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죽음 - 우리가 모르는 3-7세기 중국 법률 이야기
리전더 지음, 최해별 옮김 / 프라하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문득 고대 중국의 가족관계가 궁금해져 재독하게 됐다.

220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라 쉽게 잘 읽힌다.

북위 효명제 시절, 어머니 영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고모인 난릉장공주가 임신 중에 남편에게 맞아 유산되고 결국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한다.

남편 유휘가 평민 여자 둘과 간통하여 부부싸움을 벌였는데 오히려 임신한 아내를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오늘날 같으면 뉴스에 대서특필 될 일이다.

심지어 아내는 황제의 고모가 아닌가.

그럼에도 조정 관리들은 부부싸움 중에 처가 사망한 사건이라고 하여 도형 4~5년에 처하라고 했고 당시 섭정이던 시누이 영태후는 황족을 살해했다고 하여 유휘를 사형시키려 한다.

부존처비, 즉 남편은 높고 여자는 낮다는 유교의 가족원리를 불쌍한 난릉공주에게 적용시켰던 것이다.

여성 집권자였던 영태후만이 불쌍한 시누이의 원통함을 풀어주려 했으나 결국 유휘는 방면되고 만다.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로 친소의 관계가 결정되던 시절에, 이혼한 어머니가 사망시에 자식들은 부부의 연이 끊어지듯 부자간의 인연도 끊어진다고 생각하여 복을 입을 필요조차 없다고 했다.

그래도 당나라 시대까지만 해도 이혼도 가능하고 간통을 했다고 해서 죽이지는 않았다.

송나라를 거쳐 명청대로 넘어오면서 부권적 유교주의가 강화되어 간통한 여자는 사형에 처하게 됐으니 남녀를 떠나 인간의 존엄성이 이념 앞에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졌는지 알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들의 종속적인 처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짐작이 가고, 그럼에도 최고 자리에서 권력을 휘둘렀던 무측천이나 문명태후, 영태후, 서태후 등은 참으로 여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깊은 구절>

80p

여성이 간통을 범했을 때 받는 처벌이 남성이 간통을 범했을 때 받는 처벌보다 무겁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자료로 추정하건대 진, 한, 위진 시기의 사람들은 남녀를 구별하기보다 항렬 간에 지켜야 할 윤리를 더 중시한 것 같다. 다시 말해 근친상간 혹은 다른 항렬 간의 간통은 그 처벌이 엄격했지만 성별에 따른 처벌은 오히려 크게 드러나지 않는 편이었다.

104p

진한 이래 가정 구성원 간 상호 구타, 살인, 상해는 법률의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후대의 법률은 가정 구성원 간의 친소, 존비 관계에 따라 제재의 정도가 달라졌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를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경우는 일반 사람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경우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구타하여 상해를 입히면 일반 사람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경우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그러므로 부부간에 서로 상해를 입히고 죽이는 것에 대한 처벌의 경중의 차이가 있는지 여부는 그 시대의 법률이 어떻게  '부존처비'의 논리를 다루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남송시기부터 간통한 처를 죽인 남편을 가벼이 처벌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원대에 이르면 아예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38p

전통 중국의 가부장적 가족 윤리에 근거하면 한 아이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신분은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이다. 부계 중심의 윤리 규범 안에서 이 아이와 그 생모의 지위는 생모인 여자와 아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139p

남성의 폭력 행위는 일반적으로 처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나 여성의 폭력 행위는 다른 여자에게서 남편을 빼앗아 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폭력의 방향이 다른 여성을 향해 있었다. 다음으로 가정폭력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은 이가 남편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경우 일반적으로 소송이 성립되기 어려웠다

157p

옛날 사람들은 '부부는 義로 맺어진다'고 여겼다. 만약 서로간의 정이 식어버렸다면 혹은 더 이상 함께 생활할 수 없다면 이혼을 할 수 있었다. 당대의 <放妻書>가 보여주듯이 남편은 처를 보내면서 아름답고 행복한 두 번째의 봄을 맞으라고 축복한다. 이혼 후에 부부는 더 이상 서로에게 법률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옛날에도 부부는 헤어지면 남이라는 관념이 확실했던 모양이다. 정이 식으면 이혼하는 게 순리인데 오늘날의 유책주의는 두 남녀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175p

