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충청도 선비의 생활기록 - 조극선의 인재일록과 야곡일록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7
성봉현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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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황윤석의 유고인 <이재난고> 해설본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책은 그보다 한 세기 앞선 17세기의 일기이다.

무려 27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일기를 쓴 조극선이라는 인물의 치열한 학자적 자세가 놀랍다.

지방 관리를 지낸 사대부의 일기를 통해 17세기 양반가의 생활상을 구현해 낸다.

개인의 소회보다는 하루 일과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일록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17세기 조선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물 경제, 혹은 선물 경제 같다.

화폐가 유통된 것은 그보다 후세대이고 조선 중기만 해도 쌀, 포, 종이 등이 화폐 대용으로 쓰였고 당연히 장시도 활발하지 않아 시장에서 재화를 구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선물 형태로 주고받았다.

선물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볼 수 있다.

요즘은 돈으로 부조를 하지만 전통사회에서는시장에서 물건을 살 수 없고 자급자족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직접 현물로 부조를 한다.

예단도 그런 과거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 같다.

책의 주인공인 조극선은 개국공신인인 조온의 후예이고 지방 수령을 지냈으며 기호학파의 일원으로 지방 사족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로부터 선물을 받아 가계를 경영했다.

선물은 단순히 청탁의 의미인 뇌물이라기 보다는 상호부조 성격이 강했다.

사대부였기 때문에 특히 종이가 중요했는데 여자들이 집에서 베를 만들어 교환 수단으로 쓰듯, 조극선도 직접 닥나무를 벌초하여 나무를 쪄서 인근 가야사로 운반해 종이를 가공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이런 예를 보면 확실히 조선은 자급자족 시대였던 듯 하다.

조극선은 여러 차례 사마시와 문과 초시에 급제했으나 정시 급제는 실패하고 만다.

그럼에도 공신의 후손이자 학행으로 추천되어 중앙 정계의 하위직 관리를 지냈고 지방 수령도 역임했다.

문과 급제가 이토록 어려웠던 것을 보면, 역사책에 이름이 등장하는 고위 관료들은 최상위 엘리트들이었던 듯하다.

17세기 사대부가의 일상을 일기라는 원사료를 통해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측면으로 재구성하여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자칫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는데도 짜임새 있게 교양서 수준으로 잘 쓰여진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68p

사림은 의리를 중시하는 인간집단으로 개념화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언행과 사유 또한 의리의 틀에서 집단적으로 미화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고, 그런 흔적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 '문집' 또는 '유고'라 불리는 문헌이다. 문집은 편집된 기록, 특히 사회적 합의를 거친 공간물이라는 점에서 이런 혐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에 비해 조극선의 일기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못 실상에 가까운 심리와 언행을 담아내고 있다. 일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스승은 모두 네 사람이지만 그는 '三師'라 하여 세 사람만 인정하고 있다. 한 사람은 감추고 있는 것이다. 감춤과 드러냄의 실리는 '義' 보다는 '利'의 작동임에 분명하다. 의리의 시대에도 이해관계는 향존했고, 조극선의 일기는 그것의 실체를 보여준다. 

83p

김장생에 대해 존모의 감정을 숨기지 않은 조극선의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김장생이 학덕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초반 기호학파의 영수라는 현실적 위망과 결코 무관치 않다. 그(김장생)와의 가까움은 그 시대 사람들이 외면하기 어려운 '利'였기 때문이다.

124p

조선은 신분사회인 동시에 경쟁사회였다. 과거는 경쟁 및 능력사회로의 이행을 단적으로 보여준 제도였고, 상속의 한 형태인 '별급' 또한 경쟁과 능력을 부추긴 사회문화적 관행이었다. 학문의 영역도 이와 별개일 수는 없었다. 뛰어난 석학에게 줄지어 입문하여 사제관계를 맺었던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었다. 그 이로움은 '지식과 학문'의 영역을 넘어서는 산법의 결과일 공산이 컸다. 아무리 의리를 강조하는 사회라 할지라도 '利'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 이를 추구하는 자를 '모리배'로 지목하여 그 명예를 훼손시켜도 '利'가 종식될 수는 없다. 

 도학과 의리로 포장된 조선의 지식인 사회는 너무 미화된 측면이 있다.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과거를 통한 영달을 포기했다는 기사는 개인 전기류의 공통 테마를 이루었고, 가난, 검소, 청백은 지선의 정신사적 가치로 고착화되었다. 모든 선비가 학문에 종사하고, 모든 사람이 가난해야만 비로소 조선은 문명국가가 되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156p

그가 이렇듯 문과 합격을 위해 노력한 것은 무엇보다도 부친 조경진의 뜻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양반의 지위를 지키고 문과 출신이어야만 청요직에 나갈 수 있는 조선 사회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과거를 포기할 수 없었던 집안과 주변의 암묵적인 요구나 사회 분위기를 거부하기 어려웠다.

