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모델 - 화가의 붓끝에서 영원을 얻은 모델 이야기 명화 속 이야기 5
이주헌 지음 / 예담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주헌은 참 글을 잘 쓴다
그가 소개하는 서양 미술사를 읽고 있자면 마음이 행복해진다
명화를 소개하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는 가히 최고의 작가라 할 만 하다
단순히 그림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느낀 점을 독자에게 자연스레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이 참 마음에 든다
지금까지 읽은 그림책 중 이 사람의 책이 가장 편하고 정겹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그림 감상서에 머물지 않고 핵심이 되는 지식과 감상 포인트도 빼놓지 않고 독자에게 자상하게 알려 준다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를 읽을 때도 참 편하고 따뜻했다
이런 책들을 읽을 때는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좋은 글 때문에 책 읽는 기쁨이 두 배가 된다

서양화는 인물화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화가와 모델 사이는 감정적으로 꽤 밀착되어 있었다
이해가 간다
특히 자기 마음에 딱 드는 이미지의 모델이 나타나면 그를 상대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고 싶을 것이다
한 두 시간 만에 뚝딱 해치우는 게 아니고 몇 개월씩 작업을 해야 하므로 모델과 화가 사이에 인간적인 정리가 쌓이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 같다
그래서 모델과 결혼하는 화가도 많고, 정부가 되는 경우는 훨씬 많았다

이 책에서는 25명의 모델들이 소개되는데, 가장 바람직한 케이스는 17세기 회화의 대가인 루벤스인 것 같다
"명화의 비밀" 을 보면 카메라 루시다를 통해 인물의 형상을 캔버스에 투영시킨 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기법이 유행했는데 (우리가 감탄하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림들이 바로 이 기법을 응용한 것이다) 루벤스는 이런 기구를 전혀 이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드로잉 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루벤스의 위대함 중 하나가 바로 이 놀라운 드로잉 솜씨라는 것이다
루벤스는 성격도 좋고 화술에도 능해 유럽 왕실을 돌아 다니며 외교 사절 역할도 했다고 한다
일단 왕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멋진 그림들을 그려 분위기를 화기애애 하게 만든 후 외교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것이다
예술가라면 이런 정치 문제나 일상 생활에 완전히 꽝일 것 같은데, 루벤스라는 사람은 그림도 잘 그리지만 생활인으로서도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멋지고 유능한 화가는 아내에 대한 사랑도 대단해 아내들을 상대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첫 아내와 의가 매우 좋았지만 일찍 죽는다
34세 때 그는 16세의 둘째 아내와 결혼한다
얼핏 생각하면 도둑놈 같지만, 당시 루벤스는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은 세력가였다
반면 두 번째 아내는 제분업자의 딸로 하층민이었다
주위에서는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 귀족 출신의 아내를 맞으라고 했지만 루벤스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이해해 주고 모델 일을 통해 작업에 함께 참여해 줄 현숙하고 자상한 아내를 원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재벌 2세가 가난한 집 여자와 결혼한 셈이다
또 당시 유럽에서 16세는 전혀 어리지 않은, 결혼 적령기였다고 하니 오히려 돈 대신 사람을 택한 루벤스의 인간성에 박수를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는 첫 아내와 두 번째 아내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고, 심지어 두 아내를 미의 여신으로 함께 등장시키는 그림도 그렸으니 아내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이렇게 바람직하고 훌륭한 결혼 생활을 한 사람은 이 책에서 루벤스 한 명 뿐이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루벤스나 렘브란트 등은 자신의 그림 실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한 경우다
그림이 신분 상승의 방법이 될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흔히 예술가라고 하면 고흐처럼 세상과 단절돼 자기만의 세계에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떠올리는데, 가만히 보면 고흐나 모딜리아니 등 일부 화가에 불과한 것 같다
피카소 같은 경우는 그림을 통해 가난뱅이에서 억만장자가 됐을 정도니, 그림도 하나의 권력이고 자본이 될 수도 있나 보다
예술이 제도권 속에 갇히면 그 생명력을 잃을 위험도 있지만, 그만큼 사회가 예술의 가치를 인정해 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바람직하고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피카소는 억만장자가 됐어도 92세에 죽을 때까지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게 바로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일 것이다
사람들의 인정이나 돈, 권력 유무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빛의 화가인 렘브란트는 아내가 유력 집안의 딸인데 죽기 전,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경우 자기 재산을 상속할 수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
덕분에 렘브란트는 아내가 죽은 뒤 평생 동거만 했다고 하니, 좀 잔인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동거녀는 사회적 지위도 얻을 수 없고 법적 권리도 없던 당시 풍조를 생각해 보면, 렘브란트 보다는 함께 산 여자들이 더 불쌍하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재혼할 경우 자기 아들에게 돌아 갈 재산이 줄어들까 봐 염려하여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대단히 사치스러웠던 렘브란트는 죽기 전 알거지가 됐다고 하니, 재산을 지키려던 아내의 노력도 다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

