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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 너무너무 재밌는 소설이다
"GO" 라는 제목 만큼이나 산뜻하고 유쾌하다
재일 한국인이 쓴 소설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우울하고 무거운 내용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같은 묵직한 주제를 산뜻하고 유쾌한 터치로 풀어 간다
문득 "호밀밭의 파수꾼" 이 생각난다
재일 교포라는 정체성 문제를 뺀다면 두 소설의 스토리 전개나 문체 등은 아주 유사한 느낌을 준다
주인공 "나" 는 조총련에 소속된 재일 한국인이다
재일 한국인은 일본 국적이 아닌 외국인으로 사는 것이므로 사회에서 차별을 받는다
이 문제는 너무 어렵고 중요한 것이라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예전에는 왜 그들이 귀화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교육을 받고 일본어로 얘기한다면 그 사회에 적응해서 사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이미 백 여년의 이민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언뜻 보면 배타적이기까지 한 재일 한국인들에게 일본인이 불친절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떤 글에서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속내를 읽었다
일본으로의 이주는 자발적이 아니라 징용 등으로 식민지 시절 끌려간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일본으로 국적을 바꾼다 해도 평등하게 대해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일본인의 기본적인 정서에는 재일 한국인이 한 단계 낮은 종족이라는 편견이 숨어 있는 것이다
마치 미국 백인들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서로 뭉치는 것만이 그나마 일본 사회에서 버티고 살아갈 힘이 된다고 했다
국적을 바꾸나 안 바꾸나 차별받는 게 마찬가지라면 민족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뭉쳐서 대항하는 게 훨씬 낫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일본에 있는 한국인은 이념적으로 나뉘어서 서로를 공격한다고 한다
분단의 역사가 빚어낸 불행일 것이다
조총련계와 민단으로 나뉘어 북한과 남한의 대리전을 일본에서 펼치는 식이다
한국에서 건너 온 1세대는 그렇다 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2세대, 3세대들은 과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은 뿌리가 한국일 뿐, 어찌 보면 일본인과 다를 게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도 단지 조상이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근거없는 차별에 시달려야 한다
이들에게 끝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게 옳은 일일까?
차별하는 일본인은 말할 것도 없이 나쁜 사람들이지만, 재일 한국인의 폐쇄성이나 집단주의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주인공 "나"는 북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꾼 후 민족 고등학교 대신, 일본 고등학교로 진학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집단 이지메에 시달린다
누구도 개인에게 전체의 대의를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대체 전체라는 힘의 논리로 차별하는 기득권 세력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이 소설에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일단 주인공 "나" 부터가 대단히 매혹적이다
권투 선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 는 주먹 힘이 세기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컴플렉스를 갖지 않는다
차별하는 놈들의 사고방식은 바꾸기 힘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놈들이 덤비면 때려 눕히면 된다
즉 그들보다 정신적으로 더 여유있고 성숙한 셈이다
"나" 의 아버지는 권투 선수 출신으로 파칭코 경품 교환소를 운영하면서 살아간다
보통 아버지 하면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늙어감에 대한 애잔함 등이 묻어나기 쉬운데, 이 소설 속의 아버지는 60이 가까운 나이에도 아들과 싸워 이길 수 있고,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으로도 혼자 마크르스와 니체를 읽어 낼 정도의 지력을 가진 강인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나" 는 아버지를 두려워 하고 언젠가는 꺽어야 할 목표로 삼는다
아들에게 넘어야 할 산으로 건재하는 한,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강력한 보호막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나" 가 아버지를 도덕적으로 존경하는 것도 아니다
"나" 는 걸핏하면 아버지를 망할 놈의 영감탱이라고 속으로 지껄인다
어찌 보면 "나" 는 옳든 그르든 무조건 연장자 우선인 유교 문화를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 의 친구로 공부 밖에 모르는 정일이가 등장한다
정일이는 일본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이유로 까닭없이 맞는 "나" 를 위해 용감하게 선생 앞에서 "나" 를 편들어 준 후 흠씬 두들겨 맞는다
그 후 둘은 친구가 됐는데, 그는 일본의 좋은 대학에 진학한 후 다시 민족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돌아와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일본 고등학교로 간다는 "나" 를 때리는 선생에게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조국을 가져 본 적이 없다고 대드는 모습을 보면서, 정일이라는 캐릭터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 밖에 모르는 이 샌님은, 실은 재일 한국인 학교의 깡패 같은 동료들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다
비록 그들과 친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일본인에게 기죽지 않고 대등하게 싸우는 걸 보면서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같은 재일 한국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북한이나 남한에 휘둘려 정작 재일 한국인의 생존에 대해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민족 학교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지만, 우리라는 울타리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정일이는 일본인에게 절대 지지 않는 "나" 를 자랑스러워 한다
이 똑똑하고 반듯한 소년은 어처구니 없게 일본 고교생이 휘두르는 잭 나이프에 경동맥을 다쳐 과출혈로 죽고 만다
일본인이 조선인 여자 후배를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겁도 없이 덤빈 것이다
단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는, 공부 밖에 몰랐던 이 소심한 소년이 자기와 실상 아무 관계도 없는 여자 후배를 돕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섰을 때, 과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너무 순진해 죽음의 위험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것일까?
좋은 대학에 진학한 후 다시 민족 학교로 돌아와 재일 한국인 학생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겠다는 그의 다짐은 가식이 아닌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가 전철 안에서 과출혈로 죽어갈 때 어떤 승객도 그를 돕지 않았다
제발 이것이 소설 속의 한 장면이길 바란다
설마 일본인이 이렇게까지 냉담하고 잔인하지는 않으리라 기대한다
"나" 는 국적이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거라고 믿는다
"나" 의 아버지 역시 나는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그저 떠도는 부초일 뿐이라는 구절을 즐겨 외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그저 나라는 개인으로 당당히 혼자 설 수 있고, 또 그 홀로서기를 이상하게 보지 않고 삶의 한 방식으로 이해해 주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문득 외국인 노동자들이 생각난다
재일 교포들의 부당한 대우를 성토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이 땅의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관대한지 돌아봐진다
한국인은 더러운 피가 흐른다고 교육받은 "나" 의 여자 친구 사쿠라이는, "나" 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연락을 끊는다
일본인의 차별을 정신 상태가 한 수 아래인 놈들의 우스운 짓거리로 치부하던 이 당당한 청년은, 사랑하는 여자의 편견과 외면에는 대항할 힘을 잃는다
그러나 사쿠라이는 자기가 받은 교육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 라는 청년의 매력을 통해 깨닫고 다시 그에게 돌아온다
한국인, 일본인, 혹은 전라도 사람, 서울 사람, 우리를 규정짓는 집단의 아우라를 벗어 던지고 그저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평가받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 본다
(고등학생인 사쿠라이의 과감한 육체 행위는 무척 놀랍다 고등학생들도 이성 친구가 생기면 꺼리낌 없이 호텔로 들어가 일을 치루는 것이 일본의 전반적인 분위기인지, 아니면 소설에서 오버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더구나 첫 섹스가 아니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경험있는 척 남자를 리드하려고 하는 여학생의 자세가 놀랍다 일본 여성들은 모텔비도 남자와 똑같이 낸다고 하던데 정말 여자가 성의 주체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