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 - 서머싯 몸이 뽑은 최고의 작가 10명과 그 작품들
서머셋 모옴 지음, 권정관 옮김 / 개마고원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나귀님이 소개한 책은 독특한 울림이 있다.
이 분의 블로그에서 맛깔나는 리뷰를 읽지 않았다면 거의 선택하지 않았을 책들이다.
나와 관심 분야가 다르면서도 (일단 나는 문학에 관심이 적은 편이다. 기껏해야 고전 정도에 의무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의외의 재미를 주는 흥미로운 책들을 가끔 발견하곤 한다.
전기가 그랬고, 이런 서평집 같은 게 또 그렇다.
알라딘의 서재를 운영하면서 이 분에게 가장 실제적인 도움을 받는 것 같다.

 
서머싯 몸의 소설은 읽어 보질 않아서 사실 유명한 작가, 그 이상의 감정은 없다.
의사라는 게 좀 특이하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신뢰할 만한 저자라는 점에서, 책에 대한 믿음이 갔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명성은, 확실히 명실상부한 구석이 강한 법이니까.
사실 내가 여기 소개된 책들을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썩 몰입해서 읽은 건 아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처럼, 읽은 책에 대해서는, 흥미를 가지고 눈과 글자가 함께 움직이는데, <모비 딕> 처럼 안 읽은 책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가독성이 떨어지고 자꾸 문장을 놓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주가 아니라 소설가가 主 이기 때문에, 비교적 흥미롭게 통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거장의 명성에 주눅들지 않고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진진하다.
지승호의 인터뷰집은, 일견 재밌는 것 같으면서도,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에게 지나치게 공손하고 지나치게 숭배시 하는 것 같아, 말하자면 인터뷰이보다 한참 아래에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기 보다는, 뭐랄까, 학생처럼 얌전하게 인터뷰를 받아 적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레벨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반면 서머싯 몸의 이 책은, 거장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제일 좋아하는 작가인 톨스토이 부분을 먼저 읽었는데, 상당히 비판적이라 처음에는 톨스토이가 백작이라 지배계급이나 상류층에 대한 날카로운 메스를 가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거의 신성시 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저렇게 막 깍아 내리지는 않겠지, 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왠걸, 여기 소개된 10명이 모든 작가들이 저자의 매서운 눈매를 피하지 못했다.
나는 이런 태도야 말로, 서머싯 몸 자신이 유명한 작가이고 (즉 레벨이 되고) 무엇보다 아무리 위대한 위인인들, 털끝하나 부족한 점이 없다는 식의 어린이 전기 같을 수는 없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위인전을 읽다 보면 정말 짜증나는 것이, 너무나 성인처럼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히려 위인의 위대함이 식상한 삼류 소설처럼 전형적인 것으로 변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 책은 그런 함정을 잘 피해 나간다.

 

흥미롭게 본 부분은, 동성애에 관한 부분이었다.
에밀리 브론테나 허먼 멜빌을 동성애적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추론하는 건,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음모론 같기도 하지만 퍽 재밌는 추측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는 워낙에 동성애 자체를 언급조차 하지 못하는 엄청난 범죄로 여겨졌기 때문에 본인들은 자신의 기질을 인지할 수 조차 없었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에밀리 브론테의 그 기묘한 소설 <폭풍의 언덕> 은 히드클리프나 캐서린 언쇼가 둘 다 작가의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언니인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너무나 편안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읽은 반면, <폭풍의 언덕> 은 섬뜩하고 심지어 불쾌한 기분마저 들 정도로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읽었다.
확실히 <제인 에어>는 평범한 소설의 공식을 잘 따른 반면, <폭퐁의 언덕>은 문학사의 천재적인 작품으로 꼽힐 만큼 독창적이고 개성적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10대 문학적 천재를 꼽는다면 과연 누가 들어갈까, 하는 점이다.
이 책에 소개된 10대 작가들은, 반드시 최고의 열 명만을 꼽은 것 같지는 않다.
찰스 디킨즈를 재능이 훌륭하지만, 상업적인 작가로 평한 걸 보면 말이다.
과연 진짜 위대한 10명의 천재를 꼽는다면 누가 들어갈까?
세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들어갈 것 같은데...
제인 오스틴이나 에밀리 브론테도 10위 안에 들 수 있을까?
어쩌면 정말 독창적이고 기발한 혁명적인 사람만 꼽힐지도 모른다.
제임스 조이스처럼 말이다.