화가들은 대체로 결혼을 속박이라 생각하고 동거를 선호했다
결혼을 했다 할지라도 정부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정부들은 모델을 서다가 감정이 발전되곤 했다
피카소 같은 경우는 정식으로 오래 관계를 맺은 여자만 해서 7명이나 되지만 (92세까지 장수한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정식 결혼은 딱 두 번 뿐이었다
확실히 예술가들은 결혼을 속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라파엘로는 한 여자와 12년을 살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마르게리타라는 이 여자는 라파엘로의 그림에 성모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림 속에서 그녀는 라파엘로라는 이름이 새겨진 팔찌를 차고 있기도 하다
꽤나 사랑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끝까지 결혼은 거부했는지 모르겠다
라파엘로는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면서 마르게리타를 위해 많은 돈을 남겨 준다
단순한 정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의 이야기는 영화의 소재로 쓰일 만큼 비극적이고 애절하다
목이 긴 여인으로 대표되는 모딜리아니는 마약 중독자에 가난하며 무절제한 남자였다고 한다
피카소 같은 경우는 세탁선이라 이름붙은 가난한 집에서 이 친구들과 어울렸으나 곧 성공해서 이 곳을 빠져 나갔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여전히 가난한 지역에서 못 벗어나고 술과 마약에 절어 살았다
이 때 나타난 구원의 여신이 열 네 살 어린 잔이었다
그녀 역시 미술학도였는데, 19세 때 33세의 모딜리아니를 만나 동거를 시작한다
잔의 아버지는 백화점 간부로 둘의 결혼을 극렬히 반대했기 때문에 착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잔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지도 못하고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열렬한 사랑은 3년 후 뇌막염으로 모딜리아니가 사망하면서 이튿날 임신 8개월의 잔이 투신 자살 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조선 시대에 가문과 정절 이데올로기 때문에 자살을 강요당한 가엾은 미망인들의 죽음과는 또다른 비극성이 느껴진다
임신 8개월이면 출산도 얼마 안 남았으니 모성애 때문에라도 악착같이 살 것 같은데, 대체 모딜리아니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따라 죽었을까?
그녀가 그린 자화상을 보면 대단히 현대적이고 시원시원한 공간배치가 돋보인다
화가로서의 자의식이 풍부하고 실력도 뛰어났으며 부유한 집안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랐을 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가 대체 얼마나 깊이 사랑했으면 남편이 죽자마자 출산을 앞둔 몸으로 죽음을 택했을지 쉽게 상상이 안 간다
그저 안타깝고 슬플 따름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의 그림을 정리하고 화가로서 제 2의 삶을 살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정말 마음이 아프다

