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섹스를 하는가 - 이기적 유전자의 성이론에 대한 반박
나일즈 엘드리지 지음, 김원호 옮김 / 조선일보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생각했던 것 보다는 훨씬 쉽고 분량도 짧아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었다
300페이지가 좀 못 되는데 양장이라 그런지 책값이 비싸다
대신 북디자인이나 내구성 등은 훌륭해서 소장하기 좋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이기적 유전자" 를 사면서 거기에 대한 반대 이론이라길래 함께 주문했다
"이기적 유전자" 보다 더 만만해 보이는 이 책을 먼저 읽어서 아직 정확한 결론은 내지 못하겠지만, 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점은 나도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다

1부는 유전적인 측면에서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반박하고 2부에서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반박한다
이기적 유전자가 워낙 대세다 보니 100%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절대적으로 신뢰하는데는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가벼운 문제 제기를 하는 정도다
"이타적 유전자" 를 쓴 매트 리들리도 본성과 양육의 대립보다는 둘의 적절한 조화를 주장했다
이 책의 저자 나일즈 엘드리지는 유전학자들이 세상의 권력과 결합하여 전횡을 휘두르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
그러니까 학문적인 반박이라기 보다는, 바람직한 학자의 자세를 논했다고 할까?
어떤 면에서는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다
"빈 서판" 등을 보면 감히 함부로 반론을 펴지 못할 만큼 학문적으로 철저하게 자기 주장을 논증하는데 비해, 이 책의 전개 방식은 경험에 의존하고 있고, 두리뭉실한 편이다
저자는 독자들을 위해 쉽게 썼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학문적으로 저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다
뭐랄까, 본격적인 학자라기 보다는 대중 저술 전문가라고 할까?
학설에 입각한 철저한 논증 과정 대신, 사례를 중심으로 이런 경우도 있지 않냐며 반대를 취하는 태도는, 아무래도 한 단계 아래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쉽게 읽는 장점은 있다
특히 2부에서 서술한 문화적 측면의 이야기는 나처럼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준다
혹시 독신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능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는 사람에 비해 이기적인 것도 아니라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준다

진화에 대해 새롭게 안 사실은, 진화가 긴 세월에 걸쳐 조금씩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생물은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큰 변화를 겪지 않는다
익히 알려진 대로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으므로 미래의 인간이 ET처럼 머리만 크게 진화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오히려 저자는 인간의 뇌가 더 커지면 산도를 빠져 나오기 힘들어지므로, 진화학상으로도 그런 변화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정한다
큰 머리가 빠져 나오도록 산도가 커지면 여성은 허리를 지탱하지 못해 직립보행이 어려워질 거라는 입장이다
생물은 자연의 큰 변화에 따라 느닷없이 진화의 과정을 겪는다
기존의 생물과 새로운 생물 간에 경쟁이 벌어지면서 살아 남는 생물만 계속 자손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생물은 지구의 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됐다
고생대의 삼엽충이나 중생대의 공룡 등이 쉽게 떠오른다
공룡의 멸망 원인은 혜성이나 운석의 충돌로 인한 기후 변화로 보는 게 정설이라고 한다
저자가 고생물학을 전공했으니 맞는 말일 것 같다

저자는 유전자를 설계도에 비유한다
개체가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해 번식하고 생존한다는 것은, 설계도를 전해 주기 위해 개체가 산다는 말과 똑같기 때문에 잘못된 이론이라고 반박한다
사실 저자가 유전자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다
이미 유전자는 누구의 도전에도 확보부동한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학계의 중요 학설로 받아들여졌고, 저자는 오히려 이 이론이 권력과 결합하면서 지나치게 모든 영역에서 유전자를 강조함으로써 잘못된 결론을 유도한다고 비판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에서 극단적 진화론자들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 달걀이 먼저라고 하고, 스티븐 제이 굴드나 저자 같은 사람들은 개체의 생존이 먼저이므로 닭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생물은 자손을 번식시키는 것 보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더 먼저 생각한다
저자는 이것을 생식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으로 나눠서 설명한다
어떤 개체든지 생명 유지가 먼저이기 때문에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자손을 번식시키려는 생물은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 진화론자들은 자손 번식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개체의 생명 유지와 관련된 경제적 측면을 무시했다고 비판한다