 

제일 위안이 됐던 부분은, 아무리 훌륭한 명작이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할 수는 없다고 본 점이다.
전혀 흥미를 잃지 않고, 100% 몰입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빠지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위대한 고전일수록 중간에 재미가 없으면 내 독서 실력이 모자라나 보다, 낙심하기 일쑤인데 100% 완벽한 책은 없는 법이니, 어떤 부분에서는 맥락에 벗어난 일화들도 끼어 있기 마련이고 어쩔 수 없이 지루해지는 부분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위로한다.
그러므로 가끔 건너뛰는 방법도 유용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러다 보면 진짜로 문장의 맥락을 놓쳐 줄거리에 치중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여튼 건너 뛰기에 면죄부를 줬다는 점에서 정말 마음이 놓인다.
아무리 재밌는 책을 읽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가끔 하품이 나오기도 한다.
또 진짜 이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 하는 식으로 있을 법한 얘기인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 할지라도, 100% 완벽한 사건을 구성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허구성을 이해해 주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폴 오스터의 소설들을 읽을 때도 그렇다.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임이 분명하지만, 솔직히 우연의 연속이 하도 많아서 재밌게 읽다가도 어느 순간, 에이, 이건 말이 안 되지, 싶을 때가 있다.
그렇지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고 죽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작가가 창조해낸 세계에 몰입해 <공중곡예사>를 읽고 나서는, 정말 공중부양이 가능한지 인터넷을 뒤지기까지 했다.

 

확실히 서머싯 몸은, 그 자신이 소설가라서 그런지 창작적인 기법 면에서 작품들을 분석한다.
플로베르의 친구인 편집장이 고백한대로, 글을 쓰는데도 부류가 나눠지는데, 정말로 창의적인 재능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진짜 소설가인 플로베르 같은 사람과, 자기처럼 그 언저리에서 먹고 사는 주변부 인물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작가를 포기한 것도, 바로 그 창의적인 재능,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타고난 자질이 부족하다는 인식 때문이었고, 주변부 인물로는 살기 싫다는 일종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 "개나 소나" 죄다 작가가 되는 분위기라, 몸이 지적한 바대로 글쓰기야 말로 밑천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직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출판업의 부흥이 좋으면서도 가끔 짜증나는 게, 블로그 같은 개인 일기장에나 끄적거려야 할 잡문들을 어쩌면 이렇게도 뻔뻔하게 수치심 하나 없이 버젓이 한 권의 책으로 펴내나, 하는 것이다.
책에 대한 내 기준이 너무 엄격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역시 제일 좋았던 문구는, 소설은 교훈이나 기타 지식이나 이데올로기 전달에 있지 않고, 지적 쾌락에 그 목적이 있다는 부분이었다.
이야 말로 소설의 목적을 제대로 짚어내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정조가 문체반정을 주도했던 이유도, 소설은 한낱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아 교훈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소설의 진짜 목적과 기능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데올로기의 전파, 혹은 교훈이나 지식의 습득, 도덕적 교화, 이 따위는 부수적이고 우연히 얻게 되는 산물이다.
정말 중요한 목적은, 바로 지적 쾌감, 결국 재미가 아닌가 싶다.
3류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고전 역시 교양과 학식을 갖춘 지식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가장 큰 기능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지적대로 교양은 그냥저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 좀 성가시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므로, 교양인들을 즐겁게 하려면 소설 역시 그냥 재미가 아니라 지적 쾌락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수준이 높아야 한다.

 

여기 소개된 책들을 전부 읽었더라면 훨씬 재밌는 독서가 됐을텐데, 그 점이 아쉽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유익하고 즐거웠다.
조지 오웰과는 또다른 매력의 위트있는 문장이 돋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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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8-04-14 0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꽤 관심가는데요? 서머셋모옴은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모두 훌륭하게 쓸줄아는 몇 안되는 위대한 작가인것 같아요. 대부분 위대한 작가들이 한쪽(장편 아님 단편)분야에만 두각을 나타내는데 비해서 말이죠..

marine 2008-04-14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우차우님이라면, 훨씬 더 재밌게 읽으실 것 같아요.
전 여기 나온 10편 중 절반 정도 밖에 안 읽어서 좀 듬성듬성 읽게 되더라구요.
서머싯 몸의 작품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