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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예상과 전혀 다른 소설이었다
영화를 먼저 본 탓일까?
난 이 소설이 "슈퍼스타 감사용" 의 원작인 줄 알았고, 영화를 먼저 본 나는 당연히 이 소설의 주인공도 감사용일 줄 알았다
그런데 왠 걸, 감사용은 무지하게 못 던지 패전 전문 투수로 딱 한 번 등장한다
이름 특이한 선수로 그저 한 번 언급될 뿐이다
오히려 영화에서 이혁재가 열연한 포수 금광옥이 주인공 친구에게 편지도 보내면서 두 세번 등장한다
대체 나는 왜 이 영화와 소설을 한 가지로 생각했을까?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프로야구 원년 꼴찌 팀 때문이었을까?
요즘은 이런 식의 가벼운 글쓰기가 유행인가 보다
은희경의 "마이너리그" 나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등을 볼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
은희경식 성장 소설 같기도 하다
무겁지 않아 빠르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아주 재밌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줄곧 농구선수 이원우를 생각했다
혹시 이원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런지?
그는 내 중학교 시절 우상이었는데, 내가 그를 좋아할 때는 이미 은퇴를 앞둔 노장 선수였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90년대 초반은 "농구대잔치" 라는 실업 농구가 한창 인기있을 무렵이었는데 기아의 독무대였다
사람들이 허재에 미치고 이충희에게 열광할 그 때, 나는 유독 현대의 노장 선수 이원우를 응원했다
당시 현대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단 한 차례도 못 이기고 기아에게 굴복했다
이충희도 나이가 많이 들어 은퇴를 앞둘 무렵이었고 기아는 일명 "허동택" 트리오와 한기범 등을 앞세워 최고의 라인업을 자랑했다
잘 나가는 팀보다 좀 떨어지는 팀을 응원하고 더구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선수를 좋아했기 때문에 농구 경기를 볼 때마다 나는 항상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맨날 우승하는 OB 대신 꼴지를 도맡는 삼미를 응원해서 기가 죽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 "나" 는 꼴지만 전전하다가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면서 성장한다
1류 팀에 소속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공부에 전념한 결과 야구에 빠져든 전적에도 불구하고 일류대에 무사히 진학한다
(죽어라 입시 경쟁에 시달려야 할 중고 시절, 야구나 음악 등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리면 여지없이 입시 경쟁에서 탈락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나" 만큼 삼미를 아끼던 조상훈과 주인공이 나란히 일류대에 들어가는 걸 보고 잘난 놈들의 잘난 이야기인가, 이런 생각을 했다
잘나가는 사람들 이야기라면 삼미 대신 OB 같은 우승팀 좋아해야 전체적인 분위기가 맞는 거 아닐까?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잘 나가는 놈들이 맨날 꼴지만 차지하는 인생의 패배자들 심정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이런 생각하는 거 보면 나도 좀 뒤틀린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소설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잘난 놈들 이야기는 주위에 하도 널려 있어 사람들이 읽으려고 안 할 것이다
일류대 나와서 예쁜 여자와 연애도 하고 과외 알바로 아버지 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대기업에 취직한 "나" 는 쭉 그렇게 평탄한 인생을 살 것 같지만, 곧 IMF로 정리해고 된다
신문이나 TV에서 정리해고 어쩌고 할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소설에서 한 개인이 겪는 불행으로 등장하자,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심각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그 외의 모든 정신적 문제들은, 신념이나 정의, 가치 등등을 다 포함해 다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해 버린다
일단 내 입으로 밥이 들어가고 안락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매달 나와야 삶의 의미나 보람 같은 것도 생각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같이 일류대에 진학했던 조상훈은 아버지가 비명횡사 한 후 급작스런 집안의 몰락으로 일본에 건너가 홈리스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다
그 사이 "나"는 IMF 한파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아내와 이혼한다
한국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달릴 것 같던 이들은 어느새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프로 세계에 사라남지 못한, 아마추어 실력에 불과한 야구팀을 좋아하는 두 사람의 인생 역경은, 어쩌면 예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제와 정신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 끔찍한 무한경쟁 체제를 비판하면서 부와 성공 대신 삶의 여유를 즐기며 사는 아마추어리즘을 지향하는 것 같은데,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생각한다
남보다 더 잘 살겠다는 이기심과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원리가 아닌가?