이 책의 진짜 주제는 2부에 들어 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개체가 생식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을 가진 반면, 인간은 여기에다 성을 더한다
즉 인간은 성과 자손 번식을 분리시켜 생각한다
만약 이기적 유전자론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가장 우수한 인간은 수많은 남자들에게서 원치 않는 사생아를 낳는 매춘부일 거라고 일갈한다
다른 생물과 달리 인간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수록 아이를 적게 낳는다
선진국은 인구 감소로 고민하는 반면, 후진국은 넘쳐 나는 아이들 때문에 골치를 썩고, 심지어 중국 같은 나라는 1가족 1자녀 운동을 정책적으로 펴기까지 한다
이기적 유전자론에 따르자면, 모든 생물은 자신의 유전자를 자손에게 전달시키기 위해 생존하는 것이므로, 경제적으로 부유할수록 더 많은 자손을 낳아 자기 유전자를 후세에 남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선진국일수록,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아이를 적게 낳고 심지어 아이 낳기를 거부하기까지 한다
왜 인간 사회에서는 자연계의 법칙에 역행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저자는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래, 자연 생태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갔다고 여긴다
자연 변화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수는 기하급수학적으로 늘어나 현재 세계 인류는 60억을 넘어섰다
경제적인 여유, 즉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게 되면서 인간은 생식과 무관하게 성을 즐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 섹스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자식을 갖지 않으면서 섹스를 즐기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쓴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파트너와 섹스를 즐기지만, 누구도 그 파트너들에게서 자신의 아이를 갖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교육 수준이 높고 소득이 많을수록 아이를 적게 낳아 그 아이에게 온갖 투자를 다 한다
아이는 더 이상 가정 경제의 소득원이 아니다
선진국에서 아이를 키워 사회로 내보내려면 엄청난 경제적 비용이 필요하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부모는 자신의 여가 시간을 뺏기고,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에 적게 낳아 잘 키우는 방식을 채택한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 특히 후진국에서 아이는 여전히 중요한 경제적 소득원이 된다
농경 시대에 아이는 집안의 허드렛일을 맡았고, 부모가 늙으면 보살펴 주는 일종의 보험으로 작용했다
가난한 집에서 아이를 유곽에 팔아 먹는 얘기는 흔히 들어 왔다
요즘도 미국에는 제 3세계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부모로부터 팔려 온다고 한다
인도 등지에서 어린이 노동은 낯선 풍경이 아닌다
유럽에서도 산업 혁명 당시 어린이들은 공장 노동에 동원됐다
오늘날처럼 엄청난 돈과 보살핌을 장기간 (적어도 결혼할 때 지는)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만 자라면 곧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당연히 가난할수록, 농업 체제를 유지하는 나라일수록 많은 아이를 갖는다
미국의 경우 흑인 미혼모들은 어려운 가운데도 아이를 더 낳으려고 애쓴다
아이가 한 명 있을 때 받는 지원금으로는 살기 힘들지만, 세 명 정도 되면 지원금 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혼모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정책이 오히려 미혼모의 삶을 더욱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는 주장은 결과적으로 일리가 있게 돼 버렸다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인간은 유전자의 전달, 즉 자손 번식 보다는 자신의 생명 유지, 즉 경제적 측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극단적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다
적어도 인간 사회의 경우는 분명히 그러하다
저자는 극단적 진화론자들이 문화를 이루고 사는 인간 사회의 특성을 무시한 채 일률적인 주장을 편다고 지적한다
학술적인 논증은 아니지만, 진화론자들이 인간의 문화에 대해 더 많은 설명을 해야함은 분명한 것 같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저자가 이기적 유전자론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기적 유전자는 이미 주류 학설로 자리를 잡은 느낌이다
저자는 매스컴과 권력에 기대어 모든 영역을 유전자 문제로 풀어 내려는 기존의 풍토를 비판하고, 과학자들이 보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과학이론을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데, 이기적 유전자론이 힘을 얻으면서 거기에 정치적 해석이 개입된다고 우려한다
(가장 흔한 예로 우생학 논쟁이 있을 수 있겠다)
확실히 인간이란 종은 특별히 우월한 지위를 가져서가 아니라, 생태계의 다른 개체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을 연구할 때는, 문화에 대한 고려도 절대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과연 "이기적 유전자" 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기술했는지 궁금하다

주석도 꼼꼼하고 읽기도 편하다
특히 인간의 문화와 성을 분석한 글들은 사회 과학서로서도 훌륭한 편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개인적인 이기심 때문이 아닌가 싶어 괴로운 사람들이나, 혹시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잘못된 행동인지 의심되는 사람들은 꼭 한 번 읽어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물론 독신 여성에게 출산의 의무를 저버린,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비난하는 마초들도 한 번쯤 읽어 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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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저녁 2005-03-24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님 정말 이렇게 긴 리뷰를 어떻게 쓰나요....존경스럽다는,,,,

바람구두 2005-04-2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큼이나 긴 리뷰로군요. 흐흐.

히피드림~ 2005-06-12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님께서 책 내용을 꼼꼼히 쓰셔서 유익했습니다. 읽지 않은 책이지만 저자 주장의 핵심을 알겠네요.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아이=노동력을 의미 하므로 많은 아이들을 낳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아이가 성인이 될때까지 많은 투자를 해야하므로 적게 낳는다는 것이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무조건 적게 낳는 건 아닌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야 인구밀도도 높고 사회의 모든 환경과 시스템이 점점 척박해져 가니 맞는 소리일수도 있지만, 미국만 해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아이를 많이 낳습니다. 여유가 있고 아이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죠. 땅덩이에 비해 인구밀도도 낮은 편이구요. 실제로 유복한 미국인들은 3~4명은 낳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코마개 2005-08-18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재천 교수의 글을 보면 섹스를 하는 이유가 기생충 때문이라고. 만약 섹스없이 생명체가 태어난다면 단일 유전인자를 가진 생명만 있게되고 그럼 유전자 구조를 인식한 기생충에 의해 살아남기가힘들게 되므로 섹스를 통한 유전자 혼합으로 기생충의 숙주로 되는 것을 막고 번식하게 된다고...
그리고 아이를 적게 낳는 이유는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생존 환경이 열악해지면 스스로 번식을 자제해서 자신을 보존하고 후에 생존환경이 좋아질때를 기약하는 현상과 같다고 하는데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자식이고 뭐고 간에 지금 한국사회가 자기 입하나 건사하기도 넘 힘든 사회가 되어버려서 내 목숨부지가 우선이라 자식은 꿈도 꾸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