과거 100여 년의 역사 연구에서 학자들이 유가의 도덕질서를 옹호해 온 중국 사회를 이야기할 때 전제황권은 항상 그 주된 동력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전제황권은 유가 윤리의 범제화 과정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역대 조정이 고전 윤리 사상을 채택하고 운용할 때 사실은 고도의 취사선택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조정은 윤리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법률 규범을 이용했고, 조정이 원하는 법률 규범이란 일반적 사회 풍속과 관습에 부합해야 함은 물론 통치자의 최종 권력에 도전이나 위협이 되지 않는 것어야 했다.

 고대 가족 위주의 사회에서 혈연을 위한 복수 관념은 상당히 보편적이다. 그러나 진한 제국 시기에 이르면 정부는 백성들의 생명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러한 풍속을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만 이러한 통제 정책이 있었다 하더라도 동한 말기까지는 복수의 풍속을 뿌리째 뽑지 못했다. 윤리 관념이 율령에 침투된 이상 법 집행자의 심리 상태에도 영향을 끼쳤다. 복수는 윤리적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법률로써 막기는 어려웠다. 조위 시대에 이르면 아버지와 형제를 위해 복수를 한 사안에 대해 법은 일종의 타협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복수를 명분으로 하는 다른 행동에 대해서는 법률로써 엄격히 금지되었다. 다시 말해 제국의 조정은 고전 예경에서 허락한 혹은 격려한 윤리 관념에 대해 제한적인 수용을 하였던 것이지 결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179p

사실상 한대 이래로 역대 황제들은 모두 공식적인 관료기구에 의지하여 천하를 통치해야 했다. 그러나 관료기구가 점점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스스로 체계를 이루어 황권 밖에 독립하게 되면, 황제는 관료 체계가 자기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다시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개입하여 자기의 권위와 이익을 지켜야 했다. 동한 말기에 이르면 황제는 백관의 우두머리인 승상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이에 원래 황제의 비서 성격을 가지고 있던 상서가 황제와 중요한 일을 논의하고 조서를 기초하는 등 점점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정책 결정과 집행에 참여하기 시작한 상서는 시간이 흐르자 황궁의 일개 부분(내조)에서 조정의 구성원(외조)으로 점차 변하였다. 정식 관료기구의 한 부분이 된 후 상서는 황제를 따라 나팔을 불고 춤추었던 그 탄력성을 잃게 되었다. 황제는 마음대로 상서를 운용할 수 없게 되자 다시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다른 비서를 찾았다. 이에 비서령, 훗날 중서령이 조위 시기 황궁에서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서령은 발전하면서 그 전의 상서와 비슷한 궤도를 밟아 점차 황제의 개인 비서에서 조정의 공공 기관이 되었다.

184p

동한 말기 이후로 법률 지식은 특정 가문에서 대를 이어 전하는 방식으로 전승되었다. 사실 한나라 창건 초기에는 진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관리를 양성하고 임용할 때 그들의 행정능력과 사법지식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로 인해 중앙정부의 관원 중에는 율령에 정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동한 말년에 이르면 조정이 새로 보충하고 개정하여 반포한 법률 조문이 이미 너무 많아져 일반 관리들은 근본적으로 법률 조항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문체의 화려함, 즉 붓끝을 놀려 글재주를 부리는 능력이 원래 행정 사법 능력을 대신해 임관 기준이 되었다. 이로써 율령의 학문은 점차 쇠락했다. 이러한 경향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조위가 한을 찬탈할 무렵 조정은 반드시 '율박사'를 세워 전문적으로 법률 지식을 보존하는 임무를 맡겨야 했다. 또한 이들로 하여금 조정을 위해 법학 인재를 육성하게 했다. 비록 율령의 학문이 이러한 어려움에 처하긴 했어도, 정권이 매우 빠르게 교체되고 사회가 점점 변화했던 위진남북조 시기의 삼, 사백 년간 율령학은 몇몇 법학 명문에 의해 계속 전승되었다. 