개인들이 치열하게 투쟁하고 사회는 냉정하게 이들을 평가하는 덕분에 결국 우리 모두는 조금씩 더 편한 삶을 누려오고 있다
복지 국가란 경쟁에서 탈락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웬만한 삶은 누릴 수 있게끔 도와 주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능력 위주의 평가가 불가피 하다면, 그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사회가 도와 주는 시스템이 잘 작동할 때 비로소 안정되고 바람직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무조건 경영 악화를 피하기 위해 직원들을 쫓아내는 현재의 기업 분위기는 문제가 많다
거리로 쫓아낸 사람들을 받아 줄 완충 지대가 전무한 가운데, 즉 모든 것은 개인의 능력에 맡겨 버리는 현재의 대한민국 체제에서, 정리해고 당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이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직원을 마음대로 자를 수 있어야 우리 경제의 체질 개선이 가능하다는 일부 경제 평론가들의 말은, 그야말로 유럽 같은 복지 국가에서나 해당되는 얘기다
성공과 부를 획득하는 것, 즉 자본주의 경쟁 체제에서 낙오되지 않고 이기는 것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겠지만, 세상은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하고 무엇이 낫다고 규정지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일류대 나와서 대기업에 다니면서 워커 홀릭처럼 일하는 것도 좋고, 우유 배달 하면서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지만 자기 하고 싶은 일에 미쳐 사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삶의 형태가 다양성이라는 원칙 아래 누구도 비난이나 간섭도 받지 않고 잘 유지되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의 주인공 "나" 는 IMF 때 정리해고 된 후 삼미 슈퍼스타즈를 좋아하던 지극히 평범하고 어찌보면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과 모여 팬클럽 창단식을 갖는다
그들의 야구 모토는 치기 어려운 공 치지 않고, 받기 어려운 공 안 받는다는 식이다
하도 프로 의식 어쩌고 하면서 자신의 전 삶을 바쳐 최고가 되라고 압박을 가하니까 역설적으로 편할대로 사는 아마추어리즘을 추종하는 것이다
(사실 대충 하는 것과 아마추어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추어란 돈을 받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즉 경제적인 부를 추구하지 않을 뿐이지 뭔가에 미쳐서 하는 건 프로나 아마추어나 다 똑같은 거 아닌가?)
마지막에 이혼한 아내와 다시 합치는 과정은 좀 작위스럽다
워커 홀릭이던 "나"는 가정을 거의 돌보지 못했고 결국 아내는 외로움에 지쳐 이혼하고 만다
그런데 "나" 가 대기업에서 쫓겨난 후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 활동을 통해 성공과 부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소박한 삶을 살게 되자 다시 그 아내와 재결합 한 것이다
이건 좀 교훈적이고 억지스런 결말이다
어차피 아내라는 캐릭터 자체가 별 의미없이 그려지긴 하지만 말이다
재치있는 글솜씨가 돋보이는 괜찮은 책이다
심사위원의 지적대로 다소 경박해 보이기도 하고 깊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가벼운 글쓰기가 바로 주제라고 하면 문제될 것도 없다
문득 이원우라는 잊혀진 농구 선수를 주제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은퇴 후 뇌종양으로 세상을 뜬 드라마틱한 죽음도 생각할 꺼리를 많이 남긴다
꼴찌를 전전하던 야구팀도 몇 십 년 후 이렇게 아름다운 책으로 되살아 나는 것을 보면, 어딘가에 나처럼 어린 시절을 이원우와 함께 보낸 팬들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