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충청도 선비의 생활기록 - 조극선의 인재일록과 야곡일록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7
성봉현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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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황윤석의 유고인 <이재난고> 해설본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책은 그보다 한 세기 앞선 17세기의 일기이다.

무려 27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일기를 쓴 조극선이라는 인물의 치열한 학자적 자세가 놀랍다.

지방 관리를 지낸 사대부의 일기를 통해 17세기 양반가의 생활상을 구현해 낸다.

개인의 소회보다는 하루 일과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일록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17세기 조선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물 경제, 혹은 선물 경제 같다.

화폐가 유통된 것은 그보다 후세대이고 조선 중기만 해도 쌀, 포, 종이 등이 화폐 대용으로 쓰였고 당연히 장시도 활발하지 않아 시장에서 재화를 구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선물 형태로 주고받았다.

선물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볼 수 있다.

요즘은 돈으로 부조를 하지만 전통사회에서는시장에서 물건을 살 수 없고 자급자족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직접 현물로 부조를 한다.

예단도 그런 과거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 같다.

책의 주인공인 조극선은 개국공신인인 조온의 후예이고 지방 수령을 지냈으며 기호학파의 일원으로 지방 사족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로부터 선물을 받아 가계를 경영했다.

선물은 단순히 청탁의 의미인 뇌물이라기 보다는 상호부조 성격이 강했다.

사대부였기 때문에 특히 종이가 중요했는데 여자들이 집에서 베를 만들어 교환 수단으로 쓰듯, 조극선도 직접 닥나무를 벌초하여 나무를 쪄서 인근 가야사로 운반해 종이를 가공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이런 예를 보면 확실히 조선은 자급자족 시대였던 듯 하다.

조극선은 여러 차례 사마시와 문과 초시에 급제했으나 정시 급제는 실패하고 만다.

그럼에도 공신의 후손이자 학행으로 추천되어 중앙 정계의 하위직 관리를 지냈고 지방 수령도 역임했다.

문과 급제가 이토록 어려웠던 것을 보면, 역사책에 이름이 등장하는 고위 관료들은 최상위 엘리트들이었던 듯하다.

17세기 사대부가의 일상을 일기라는 원사료를 통해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측면으로 재구성하여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자칫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는데도 짜임새 있게 교양서 수준으로 잘 쓰여진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68p

사림은 의리를 중시하는 인간집단으로 개념화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언행과 사유 또한 의리의 틀에서 집단적으로 미화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고, 그런 흔적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 '문집' 또는 '유고'라 불리는 문헌이다. 문집은 편집된 기록, 특히 사회적 합의를 거친 공간물이라는 점에서 이런 혐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에 비해 조극선의 일기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못 실상에 가까운 심리와 언행을 담아내고 있다. 일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스승은 모두 네 사람이지만 그는 '三師'라 하여 세 사람만 인정하고 있다. 한 사람은 감추고 있는 것이다. 감춤과 드러냄의 실리는 '義' 보다는 '利'의 작동임에 분명하다. 의리의 시대에도 이해관계는 향존했고, 조극선의 일기는 그것의 실체를 보여준다. 

83p

김장생에 대해 존모의 감정을 숨기지 않은 조극선의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김장생이 학덕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초반 기호학파의 영수라는 현실적 위망과 결코 무관치 않다. 그(김장생)와의 가까움은 그 시대 사람들이 외면하기 어려운 '利'였기 때문이다.

124p

조선은 신분사회인 동시에 경쟁사회였다. 과거는 경쟁 및 능력사회로의 이행을 단적으로 보여준 제도였고, 상속의 한 형태인 '별급' 또한 경쟁과 능력을 부추긴 사회문화적 관행이었다. 학문의 영역도 이와 별개일 수는 없었다. 뛰어난 석학에게 줄지어 입문하여 사제관계를 맺었던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었다. 그 이로움은 '지식과 학문'의 영역을 넘어서는 산법의 결과일 공산이 컸다. 아무리 의리를 강조하는 사회라 할지라도 '利'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 이를 추구하는 자를 '모리배'로 지목하여 그 명예를 훼손시켜도 '利'가 종식될 수는 없다. 

 도학과 의리로 포장된 조선의 지식인 사회는 너무 미화된 측면이 있다.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과거를 통한 영달을 포기했다는 기사는 개인 전기류의 공통 테마를 이루었고, 가난, 검소, 청백은 지선의 정신사적 가치로 고착화되었다. 모든 선비가 학문에 종사하고, 모든 사람이 가난해야만 비로소 조선은 문명국가가 되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156p

그가 이렇듯 문과 합격을 위해 노력한 것은 무엇보다도 부친 조경진의 뜻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양반의 지위를 지키고 문과 출신이어야만 청요직에 나갈 수 있는 조선 사회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과거를 포기할 수 없었던 집안과 주변의 암묵적인 요구나 사회 분위기를 거부하기 어려웠다.

167p

조극선은 지방 유생으로서 경제적으로 경학과 제술에만 전념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에게는 훌륭한 스승이 3명이나 있었으나, 규칙적인 학업이 불가능하였다. 또 박지계와 조익을 만나기 전에는 6년 넘게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과거에 합격할 때까지 경서 공부와 제술을 끊임없이 익혔지만 결국 과업을 성공적으로 매듭짓지 못하였다.

195p

사진향은 왕실의 가족을 근간으로 한 친인척들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졌다.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가족 간의 친밀함은 왕실을 지탱하는 가장 큰 연대감이었으며, 국장에서 그들의 연대감은 사진향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204p

조극선은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과거시험을 치렀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의 관직생활은 충신의 후예라는 사회적 조건에 부분적으로 의존하였다. 물론 처음으로 입사한 동몽교관의 자리는 그의 학자적 모습을 잘 보여주며,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충신 자손이 많은 세자익위사에 나아간 것이나 인목왕후 국장 중 충훈부 진향에 참여한 것은 충신의 후예로서 자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293p

16세기의 선물경제는 양반관료와 사족의 이중적 지배구조 속에서 형성, 유지된 경체체제로, 정확한 가치 환산보다 선물 제공에 따른 보상을 중요시하는 교환체계로 이해된다. 그리고 선물은 개인의 관직, 그리고 그가 지녔던 친족망과 교유관계를 바탕으로 한 '양반 상호공조의 관행'으로서 녹봉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던 시기에 양반사회를 존속시키는 새로운 방책이었고, 양반관료들이 자신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16세기 조선사회의 선물경제는 세계사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였으며, 그 주체가 구매력이 높은 양반관료였다는 점에서 장시 활용을 제한하여 시장경제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16세기의 주요한 재화 획득 수단이었던 선물교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상품교환의 비중이 증가하여, 19세기가 되면 선물교환은 의례적인 영역으로 축소되고 있음을 제시한 것도 역시 일기를 통한 연구였다.