186p

비록 북위의 한화 운동은 효문제 즉위 후, 즉 문명태후 섭정시대 비로소 대대적으로 진행되었지만, 탁발 선비의 북방 통치의 역사에서 보면 사실은 처음부터 부분적으로 한족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북위 건국 이래 몇 차례 율령을 수정하고 제도를 개혁한 것은 모두 한의 정치 전통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또한 위, 진과 남조의 통치 체제를 종종 참고하였다. 상서의 관원들은 경전에 의거하여 정확히 의견을 밝혔고, 그들이 주장한 것은 모두 유가의 가족주의였다. 확실히 북위의 법률 개정 과정에서 유가의 윤리 사상은 매우 중요했고 점차 법전의 조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212p

전통적 예법 관념에서 보면 이혼을 하여 집을 떠난 어머니는 근본적으로 "가족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 즉 아버지의 가족과 친속의 명분이 없어진 사람이다. 반면 자녀는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았고 여전히 아버지 집안의 한 사람이니, 부계 가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과 이혼한 어머니는 당연히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녀는 어머니를 위해 복상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214p

여성 통치자가 만약 자기의 인생 경험에서 출발해 여성의 시각으로 새롭게 부계 중심적 예법을 대한다면, 그 가운데의 '부존처비', '부존모비' 그리고 '시댁 가족정체성' 등 각종 원칙들에 대해 필시 다른 느낌과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무측천이 복상 기간을 개혁한 것이든, 영태후가 공주를 보호한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사안의 부인 유씨가 했던 불평도 납득이 간다.

"주공은 남자라 그렇게 썼습니다. 만약 주공의 아내더러 시를 쓰라했다면, 필시 그런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223p

현실적인 측면에서 간통은 후사의 혈통을 혼란시킬 수 있다. 간통한 여성이 낳은 아이는 부친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고, 이는 부계 가족의 계승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당대 법률은 간통죄에 대해 그저 '도형'에 처하는 것으로 그쳤다. 또 부계 혈통의 혼란 문제를 걱정한다 하여 따로 간통한 여성에 대한 처벌을 가중하지는 않았다. 명, 청 시기 이후 간통한 여성을 엄벌하여 사형에 처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당대한 해도 부권의 영향력이 그리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가 법률로써 혼외 성행위를 금지한 것은 아니다. 비록 정서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일반 사람들은 배우자가 다른 이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모든 사회에서 그것을 법에 고소하여 '간통을 잡는' 방식으로 혼외 성행위를 막은 것은 아니었다. 한 여성이 만약 평생을 온 힘을 다해 혼인과 가정에 헌신했는데, 법률로써 남편의 배반을 제재할 수 없다면 아마도 그녀는 증오에 떨 것이다! 

 남성은 자기 혈통을 이어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어떤 경우는 정말로 모골이 송연해지고 주먹이 불끈 쥐어질 정도다. 고대 흉노는 소위 '탕장'이라는 습속이 있었다. 임신에 관련된 검진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가 본인의 자식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남자들은 처를 취한 이후 태어난 첫 번째 아이를 예외 없이 죽이고, 두 번째 아이부터 키웠다고 한다. '탕장'은 바로 처의 배 속을 먼저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가정폭력방지법의 추진은 민법 친속편의 개정과 마찬가지로 여성단체가 줄곧 힘을 쏟은 부분이다. 앞사람이 넘어지면 뒷사람이 어어가고,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 결과, 최근에 이르러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어찌되었던 여성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결국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체의학이라 불리는 사기
에트차르트 에른스트 지음, 강석하.김현우 옮김 / 과학과세상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앞서 읽은 <대체의학을 믿으시나요> 보다 한 발 더 나간 강경론적 입장의 책이다.

앞의 책은 대체의학이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나치게 상업적이지 않다면 플라시보 효과 측면에서 나쁠 건 없다는 쪽이었는데, 이 책의 저자는 거짓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비판한다.

현대의학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그것이 대체의학의 존립 근거가 될 수 없다.

의학은 근거를 가지고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대체의학은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근거라고 제시하는 것들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허술한지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SCAMDMS So-called Alternative Medicine 의 약자, 간단히 말해 scam, 곧 사기다.

