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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과 장부 - 경제 세계화 시대,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와 상업
리보중 지음, 이화승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1월
평점 :
세계화는 언제 시작했을까?
더 정확히 세계화의 정의는 무엇일까?
저자는 상품의 교류가 전세계적 수준으로 확대되는 시점을 세계화의 시작으로 본다.
이 책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초기 세계화에 대해 중국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440페이지로 두꺼운 편이지만 번역도 매끄럽고 편집도 보기 좋으며 무엇보다 경제적, 현실적 관점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저자의 집필 방향이 너무나 흥미롭다.
전에는 중국에서 번역된 책들이 서양책들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했었는데 양서들이 많이 번역이 안 되서 그랬나 보다.
너무너무 재밌게 읽었고 자본주의는 최근에 발명된 것이 아니라 재화의 교환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태초부터 시장의 형태로 존재해 왔고 교통과 기술의 발달로 그 범위가 전세계적으로 확대됐을 뿐임을 알게 됐다.
제목이 "조총과 장부"여서 사내대장부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회계장부를 뜻한다.
이슬람이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이라면 네덜란드 상인들은 한 손에 장부, 한 손에 총을 외쳤다고 한다.
뼛속까지 상업적인 민족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중국에 사대하는 조선의 모습에 분통이 터지곤 했는데, 특히 망해가는 명나라를 끝까지 섬기는 모습이 너무나 한심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전통 세계의 중국이 얼마나 엄청난 국가였는지 실감했다.
당시 우리 조상들로서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강대국이자 문명국이었을테고 조공 시스템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면서 국제 질서에 잘 적응했던 셈이다.
명나라가 한줌 밖에 안 되는 만주족에게 망하리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더니, 과연 일본의 국력은 과거부터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인구는 세계에서 세 번째에 달했고 은광이 전 세계의 1/3을 생산해 구매력이 높았으며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군대의 수준이 높아졌으니 밖으로 뻗어나갈 만 했던 것이다.
명군이 한반도에 들어와 피해를 주긴 했으나, 만력제를 조선의 황제라고 비난했던 당시 명나라 신하들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로 명나라로서는 원병 파견이 큰 부담이었다.
주제를 확실하게 드러내자면 제목을 "무기와 무역"으로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전통 무기가 아닌 대포와 조총 같은 화기는 군사적 살상력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였고 이것을 전파시킨 것이 바로 상인들의 무역이다.
상인은 이익 추구를 위해 국가를 초월해 거래하기 때문에 최신 무기들은 전 세계로 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만 동아시아 무역 시스템에서 제외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국가들까지 무역 시스템을 통해 국가의 부를 창출하고 군사력을 강화시키는데 중국의 조공 시스템에만 안주했던 조선의 안이함이 안타깝다.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고 경제적 세계화 관점에서 보는 역사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강추한다.
<인상깊은 구절>
17p
스스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성공 여부는 그다음 문제다.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성공과 실패, 유리함과 불리함에 관해서는 신의 지혜로도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다.