294p

선물경제의 이해는 개인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호혜성의 원리, 국가 및 관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재분배의 원리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호혜성의 규범에 대한 강조는 도덕경제의 사회로까지 나아간다. 결국 선물경제는 도덕경제의 한 형태로서, 전근대 한국 사회는 '호혜-재분재의 통합구조'에 기초한 도덕경제가 가장 잘 실현되던 사회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선물경제'에서 바라보는 선물은 시장을 대체하는 것으로, 교환이나 거래가 아닌 정치적 혹은 정서적 호혜를 바탕으로 한 경제활동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선물의 이해는 호혜성을 수반하지 않는 상품과 달리, 주기와 받기 그리고 답례라는 삼중의 의무를 수행하는 행위로서 선물을 파악함으로써 물건 그 자체뿐 아니라 당사자 간의 관계에 더 집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301p

<인재일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재화의 교환은 대부분 선물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매매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었다. 또한 화폐도 널리 쓰이지 않고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시장이 충분하게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수도 있다.

303p

가계부가 아닌 일기라는 자료적 성격으로 인해 매매행위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을 가능성과 함께 조극선이라는 인물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로 인하여 매매활동 자체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즉 조극선을 포함하는 사족층의 남성들이 시장과 매매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노비와 전답과 같은 주요 거래에 있어서도 노비의 이름으로 매매문서를 작성할 정도로 매매활동 참여를 기피하였다. 더불어 가정을 운영하기 위한 재화의 구입은 대체로 여성의 몫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305p

포틀래치로 대표되는 호혜에 있어 '주어야 하는 의무'와 '받아야 하는 의무', '답례의 의무'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다만 가족과 같이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순수한 선물'의 경우는 일반적 호혜성의 영역으로 직접적인 물질적 보답의 기대는 적절하지 않고 기껏해야 암묵적인 기대만이 가능하다.

326p

인근의 지방관으로 부임해 있을 때 조극선가에 대한 선물의 집중적으로 제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덕산현과 같은 농촌사회에서 권력에 근거한 호혜로서의 선물이라 할 수 있고, 관직에 올라 권력과 부를 소유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친족의 의무'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역시 일반적 호혜성의 범주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것은 가족 내 및 가족 간의 사회적 행동의 기초를 이루는 호혜성의 규범과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로 작용하는 생계에 대한 권리라는 두 가지 도덕적 원리가 친족집단 내에서 긴밀하게 조응하는 것으로, '도덕경제' 사회로서의 조선사회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31p

덕산현과 같은 향촌사회에서 국가권력의 대행자인 지방관에 대한 개인의 위치는 절대적인 약자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나름 지역 내에서 유력 사족의 한 구성원인 정자익이 군정 차출과 관련하여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히는 상황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일방적인 관과의 관계를 볼 때, 충청도 병사 현즙과 가까운 일가인 조극선가에게 제공하는 선물은 단순한 관계의 유지 이상의 분명한 목적성과 대가성을 내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36p

선물의 종류와 양에 있어서도 대단치 않았다. 이것은 당시 사제관계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도학과 의리를 함께 하는 학문공동체의 근간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호혜성을 수반하지 않는 상품과 달리 선물은 물건 그 자체뿐만 아니라 물건을 교환하는 당사자 간에 긴밀한 상호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인식까지도 함께 교환하는 효과를 발휘함으로써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핵심 요인이 된다.

341p

박주인가의 선물은 이와 같이 목적성이 분명하였지만, 선물에 대한 대가는 직접적이지 않았고 부채의 계산도 노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절대적인 권력자인 관으로부터 위험에 대비하고, 나아가 그 권력을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드물고도 중요한 기회 앞에서 선물은 보다 적극적이고 관대하게 일반적 호혜성의 모습으로 제공되어야 했다.

350p

실제로 승려들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조극선가에 예속되어 선물과 사역을 제공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승려들이 노비들에 비해서도 훨씬 많은 역과 물종을 극선가에 바치고 있는 것으로, 이는 한편으로 극선가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극선가에 기대어 다른 곳으로부터 추가적인 침해를 막고자 하는 의도일 수도 있다.

 1620년 전반 무렵에 가야사가 궁가의 원당이 되자, 가야사 승려들의 조극선가에 대한 태도는 돌변하였다. 더 이상 상전가에 공손하지도 않았고, 극선가의 종이 제작 요구를 무시하기까지 하였다. 

 승려들이 극선가에 제공한 선물과 사역은 한편으로는 예속에서 말미암은 의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선가의 관대함과 보호에 대한 기대로 제공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속관계가 소멸하고, 관대함과 보호를 기대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더 이상 선물과 노역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360p

16세기 조선을 선물경제로 설명하는 "선물수수는 대단위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선물을 주고받는 당사자도 도덕적으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로 하는 물자를 요구하였으며, 상대가 호의적이었을 경우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라는 말은 마르셀 모스나 칼 폴라니의 저서에서도 볼 수 있음직한 인류학적 언설로, 자본주의 이전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전근대 사회를 호혜에 기초한 보편적인 경제체제로 설명기에 적합하다. 그러나 조선은 상당히 고도화된 법과 관료체계를 갖춘 중앙집권적 사회였다.

 조선시대에 존재한 공, 사의 불분명은 공, 사 개념의 미발달이란 측면도 있겠지만, 제도적 한계 및 행정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법적 투명성을 집행하기 어려운 현실적이고 시대적인 한계도 분명히 내재하였다. 중앙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처벌은 물론 조극선의 부끄러움에 대한 인식을 볼 때, 양반관료의 수증과 위헙청탁은 합리적인 경제행위라기보다 익숙해진 '일상 속의 불법'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시각이다.

366p

호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물질 이득의 대가가 아닌 사회적 신용을 획득하려는 행위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미덕을 과시적으로 행하게 되면, 그것이 상호성의 원리에 따라 결국 자신의 가족에게 혜택이 돌아오게 된다고 본다. 이 같은 상호 간에 선물을 나누는 형식으로 존개되며, 시간적으로 동시적이 아니라 모두 단절되어 실행된다.

 재분배의 원리는 집단의 농작물 중 상당 부분이 추장에게 전달되고, 추장은 이를 비축했다가, 모든 공동체 활동에 중심을 이루는 공동체 전체의 행사와 그 속에서 관습에 따라 모두에게 보내는 선물에 의해 재분배가 이루어짐을 말하며, 여기에서 중심성의 패턴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러나 조선의 중앙집권적인 관과 깊숙하게 연결된 사족들의 사적 행위 -그것이 칭념이건, 선물이건- 가운데 이와 같이 공동체를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중심성의 패턴을 보이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선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재분배 원리와는 상치되며, 국가적 단위에서 제도적으로 재분배해야 할 공적 자원을 사적으로 특정 소수에게 집행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재분배의 성격을 훼손하는 행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90p

오달제는 1633년 문과 초시에서 행전에 대한 대책을 제출하였다. 여기서 그는 당시 행전이 성공하기 어려운 요인으로 행전의 목적이 국왕과 국가의 '이해'에서 출발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면서 <맹자>의 구절을 인용해 '인의'에서 답을 찾을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인의'에 바탕을 둘 경우 전문의 유통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오달제를 비롯한 당시 선비들의 여론이었다.



<오류>

190p

세 번째 언덕엔 인원왕후의 능인 유릉이 있었고,

-> 유릉은 인원왕후가 아니라 의인왕후의 능이다.

197p

의성왕대비(명종비 인순왕후), 명종대왕, 인순왕대비(인종의 계비, 1532-1575), 공의왕대비(인종비, 1514-1577), 의인왕후

->의성왕대비가 인순왕후로, 인종의 계비는 잘못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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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과 장부 - 경제 세계화 시대,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와 상업
리보중 지음, 이화승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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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언제 시작했을까?