167p

조극선은 지방 유생으로서 경제적으로 경학과 제술에만 전념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에게는 훌륭한 스승이 3명이나 있었으나, 규칙적인 학업이 불가능하였다. 또 박지계와 조익을 만나기 전에는 6년 넘게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과거에 합격할 때까지 경서 공부와 제술을 끊임없이 익혔지만 결국 과업을 성공적으로 매듭짓지 못하였다.

195p

사진향은 왕실의 가족을 근간으로 한 친인척들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졌다.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가족 간의 친밀함은 왕실을 지탱하는 가장 큰 연대감이었으며, 국장에서 그들의 연대감은 사진향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204p

조극선은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과거시험을 치렀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의 관직생활은 충신의 후예라는 사회적 조건에 부분적으로 의존하였다. 물론 처음으로 입사한 동몽교관의 자리는 그의 학자적 모습을 잘 보여주며,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충신 자손이 많은 세자익위사에 나아간 것이나 인목왕후 국장 중 충훈부 진향에 참여한 것은 충신의 후예로서 자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293p

16세기의 선물경제는 양반관료와 사족의 이중적 지배구조 속에서 형성, 유지된 경체체제로, 정확한 가치 환산보다 선물 제공에 따른 보상을 중요시하는 교환체계로 이해된다. 그리고 선물은 개인의 관직, 그리고 그가 지녔던 친족망과 교유관계를 바탕으로 한 '양반 상호공조의 관행'으로서 녹봉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던 시기에 양반사회를 존속시키는 새로운 방책이었고, 양반관료들이 자신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16세기 조선사회의 선물경제는 세계사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였으며, 그 주체가 구매력이 높은 양반관료였다는 점에서 장시 활용을 제한하여 시장경제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16세기의 주요한 재화 획득 수단이었던 선물교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상품교환의 비중이 증가하여, 19세기가 되면 선물교환은 의례적인 영역으로 축소되고 있음을 제시한 것도 역시 일기를 통한 연구였다.

294p

선물경제의 이해는 개인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호혜성의 원리, 국가 및 관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재분배의 원리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호혜성의 규범에 대한 강조는 도덕경제의 사회로까지 나아간다. 결국 선물경제는 도덕경제의 한 형태로서, 전근대 한국 사회는 '호혜-재분재의 통합구조'에 기초한 도덕경제가 가장 잘 실현되던 사회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선물경제'에서 바라보는 선물은 시장을 대체하는 것으로, 교환이나 거래가 아닌 정치적 혹은 정서적 호혜를 바탕으로 한 경제활동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선물의 이해는 호혜성을 수반하지 않는 상품과 달리, 주기와 받기 그리고 답례라는 삼중의 의무를 수행하는 행위로서 선물을 파악함으로써 물건 그 자체뿐 아니라 당사자 간의 관계에 더 집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301p

<인재일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재화의 교환은 대부분 선물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매매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었다. 또한 화폐도 널리 쓰이지 않고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시장이 충분하게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수도 있다.

303p

가계부가 아닌 일기라는 자료적 성격으로 인해 매매행위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을 가능성과 함께 조극선이라는 인물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로 인하여 매매활동 자체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즉 조극선을 포함하는 사족층의 남성들이 시장과 매매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노비와 전답과 같은 주요 거래에 있어서도 노비의 이름으로 매매문서를 작성할 정도로 매매활동 참여를 기피하였다. 더불어 가정을 운영하기 위한 재화의 구입은 대체로 여성의 몫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305p

포틀래치로 대표되는 호혜에 있어 '주어야 하는 의무'와 '받아야 하는 의무', '답례의 의무'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다만 가족과 같이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순수한 선물'의 경우는 일반적 호혜성의 영역으로 직접적인 물질적 보답의 기대는 적절하지 않고 기껏해야 암묵적인 기대만이 가능하다.

326p

인근의 지방관으로 부임해 있을 때 조극선가에 대한 선물의 집중적으로 제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덕산현과 같은 농촌사회에서 권력에 근거한 호혜로서의 선물이라 할 수 있고, 관직에 올라 권력과 부를 소유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친족의 의무'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역시 일반적 호혜성의 범주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것은 가족 내 및 가족 간의 사회적 행동의 기초를 이루는 호혜성의 규범과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로 작용하는 생계에 대한 권리라는 두 가지 도덕적 원리가 친족집단 내에서 긴밀하게 조응하는 것으로, '도덕경제' 사회로서의 조선사회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31p

덕산현과 같은 향촌사회에서 국가권력의 대행자인 지방관에 대한 개인의 위치는 절대적인 약자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나름 지역 내에서 유력 사족의 한 구성원인 정자익이 군정 차출과 관련하여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히는 상황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일방적인 관과의 관계를 볼 때, 충청도 병사 현즙과 가까운 일가인 조극선가에게 제공하는 선물은 단순한 관계의 유지 이상의 분명한 목적성과 대가성을 내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36p

선물의 종류와 양에 있어서도 대단치 않았다. 이것은 당시 사제관계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도학과 의리를 함께 하는 학문공동체의 근간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호혜성을 수반하지 않는 상품과 달리 선물은 물건 그 자체뿐만 아니라 물건을 교환하는 당사자 간에 긴밀한 상호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인식까지도 함께 교환하는 효과를 발휘함으로써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핵심 요인이 된다.