저자의 명확한 관점이 돋보이지만 대중에게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제일 저명한 지지자로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나온다.

역시 방송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처럼 덜 떨어진 인물이었다.

왜 여전히 대체의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상업적 이익을 얻는 것일까?

여전히 인간은 달에 가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 만큼 원래 사람들은 음모론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대체의학은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다.

단순하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 주기 때문에 감성적으로 쉽게 수용되는 듯 하다.

현대의학의 복잡성은 의과대학과 전문의 과정을 10년 넘게 수료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일반인들에게는 잘난 척 하는 배타적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환자 선택권이라는 것은 책에 나온 표현대로 토론에서는 이길 수 있는 논리로 쓰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환자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함을 인식하고, 의료인들이 윤리적으로 행동하고 인과 관계가 입증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임상에 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즘 정치를 보면서도 느끼는 바지만, 대중의 시대에 정말 중요한 것은 진리를 어떻게 대중에게 잘 알리는지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등의 역습 - 좌파의 역주행, 뒤로 가는 대한민국
이동관.윤창현.김대호 외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때는 김대중, 노무현 당선됐을 때 이 땅의 민주화가 왔다고 울었던 적도 있었다.

학생운동 세대는 아니지만 5.18의 현장인 광주에서 자랐고 아빠가 그 일로 옥살이를 하고 불운한 젊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독재에 투쟁하는 것이 절대선이고 박정희나 특히 전두환은 절대악이라고 생각했었다.

노무현이 당선되던 날 어찌나 가슴이 벅차던지 대한민국은 이제 진보가 이끄는 새 세상이 될 거라 믿고 새벽까지 TV 를 시청하면서 희망에 부풀었다.

그런데 이제 40대가 되고 보니, 더군다나 이 정부에서 핍박하는 영세 자영업자가 되고 보니 이상과 현실은 전혀 다르며, 586 운동권 세력이 꿈꾸는 이상이라는 것도 21세기 글로벌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좌파는 선전과 선동에 능하다더니 과연 그렇다.

자본가에게 핍박받는 노동자 스탠스를 고수하는 민노총은 사실은 상위 10%에 해당하는 소득을 가진 기득권층이고, 문재인 정부가 열심히 증원하고 있는 공무원들 역시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평생고용이 보장되고 죽을 때까지 연금을 보장받는 소득 상위층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이유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사실을 책을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책에서는 민노총과 공무원들을 신기득권층이라 부른다.

이미 직업을 얻은 사람들은 회사의 생산성과는 상관없이 절대 고용을 보장하여 해고를 어렵게 만든다면 회사에서는 인건비 부담 때문에 당연히 인력 충원을 중단한다.

그렇다면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는 청년층에게는 닫힌 문이 되버린다.

이게 바로 평등의 역습이다.

문 정부가 그렇게도 외치는, 기회는 평등하고 결과는 공정할 거라는 주장과는 달리, 출발선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권리만 보장해 준 꼴이 되버렸다.

왜 꼭 하늘로 승천해야 하나, 개천에서도 잘 지내면 된다, 내가 강남 살아보니 별로 좋을 것도 없더라는 식의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나라를 운영하고 있으니 결국은 사다리 걷어차기가 되버린다.

열심히 경쟁해서 더 나은 삶의 조건을 가지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이런 욕망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해 왔는데 정부에서는 평등을 내세워 규제와 형벌로써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다.

강남좌파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글로벌 시대에 걸맞지 않는 현 정부의 시책들에 한숨이 나오고 대한민국이 과연 보다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는지, 더 보편적으로는 AI 시대에 기술을 갖지 못하는 대다수의 대중들이 일자리를 얻어 중산층의 삶을 유지할 길이 있기는 한건지 절망적인 느낌이다.

세계화의 실제적인 피해를 후진국이 보는 게 아니라, 제조업 위주의 나라인 미국의 노동자들이 대량해고를 당하게 된다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개도국들은 공장 세워서 일자릴 얻고 저가 물건들을 전세계에 팔아 훨씬 잘 살게 된다.