더 정확히 세계화의 정의는 무엇일까?

저자는 상품의 교류가 전세계적 수준으로 확대되는 시점을 세계화의 시작으로 본다.

이 책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초기 세계화에 대해 중국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440페이지로 두꺼운 편이지만 번역도 매끄럽고 편집도 보기 좋으며 무엇보다 경제적, 현실적 관점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저자의 집필 방향이 너무나 흥미롭다.

전에는 중국에서 번역된 책들이 서양책들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했었는데 양서들이 많이 번역이 안 되서 그랬나 보다.

너무너무 재밌게 읽었고 자본주의는 최근에 발명된 것이 아니라 재화의 교환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태초부터 시장의 형태로 존재해 왔고 교통과 기술의 발달로 그 범위가 전세계적으로 확대됐을 뿐임을 알게 됐다.

제목이 "조총과 장부"여서 사내대장부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회계장부를 뜻한다.

이슬람이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이라면 네덜란드 상인들은 한 손에 장부, 한 손에 총을 외쳤다고 한다.

뼛속까지 상업적인 민족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중국에 사대하는 조선의 모습에 분통이 터지곤 했는데, 특히 망해가는 명나라를 끝까지 섬기는 모습이 너무나 한심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전통 세계의 중국이 얼마나 엄청난 국가였는지 실감했다.

당시 우리 조상들로서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강대국이자 문명국이었을테고 조공 시스템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면서 국제 질서에 잘 적응했던 셈이다.

명나라가 한줌 밖에 안 되는 만주족에게 망하리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더니, 과연 일본의 국력은 과거부터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인구는 세계에서 세 번째에 달했고 은광이 전 세계의 1/3을 생산해 구매력이 높았으며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군대의 수준이 높아졌으니 밖으로 뻗어나갈 만 했던 것이다.

명군이 한반도에 들어와 피해를 주긴 했으나, 만력제를 조선의 황제라고 비난했던 당시 명나라 신하들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로 명나라로서는 원병 파견이 큰 부담이었다.

주제를 확실하게 드러내자면 제목을 "무기와 무역"으로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전통 무기가 아닌 대포와 조총 같은 화기는 군사적 살상력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였고 이것을 전파시킨 것이 바로 상인들의 무역이다.  

상인은 이익 추구를 위해 국가를 초월해 거래하기 때문에 최신 무기들은 전 세계로 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만 동아시아 무역 시스템에서 제외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국가들까지 무역 시스템을 통해 국가의 부를 창출하고 군사력을 강화시키는데 중국의 조공 시스템에만 안주했던 조선의 안이함이 안타깝다.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고 경제적 세계화 관점에서 보는 역사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강추한다.


<인상깊은 구절>

17p

스스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성공 여부는 그다음 문제다.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성공과 실패, 유리함과 불리함에 관해서는 신의 지혜로도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다.

40p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국은 국가를 초월하는 정치, 사회, 문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황쥔제의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이렇게 넓은 영도를 보유하고 지역 간 큰 차이를 보이는 중국이 그럼에도 내부 결속이 느슨한 나라는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이전 수많은 제국이 내부적으로 분열을 겪었던 것과 달리 중국은 어느 정도 '지리적 특수성'이 있었다. 역사학자 존 맥닐은 "중국은 세계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고 내륙에 수로 시스템을 가동해서 공간을 연결시켰다. 기차가 등장하기 전에는 운송비용 측면에서 세계의 어떤 육지 운송 네트워크도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중국은 수로 시스템 덕분에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통일된 시장을 갖추고 이를 기반으로 정치 세력, 사회를 창조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도 수로 시스템으로 연결되는 한 생산 방식, 토지 이용, 자원 개발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중국은 국가 형성과 발전 과정이 매우 특수했다. 秦 나라 이래 오랜 기간 통일된 중앙집권제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하나의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실행함으로써 '국가'를 초월하는 정치, 사회, 문화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런 특수성으로 인해 초기 경제 세계화 시대의 동아시아는 중국과 중국 이외의 지역 이렇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 중심론'에 따라 구분한 것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51p

중국 교과서엔 "자본주의의 여정에는 무기와 폭력, 피와 눈물로 가득 차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기와 폭력'이나 '피와 눈물'로 가득한 정복과 약탈이 근대 초기에 서유럽이 해외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인류 역사는 정복과 약탈로 가득차 있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칭기즈칸과 그 자손들이 벌인 전쟁이다. 몽골인들은 이 정복 전쟁을 통해 아시아에서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정치적 실체인 몽골 제곡을 건립했다. 정복과정에는 '무기와 폭력'이 동원되었고 피정복지역의 백성에게서 엄청난 '피와 눈물'을 자아냈다. 또한 중국과 유럽 여러 지역의 역사를 변화시킴으로써 어떤 의미로는 세계사의 '대변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피정복지역의 사회,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는 바꾸지 못했고 위용을 자랑하던 몽골 제국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으며 몽골의 언어와 문화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전통적 관점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대변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변화'는 이전 시대와는 성격이나 영향력 면에서 완전히 다른 역사적 전환이다. 대변화는 바로 경제 세계화의 시작을 가리킨다.

169p

조선은 일본과 달리 서양의 화기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인색했다. 서양인과의 접촉도 늦었고, 화기 기술에도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174p

동북아시와는 달리 동남아시아에서는 화기가 냉병기의 보완재로 사용되었다. 이는 선진 화기를 사용하는 서양인들이 아주 적은 병력으로 손쉽게 이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 통치를 할 수 있게 만든 요인이었다. 

199p

국가가 더 이상 군사 기술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초기 경제 세계화의 주역인 상인은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져와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상인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고객에게 이를 판매했다. 

220p

원의 통치자들은 유가의 학설을 이용해서 통치를 공고히 하려고 했지만 다른 왕조들처럼 유학을 존중하지는 않았고 바얀 등 권신을 특히 배척했다. 유학을 공부한 사대부의 사회적 지위도 아주 낮아 정소남은 <심사>에서 '사회적 신분상 유사가 9등이고 그다음 거지가 맨 아래였다'라고 할 정도였다.

226p

당대의 경교처럼 원대의 기독교 선교활동 역시 조정의 지지 하에 진행되었고, 신도가 주로 외래 소수민족이어서 중국의 기층 사회에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조정의 지지가 점차 사라지자 교회도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되고, 교파 간의 싸움이 일어나 기독교 발전을 저해했다. 무엇보다도 이민족 통치 하에서 박해받던 한족이 여러 특권을 누리던 몽골인과 색목인, 그들이 숭상하는 외래 종교에 호감을 가질 리 없었다. 원나라가 망한 후 기독교 세력도 함께 사라졌다.

235p

동남아시아 많은 지역이 빠르게 이슬람화된 것은 현지 무슬림 통치자들이 당시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인 오스만 제국과 그 동맹자인 인도 무굴 제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 귀의한 이후 이들로부터 군사 기술이나 군비 지원을 받았다. 이것이 이슬람 세력이 힌두교/불교 국가와의 투쟁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하며 결국 승리로 이끈 배경이 되었다.