화가들이 뽑은 가장 훌륭한 그림이라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에 등장하는 스페인 공주 마르가리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시녀들" 이라는 그림은 복잡한 배치도 때문에 더욱 유명한데, 펠리페 4세의 큰 신임을 받은 벨라스케스는 두 번째 왕비가 낳은 마르가리타의 초상화를 여러 장 그렸다
당시 스페인 왕실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근친혼을 통해 혈통을 유지시켰기 때문에 (두 왕실은 뿌리가 같다) 마르가리타는 태어나자마자 약혼자가 정해졌다
당시에는 전화도 없고 비디오도 없으니 해마다 초상화를 그려 미래의 시댁에 인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왕실 화가가 된 후 자기 직업과 위치를 너무 사랑했으며 펠리페 4세와의 관계도 대단히 끈끈해서 친구 같았다고 하니, 어린 공주에 대한 애정도 컸으리라
저자는 마치 삼촌이 조카를 그리듯, 마르카리타의 초상화에는 화가의 따뜻한 시선이 배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어린 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함과 앙증맞음, 그러면서도 공주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어색한 딱딱함 등이 잘 녹아난 듯 하다
이 귀여운 공주님은 겨우 2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아이를 그린 가장 멋진 그림을 꼽자면 영국 화가 밀레이가 그린 어린 딸 에피를 꼽고 싶다
아버지가 딸을 그려서일까?
다른 초상화에서는 느끼기 힘든 왠지 모를 친근감과 따뜻한 시선이 배어 있다
다섯 살 때 처음으로 교회에 가 설교를 듣는 모습은 어찌나 앙증스러운지 깨물어 주고 싶다
빨간 망토와 성장을 차려 입고 교회 의자에 앉아 나름대로 얌전을 빼는 이 귀여운 꼬마애는, 결국 아버지가 다음 해에 그린 설교 모습에서는 잠이 들고 만다
첫 설교 때는 나름대로 품위를 지키려고 안 졸려고 애를 썼지만, 두 번째 설교부터는 도저히 잠을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목도 "나의 첫 설교" 와 "나의 두 번째 설교" 로 그림의 주제를 잘 표현한다
밀레이는 이 그림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고, 심지어 런던의 대주교는 왜 설교가 길고 지루해서는 안 되는지를 이 그림이 잘 보여 준다는 논평까지 했다고 하니, 그 인기를 알 만 하다

화가들은 대체적으로 성욕이 강했던 것 같다
성욕이야 인간의 본능이니 없는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만, 화가들은 넘치는 에너지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놀라운 사람들이다
피카소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 등장하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결혼 관계 외에도 많은 정부들을 뒀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곤 실레는 좀 독특하다
보통 누드를 그리면서 모델과 깊은 관계가 되기 마련인데, 실레는 어린 여동생을 누드 모델로 썼다
그는 워낙 어린 소녀의 누드를 좋아해서 미성년자 보호법에 걸려 실형을 살기도 했을 정도다
사춘기 시절부터 누드 그리기를 좋아한 이 화가는 어린 나이에 모델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여동생 게르티의 끼가 훌륭해서 그랬는지 여동생의 누드를 많이 그렸다
단순히 벗겨 놓은 것도 아니고 기묘한 포즈를 많이 취하게 해서 근친상간을 한다는 비난을 들었고 일부 평론가들은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한다
겨우 스물 여덟의 나이로 사망한 실레는 직접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면 꽤나 예민하고 날카롭게 생겼다
그래서인지 누드화도 인물의 형태와 감정을 순식간에 잡아내는 식으로 (어찌보면 커리캐쳐처럼) 날카롭게 그렸다
오빠 앞에서 옷을 벗고 모델을 서는 여동생이라...
요즘도 오해의 소지가 많이 생길 일이다

책에 등장하는 케이스 하나하나가 너무 재밌고 흥미진진 하다
저자의 서문에 밝힌 바대로 예술의 경지를 넘어 인간 삶의 희노애락과 애환이 고스란히 드러나 더욱 감동적이고 흥미롭지 않나 싶다
그림 속의 인물들이 단순히 화가의 재능을 드러내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생생한 인물로 살아서 다가오는 느낌이다
저자의 소망대로 모델들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뤄져서 위대한 예술가와 함께 고민을 나누던 그들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게 됐으면 좋겠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5-01-1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주헌씨 프랑스 미술 여행기 밖에 못 읽었지만, 참 좋았어요. 이 책도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기획은 평범한데, 이주헌씨의 글이라면야.

marine 2005-01-14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마 전에 "프랑스 미술 여행기" 아빠에게 선물로 받았어요 읽고 리뷰 올려야겠다^^ 이 책도 읽어 보세요 참,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 도 정말 재밌답니다 하이드님의 여행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비로그인 2005-07-14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 에뷔테른을 판박이처럼 똑같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더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