였다.
74p
문벌귀족은 이런 제도로 보장된 고관 중위에 안주하여 현학이나 풍류를 추구하는 데 열중하고 吏治와 같은 실무는 오히려 경멸하였다. 여기에서 吏務 는 대각의 영사, 주서, 감수, 전첨 등 법을 아는 下吏 에게 위임하였다. 따라서 문벌귀족은 한편으로는 고위 고관을 차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무에서 이탈하고 있으면서 황제 권한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미 송초 이래로 황제가 군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문벌귀족에게 명목상 고위직을 주고 국가의 중추적 실권은 한문 한인을 발탁, 등용하여 이들에게 위임하였다. 한인 대명보는 안팎의 여러 잡사를 담당하여 재상인 강하왕 의공과 안사백 등 귀족관료들은 공명만을 지켰을 뿐이다.
83p
남조 역대 왕조는 끊임없는 찬탈혁명과 황족 종친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정국이 항상 불안정하여 정치의 권요에 참여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더 나은 영달을 가져오는 것보다 오히려 일신일족의 파멸을 가져오는 위험성이 더 많았다. 덧붙여서 송의 효무제와 같이 황제권력을 신장하기 위해서 귀족 세력을 억압하는 탄압 정치를 시행할 때는 귀족들의 지위는 매우 불안하게 되었다. 정치 사회적 지위가 보증된 문벌귀족은 거꾸로 불안과 위기에 직면하게 된 정황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런 역사현상에서 그들이 터득한 인생철학은 '명철보신'이었다. 명철보신을 처세훈으로 하는 그들에게 정치라는 현실세계에서 도피하여 학문이나 시문 담론의 문화세계가 새로운 삶의 장이 되었다. 명철보신의 처세훈은 당시의 지식인에 풍미하고 있었던 현학과 결합하여 현허를 숭상하고 이치를 멸시하여 정치에 관심을 잃고 행동할 의욕을 잃은 무기력한 남조 사대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벌귀족은 한편으로는 고관 고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실제 이치에서는 이탈하고 있었다.
96p
무제의 근본 생각은 귀족제도를 존중하지만 귀족제의 존중은 귀족적 교양의 존중이지 현실의 문지의 존중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지가 낮더라도 귀족적 교양을 갖춘 자를 임관 등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무제의 새로운 정책은 학관 시험제도를 장려하게 되어 후세의 과거제의 유력한 연원의 하나가 되었다. 즉위한 뒤 곧바로 구품중정법이 설치된 이후 겨우 명맥만 유지한 데 지나지 않았던 수재, 효렴제를 다시 중시하여 시험으로 관리 등용하는 제도를 채택하였다. 비록 관리 등용제로서는 부차적 위치를 차지했을 뿐이지만, 이 시험제도는 당대에서 시작되어 송대에 확립된 과거제의 선구가 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08p
양말 후경의 난과 진초 혼란기를 거치면서 명문세족들은 일족이 패망하거나 타향에 유랑하는 등의 인적 손실과 그 취약한 기생적 경제 기반의 괴멸은 이들의 정치 사회적 실력을 잃게 만들었다. 진대에 들어와서는 명문세족 출신들은 정권의 중추부에서 밀려나고 그 대신 남방의 토호나 한문층으로 대치되고 명문세족들의 잔영은 문화적 전통의 상징으로서 하나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후경의 난으로 남조 귀족제는 종말을 고하고 진대에서는 남방 토착세력인 토호, 한문층의 신흥 계급이 귀족제의 틀을 깨고 새로이 정치, 사회, 군사적으로 현저하게 대두한 시대이다.
109p
5호 16국 시대의 외민족의 정권수립을 일반적으로 말하는 외민족 침입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한족 왕조의 외민족에 대한 군사적 침략에서 결과한 중국 내지에 강제 이주된 외민족이 한족 왕조의 분열과 약체화를 틈타서 민족적 자각과 한족의 경제적 착취, 정치적 모순에 항거해서 스스로의 정권을 수립하였다고 풀이된다. ... 이런 동향이 마침내 수당시대에 완숙되어 호한의 혼혈로 內遷호족은 한족에 완전히 동화되어 한족화하고 생활문화의 각 방면에서도 호한의 구별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호한 양세계의 통합이 펼쳐진 것이다. ....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 한의 통치자가 호족세력을 분산시키고 변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들의 변경 지대 거주를 용인한 것이다.
118p
염민의 호족 살육책은 정치적으로는 호한을 아우르는 통일 보편적 국가를 수립하고 사회적으로는 종족주의를 초월한 호한 융합이라는 역사적 추세를 거역하는 지극히 반동적이고 성공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때문에 이 정책은 화북사회의 혼란을 부추겼을 뿐이고 이런 사회 혼란을 틈탄 인심 동요는 후조국의 내란에 무력간섭 하고 있던 선비족 모용준이 하북에 침입해서 염민을 사로잡아 참살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202p
이들은 이미 강북의 본적지를 떠나 남쪽에 거주하고 있지만 여기에 그 출신 군명을 부쳐 이른바 교군을 만들어 각각 중정을 두어 일족 향당을 품정하여 관료진출의 기반을 만들었다. 아무런 경제적 기반 없이 타향에 머물러 살고 있는 이들은 오로지 정권에 기생하여 관료적 귀족, 귀족적 관료로서 지위를 사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수단이었다. 물론 관료라는 특권적 지위는 그들에게 토지나 기타 재산을 이룰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도 있었으나 그것은 극히 드물었다고 보인다.
