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루쉰 - 위대한 지식인의 초상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박홍규의 인물 평전을 읽다 보면 그 박학다식함과 광범위한 범위에 놀라곤 한다 그가 이번에 손댄 사람은 "아큐정전"의 루신이다 위대한 지식인의 초상이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박홍규답게 무조건적인 추종의식은 불허한다 그의 평전을 읽다 보면 주체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조건적 찬양은 체질적으로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생각이 든다 좋게 말하면 비판 정신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좀 꼬였다는 생각도 든다 하여간 그는 마이너리티 기질이 아주 다분하다


책의 모양은 아주 마음에 든다 한 손에 쥐고 읽을 수 있는 이 정도 크기가 딱 좋다 표지도 튼튼해서 쉽게 찢어질 것 같지 않다


저자가 인간 루쉰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은 재밌게 읽었는데, 그의 작품들을 광범위하게 해석한 것은 솔직히 제대로 못 읽었다 당장 제일 유명한 아큐정전조차 읽어 보지 않았으니 흥미가 날 리 없다 그런데 박홍규는 그 많은 루쉰의 저작들을 모조리 통독한 것일까? 그는 늘 기존의 학설들을 비판하기 때문에 자기 방어를 위해서는 꼼꼼하게 텍스트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박홍규의 독서 범위는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쓴 평전을 읽을 때마다 그 광범위한 독서 범위에 대해 깜짝 놀라곤 한다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 성실함과 부지런함에는 감탄을 보내고 싶다


루쉰이 비판한 것은 봉건적인 유교 문화의 악습이었다 유학은 이미 그 순기능을 잃어버린 채 민중을 억압하는 굴레로 전락했기 때문에 유학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쉰은 중국의 식인 문화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광인일기"가 바로 그 식인 문화를 고발한 작품이다 아버지가 아프면 아들의 살을 베어 먹이는 행위가 효로써 칭찬을 받고, 임금을 위해 가족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충히 효보다 먼저임을 보인다는 식의 잔인한 식인 문화를 고발한다 사실 이런 설화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자기 살을 베어 부모를 공양한다는 얘기는 전통적인 효의 대표적인 설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게 얼마나 끔찍한 얘기인가? 루쉰은 이 설화를 듣고 혹시 할아버지를 위해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 했다고 고백한다 식인 문화라고 하니까 끔찍하지만, 내용을 찬찬히 뜯어 보면 그것이 유교 문화의 모습 중 하나다


언젠가 마광수가 쓴 서편제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득음한다는 핑계로 딸 몰래 눈 멀 약을 먹여 장님으로 만든다는 스토리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얘기라는 것이다 딸의 인생을 망치는 것은 물론이고, 한이 있어야 득음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처구니 없다고 비난했다 사실 나도 그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저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아무리 딸이라지만 자기 인생을 아버지 마음대로, 그것도 평생 장님으로 살게 한다는 것이 득음을 핑계로 대지만 잔인하고 부도덕한 처사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워낙 유명한 영화이고 우리 소리의 미를 보여 준 훌륭한 영화라고 찬사 일색이라 혼자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마광수의 글을 보니까 속이 시원했다 가정 형편이 어렵다고 자식을 죽인 후 자살하는 부모들의 심리도 이와 똑같다 대체 자식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가미가제 특공대 식의 군국주의나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면 열녀비를 세워 주고 강간당하면 목숨을 끊어야 명예를 유지한다는 식의 정절 이데올로기 등도 다 같은 파시즘의 변형 같다 그렇다면 정말 유학은 21세기에 더 이상 존재 가치를 잃는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루쉰이 서구 정신을 무조건 찬양한 것도 아니다 박홍규에 따르면 그는 중국의 고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다만 그는 중국인들이 봉건적인 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주체성을 갖기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했을 따름이다 아큐정전을 보면, 주인공 아큐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만 정신수련법을 통해 자기 위안을 삼는 인물로 나온다 어떻게 보면 긍정적인 사람 같기도 한데, 루쉰은 그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웃는다 중국인들은 이민족에게 점령당했으나 정신적으로는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자부심 강한 민족이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현실을 받아 들이고 극복하려고 애쓰는 대신 자기들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해석하므로써 그 지배에 대해 저항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루쉰은 중국인들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이민족 지배자를 향해 저항할 것을 주장한다 그는 현실에서는 노예지만 상상 속에서는 그들을 지배하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을 비웃고 있다