40p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국은 국가를 초월하는 정치, 사회, 문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황쥔제의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이렇게 넓은 영도를 보유하고 지역 간 큰 차이를 보이는 중국이 그럼에도 내부 결속이 느슨한 나라는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이전 수많은 제국이 내부적으로 분열을 겪었던 것과 달리 중국은 어느 정도 '지리적 특수성'이 있었다. 역사학자 존 맥닐은 "중국은 세계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고 내륙에 수로 시스템을 가동해서 공간을 연결시켰다. 기차가 등장하기 전에는 운송비용 측면에서 세계의 어떤 육지 운송 네트워크도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중국은 수로 시스템 덕분에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통일된 시장을 갖추고 이를 기반으로 정치 세력, 사회를 창조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도 수로 시스템으로 연결되는 한 생산 방식, 토지 이용, 자원 개발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중국은 국가 형성과 발전 과정이 매우 특수했다. 秦 나라 이래 오랜 기간 통일된 중앙집권제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하나의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실행함으로써 '국가'를 초월하는 정치, 사회, 문화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런 특수성으로 인해 초기 경제 세계화 시대의 동아시아는 중국과 중국 이외의 지역 이렇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 중심론'에 따라 구분한 것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51p
중국 교과서엔 "자본주의의 여정에는 무기와 폭력, 피와 눈물로 가득 차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기와 폭력'이나 '피와 눈물'로 가득한 정복과 약탈이 근대 초기에 서유럽이 해외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인류 역사는 정복과 약탈로 가득차 있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칭기즈칸과 그 자손들이 벌인 전쟁이다. 몽골인들은 이 정복 전쟁을 통해 아시아에서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정치적 실체인 몽골 제곡을 건립했다. 정복과정에는 '무기와 폭력'이 동원되었고 피정복지역의 백성에게서 엄청난 '피와 눈물'을 자아냈다. 또한 중국과 유럽 여러 지역의 역사를 변화시킴으로써 어떤 의미로는 세계사의 '대변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피정복지역의 사회,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는 바꾸지 못했고 위용을 자랑하던 몽골 제국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으며 몽골의 언어와 문화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전통적 관점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대변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변화'는 이전 시대와는 성격이나 영향력 면에서 완전히 다른 역사적 전환이다. 대변화는 바로 경제 세계화의 시작을 가리킨다.
169p
조선은 일본과 달리 서양의 화기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인색했다. 서양인과의 접촉도 늦었고, 화기 기술에도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174p
동북아시와는 달리 동남아시아에서는 화기가 냉병기의 보완재로 사용되었다. 이는 선진 화기를 사용하는 서양인들이 아주 적은 병력으로 손쉽게 이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 통치를 할 수 있게 만든 요인이었다.
199p
국가가 더 이상 군사 기술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초기 경제 세계화의 주역인 상인은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져와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상인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고객에게 이를 판매했다.
220p
원의 통치자들은 유가의 학설을 이용해서 통치를 공고히 하려고 했지만 다른 왕조들처럼 유학을 존중하지는 않았고 바얀 등 권신을 특히 배척했다. 유학을 공부한 사대부의 사회적 지위도 아주 낮아 정소남은 <심사>에서 '사회적 신분상 유사가 9등이고 그다음 거지가 맨 아래였다'라고 할 정도였다.
226p
당대의 경교처럼 원대의 기독교 선교활동 역시 조정의 지지 하에 진행되었고, 신도가 주로 외래 소수민족이어서 중국의 기층 사회에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조정의 지지가 점차 사라지자 교회도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되고, 교파 간의 싸움이 일어나 기독교 발전을 저해했다. 무엇보다도 이민족 통치 하에서 박해받던 한족이 여러 특권을 누리던 몽골인과 색목인, 그들이 숭상하는 외래 종교에 호감을 가질 리 없었다. 원나라가 망한 후 기독교 세력도 함께 사라졌다.
235p
동남아시아 많은 지역이 빠르게 이슬람화된 것은 현지 무슬림 통치자들이 당시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인 오스만 제국과 그 동맹자인 인도 무굴 제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 귀의한 이후 이들로부터 군사 기술이나 군비 지원을 받았다. 이것이 이슬람 세력이 힌두교/불교 국가와의 투쟁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하며 결국 승리로 이끈 배경이 되었다.
240p
알단칸이 장전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은 중국에 큰 의미가 있다. 판원란은 당대 토번이 서역을 점령한 것에 대해 "이 새로운 형세는 토번이 무력으로 선교를 하는 무슬림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한족 문화가 파괴되는 것을 막은 셈이다. 훗날 회홀이 서쪽으로 이주해서 천산남북 지역에 정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중국 역사에 대한 커다란 공헌이다"라고 했다.
