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평전 - 박정희의 정치사상과 행동에 관한 전기적 연구
전인권 지음 / 이학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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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그는 누구인가?
정치적 측면 보다는 인간적 측면에, 더 정확히는 심리 기제 분석을 주로 한 책이다
그래서 제목도 "평전" 이다
정치 얘기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박정희 시대에 관한 책은 즐겨 읽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박정희라는 개인에 중점을 준다는 점에서 선택하게 됐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나귀님의 호의적인 리뷰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그러고 보면 내 독서의 폭은 이 분 때문에 많이 확대되는 것 같다

박정희가 "심리적 고아" 라는 식의 설명은 솔직히 별로 끌리지가 않는다
한 사람이나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설명 체계는 어쩐지 작위적, 혹은 결과론적이라는 느낌 때문에 신뢰가 잘 안 간다
박정희가 심리적 고아였다면,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적고, 부모와 반대되는 길을 가는 모든 사람이 다 고아일 것이다
한편으로 따지면, 고아 즉 부모와 결별한 사람만이 부모 세대를 뛰어넘어 업적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나처럼 부모에게 너무 밀착된 사람은 결국 부모가 원하는 길, 부모가 제시한 방향 이상으로 나가지는 못한다
이른바 모범생 컴플렉스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조갑제가 쓴 전기의 인용이 많다는 점이다
조갑제 하면 수구 꼴통 내지는 박정희 신도 같은 부정적인 생각 밖에 안 떠오르는데 그래도 다른 책에서 인용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성이나 정확성은 확보하고 전기를 썼나 보다
책에서 언급한 대로 박정희와 김대중은 정 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두 사람의 전기를 같이 읽어 보고 싶다
강준만식의 인물 비평 같은 전기는 싫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은 꽤나 성실하고 우수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전라도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자유주의적인 김대중에게 더 끌릴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박정희식의 국가주의나 전체주의, 혹은 공동체 윤리적인 게 너무 싫다
그냥 싫은 게 아니라 너무너무 싫다
1970년대에 학교를 다니지 않은 점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아마도 사회부적응자가 되었을 게 뻔 하다
그렇다고 학생운동 세력이 되지도 않았을 것 같다
학생운동 진영 역시 권위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이익보다 앞서는 사회, 좀 더 양보하자면 최소한 비슷한 무게를 지니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이 순전히 권력욕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동감하는 바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보자면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다기 보다는, 비정상적인 코스로 빠르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쪽에 섰음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서울대 나와서 정통 관료가 되는 길로는 갈 수 없으니 대안을 선택했다고 해야 하나?
아빠가 고백한 것처럼 70년대는 학생운동이 또다른 대안적 권력잡기의 길이 아니었던가?
만약 그가 진실로 공산주의자였다면 한 번의 검거로 그토록 완벽하게 변절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저자의 분석대로 형 박상희의 죽음에 따른 울분과, 형 덕분에 남로당 고위층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는 점이, 그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신분을 부여했을 것이다

박정희가 능력있는 군인이라는 점이 자주 언급된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꽤 긍정적으로 바뀌게 됐다
독재자,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 파시스트 대략 이런 게 박정희에 대한 내 이미지였는데, 상당히 객관적인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나름대로 사상도 있고 확고한 행동력과 능력을 갖춘 유능한 군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긴 남로당 사건으로 숙청될 위기에 몰린 그가, 한국전쟁 중에도 군에서 복무하고,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저자의 말마따나 뛰어난 실력이었을 것이다
과거청산을 못하고 친일파가 국가의 요직을 점령한 점은, 민족기강 면에서 보자면, 혹은 인과응보 법칙에서 보자면 통탄할 일이지만, 그나마 교육을 받고 국가경영을 할 만한 집단은 기존의 관료나 군인들 밖에 없었을 것 같다
미국이나 이승만 입장에서 친일파 관료 집단을 받아들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따지면 단지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의 검증도 없이 국가의 중요 직책을 맡는 게 온당하냐는 의문이 생긴다
결국 민주화 운동 내지는 독립 운동은, 또다른 권력획득으로 보상받는 게 아니라 시민 사회의 존경과 국가의 경제적 보상 수준에서 마무리 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육영수와의 결혼 이야기는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
대단한 부잣집 딸이었던 육영수가 가난한 군인에게 끌려, 그것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전쟁터에 결혼을 감행했다는 점은 특이할 만한 점이다
확실히 박정희에게는 사람을 끌 만한 카리스마가 있었던 것 같다
육영수는 아버지의 비서 노릇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뜻을 받들었던 것처럼, 박정희를 깍듯히 섬겼다
강요되지 않았다는 점, 이를테면 자발적이었다는 느낌 때문인지 기존의 가부장제에 대한 거부감과는 다르게, 아름답게 느껴졌다
저자에 따르면 이 부부는 완벽한 커플십을 자랑했다고 한다
육영수가 죽은 후 박정희가 심리적으로 심한 방황과 갈등을 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박근혜는 그녀의 어머니가 청와대 내의 야당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육영수는 박정희가 원하는 대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내조를 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도 그녀의 스타일로 봤을 때 남편 뜻을 크게 거스르면서 자유와 평등을 설파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상당히 전통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다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은 얼마나 부유했던지 소실을 다섯이나 거느리고, 자식이 22명이나 됐다고 한다
재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대단한 사람이 정실 부인에게서 낳은 딸을, 그것도 비서 역할을 잘 수행해 내던 신뢰하던 딸을, 재취로 줘야 했으니 꽤나 반대가 심했을 법 하다

