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교양강의>를 리뷰해주세요.
사기 교양강의 - 사마천의 탁월한 통찰을 오늘의 시각으로 읽는다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1
한자오치 지음, 이인호 옮김 / 돌베개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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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원래 역사를 좋아한다. 물론 드라마도 사극(퓨전 사극은 제외)을 좋아한다. 과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늘 궁금하고, 그 시절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들 하는데, 어느 시대 어떤 인물이 어떤 방식으로 살다 갔는지 흥미가 간다.  

그래서 역사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예전에 사기열전 번역본이나, 한권으로 읽는 사기 같은 류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또 열국지나 초한지, 삼국지 등의 책도 여러번 읽어서 잘은 몰라도 대강 유명한 사람 이름 정도는 익혔지만, 한 시대, 한 인물을 제대로 바라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우리 나라 역사 이야기도 아니고 (물론 우리 역사도 대강 밖에 알지 못하지만) 남의 나라 역사 속에 나오는 인물이다 보니, 그 사람들이 실제 중국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평가되는지 중국 역사에서는 어느 정도 위치를 점유하는 인물들인지,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던 차에 그 궁금증을 어느 정도는 풀어줄 만한 책을 만나게 되었다. 한자오치라는 중국 강단 사학자가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가지고 강의를 한 내용 중 정수만을 뽑아서 책으로 편집한 것이니, 나의 구미에 딱 맞는 책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통틀어서 어쩌면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인물인 시황제, 이사, 항우, 유방, 여후, 한신, 장량, 주아부, 한문제, 한경제, 한무제에 대해 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설명하면서 사마천이 각 개개인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왜 그렇게 평가했는지, 오늘의 관점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는지 등등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시황제는 정말 폭군이고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이었을까?? 호해가 아니라, 시황제의 큰아들 부소가 2세 황제가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항우가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여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한신이 괴통의 말을 듣고 천하삼분을 했더라면,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하는 멋진 장면이 나오는 삼국지 이전에 삼국시대가 도래하진 않았을까 등등 역사책을 읽다보면 만약 이랬더라면 하는 가정을 많이 하게 된다.  이미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기에 역사책 면면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의 운명도 다 알고 있기에, 뛰어난 인재가 억울한 누명이나 한계 때문에 역사 속에 스러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또 왜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을까? 왜 그런 뻔한 함정을 피하지 못할까 하면서 아쉬워하지만, 당시 정황상 그렇게 밖에 안되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또 역사란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또 끊임없이 현재에 새로 쓰여지는 이야기라고도 한다.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되어 지는 기록이기에, 아무래도 기득권, 권력을 가진 계층의 입맛에 맞도록 끊임없이 수정되어 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마천의 [사기]가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고전으로 추앙받는 것은 그 속에 성공한 통치자만의 역사가 아니라, 실패했지만, 누구보다 뛰어나고 멋진 영웅과 호걸과 재사와 협객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한번 사마천의 사기를 다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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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청소력 - 걸레 한 장으로 인생을 바꾸는
마쓰다 미쓰히로 지음, 우지형 옮김 / 나무한그루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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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루 하루의 바쁜 생활 속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대충 대충 사는데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그 사람의 집을 보면 그 사람을 알수 있다. 더럽고 지저분한 집에서 사는 사람의 현재 인생도 더럽고 지저분하게 꼬여 있을 것이다... 청소를 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 이런 책 내용은 처음에는 좀 불편했지만,,,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처음에 책을 받아보고나서..

너무 큰 활자.. (중학생 때 이후로 거의 처음 보는 것 같다.)에 약간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좋은 책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현란한 도표나 어려운 단어를 써가면서 한줄 한줄 마음에 새겨 읽지 않으면 주제를 찾아내기 어려워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우습게 보였다...

 

어쩌면 늘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부분을 긁어주는 내용이라 더 쉽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정리정돈이 되어 있지 않은 곳은 그 자체로 엄청난 마이너스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고 환경의 영향을 쉽게 받는 우리들은 본인이 알든 모르든 그 마이너스 에너지에 의해 쉽게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는 말에 백번 공감했다...

직장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잘 정리된 방안에 들어갈 때의 행복감,, 또 그 반대로.. 어수선한 방에 들어설 때 치미는 답답함, 혹은 짜증은 누구나 경험한다..

그런 마이너스의 에너지는 계속적으로 자석처럼 나쁜 기운을 끌어들이고 점점 악순환에 빠져 들게 된다...

 

책을 읽고 나니 문득.. 내 방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그다지 소용되지 않는 여러 물품들과 오래된 옷들과 오래된 서류들과 헤어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간직하는 것과 보관하는 것과 그냥 쌓아두는 것은 다르다..

그동안 그냥 쌓아두고 있었으면서도 간직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들이 참 많다는 걸 알았다..

 

오늘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책장 위에 몇 년 전부터 놓여있던 수납함을 정리하다가 너무 반가운 편지들을 찾았다.. 벌써 십년 전에 친구와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보면서..