루쉰은 민중의 저항을 촉구했지만 정작 그 민중과는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루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지식인의 눈으로 보면 민중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무리인가? 그는 평민문학이 없다고 단언한다 과연 일반 민중들이 스스로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예술을 창조할 수 있을까? 요즘은 대중 문화 시대라 매스 미디어를 통한 오락거리가 넘쳐 나지만 그것이 민중예술일 수는 없다 루쉰이 꿈꾸는 평민문학은 개인 개인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완전한 개인주의 사회, 혹은 아나키즘적인 사회가 올 때까지 요원한 문제로 남을 것이다 혁명가가 거리에서 처형당하면 민중들은 혁명가를 애도하기 위해 거리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목 잘린 시체를 구경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민중의 의식 수준이다 이래서 파퓰리즘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어떤 사가는 로마가 정치적으로 더 발전적인 형태인 공화정을 포기하고 제정으로 역행한 이유를 파퓰리즘으로 보기도 한다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란 바로 이런 어리석은 대중을 지배할 독재자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가 비록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할지라도 어쨌든 1인 독재 아닌가


어쨌든 현대 사회는 갈수록 개인의 주체성이 강조되고 국가나 사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쓴다 개인이 어떤 권력 구조로부터도 지배당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가 아나키즘이 꿈꾸는 사회가 아닐까? 그렇다면 개인주의를 꿈꾼 루쉰은 앞으로도 계속 연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반봉건성을 추구한 루쉰이지만 그 역시 시대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집안의 강요로 결혼한 후 아내를 버려둔 채 17세 연하의 여제자와 동거한다 그 역시 이 사실에 많은 부담을 가지면서도 간통죄로 아내가 고소할까 봐 두려워 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는 이념을 스스로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란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 지행합일, 혹은 남에게 관대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해지기 같은 덕목은 언제나 요원한 문제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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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4-11-30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읽다가 숨 넘어갈 뻔 했습니다. 문단 좀 나눠 주세요... ㅎㅎㅎ ㅋ

여울 2004-11-30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문득 몸에 붙어있는, 때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일상의 파시즘 잔재로 깜짝깜짝 스스로 놀랍니다. 그러려니 하지만,,, 넘 어려운 문제죠. 지식이라는 넘 자체가 다분히 이런 기질이 있죠...? 암튼 집중은 문제가 있어요??

marine 2004-12-01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블로그에 먼저 올린 후 복사해서 올리는데, 알라딘 시스템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어떨 때는 잘 나눠지는데 어떨 때는 또 이 모양으로 붙어 버리더라구요

일상의 파시즘, 이걸 극복하는 게 실은 제일 어려운 문제 같아요 왜냐면 매일매일 마주치는 것들이잖아요^^

하이드 2004-12-07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네요. 전기류, 인물 평전류 좋아하는데, 말씀하신데로, ' 아큐정전 ' 동화판 읽은 저로서도 좀 조심스럽긴 하네요. 이 참에 아큐정전도!

marine 2004-12-07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전 좋아하시면 박홍규가 쓴 책들 읽어 보세요 일단 이 사람은 위인들을 우러러 보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니까 읽기 편해요 업적에 가려진 인간적인 면, 혹은 위선 등을 파헤친다고 해야 할까? 일반적인 시각과 좀 다른 독특한 시각으로 조명하니까 참신한 면이 있어요 물론 지나친 비약도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