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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팝니다 -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스타벅스와 체게바라.. 하나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미국 문화의 상징인 반면, 또 다른 한 사람은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고 사회주의 가치의 실현을 위해 게릴라 투쟁을 벌였던 영원한 혁명가.. 정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그게 낯설지 않다..
왜 그럴까? 일단 자주 책 표지에 등장하는 스타벅스의 컵 자체가 익숙하다. 또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도 수없이 보아 왔기에, 체 게바라가 실천하고자 했던 이상과는 상관없이 그는 젊음과 저항에 대한 하나의 심볼로서 상품화되어 버렸다.
60-70년대 미국에 히피라고 불리던 반문화 운동을 하던 일군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모든 사회 문화 자체가 체제 유지를 위한 억압의 기제라고 보았다. 학교는 체제 순응을 위한 교육 기관이고 모든 사회 문화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마약이니까, 당연히 기존의 문화, 관습, 가치를 거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은 공감을 샀었다. 즉 문화 전체가 이데올로기 체제에 불과하므로 문화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것이 자신과 타인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란 생각이 바로 반문화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반체제 운동이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대안이나 저항이 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대척점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했다. 물론 러시아나 동구권이 지금에 와서 거의 사회주의를 폐기처분하다시피 했지만, 만약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라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사회주의라는 대안 때문에 불가피하게 자본주의는 조금씩 사회주의의 정책, 예를 들자면, 노조와의 공생 추구라던가, 소외 계층에 대한 약간의 지원, 내지는 소득 재분배의 문제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고, 자본의 억압과 착취라는 면을 조금은 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더이상 자본주의의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반문화 운동을 사회주의를 대체한 급진 정치 사상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반문화를 이끄는 주동자들은 자신들의 반란이 급진적이며, 세뇌된 유순한 노동자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위험한 도전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보면 언제부터인가 반문화는 자본주의 안에 완전히 포섭된 듯 보인다. 즉 자본주의 체제는 반문화의 상징들을 전유하고, 그 혁명적 내용을 완전히 비운 후에 상품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판매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상품을 생산하고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존재한다.애초에, 사회주의 이론에 따르면 언젠가는 과잉 생산된 물품 때문에 더이상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점이 오고 그러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고 해고된 노동자들이 늘어날수록 상품은 더 팔리지 않는 악순환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는 대공황으로 간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결코 그런 이유로는 대공황이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고자 하는 물품이 모두 똑같다면 과잉 생산된 것이 더이상 팔리지 않는 시점이 오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남과 다르고자 하는,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남들보다는 특출나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에 대한 수요와 욕망은 증가한다. 남들과 다른 물건을 소유하거나, 남과 다른 취향을 가졌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가 쿨하다는 증거다.
바로 그 점에서 자본주의와 반문화 운동은 서로를 포섭한다. 즉, 기존의 문화, 가치의 전복을 추구하는 반문화야 운동이야 말로 늘 보편화되지 않는 새로운 상품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문화의 자양분이다. 그래서, 보편화된 나이키 운동화를 캔버스 운동화가 대체해 버리고, 우아한 발레 대신에 비보이들의 거친 몸짓이 주류 문화로 편입된다. 나만 해도 작년엔가 일금 오만원인가를 주고 비보이 공연을 보러 간적도 있었다. 즉 반문화 운동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일반 대중과의 기호와 취향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자본주의 신상품의 보고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반문화 반란이란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의안들에 쏠릴 에너지와 노력을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제도권 내에서의 점진적인 변화를 모조리 경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따라서 반문화 반란이란 결국 듣기에는 좋을 지 몰라도 결코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순 없다. 실제로 우리 삶을 개선시킨 것은 히피나 문화 반란자들의 선동적인 문화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점차적인 제도 개선을 통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