240p

알단칸이 장전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은 중국에 큰 의미가 있다. 판원란은 당대 토번이 서역을 점령한 것에 대해 "이 새로운 형세는 토번이 무력으로 선교를 하는 무슬림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한족 문화가 파괴되는 것을 막은 셈이다. 훗날 회홀이 서쪽으로 이주해서 천산남북 지역에 정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중국 역사에 대한 커다란 공헌이다"라고 했다. 

241p

미얀마와 시암국 모두 인도차이나반도에 위치한 강국이었다. 이들이 불교를 신봉하면서 불교 문화권이 형성되었고, 이로써 중국 남쪽에서 올라오는 이슬람의 세력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몽골, 신장 북부, 칭짱고원까지의 지역에서 불교는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중국의 서, 북, 남을 에워싸는 이른바 '불교장성'을 쌓은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 특히 중국에서 이 '불교장성'은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 불교장성이 형성되면서 이슬람의 동쪽 진출을 막았고, 중국은 인도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243p

"송,명 유학은 왕권 통치와 결합하거나 관리들의 치적을 기술하는 '관학으로서의 유학'에서 탈피하고, '교화를 우선'하는 세속적인 인문 전통을 실천함으로써 점차 '교화의 유학'의 역할로 변했다. 유학은 의장, 사창, 보갑, 서원, 향약 등의 각종 제도 및 사업을 통해 사회에 공헌했다. 송, 명 이후 세족 문벌이 사라지면서 사회는 점차 평등하고 느슨해져 조직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였는데, 유학에 따르면 사회의 모든 공공사업에는 반드시 '이끄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만약 사대부가 사회에 관심을 쏟지 않고 관리가 된 후 자신의 출세와 부귀만을 좇는다면 반드시 부패하고 만다. "사대부 집단이 위로는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아래로는 농촌 사회에 관심을 가지면서 유학은 송대 이후 1000년 동안 중국 역사에서 안정적이고 지도적인 역량을 갖게 되었다."

254p

"첫 번째 파도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자신들의 종교를 포함해 서양 문명을 비교적 완전하게 수출한 것이다. 모든 문명에서 민족 종교는 핵심이다. 역량을 갖춘 비서유럽 민족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이런 시도에 저항했다. 두 번째 파도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 지역에서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영국인이 서양 문명을 전파한 것이다. 이들은 문명을 선별한 다음 수출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상인과 관료는 선교사들의 활동에 전전긍긍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17세기 인류 세계에 침투한 서양 문명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가 아니라 기술이다. 그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 기술이었다."

301p

"남양 군도는 지리적으로 매우 독특하다. 이곳의 특징은 삼림과 바다가 공존한다는 것인데, 삼림 지대 때문에 육로로는 접근이 어려운 반면 해양은 사통팔달이어서 중국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아라비아인, 서양인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이 개방된 공간은 외래 세력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경쟁하는 장소가 되었다. 전쟁이 자주 일어나지 않아서 장벽 같은 방어 시설이 없었고, 유럽인들은 이곳을 그저 '촌락이 모여 있는 지역'이라고 여겼다." 앤서니 리드의 분석대로 남양 군도는 군사력이 약했기에 유럽의 강력한 전함을 당해내지 못했고, 아주 쉽게 서양의 식민 지배자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305p

중국은 영토, 인구, 경제력, 정치 제도 등 모든 면에서 특수하기 때문에 어떤 나라와도 비교가 불가능하다. 이 특수성을 기반으로 조공 시스템의 중심에 중국이 놓인 것이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했고 인접 국가들은 중국으로부터 여러 자원(제도, 과학 기술, 문화 등)을 받아들였지만, 반대로 중국이 이들에게서 얻은 것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인은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국제관계 시스템은 중국의 외교 전통 위에 세워졌다. 

308p

명나라는 이에 따라 조공 시스템을 운영하고, 조공국 간의 다툼이 중국에 위협을 가하지만 않으면 무력으로 간섭하지 않았다. 명대 후기의 문인 원굉도는 조선과 일본이 충돌했을 때 "이웃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데 나는 자식을 내보내 돕고 있으미 어찌 곤혹스럽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이는 이웃 나라의 분규에 대한 중국의 난처한 입장을 잘 표현한 말이다.

 조공 시스템은 대체적으로 잘 운영되면서 동아시아는 평화를 유지했다. 

 명대 후기, 동아시아에 새로운 강자들이 등장하면서 중국의 지위에 도전하고, 심지어 직접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이전까지의 국제질서는 유명무실해졌고, 명 조정은 새로운 국면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3p

히데요시의 야심은 미친 자의 망상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았고, 전쟁에 필요한 인원을 충분히 징집할 수 있었다. 또한 국제 무역에 필요한 경통 화폐인 백은을 대량 생산해서 전쟁에 필요한 군비와 물자를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 조총 제조와 사용 기술이 대단히 뛰어났고, 수차례 내전을 겪으면서 풍부한 실전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명나라의 영토와 인구가 일본보다 10배 이상이었으나 일본은 명나라를 정복하는 전쟁을 수행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325p

중국의 인접국은 경제적으로 그에 미치지 못해 중국인들은 그들을 가난한 나라고 여겼다. 따라서 인접국을 정복한다고 해도  별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중국의 지리 환경도 대외 확장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국은 대외 개방을 하지 않고 자급자족에 의존하는 국가다. 그리고 출구라고는 사막과 해양 오직 두 곳 밖에 없다. 그나마 잠재적인 무역 파트너가 있을 때만 이 출구를 활용했다." 이 두 개의 출구는 정확히 말하면 '서역'과 '남해'로, 중국이 영토를 넓히려면 이 지역 먼저 정복해야 했다. 동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바다인 태평양이 있고, 서쪽에는 높고 넓은 고원인 칭짱고원이 있으며, 북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동토 지대인 시베리아가 있고, 남쪽에는 열대 지대가 있어서 중국은 바깥으로 뻗어나갈 수 없었다.

331p

동아시아의 중심인 중국은 영토를 확장할 생각이 없었고, 조공 시스템은 다른 나라들의 주권을 보장하면서 서로 이득을 얻는 일종의 호혜관계였다. 누군가 조공 규칙을 어긴다면 중국이 경고를 하기도 했으나 무력을 사용해 타국의 영토를 뺏지는 않았다. 중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전쟁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중국이 인접국과 전쟁을 벌일 때도 그 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영토를 빼앗으려는 목적은 없었기에 국지전 수준에 그치거나 비교적 강도가 약해 근대 유럽의 상황과는 크게 달랐다. 페어뱅크는 "중국의 전통적인 대외 정책은 여러 비폭력 방법을 포함한다. 전쟁의 목적은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지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고, 물리적 전과보다는 심리적 효과를 얻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364p

척계광의 훈련법이 확산되기 이전에는 군대가 개인의 무예를 중시해서 무기를 제멋대로 다루면 영웅처럼 대접했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무술가, 염효(소금을 몰래 팔던 사람들), 승려, 소수 민족이 군대로 들어갔다. 이들이 잘 조직된 왜구에게 추풍낙엽처럼 무너지자 비로소 전투의 승패는 개인의 무예 실력과 무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416p

과거 몽골이 그토록 오랫동안 남송과 전투를 벌인 것과 달리 청이 이렇게 순조롭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청조 건립 초기, 프랑스 선교사 조아킴 부베는 이렇게 분석했다. "사실 타타르인(만주족)은 제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았지만, 한인들은 서로를 죽였고 심지어 용감한 한인들은 오히려 만주족을 위해 자신들의 민족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가장 용감한 한인'은 누구였을까? 한학자 마크 엘빈은 "만주인이 중국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오삼계, 홍승주 등 한족의 반란 세력이 만주족을 대신했다"고 했다. 또한 "1640년대 만주족의 작전능력은 명나라 군대와 비교할 바가 못 되었기 때문에" 만약 한족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만주족의 힘만으로는 중국을 정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분석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군이 비교적 쉽게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오삼계, 홍승주 등의 한족의 반란 세력 때문이 아니라 청조에 항복해서 팔기에 편입된 명나라 군대인 한군 팔기, 특히 덩저우 대포 부대 때문이었다.