그러나 선진국의 제조업 비숙련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뺏기게 되는 것이다.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어 충분한 이윤을 얻어야 하는데 과연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랍과 이슬람 - 그 문명의 역사와 사상
임병필 외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저 읽은 이와나미 문고의 <이슬람 문화>에 비하면 깊이가 얕은 느낌이지만 같이 읽어서 도움이 됐다.

이슬람 세계 중에서도 주로 중동의 아랍 국가에 초점을 맞췄다.

표지디자인은 산뜻하고 예쁜데 도판이 전부 흑백이라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170p

샤리아의 법 제정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코란, 순나, 법학파들을 통해 '돼지는 불결하다'는 것을 돼지 금지의 일관된 이유로 주장하고 있다. 또한 어디에서도 돼지 금지를 위반할 시의 처벌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세계에서는 핫드형을 집행하는 술 금지보다 아무런 처벌이 없는 돼지 금지가 무슬림들이나 비무슬림들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는 돼지 금지를 준수하는 것이 알라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이슬람에 대한 종교적 신념과 정체성의 유지나 실천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21세기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돼지 금기의 복합적 요인들이 무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돼지에 대한 금기를 지키려는 것은 타종교와의 차별성과 이슬람이라는 집단적인 자기동일성을 강화하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300p

아랍 사회는 매정스럽고 엄하고 냉혹하다. 강자를 숭배하고 약자에의 동정은 없다. 개인에게 가혹하다. 사소한 실수로도 큰 질책을 당한다.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인정되면 과실은 용서를 받을 것이나, 나쁜 일을 범한 사람에게는 평생 동안 비난이 따라다닌다.

 아랍인들은 무엇이든 숨기려고 든다. 자기 행위를 밝히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 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중요한 일은 비밀리에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혼자만 진행한다면 불리한 가치판단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랍인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는 무엇을 하여도 무방하다"는 말에 따라 사는 듯하다. 사회에서 벗어나 자기를 알아보는 이가 없는 곳에 사는 아랍인의 행동에는 놀랄 만한 변화와 이완이 일어난다. 

307p

"주님은 죽음으로만 우리를 공평하게 하신다"

종교를 원망하는 속담이다. 이집트인들은 열악한 자연환경 속의 삶에서 만족보다는 불만족이 많았기 때문에 다음과 이런 속담들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속담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인간들 간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기에 결국 죽어서 공평해질 수 있다며 신을 원망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승자는 누구인가? - 근세 초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4
김원중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민음사의 이 시리즈는 분량이 작으면서도 역사의 여러 주제에 대한 쉽고 깊이있는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괜찮은 기획물 같다.

홍보가 많이 안 된 것 같아 아쉽다.

살림 문고나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보다 훨씬 깊이있다.

왜 대항해 시대는 서유럽이 아닌 이베리아 반도에서 먼저 시작된 것일까?

특히 포르투갈은 당시 유럽의 부국도 아닌데 말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피레네 산맥으로 가로막혀 지중해 무역에서 이탈리아 등에 밀린 상태였고 특히 에스파냐는 국토 회복 운동을 통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데 총력을 기울이던 때라 유럽 대륙 내에서의 확장을 추구하기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히크의 결단은 놀랍다.

과학 기술이 일천하던 시절에 모험심을 갖고 바다로 나가게 한 지도자의 리더쉽이 나라를 중흥시킨 것이다.

포르투갈은 유럽의 빈국이었기 때문에 해상 무역을 위한 상관을 건설하고 이익을 얻고 싶었을 뿐 후발주자인 서유럽처럼 식민지를 건설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희망봉을 돌아 찾아간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이 함부로 점령할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반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나라의 힘을 밖으로 팽창시키려 한 에스파냐는 운좋게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상대적으로 정치체제가 후진적이었던 인디언들을 점령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포르투갈과 무역할 제품들이 많았던 반면,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을 만족시킬 만한 상품이 부족해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은광을 개발하고 대농장을 직접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디언들의 몰락으로 에스파냐인들의 잔혹한 학대 등을 거론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책에 나온대로 천연두 같은 질병이었을 것이다.