241p
미얀마와 시암국 모두 인도차이나반도에 위치한 강국이었다. 이들이 불교를 신봉하면서 불교 문화권이 형성되었고, 이로써 중국 남쪽에서 올라오는 이슬람의 세력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몽골, 신장 북부, 칭짱고원까지의 지역에서 불교는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중국의 서, 북, 남을 에워싸는 이른바 '불교장성'을 쌓은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 특히 중국에서 이 '불교장성'은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 불교장성이 형성되면서 이슬람의 동쪽 진출을 막았고, 중국은 인도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243p
"송,명 유학은 왕권 통치와 결합하거나 관리들의 치적을 기술하는 '관학으로서의 유학'에서 탈피하고, '교화를 우선'하는 세속적인 인문 전통을 실천함으로써 점차 '교화의 유학'의 역할로 변했다. 유학은 의장, 사창, 보갑, 서원, 향약 등의 각종 제도 및 사업을 통해 사회에 공헌했다. 송, 명 이후 세족 문벌이 사라지면서 사회는 점차 평등하고 느슨해져 조직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였는데, 유학에 따르면 사회의 모든 공공사업에는 반드시 '이끄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만약 사대부가 사회에 관심을 쏟지 않고 관리가 된 후 자신의 출세와 부귀만을 좇는다면 반드시 부패하고 만다. "사대부 집단이 위로는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아래로는 농촌 사회에 관심을 가지면서 유학은 송대 이후 1000년 동안 중국 역사에서 안정적이고 지도적인 역량을 갖게 되었다."
254p
"첫 번째 파도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자신들의 종교를 포함해 서양 문명을 비교적 완전하게 수출한 것이다. 모든 문명에서 민족 종교는 핵심이다. 역량을 갖춘 비서유럽 민족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이런 시도에 저항했다. 두 번째 파도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 지역에서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영국인이 서양 문명을 전파한 것이다. 이들은 문명을 선별한 다음 수출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상인과 관료는 선교사들의 활동에 전전긍긍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17세기 인류 세계에 침투한 서양 문명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가 아니라 기술이다. 그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 기술이었다."
301p
"남양 군도는 지리적으로 매우 독특하다. 이곳의 특징은 삼림과 바다가 공존한다는 것인데, 삼림 지대 때문에 육로로는 접근이 어려운 반면 해양은 사통팔달이어서 중국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아라비아인, 서양인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이 개방된 공간은 외래 세력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경쟁하는 장소가 되었다. 전쟁이 자주 일어나지 않아서 장벽 같은 방어 시설이 없었고, 유럽인들은 이곳을 그저 '촌락이 모여 있는 지역'이라고 여겼다." 앤서니 리드의 분석대로 남양 군도는 군사력이 약했기에 유럽의 강력한 전함을 당해내지 못했고, 아주 쉽게 서양의 식민 지배자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305p
중국은 영토, 인구, 경제력, 정치 제도 등 모든 면에서 특수하기 때문에 어떤 나라와도 비교가 불가능하다. 이 특수성을 기반으로 조공 시스템의 중심에 중국이 놓인 것이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했고 인접 국가들은 중국으로부터 여러 자원(제도, 과학 기술, 문화 등)을 받아들였지만, 반대로 중국이 이들에게서 얻은 것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인은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국제관계 시스템은 중국의 외교 전통 위에 세워졌다.
308p
명나라는 이에 따라 조공 시스템을 운영하고, 조공국 간의 다툼이 중국에 위협을 가하지만 않으면 무력으로 간섭하지 않았다. 명대 후기의 문인 원굉도는 조선과 일본이 충돌했을 때 "이웃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데 나는 자식을 내보내 돕고 있으미 어찌 곤혹스럽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이는 이웃 나라의 분규에 대한 중국의 난처한 입장을 잘 표현한 말이다.
조공 시스템은 대체적으로 잘 운영되면서 동아시아는 평화를 유지했다.