432p

경제 세계화의 초기에는 상업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었다. 국제 무역의 무대가 넓어졌지만 아직 규칙이 정해지지 않아서 상인들의 탐욕은 무법천지에서 노출되었으며 이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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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해 글로벌지역학총서 (한국학술정보) 8
김상규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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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나 표지는 격조있고 괜찮은데, 내용이 너무 지루하다.

전반적인 일본 문화 역사에 관한 이야기로, 백과사전 보는 기분이다.

특히 일본 역사서에 나오는 민담이나 문학 작품들을 설명하는 부분이 너무 난삽하고 지루하다.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힘든 흥미로운 민간 전승들이긴 하지만 한번에 와닿지 않아 아쉽다.

겐지모노가타리나 야스나리의 문학 작품들은 관심있게 읽었다.

또 일본의 전통 연극인 가부키, 노가쿠, 교겐, 조루리 등의 설명도 흥미롭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구성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많은 것을 두고 노벨상과 인연이 많다는 식으로 가볍게 넘기는 대목은 좀 황당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물리학상이나 화학상 등 과학 분야에서 스무 명이 넘는 수상자를 배출한 것은 엄청난 국가의 저력 아닌가?


<인상깊은 구절>

254p

로드리고는 개종에 이르는 길을 똑같이 괴로워한 주의 존재를 아주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설령 자신이 속한 교회는 배반하였을지라도 신을 배반한 것은 아니었다. 신은 침묵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으며,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기교자란 교회에 있어서는 썩은 사과이고, 언급하고 싶지 않은 존재이지만, 그들이 기교하게 된 동기와 심리,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교회의 관심 밖에 있어서 연구 대상조차 안되었다. 이리하여 약자가 된 그들은 역사학자나 정치가들로부터도 침묵으로 묵살당했지만, 그들도 인간이기에 그때까지 자신들의 이상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배반했을 때의 눈물과 회한은 누군가 닦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개종한 이후 굽은 손가락을 모아 말로서는 표현되지 않은 기도를 올렸다고 생각하면 나의 뺨에도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고 토로하고 있다.

(배교자들에 대한 마음씀이 인상깊다. 배교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신과 동료들을 배신했다고만 비난받았지만, 지금까지 진리와 이상으로 믿었던 것들을 버릴 때의 그 연악한 마음을 누군가는 닦아 주어야 하고 그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엔도는 기독교가 가진 최대의 구제능력은 성서에 그려진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죄인으로 고문 끝에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진 자신을 결박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게다가 뭇사람들이 지독하게 욕설을 퍼붓는 모습은 역사상 가장 비참하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더럽고 참담한 자신을 어디까지나 끝없이 곁에 있으면서 지켜주는 사람, 그것이 그리스도라고 한다. 이 특징적인 기독교 해석은 높은 평가와 함께 이단으로 간주하는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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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경제 이야기 - 화폐통일 진시황부터 거시경제학자 제갈량까지
왕링옌.왕퉁 지음, 이서연 옮김 / 시그마북스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만 듣고 뻔한 역사 이야기인 줄 알았다.

특히 중국에서 출판된 책들은 가벼운 편집 위주의 책이 많아 깊이 면에서 늘 실망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재밌고 훌륭할 수가!

제목을 너무 평범하게 지어 책이 가진 놀라운 재미와 깊이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알라딘에 리뷰도 없어 홍보가 안 된 것 같아 아쉽다.

저자들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로 사학자가 아닌 경제학자인데도 역사에 대한 깊이나 비평이 대단한 수준급이다.

단순히 경제적 현상을 역사적 사례에서 찾는데 그치지 않고, 경제학의 원리로 보는 역사를 아주 흥미롭게 설명한다.

나는 역사에는 관심이 많지만 경제 쪽은 주식의 원리도 다 이해를 못하는 편이라 경제 이론을 설명하는 부분들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긴 했지만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원리에 눈을 뜬 기분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전근대 사회에서도 어떻게 재화를 획득해서 분배할 것인가, 또 그것을 바탕으로 왕조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던 것을 보면, 인간은 정말 사회적 동물이고 경제적 존재인 것 같다.

무엇보다 공공지출에 대한 비판이 현 정부의 시책과 비교되어 많이 와 닿았다.

부자들은 권력과 정보가 있기 때문에 증세를 해도 자산을 잘 숨기고 정부가 원하는 만큼 많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러나 증세 정책이 강화될수록 노동으로 먹고 사는 중산층들은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고 그 돈이 가난한 계층으로 가지도 않을 뿐더러 결국 중산층도 붕괴되고 만다.

정부가 원하는 것이 건강한 중산층의 확대라고 본다면, 증세 정책은 사회를 안정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셈이다.

또 정부의 효율성은 민간을 따라올 수가 없다.

정전제로 대표되는 '공유지의 비극'으로 이를 설명한다.

자기 것을 내놓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과도한 사회주의 경제정책들은 결국 모두를 가난하게 만들 수 밖에 없음을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입증하고 있으니 현 정부 정책자들이 한 번쯤 읽어 봤으면 싶다.

월급을 적게 주면서 청렴함을 기대할 수 없다는 주장도 아주 현실적이다.

옹정제가 양렴은을 지급해 관리의 부패를 막았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경제적 관점으로 보는 역사가 궁금한 분들이라면 필독을 권한다.

모름지기 책이라면 이 정도 수준은 되야 출판을 하는 것인데 가벼운 책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인상깊은 구절>

48p

화폐 통일을 구체적으로 실시하는 과정에서 보면 업적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진시황이 상당히 거칠게 일을 추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화폐 통일은 전쟁보다도 더욱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기에 약간만 부주의해도 경제 발전에 큰 손실을 불러올 수 있었다. 

 설사 진나라가 모든 정치적 자원을 쏟아 부어 화폐 통일을 실행했다 하더라도 '말에 의지해 정보가 전달되고, 함성에 의지해 공지가 알려지고, 새김으로써 글을 남기던' 시대였던 만큼 수년, 심지어 수십 년의 세월을 쏟아 부어도 완성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더구나 진시황은 동쪽에는 만리장성을 쌓고 북쪽으로는 흉노족을 몰아내며 남쪽으로 월나라에 군사를 파견하고 서쪽으로는 파촉까지 길을 내는 등 대규모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화폐 통일 정책에 사용할 재정자원이 분명히 적었을 것이다. 더구나 짧은 시간 내에 화폐 통일을 강행해야 했으므로, 민간의 자원을 대규모로 수탈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진나라는 6국 화폐 통일에 따른 적응 기간 동안 노역을 줄이거나 세금을 낮추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 진나라가 짧은 시간 동안 사방에서 전쟁이 계속됨에도 화폐 통일을 강행했던 것은 당장 혼란스럽더라도 역사에 길이 남을 개혁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진시황의 적지 않은 '정책 성과'와 개혁 정치는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당시 백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진시황 자신도 직접 누리지 못한 개혁의 성과는 다음 왕조인 한나라가 모두 갖게 된다.