마치 유럽 인구의 30%가 흑사병으로 쓰러졌던 것처럼 말이다.

대항해 시대의 시작점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고찰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37p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이 1492년 무슬림들의 최후의 보루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오랫동안 사회의 필수적인 구성원이었고 예술, 상업, 지식에 지대한 기여를 해 온 유대 인과 무슬림들을 추방하거나 강제 개종시킨 일은 비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근절하려는 에스파냐 사회의 종교적 열정이 얼마나 강했는지 잘 보여 주는 예다. 또 에스파냐는 좁은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슬람 세계인 북아프리카와 대치하고 있었고, 지중해에서 튀르크 이슬람 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증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벨 여왕이 대이슬람 투쟁의 한 방법으로서, 콜럼버스를 지원해 '이교도들'을 물리치고 그들의 땅에 그리스도교를 전하기 위해 해외 팽창을 생각하게 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15세기에 종교는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고, 정치 혹은 무역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종교적 요인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종교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인들의 팽창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강렬한 종교적 확신, 이슬람을 타도하고 이교도들을 개종시킬 사명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그들의 신념은 확신을 가지고 해외 모험에 나서게 만들었다. 이에 비해 유럽의 좀 더 신중하고 실용적인 국가들, 특히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은 그것을 무모하고 별로 실소득이 없는 사업으로 생각했다. 이는 종교가 왜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이 해외 팽창에서 중요한 요인이인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58P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궁정과 도시 국가들은 부와 예술적 성취를 과시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이탈리아 내에서 멋진 건물을 건축하고, 위대한 미술가들을 지원하는 데 많은 돈을 지출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지역의 '발견'과 팽창을 위해 쓸 돈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이런 내향적인 경향과 자기만족은 그보다 더 가난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 모험적일 수 있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또한 15세기 말~16세기 초 이탈리아는 외침과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내분으로 분열되어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각축장이 되었고, 이탈리아 소국들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야심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그에 비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네덜란드와 영국 등 북서 유럽 국가들은 보다 통일되고 경제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좀 더 안정되고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66p

처음에 아프리카 노예들은 해안 지역을 습격해서 얻을 수 있었으나 1480년대 이후로는 아프리카 국가 혹은 무역업자들과 포르투갈 간의 교역의 일부로 공급되게 된다. 즉 아프리카의 지배자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붙잡아 포르투갈 인들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공급되었다. 

(아프리카는 무조건 유럽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만 인식되는데 자국민들 노예로 팔아넘긴 이런 행태는 좀더 비판적인 시선이 필요할 것 같다)

69p

다가마의 항해가 있고 나서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양 무역을 거의 지배하게 되었다. 이 지배가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무력에서의 우위 때문이었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 외에도 당시 이 지역에는 포르투갈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만한 어떤 단일한 해상 세력이 없었다는 점도 포르투갈 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말라바르 해안을 따라 늘어선 작은 국가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들은 포르투갈 인들을 위협할 만한 힘이 없었다. 동아프리카 해안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이집트와 페르시아는 강국이었으나 둘 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인도양에는 정규적인 함대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 중국 명나라는 더 강국이었지만 이 무렵 중국은 더 이상 인도양 해역에 관심이 없었다.

72p

포르투갈인들은 아시아 어디에도 대규모 영토와 다수의 인구를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지 않았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의 지배, 그러니까 아시아의 땅과 사람들에 대한 지배라고 할 만한 현상이 시작되는 것은 포르투갈에 의해서가 아니라 17세기 네덜란드의 자바 지배, 에스파냐 인들의 필리핀 지배에 의해서였다. 포르투갈이 아시아에서 가졌던 관심은 수지맞는 해상 무역 제국의 건설과, 그것의 안정적인 유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그것을 유지할 만한 자원도, 병력도, 동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은 단지 가끔 자신들의 상업적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지 지역 세력들 간의 라이벌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들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군주들 혹은 세력가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을 뿐이었다.