반가움과 그리움에 젖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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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읽다 중간에 덮어 놓은 책이 벌써 다섯 권이다. 이제 몇 십 페이지 밖에 안 남은 책들도 많은데, 마음 잡고 지금이라도 읽기 시작하면 다 읽을텐데.. 나는 또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무의미하게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괜히 커피를 타네 마네 하면서 얼쩡 거리다가 지금은 또 이렇게 알라딘을 배회하고 있다.  

이건 병이지 싶다!!  

돈에 대한 탐욕이 넘치는 사람을 수전노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돈을 웅켜 쥘 줄만 알지 쓸 줄을 모르기에 어떤 면에서는 돈의 진정한 가치를 결코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럼 나와 같이 책, 특히 새로운 책에 대한 욕심이 지나친 사람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제대로 책을 읽지도 못하고, 책에서 읽거나 느낀 바를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불가능하면서도 마구 새 책만 보면 거의 반 자동적으로 새 책에 손이 간다. 아직 미처 읽지 못한 책을 내 밀쳐 두고, (물론 그런 책들도 언젠가는 읽긴 읽는다. 다만, 생각이나 느낌이 연결되지 못하고 그 전의 내용이 어렴풋하게 떠오르거나, 도대체 무얼 읽었는지 생각 나지 않아서 앞 장을 자꾸 들쳐 보게 되어서 문제지만,) 새 책만 자꾸 만지는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런 사람을 무엇이라고 부르건 간에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짜 책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 조선 시대 김득신이란 선비가 좋아하는 책은 다 일만독 이상을 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같은 책을 일만 번 정도는 보아야 어느 정도 그 내용을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체화할 수 있을 거란 얘기일 거다.  그런 분들의 독서야 말로 진짜 독서일 것이다.  

뭐, 하긴, 인격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거나, 인간 역사를 꿰뚫어 보는 혜안과 통찰을 전해주는 고전과 우리 시대에 난무하는 온갖 지식 정보의 잡동사니나, 개개인의 감상을 다룬 책 자체를 똑같이 취급할 수야 없는 거지만, 그래도 나와 같은 독서 태도는 좀 너무 하지 싶다.  

그래서 그런 걸 고쳐보려고 여러 가지 독서에 대한 책들을 읽어 보지만, 그런 책을 읽다가도 나는 새 책이 도착하면 나도 모르게 손이 새 책으로만 간다.. 말 그대로 병이다!!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어야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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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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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어떤 책은  저자가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떤 의도를 갖고 그렇게 표현한 건지 잘 파악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반면, 또 어떤 저자의 글은 힘들이지 않아도 금새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공감이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책 자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무게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저자의 필력에 따라 책 읽기의 난이도가 좌우되곤 한다.(또 외국 작가의 경우에는 번역도 한 몫을 하지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쉽게 읽히는 작가가 반드시 훌륭하고 어렵게 읽히는 작가가 재능이 부족하다거나, 혹은 그 반대라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생각의 흔적을 쉽게 더듬을 수 있는 작가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알랭 드 보통은 내게 선호할만한 작가이다.  

그의 다른 책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으면서,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이유, 그 지극히 개인적인 선망과 취향에 대해, 마음의 수없는 흔들림과 욕구와 이기심과 집착에 대해 그럴 듯하게 설명해 놓아서.. (물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주인공처럼 쓸데 없이 너무 생각만 많으면 피곤하겠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참 재미있고 기발하다고 느꼈었다. 다 읽은 다음 책 뒷편에서 그 책을 썼을 때 저자의 나이가 20대 중반에 불과했다는 걸 알고 약간의 질투와 부러움과 수치심(그보다 거의 십여년을 넘게 더 산 내가 그의 철학적 사유에 감탄한다는 게 좀 한심스럽게 느껴졌었다)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래서 난 약간의 설렘과 기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이번에 산 책 [불안]을 읽어나갔다. 솔직히 어떤 저자에 대한 기대 때문에 책을 다시 사게 되는 건, 특히 문학과 관련된 분야의 책을 사게 되는 건 밀란 쿤데라 이후로 참 오래간만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 책을 문학작품이라고 분류하긴 좀 힘들 듯 하다.  오히려 현대인의 불안 심리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글에 가깝다.  

 인간은 누구나 높은 지위를 갈망한다. 왜 그럴까?  

사랑이란  일종의 존중이라고. 특히 한 사람이 다른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 볼 때,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더 받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우리가 높은 지위에 목을 매는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나쁜 모습을 끊임없이 인식하는 과정이다. 저자의 말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 조차도 늘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번 뒤바뀔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나 자신을 내가 어떻게 평가하고 인식하는가가 좌우되기에, 늘 타인의 반응과 평가에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럼 특히 현대인은 왜 불안한가?  