56p

게다가 진시황은 큰 업적을 세우는 걸 좋아했다. 이 때문에 항상 정벌과 노역이 끊이지 않았다. 군대를 모으는 일이나 궁을 짓고 만리장성 쌓는 일은 모두 대규모 재정과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백성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의 자산이 대량으로 소모되었다. 사실 이것은 과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른 후 유럽이 겪은 대공황 상황과 같았다. 백성들은 계속되는 각종 노역을 힘겹게 감당해야 했다. 더구나 강압적으로 6국의 화폐를 폐기한 뒤 일련의 적응 과정이나 보상 조치가 전혀 없어 대량의 민간 자본이 소실되었다.

59p

항우는 대적할 수 없는 용맹한 무장이었다. 하지만 장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적을 무찌르는 용맹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수하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 군대의 사기를 고무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몇 배에 달하는 진나라 군대를 보면서 항우 자신은 두렵지 않았을지 몰라도 수하들은 두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전투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만약 모든 병사와 군관이 한마음 한뜻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과 싸운다면 승리할 확률이 가장 높아진다. 하지만 경험이 많은 장군이나 정예병도 상황이 수시로 변하는 전장에서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승리할 것이란 희망보다는 자신이 전장에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심리적으로 붕괴되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는 빨리 전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이다.

 게다가 옆의 사람이 도망을 가면 원래 싸우려 했던 사람도 심리적으로 붕괴되면서 덩달아 함께 도망치게 된다. 그렇게 후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던 병사들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적에게 등을 보인 채 도망친다. 그렇게 진영이 무너진 병사들은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도륙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에 맞는 선택을 한다면 결국 최악의 결과로 치닫고 만다. 그러므로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는 사기를 올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전투를 하기 전에 사기를 최대한 끌어올려 승리에 대한 주관적 확신을 심어놓는다면 전투 중에 힘겨운 상황을 만나도 도망치지 않는다. 이것이 고대에 장군들이 사기를 목숨과 같이 생각했던 이유이다.

150p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기 아까워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설령 모든 재산을 자기 나름대로 성실하게 신고한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악착같이 파고들면 어디선가 고발당할 거리가 나오게 마련이다. 

 이런 법제들로 무제의 국고는 풍족해졌지만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사마천의 묘사에 따르면 당시 중산층 이상 상인들은 대부분 파산했으며,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쓰려고만 할 뿐 돈을 벌거나 모아두려고 하지 않았다. 고정자산이 생기면 재산세를 내야 하고, 돈을 벌면 소득세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고생해서 번 돈이 자신의 삶을 보장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화로 돌아올 수 있다면 무엇 하러 부지런히 일을 하겠는가?

154p

현실 사회에서의 이러한 교환은 상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교환 과정에서 숙달되는 전문성을 고려해 본다면 최종적인 개선 효과는 놀랍다. 오늘날의 생활조건이 한나라 때 황제보다도 좋은 것은 상인의 분담과 기술 향상이 가져다준 이득이다. 그렇다면 전문적인 업무분담이 기술 향상을 촉진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전문 업무가 분담되어야 연구원들이 충분히 높은 보수를 받으며 연구에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나라에도 총명한 인재는 있었다.

157p

민영기업은 국영기업보다 항상 효율이 더 높다. 첫째 이유는 국영기업의 경영인은 회사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투지가 부족하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국영기업은 여러 비경제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69p

정부가 국민을 '힘들게 한다'는 것은 종종 정부가 거액의 자본을 하나 또는 몇 개의 항목에만 집중해서 투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고대에는 주로 두 가지 방면에 집중되었다. 그중 첫 번째는 군주 개인의 향락이다. 화려한 궁전을 건설하거나 정원을 조성하거나 진귀한 금은보화를 총애하는 신하나 후궁에게 하사하는 등 제한 없이 지속적으로 많은 자본을 소모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외 전쟁이나 내부 권력 다툼으로 인한 군비 지출이다.

 일반적으로 향락으로 국고를 탕진한 군주는 '혼군'이라 불렸고, 군비 지출로 국고를 소진한 국고는 만약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고 국가가 발전 단계에 있었을 경우는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람들은 이러한 군주를 '웅대한 포부를 지닌 지략가'라 평가했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대개 시호에 '武'자가 붙었다. 반면 운이 부족해 직접적으로 나라를 망하게 한 경우 시호에는 '桀'이나 '煬'과 같은 글자가 붙었고, 이후 사관들은 이런 군주들을 '폭군'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사료를 보면 이런 군주들에게는 항상 '천하를 궁핍하게 만들었다'는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72p

적합한 공공 프로젝트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케인스는 정부가 사람을 고용해서 아무 의미 없는 구덩이 파고 메우는 일이라도 시켜여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아 소비하고 기업이 상품을 판매해야 자금이 돌아가 전체 경제 불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군주의 사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도 이재민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의미하에 구덩이를 팠다가 메우는 케인스의 방법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겠다. 시키는 일을 해야만 최소한의 임금이라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재민은 사회적 혼란을 일으킬 위험이 줄어들고 노동의 대가로 받은 임금으로 힘겨운 시기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혼군일 경우 국가는 큰 불행에 빠질 수 있다. 이런 군주는 농민이 바쁘든 한가하든 상관없이 내키는 대로 인력을 동원해 자기 욕구를 채우려 든다. 송휘종의 화석강이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동원은 농민들의 농사주기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사회 자산에 직접적인 손실을 초래해 천하를 궁핍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184p

경기불황에 따른 지원금만 제공하고 실질적인 생산활동은 보장해 주지 않는 일부 부적절한 복지 지출은 거액의 공공자금을 소모한다. 이러한 지원은 겉으로는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책임 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이렇게 재정을 갉아먹을 경우 정부 재정예산이 더욱 악화된다. 더구나 힘든 상황에 처한 기업과 기업주들은 실질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 사람들의 직장을 구하려는 적극성은 떨어진다. 그러므로 이런 지출은 반드시 줄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투자 확대와 지출 감축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경제위기일 때도 생산 연구개발과 상업유통 방면의 투자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비생산적인 복지와 이전지급 방면은 절약해도 괜찮다. 한마디로 경제위기에 처한 국가는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읽어봐야 할 대목 같다)

189p

강충 등의 사람들이 감히 태자 유거를 모함할 수 있었던 것은 태자의 생모이자 황후인 위자부가 세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황후는 남동생인 대장군 위청이 병사함으로써 더 이상 지지해 줄 세력이 없는 데다가 황제의 총애를 잃고 있었다. 이 반란 사건으로 위청의 아들도 화를 입어 죽임을 당해야 했다. 안타까운 점은 위청은 생전에 무제를 위해 전장에서 공을 세운 공신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생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흉노족과 치열히 싸우며 한나라를 지켰지만 정작 사후에 가족을 지킬 수는 없었다.