상관에게는 철저하게 복종하고, 아랫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베푸는 식의 종적인 인간관계에 익숙한 박정희는, 반대로 동료들과의 횡적인 관계는 서툴렀다
이거야 말로 아빠의 특성을 보는 것 같다
아빠 역시 자기가 지배할 수 있는 아랫사람에게는 자애로움과 변치않는 애정을 보이고, 반대로 힘있는 윗사람은 깍듯이 모신다
그런데 정작 본인과 위치가 비슷한 동료들과의 관계는 서툴다
아빠의 경우는, 동료들보다 특별히 나은 위치에 서지 못해 인간관계 자체를 회피하는 식으로 풀었던 것에 비해, 박정희는 아빠보다는 훨씬 능력있는 시대의 인물이다 보니, 그들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했다
평전을 읽을수록 아빠가 박정희와 비슷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을 숭상하고 횡적인 관계에 약하고 반대로 종적인 관계에서는 강하고, 남을 제압하려고 하고 소탈하고 적자생존 논리에 동의하고 권위주의적인 면 등등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아빠가 학생운동을 했던 것도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했던 것처럼 정상적인 루트로 권력을 잡지 못한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빠를 사랑하고 특히 아빠와 많은 부분에서 기질적으로 일치하지만, 권위주의적이고 공동체적인 면은 매우 싫어한다
우리가 갈등을 빚는 부분은 바로 이 점이다
이를테면 나는 유교적 가치나 공동체 윤리 측면의 전체주의적인 부분을 싫어한다
꼭 결혼을 해야 하는가, 꼭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등과 같은 유교적인 도덕 부분은 우리가 늘 갈등하는 부분이다
박정희와 기질이 매우 비슷한 아빠가 정작 박정희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다가 청춘을 바친 걸 보면 아이러니 하면서도, 절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던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했던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박정희가 생존 문제에 집착했다는 점은 내 기질과 비슷하다
이 점은 아빠와 내가 다른 점이기도 하다
내가 여자인 탓도 있겠는데, 나는 기본적으로 비정치적이고 권력을 잡는 문제에 대해 매우 무관심하다
다만 나는 가난이라던가 경제적 의존 같은 문제에는 너무너무 민감하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용감하게 자유를 찾아 떠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경제적 생존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나는 돈 문제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도 될 상황이다
나 역시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내가 그토록 동경해 마지 않는 예술적인 관람자 생활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질상 절대로 그런 낭비적인 삶을 살 수 없다
경제적 생존 문제는 나를 넘어 우리 가족에게까지 확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박정희는 가족은 건너 뛰고 바로 국가나 민족에게로 확장시켰던 것 같다
저자의 지적처럼 심리적 고아이다 보니, 가족의 가난 극복은 뒷전이고 (어쩌면 형 박상희에게 일임하고) 민족의 생존 문제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나는, 심리적 고아는 절대로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치게 가족 의존적이기 때문에)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아마도 나는 죽는 날까지 우리 가족의 경제 문제에 매달릴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치하는 날은, 내 기질상 죽는 날까지 오지 않을 것 같다
명품을 사고 비싼 차를 사는 것 같은 사치가 아니라, 오페라를 보고 책을 모으는 문화적 종류의 사치까지도 말이다

저자가 일찍 타계했다는 점은 참 아쉽다
"남자의 탄생" 도 참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박정희의 딸 박근혜에 대한 분석도 시도했을 것 같다
박정희가 근대 사회에 남긴 흔적을 생각해 보면, 박근혜가 과연 정권을 잡을 수 있을지 문제도 퍽 흥미롭다
여자라는 결정적인 이유 때문에 아마도 힘들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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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현대사, 그리고 운동 (作)
    from 木筆 2007-07-10 12:30 
    전인권선생님의 타계가 아쉽지요. 저도 소식듣고 꽤나 우울했답니다. 학자적 접근 못지 않게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자료들이 너무 적은 것이 아쉬운 것 같습니다. 손살같이 지나온...
 
 
2 2011-04-18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조갑제는 흔히 박정희 찬양자로 알려져 있고 그런 면도 있지만 다른 건 몰라도 기본적 팩트왜곡은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박정희 반대자들이 이용하는 자료들조차 상당수가 조갑제가 조사하고 확인한 자료입니다(대표적으로 이혼경력이나 혈서설)
책에도 나와있듯이 찬양이나 부정이냐를 떠나서 박정희에 관해 1차적 자료를 발굴,조사,재확인은 조갑제가 대부분 다 했다고 봐도 무방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