207p
누층적 통혼집단은 사회적 신분을 계기로 형성된 것이고 또 이런 통혼 형태는 누층적 사회 신분 구성을 유지, 존속하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이다. 이리하고 남조의 혼인은 신분내혼제로서 '士庶不婚'을 큰 틀로 하면서 당시 분화된 통혼집단의 계층적 존재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209p
심약이 양 무제에게 혁명의 조기 결행을 권행하는 진언에, "사대부들이 반용부봉(용을 붙잡고 봉황을 따라간다, 훌륭한 사람을 쫓아 따라간다는 뜻) 하는 것은 척촌지공(조그마한 공)으로 복록을 보전하고자 함입니다"라는 어구가 있다. 여기에는 무제 거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심약 등을 포함해서 옹, 형주의 호족, 토호층이 문벌제의 굴레를 뚫고 정치, 사회적으로 상승하려는 염원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213p
서진 말부터 화북이 혼란에 빠지고 이 혼란을 틈타서 이민족인 오호가 화북에 각각 왕조를 세워 한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오호의 이민족 국가에게 고래로부터 화북에서 정착하고 우수한 문화를 지니고 절대 다수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존재는 실제 통치문제로서 경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족은 오호 국가에게 세를 공급하고 역역에 종사하는 필요불가결의 존재였다. 이런 한족을 지배하고 그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제지의 유력자인 호족의 경제력과 향촌에 대한 규제력을 이용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호 여러 국가가 이민족 정권이기 때문에 한족을 압박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한인 호족이나 명족을 존중하고 위진 시대의 사족의 호적을 부활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오호 여러 군주들은 그들 국가의 통치이념과 정책 입안 및 시행 등에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는 한족 사대부를 등용해서 그들을 국가건설에 참여시키고 있다.
한편 한족측에서도 서진 말기 문벌귀족의 경쟁과 궁중음모 등으로 혼란한 관계에서 뜻을 이룰 수 없었던 한족의 사인 가운데는 오히려 이민족의 신흥 실권자에게 소망을 걸고 그 밑에 들어가서 호족 군주의 모주가 된 자도 적지 않았다. 오호의 군주들은 이런 세력에 대해서 끝까지 반항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는 무력으로 억압하고 항복 귀순한 자에게는 종래의 사회적 지위 즉 사의 신분과 그에 따른 특권을 승인하고 호족국가의 관료로 받아들였다.
215p
호족 군주들이 한족 사대부들을 그 통치기구에 흡수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호족 군주의 대부분이 한문화에 상당히 깊은 영향을 받아 학문과 교양을 습득하고 이해한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호족 군주들은 한족적 사상의 바탕 위에서 전제군주 체제와 중농주의적 국가창건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여기에서 이 국가이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유교의 정치사상을 표방하게 되고 이 실천을 위해서 유학의 지식을 갖추고 있는 인재가 필요하였다. 이런 요구에 응하는 적격한 인재들이 곧 한족 사대부들이다. 여기에서 오호시대의 한족 사대부들은 종족적 압박도 받지 않고 오히려 관료로 등용되어 향당의 지도자로서 재지 세력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223p
고환과 제휴한 산동의 명문 호족들은 적극적으로 향병을 초모하여 무력집단을 구성하고 그 將이 되어 전투에 참가하는 등 종래의 문벌귀족처럼 선조의 古骨을 팔아서 영화에 안주하려는 자세와는 판이하게 다르며 그들에게서는 세상의 난국을 헤쳐 나가려는 용기와 강한 의욕을 찾아볼 수 있다.
224p
정치의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는 귀족이라도 황제의 역린을 건드리면 지위 박탈은 물론이고 주살을 면치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성제대에서 후주대까지 권세를 휘둘렀던 조정은 무성제에게 아첨함으로써 전대 효소제 때의 불우한 처지를 만회하고 또 본질적으로 제권에 기생하는 은행의 무리와 결합하여 반대당을 제거하는 등 귀족의 지위는 왕조에게 완전히 규제되어 귀족으로서 자율성을 잃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247p
<당률>의 부곡, 객녀에 대한 여러 규정을 통관하면, 그들은 노비와는 달리 인격을 갖고 있으나 주인에 대한 예속은 노비와 같으며, 대우는 노비보다 약간 양호한 편이고 또 그들은 인신매매한 것이 아니고 주가의 의식 급여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천하게 여겨졌으나 사가의 노비보다는 상급 천인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4p
대규모의 수리관개 사업에 공권력이 필요하게 된 것은 그 방대한 노동력의 동원과 편성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많은 노동력의 동원과 편성은 도저히 민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권력에 의한 수리관개 시설의 설치로 경지화된 전토는 이때 대량으로 유입된 북래 난민들에게 분여되었을 것이고 이런 농민을 독립, 자영 농민으로 육성하여 안정된 소농 경영을 이루어 국가의 정치, 경제적 기초 확립에 공헌하였을 것이다.
297p
지방관의 불법이 끊이지 아니한 직접 원인으로는 이때까지 북위에서는 관리에 대한 녹봉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리들은 인민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또는 상인들과 결탁해서 상행위를 하여 가산을 불리고 아울러서 녹봉에 대신하는 비용을 조달하고 있었다.
<오류>
66p
유유는 손은亂 토벌에서 무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이어서 환현을 멸망시키고 전연과 후진을 평정하여 새로운 왕조 수립의 기초를 닦았다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 송의 유유가 토벌한 것은 전연이 아니라 모용초의 남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