 이처럼 한나라가 공신과 그들의 후손을 푸대접하는 일은 이전부터 있어왔다.

193p

천하가 안정된 후에 공신들이 반란을 계획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공신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공을 인정받아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고 가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는 공신을 제거하고 싶어 하지 않고, 공신은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황제와 공신이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비극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일까? 바로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황제는 공신을 잘 대해주고 싶지만 만약 공신이 정말로 찬탈을 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제거해 후환을 없앨 수밖에 없다. 황제에게는 자신의 황위와 가문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고, 군신의 모범을 세우는 일은 부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는 누가 정말 충성스러운 공신이고 누가 찬탈을 꿈꾸는 공신인지 알지 못한다. 게다가 두각을 나타낸 공신의 경우 자연스럽게 권력과 명성을 가지게 되면서 황제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이에 황제가 진정한 충신을 가려내는 일은 더욱 더 어려워진다.

 공신의 입장에서 보면 황제가 자신을 시험해 본다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신호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못 대처할 경우 감옥에 갇히거나 자신과 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 처한 이상 자신이 바라는 조용하고 안락한 삶은 이미 물거품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느니 아예 박차고 일어나 위험한 도박을 해보는 게 나았던 것이다.

 더구나 충성심이 강한 신하들은 황제가 자신을 의심할수록 더욱 신중하게 행동하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다. 그러한 행동이 오히려 의심을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은 알지 못했다. 황제가 신하을 의심하는 것은 신하가 명성과 권력, 민심을 가지고 있어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훌륭한 처신과 뛰어난 능력으로 명성을 쌓을수록 황제의 의심도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원칙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위신을 떨어뜨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게 나았다

204p

정전제로 인해 일부 토지를 잃는 대지주들에게 다른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고, 아울러 토지가 그다음으로 많은 중소지주와 자작농에게도 일부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 그런 뒤에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제공해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이다. 한나라는 황제의 힘이 수도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주와 지방 호족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러니 황제가 지주와 지방호족이 받는 손실을 충분히 보상해 주어야만 비로소 정전제를 효과적으로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날에서 이러한 이익 교환 방법을 생각해 낸 황제는 없었으며, 성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 개혁은 시작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존중하는 것은 개혁이 본래 의도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 필요한 핵심 조건이다. 

205p

두 정당의 토론에서 민주당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이익은 돌보지 않은 채 오로지 부자들의 이익만 돌보려 한다고 공화당을 질책하면 공화당은 '우리는 결코 중산층과 저소득층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증세야말로 중산층에게 더욱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반박한다. 부자들은 다양한 자산과 해외 계좌를 가지고 있다. 즉, 세금을 많이 걷을수록 부자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는 것이다. '반면 중산층의 경우 대부분 자신의 일을 통해 수입을 얻기 때문에 세금을 피할 방법이 거의 없다. 그리고 세금을 많이 걷는다고 해서 반드시 세금의 총액이 증가해 저소득층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중산층의 세금 부담을 가중시켜 양극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런 점을 보면 성현의 생각이 짧았다고 탓할 것도 없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동기 상쇄'의 문제점은 해결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현의 사회실험은 이후 황제들에게 신선한 교훈을 주었다. 그 이후로 어느 왕조, 어떤 황제도 다시는 정전제를 실시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209p

상나라, 주나라와 비교했을 때 한나라는 이미 사유재산권에 대한 의식이 분명했다. 상고시대에는 협력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앙의 왕전을 농민들이 힘을 모아 함께 경작했다. 하지만 한나라의 경우 계속 정전제를 실시한다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규모의 경제를 통한 이득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히려 '공유지의 비극'이 심각해져서 정전제의 협력 체제가 비효율적이 될 수 있다.

241p

환관은 외부 선택도 매우 적다. 황제는 거의 어떠한 보수도 지불하지 않은 채 환관을 자신의 옆에 묶어둘 수 있었다. 천자가 바뀌면 아래 신하도 바뀌던 시대에서 황제와 운명을 같이하는 환관으로서는 현재의 황제 말고는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 권력을 휘두르는 외척과 관리들은 설사 황제가 바뀐다 하더라도 일부를 제외하고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직접 황제를 옹립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정치 풍파에 휘말릴 확률이 낮았다. 게다가 황제가 외척에게서 권력을 다시 되찾아 오는 일은 상당히 위험한 시도였다. 그래서 황제는 가능하다면 뜻이 맞는 관리와 함께하고 싶어 했지만 조정 관리들은 자신과 후손의 안전, 그리고 다른 관리들과의 정치적 관계까지 모두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황제가 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 대가는 황제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관은 황제에게 가장 좋은 동맹자가 되었다. 더욱이 환관과 황제는 밤낮으로 함께 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친해질 수 있었다.

 권력을 가진 황제의 경우 주로 조정 관리들과 함께 일을 처리한다. 왜냐하면 관리의 경우 교육 수준도 높고, 선발 구조도 환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체계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역사적으로 태평성대의 시기라고 부른다. 반면 권력을 가지지 못한 황제의 경우는 과감한 시도를 할 때 주로 환관의 힘에만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 환관은 어떠한 의미에서 보면 권력을 잡지 못한 황제의 마지막 선택지였던 셈이다.

254p

동한 시대에 이러한 금은보화를 살 수 있는 대상은 황제의 친척과 외척 그리고 거상들이었고, 현대 짐바브웨에서는 부유한 백인 지주들이었다. 무력을 사용해 부유층을 청산한 동탁과 무가베는 자신이 몰수한 금은보화를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구입할 사람이 없다면 금은보화는 단지 장부상의 자산일 뿐 실제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277p

유럽에서 십자군이 1차 원정에 나섰을 때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영주들은 서유럽에서 출발해 지중해의 가장 동쪽 끝까지 가서 셀주크 투르크족과 지난한 전투를 치렀다. 굳건한 신앙심을 가진 십자군과 투르크족 모두 절대 질 수 없었다. 더욱이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멀리 원정을 온 십자군에게는 전투에서 진다는 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전군의 몰살을 의미했다. 

303p

이렇게 둔전한 토지는 모두 국가가 소유했다. 둔전병이나 농민이 둔전에 경작을 할 경우 생산된 곡식을 국가가 비율에 따라 병사나 백성에게 분배했다. 국시대에는 군대 체제하에서 군사와 백성 모두 태평성대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한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분배 제도가 실행될 수 있었다. 둔전제가 실시된 이후 위나라의 식량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되었고, 군량미가 부족해 군대가 퇴각하는 상황도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둔전제가 지속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사람들이 적극성을 잃어나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등애는 장수인 자신도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일개 군인과 농민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319p

사실 위나라와 진나라는 동한 시대보다도 중앙 권력이 약했다. 각 지방의 권력은 모두 호족과 사대부들이 쥐고 있었다. 게다가 중앙 조정의 관리들도 모두 그들과 같은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결탁되어 있어 황제가 상황을 전환시킬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무제 사마염은 위나라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교훈으로 삼아 주나라 제도를 모방해 친척들을 제후왕으로 임명했다. 친척들에게 주요 지역을 맡김으로써 군권을 장악해 명문 사대부와 지방 호족 세력에 맞서려 한 것이다. 사마염이 제후왕을 봉한 일이 훗날 환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는 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시에 틀린 결정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마염은 제후왕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보다는 진나라 조정의 권위를 보호해 주는 수호자의 역할을 더 크게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바랐던 대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321p

무제가 비록 슬기로운 군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개국군주로서 패기와 열정으로 진나라의 내외적인 문제들을 말끔히 해소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제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유는 훗날 황위를 물려받아야 할 태자 사마충이 '심각한 바보'였기 때문이다.