 유럽의 빈국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인들이 15.16세기에 건설한 해외 제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의 가장자리에 세워진 일련의 요새와 상관들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론적으로 포르투갈인들은 아시아 해역에서 중국의 명 왕조, 인도의 무굴 제국 등 가공할 적수들과 맞서야 했다. 그러나 이들 열강들은 강력한 육군에 의해 유지되는 육상 제국이었고, 자국의 부의 원천이 해군과 대외 무역이 아닌 농업과 국내 교역에 있다고 생각했다. 무굴 제국과 명의 황제들은 포르투갈인들을 자신들의 이해와 별 관계없는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그들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거나 물리치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 또한 그런 강력한 아시아 국가 지배자들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처신했음은 물론이다.

97p

에스파냐인들에게 아메리카는 땅과 재산 모두를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정복 대상이었다. 당시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을 포함하여 유럽인들은 자기들이 점령한 '이교도들'의 땅에 대해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교도만이 영토의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는 원칙을 만들어 놓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자신들이 '발견한' 땅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발견한' 포르투갈인들은 그 소유권을 현실화할 힘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제로 주장할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에스파냐인들은 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99p

콜럼버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카리브 해는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인들이 발견했던 수지맞는 교역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본토 내륙에 사는 훨씬 개화된 원주민들도 백인들과 지속적으로 교역할 만한 물품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에스파냐인들이 볼 때 아메리카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은 오로지 금광과 은광, 진주 어장, 비옥한 토양뿐이었다. 이것들을 수탈하기 위해서는 몇몇 해군 기지를 발판으로 하는 해상 제국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복과 식민지화,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한 원주민의 노예화였던 것이다.

111p

탐욕스럽고 거칠고 강인했던 그들은 비록 끝까지 살아남아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 부를 얻기 위해 인디언들과 낯선 환경과 기후에 맞서 싸우면서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밀림을 헤치고 돌아다녔다. 정복자들은 저마다 출신 배경은 달랐지만 모두 강한 개인적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인디언들에 비해 월등히 우월한 존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아메리카 정복은 바로 이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135p

인디언의 몰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자주 이른바 '흑색 전설'로 설명해 왔다. '흑색 전설'이란 주로 영국 미국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 생겨난 것으로, 에스파냐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왜곡하고 과장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에 따라 에스파냐 인들이 처음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대단히 잔인하게 대했으며, 그런 학대를 못 이기고 많은 인디언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당시 에스파냐 인들이 인디언들의 노동력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고, 인디언들에 대해 고의적으로 과도한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얻을 것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유럽인들이 의도하지 않게 아메리카로 들여와 면역력이 없는 주민들 사이에 들불처럼 확산되었던 천연두 같은 '유럽의 질병'이 인디언 인구의 궤멸을 가져 온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아마도 인구 감소의 주원인은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역병이었을 것이다.

(유럽 인구의 1/3 이상을 앗아간 흑사병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40p

"거대한 새로운 시장의 출현과 그것의 끊임없는 확대는 유럽의 상인과 제조업자에게 전례없는 기회와 자극을 제공했고, 유럽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새로운 부와 자본이 축적되고 새로운 근대적 기업 형태가 나타나고 금융업은 보다 합리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적이고 세계적인 규모의 자본주의 색채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시민 계급이 무럭무럭 자라나게 되었다."

 이처럼 대항해 시대는 유럽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것은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 해양 팽창은 19세기에 현실화된 유럽의 세계 지배를 불가피하게 만든 요인이었는가?

 유럽이 적극적으로 해외 팽창을 한 것은 사실이고 최종적으로 제국주의의 지배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이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았다는 설명이다. 16세기의 대항해와 19세기 유럽의 세계 지배 간에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대항해가 시작될 무럽 부와 군사력, 과학 기술은 모두 중국과 이슬람권 등 아시아 세계가 우위에 있었고, 그 상태가 300년 가량 유지되었으며 19세기에 가서야 세계 경제의 중심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겨 갔다는 설명이다. 그 근거로 유럽 인들이 해외 팽창에 나설 무렵 세계의 많은 문명권들이 모두 나름대로 팽창을 시도했다는 점, 1800년까지 세계 인구의 2/3가 아시아에 거주했고 (그 대부분은 중국과 인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1775년 경 아시아가 세계 생산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생산성도 더 높았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