명대 후기, 동아시아에 새로운 강자들이 등장하면서 중국의 지위에 도전하고, 심지어 직접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이전까지의 국제질서는 유명무실해졌고, 명 조정은 새로운 국면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3p
히데요시의 야심은 미친 자의 망상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았고, 전쟁에 필요한 인원을 충분히 징집할 수 있었다. 또한 국제 무역에 필요한 경통 화폐인 백은을 대량 생산해서 전쟁에 필요한 군비와 물자를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 조총 제조와 사용 기술이 대단히 뛰어났고, 수차례 내전을 겪으면서 풍부한 실전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명나라의 영토와 인구가 일본보다 10배 이상이었으나 일본은 명나라를 정복하는 전쟁을 수행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325p
중국의 인접국은 경제적으로 그에 미치지 못해 중국인들은 그들을 가난한 나라고 여겼다. 따라서 인접국을 정복한다고 해도 별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중국의 지리 환경도 대외 확장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중국은 대외 개방을 하지 않고 자급자족에 의존하는 국가다. 그리고 출구라고는 사막과 해양 오직 두 곳 밖에 없다. 그나마 잠재적인 무역 파트너가 있을 때만 이 출구를 활용했다." 이 두 개의 출구는 정확히 말하면 '서역'과 '남해'로, 중국이 영토를 넓히려면 이 지역 먼저 정복해야 했다. 동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바다인 태평양이 있고, 서쪽에는 높고 넓은 고원인 칭짱고원이 있으며, 북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동토 지대인 시베리아가 있고, 남쪽에는 열대 지대가 있어서 중국은 바깥으로 뻗어나갈 수 없었다.
331p
동아시아의 중심인 중국은 영토를 확장할 생각이 없었고, 조공 시스템은 다른 나라들의 주권을 보장하면서 서로 이득을 얻는 일종의 호혜관계였다. 누군가 조공 규칙을 어긴다면 중국이 경고를 하기도 했으나 무력을 사용해 타국의 영토를 뺏지는 않았다. 중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전쟁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중국이 인접국과 전쟁을 벌일 때도 그 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영토를 빼앗으려는 목적은 없었기에 국지전 수준에 그치거나 비교적 강도가 약해 근대 유럽의 상황과는 크게 달랐다. 페어뱅크는 "중국의 전통적인 대외 정책은 여러 비폭력 방법을 포함한다. 전쟁의 목적은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지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고, 물리적 전과보다는 심리적 효과를 얻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364p
척계광의 훈련법이 확산되기 이전에는 군대가 개인의 무예를 중시해서 무기를 제멋대로 다루면 영웅처럼 대접했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무술가, 염효(소금을 몰래 팔던 사람들), 승려, 소수 민족이 군대로 들어갔다. 이들이 잘 조직된 왜구에게 추풍낙엽처럼 무너지자 비로소 전투의 승패는 개인의 무예 실력과 무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416p
과거 몽골이 그토록 오랫동안 남송과 전투를 벌인 것과 달리 청이 이렇게 순조롭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청조 건립 초기, 프랑스 선교사 조아킴 부베는 이렇게 분석했다. "사실 타타르인(만주족)은 제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았지만, 한인들은 서로를 죽였고 심지어 용감한 한인들은 오히려 만주족을 위해 자신들의 민족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가장 용감한 한인'은 누구였을까? 한학자 마크 엘빈은 "만주인이 중국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오삼계, 홍승주 등 한족의 반란 세력이 만주족을 대신했다"고 했다. 또한 "1640년대 만주족의 작전능력은 명나라 군대와 비교할 바가 못 되었기 때문에" 만약 한족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만주족의 힘만으로는 중국을 정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분석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군이 비교적 쉽게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오삼계, 홍승주 등의 한족의 반란 세력 때문이 아니라 청조에 항복해서 팔기에 편입된 명나라 군대인 한군 팔기, 특히 덩저우 대포 부대 때문이었다.
432p
경제 세계화의 초기에는 상업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었다. 국제 무역의 무대가 넓어졌지만 아직 규칙이 정해지지 않아서 상인들의 탐욕은 무법천지에서 노출되었으며 이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