341p

박주인가의 선물은 이와 같이 목적성이 분명하였지만, 선물에 대한 대가는 직접적이지 않았고 부채의 계산도 노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절대적인 권력자인 관으로부터 위험에 대비하고, 나아가 그 권력을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드물고도 중요한 기회 앞에서 선물은 보다 적극적이고 관대하게 일반적 호혜성의 모습으로 제공되어야 했다.

350p

실제로 승려들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조극선가에 예속되어 선물과 사역을 제공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승려들이 노비들에 비해서도 훨씬 많은 역과 물종을 극선가에 바치고 있는 것으로, 이는 한편으로 극선가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극선가에 기대어 다른 곳으로부터 추가적인 침해를 막고자 하는 의도일 수도 있다.

 1620년 전반 무렵에 가야사가 궁가의 원당이 되자, 가야사 승려들의 조극선가에 대한 태도는 돌변하였다. 더 이상 상전가에 공손하지도 않았고, 극선가의 종이 제작 요구를 무시하기까지 하였다. 

 승려들이 극선가에 제공한 선물과 사역은 한편으로는 예속에서 말미암은 의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선가의 관대함과 보호에 대한 기대로 제공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속관계가 소멸하고, 관대함과 보호를 기대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더 이상 선물과 노역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360p

16세기 조선을 선물경제로 설명하는 "선물수수는 대단위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선물을 주고받는 당사자도 도덕적으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로 하는 물자를 요구하였으며, 상대가 호의적이었을 경우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라는 말은 마르셀 모스나 칼 폴라니의 저서에서도 볼 수 있음직한 인류학적 언설로, 자본주의 이전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전근대 사회를 호혜에 기초한 보편적인 경제체제로 설명기에 적합하다. 그러나 조선은 상당히 고도화된 법과 관료체계를 갖춘 중앙집권적 사회였다.

 조선시대에 존재한 공, 사의 불분명은 공, 사 개념의 미발달이란 측면도 있겠지만, 제도적 한계 및 행정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법적 투명성을 집행하기 어려운 현실적이고 시대적인 한계도 분명히 내재하였다. 중앙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처벌은 물론 조극선의 부끄러움에 대한 인식을 볼 때, 양반관료의 수증과 위헙청탁은 합리적인 경제행위라기보다 익숙해진 '일상 속의 불법'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시각이다.

366p

호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물질 이득의 대가가 아닌 사회적 신용을 획득하려는 행위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미덕을 과시적으로 행하게 되면, 그것이 상호성의 원리에 따라 결국 자신의 가족에게 혜택이 돌아오게 된다고 본다. 이 같은 상호 간에 선물을 나누는 형식으로 존개되며, 시간적으로 동시적이 아니라 모두 단절되어 실행된다.

 재분배의 원리는 집단의 농작물 중 상당 부분이 추장에게 전달되고, 추장은 이를 비축했다가, 모든 공동체 활동에 중심을 이루는 공동체 전체의 행사와 그 속에서 관습에 따라 모두에게 보내는 선물에 의해 재분배가 이루어짐을 말하며, 여기에서 중심성의 패턴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러나 조선의 중앙집권적인 관과 깊숙하게 연결된 사족들의 사적 행위 -그것이 칭념이건, 선물이건- 가운데 이와 같이 공동체를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중심성의 패턴을 보이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선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재분배 원리와는 상치되며, 국가적 단위에서 제도적으로 재분배해야 할 공적 자원을 사적으로 특정 소수에게 집행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재분배의 성격을 훼손하는 행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90p

오달제는 1633년 문과 초시에서 행전에 대한 대책을 제출하였다. 여기서 그는 당시 행전이 성공하기 어려운 요인으로 행전의 목적이 국왕과 국가의 '이해'에서 출발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면서 <맹자>의 구절을 인용해 '인의'에서 답을 찾을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인의'에 바탕을 둘 경우 전문의 유통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오달제를 비롯한 당시 선비들의 여론이었다.



<오류>

190p

세 번째 언덕엔 인원왕후의 능인 유릉이 있었고,

-> 유릉은 인원왕후가 아니라 의인왕후의 능이다.

197p

의성왕대비(명종비 인순왕후), 명종대왕, 인순왕대비(인종의 계비, 1532-1575), 공의왕대비(인종비, 1514-1577), 의인왕후

->의성왕대비가 인순왕후로, 인종의 계비는 잘못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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