과거 사람들의 지위는 대개 타고난 신분에 의해 결정되어 졌다. 그러므로,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고귀한 대로, 또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천한 대로 각자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맞게 생활했으므로, 특별히 불안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즉, 나의 위치란 나 자신과 무관하게 출생과 더불어 주워지는 것이기에, 그것에 대해 내가 책임질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정착됨에 따라, 언제부터인가 성공 신화가 만들어 졌다. 개인의 노력과 재능 여하에 따라 누구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가 만들어 진 것이다. 과거에는 한정된 곳에서 한정된 일을 하면서 늘 보던 사람만을 접하면서 살았기에, 특별히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것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에 접어 들면서 누군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특출난 성공을 한다. 그 특출난 성공이 바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열등감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저렇게 성공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어느 사이엔가 성공과 실패의 근원이 과거처럼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 탓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사람이 갈망하는 성공과 높은 지위는 한정되어 있고, 당연히 그것은 소수의 몫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노력만 하면, 그걸 얻을 수 있다는 사탕발림이 계속되고 있고, 높은 지위에 이미 오른 사람은 오른대로, 치고 올라오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언제나 자신의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기에, 또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은 존중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걱정 때문에 불안할 수 밖에 없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현대 사회는 물질은 풍요로워 졌는지 몰라도, 내면적으로는 참 불행한 세대란 생각도 해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와 똑같이 불안하고 나와 똑같이 사랑받기를 갈망하는 내 옆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마음이 필요한데, 그렇게 마음을 활짝 열려니, 늘 거절당하거나 상처 받는 게 아직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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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팝니다 -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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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타벅스와 체게바라.. 하나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미국 문화의 상징인 반면, 또 다른 한 사람은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고 사회주의 가치의 실현을 위해 게릴라 투쟁을 벌였던 영원한 혁명가.. 정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그게 낯설지 않다..  

왜 그럴까? 일단 자주 책 표지에 등장하는 스타벅스의 컵 자체가 익숙하다. 또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도 수없이 보아 왔기에, 체 게바라가 실천하고자 했던 이상과는 상관없이 그는 젊음과 저항에 대한 하나의 심볼로서 상품화되어 버렸다.  

60-70년대 미국에 히피라고 불리던 반문화 운동을 하던 일군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모든 사회 문화 자체가 체제 유지를 위한 억압의 기제라고 보았다. 학교는 체제 순응을 위한 교육 기관이고 모든 사회 문화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마약이니까, 당연히 기존의 문화, 관습, 가치를 거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은 공감을 샀었다.  즉 문화 전체가 이데올로기 체제에 불과하므로 문화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것이 자신과 타인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란 생각이 바로 반문화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반체제 운동이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대안이나 저항이 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대척점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했다. 물론 러시아나 동구권이 지금에 와서 거의 사회주의를 폐기처분하다시피 했지만, 만약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라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사회주의라는 대안 때문에 불가피하게 자본주의는 조금씩 사회주의의 정책, 예를 들자면, 노조와의 공생 추구라던가, 소외 계층에 대한 약간의 지원, 내지는 소득 재분배의 문제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고, 자본의 억압과 착취라는 면을 조금은 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더이상 자본주의의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반문화 운동을 사회주의를 대체한 급진 정치 사상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반문화를 이끄는 주동자들은 자신들의 반란이 급진적이며, 세뇌된 유순한 노동자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위험한 도전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보면 언제부터인가 반문화는 자본주의 안에 완전히 포섭된 듯 보인다. 즉 자본주의 체제는 반문화의 상징들을 전유하고, 그 혁명적 내용을 완전히 비운 후에 상품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판매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상품을 생산하고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존재한다.애초에, 사회주의 이론에 따르면 언젠가는 과잉 생산된 물품 때문에 더이상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점이 오고 그러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고 해고된 노동자들이 늘어날수록 상품은 더 팔리지 않는 악순환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는 대공황으로 간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결코 그런 이유로는 대공황이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고자 하는 물품이 모두 똑같다면 과잉 생산된 것이 더이상 팔리지 않는 시점이 오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남과 다르고자 하는,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남들보다는 특출나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에 대한 수요와 욕망은 증가한다. 남들과 다른 물건을 소유하거나, 남과 다른 취향을 가졌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가 쿨하다는 증거다.  

바로 그 점에서 자본주의와 반문화 운동은 서로를 포섭한다. 즉, 기존의 문화, 가치의 전복을 추구하는 반문화야 운동이야 말로 늘 보편화되지 않는 새로운 상품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문화의 자양분이다. 그래서, 보편화된 나이키 운동화를 캔버스 운동화가 대체해 버리고, 우아한 발레 대신에 비보이들의 거친 몸짓이 주류 문화로 편입된다.  나만 해도 작년엔가 일금 오만원인가를 주고 비보이 공연을 보러 간적도 있었다. 즉 반문화 운동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일반 대중과의 기호와 취향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자본주의 신상품의 보고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반문화 반란이란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의안들에 쏠릴 에너지와 노력을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제도권 내에서의 점진적인 변화를 모조리 경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따라서 반문화 반란이란 결국 듣기에는 좋을 지 몰라도 결코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순 없다. 실제로 우리 삶을 개선시킨 것은 히피나 문화 반란자들의 선동적인 문화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점차적인 제도 개선을 통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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