 사마의, 사마소, 사마염과 같은 영제들 속에서 어떻게 사마충과 같은 바보가 태어나게 된 것일까?

332p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하더라도 정보 소통의 장애 때문에 관계가 갈라질 수 있으며, 결국 한쪽에서 완전한 우위를 차지해 반대쪽에서 반항할 마음을 접을 때 양쪽은 오히려 소통하며 오해를 풀 수 있다. 바로 제갈량과 유선의 관계처럼 말이다. 유비가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제갈량은 능력과 덕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의와 실권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쪽에서 대의를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다면 양측이 함께 협력하기는 힘들다. 

 왕도는 충성심으로 가문의 지위를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의 명맥도 유지했다. 동진은 이후에도 소준의 난과 비수대전을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하지만 동진은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강력한 종실의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족의 추대에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이 점은 당시 권신들이 계속 등장하게 된 원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진의 권신들은 최소한 황실에 대한 굳건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344p

조조는 중원을 누비며 천하 통일의 야심을 드러내면서도 헌제를 보좌하며 맹세한 '한나라의 신하로 살며 찬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평생 동안 지켰다. 하지만 조비의 경우 조조의 정치적 유산은 그대로 물려받았지만 한나라 신하가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에 오를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도 모두 천하의 8할을 차지한 것은 한나라 헌제가 아니라 조씨 가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헌제를 폐위시킨 뒤에도 조비는 자신의 영토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헌제를 잘 대우해서 아직도 한나라에 충성심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새로운 왕조의 넓은 도량을 과시하는 게 좋다.

366p

높은 봉급을 준다고 해서 모든 관리가 청렴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낮은 봉급을 주면서 청렴함을 요구한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꿈과 같다. 더욱이 감찰 제도의 개혁 성과가 크지 않고 대량의 사회 자본을 소모하고 있을 때는 차라리 '높은 봉급으로 청렴한 관리를 양성'하는 것이 경제에도 효과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376p

물론 이 점은 고양에게 너무 지나친 요구이다. 사실상 역대 황제들 중에서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귀족과 지주는 농촌 안에서 엘리트 계층이었다. 황제가 바라는 것은 귿들을 통해 사회 질서가 유지되고 국가의 정책이 집행되는 것이었다. 어떠한 의미에서 보자면 지방의 명사나 지주들은 황제의 통치 기반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스스로 자신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은 할 수 없었다.  

390p

이와 같은 업적을 남긴 수문제는 또 상당한 애처가였으며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제왕은 천명을 받아야지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여러 저술을 남긴 공자도 분명 제왕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명을 받지 못했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군이라 할 만한 업적을 남긴 수문제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다. 수문제는 뭐든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393p

일부 작은 범죄를 저지른 백성과 관리들의 경우 약하게 처벌해서 이후 자신의 직책과 생활에서 더 나은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하지만 수문제는 강력하게 처벌함으로써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조정과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더욱 심각한 점은 수문제가 법률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가중 처벌을 함으로써 관료들에게 전략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황제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은 법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황제의 기분을 이용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천거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음해해 해치워버릴 수 있었고, 이에 조정이 권력 투쟁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권신과 간신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397p

수문제가 실시한 업무 효율 향상 시스템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행정 권한을 이용해 곡식을 채우는 게 고생스럽게 헌납을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관리들도 도덕자본이 상당히 높지 않은 이상 자신의 승진을 위해서 백성들을 압박하고 희생시키기 쉽다. 그러니 수문제가 실시한 상벌 제도는 사실상 관리들에게 잘못된 동기를 불어넣어 준 셈이다.

401p

동한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위 관리들이 일식,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 때문에 파면당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동한 정부는 어째서 재해민들을 구제하지는 않고 총리나 국방장관과 같은 관리들을 문책한 것일까? 이것은 사실 동한 정부가 미신을 지나치게 숭배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자연재해가 하늘이 노여워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고위 관리를 파면시켜 하늘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에서 동한 시대에 외정을 책임지는 재상은 권력이 분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실권도 별로 없는 상태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고위 관리의 파면으로 미치는 정치적 파장을 동한 정부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409p

재산권을 명확히 한다면 거래비용을 소홀히 할 수 있다. 시작할 때 누구에게 재산권을 부여하든 시장은 항상 효율적인 균형, 즉 가장 최적의 배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코스의 정리는 정부의 간섭이 없는 상황에서도 외부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류>

177p

육성장후 유정은 자신의 당숙이자 한나라 천자인 무제가 중요한 제사를 개최한다는 말을 듣고 

-> 유정은 경제의 손자로, 무제는 유정의 당숙이 아니라 삼촌이다.

362p

전연의 개국황제 모용수 역시 참합피 전투에서 패하고 얼마 뒤 병사했다.

-> 전연의 개국황제는 모용황이고, 모용수는 그 아들로 후연의 개국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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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 오아시스 도시의 숙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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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은 밀도가 다소 떨어진다.

순수한 돈황 기행문이라 답사기 성격에는 맞지만 정보를 많이 주지는 않아서 아쉽다.

1권에 막고굴 편만 추가해서 냈으면 더 밀도있는 구성이 됐을텐데 아쉽다.

저자 입장에서는 따로 시간을 내서 돈황을 두 번이나 답사했으니 한 권으로 끝내기가 아쉬웠을 것 같긴 하다.

돈황 문서와 벽화를 약탈해 간 서구 학자들의 행태는 문화재 도굴범으로만 보기에는, 돈황학 창시라는 엄청난 학문적 유산이 있으니 비난만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알고 생각하는 문화재 도굴범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놀라운 학문적 열정과 식견으로 문서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 체계를 세웠다.

자국에서 기사 작위를 받고 학자로서 추앙받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오타니가 수집해 온 유물이 있어 세계 돈황학회에 한국도 역할을 하고 있다.

서구 학자들의 모험심, 학문적 열정 등은 경전을 찾아 머나먼 인도로 떠난 중국의 스님들을 연상시킨다.

인간이 원래 호기심의 동물인가 싶기도 하다.

중앙아시아가 청나라 때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독립적인 역사와 문화가 있는 곳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돈황 벽화를 임모한 장대천, 상서홍, 한락연에 대한 소개도 신선했다.

장대천은 제백석이나 서비홍 등과 비견되는 유명한 화가라는데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청록 산수 느낌이 현대적이고 감각적이다.

사진 속의 상서홍은 키가 크고 파리에 유학까지 다녀 온 엘리트 화가인데 사막 한가운데 돈황 석굴에 일생을 바친 열정이 놀랍다.

조선족 화가 한락연의 그림은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인상깊은 구절>

304p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힘은 총칼보다 돈(자본)과 신앙(종교)에서 더 강력하게 발현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서역과 중국을 연결하는 관문이 바로 양관과 옥문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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