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1
이시다 이라 지음, 김성기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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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창 일본드라마에 빠져 있었을 때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를 보았다. 그 당시는 원작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 책이 출간되면서 그 드라마의 원작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워낙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기에 원작소설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쉽게 손이 가질 않았다. 드라마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작에 대한 욕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몇 권을 구입하였지만 미뤄두고 있었다. 이제 이 시리즈의 첫 권을 시작한다.

몇 년이 흘러가면서 드라마의 세부적인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씩 기억하는 내용을 짜깁기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단편들이 드라마 속에 녹아 있는 것 같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표제작이고, 그 사이에 다른 작품들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은 드라마로 표현할 수 없는 더 깊고 어두운 이야기가 나온다. 좀더 직설적이고 잔인하고 현실적인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와는 다른 재미가 있다. 

모두 네 편의 연작 단편소설이 들어있다. 표제작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마코토의 첫 활약이 펼쳐진다. 드라마에서 기본 미스터리가 되는 줄거리가 이 단편에선 중요한 소재다. 마코토를 둘러싼 환경과 I.W.G.P의 권력 지도와 그 지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삶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다양한 사건을 해결할 그의 동료들이 한 명씩 모습을 드러낸다. 드라마의 이미지가 깨어짐과 동시에 그 이미지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익사이터블 보이>는 전작에서 해결사 모습을 보여주었던 마코토가 본격적으로 해결사 역을 맡게 되는 작품이다. 묘한 힘의 균형 속에서 야쿠자 보스의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이 의뢰를 통해 그는 과거 동창들을 만나고, 자신의 능력을 한층 더 발전시킨다. 이번 소설에서 현실의 야쿠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드러난다. 그가 발을 담군 세계가 아직 그 세계는 아니지만 그 경계를 그가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오아시스의 연인>을 읽으면서 역시 드라마가 생각났다. 전작에서 새롭게 사귄 친구들과 함께 한 이란인을 보호하는 작전을 펼친다. 그 이란인을 보호해달라고 한 것은 그의 동창이자 매춘녀이자 이란인의 애인이다. 그녀가 마약하는 것을 화내고, 딜러의 마약을 불 태워 생명이 위태로워진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이 난관을 해결하고, 그를 보호할까 의문이었는데 예상외로 간단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 방법을 실행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해결사 마코토의 능력이 더욱 돋보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결말은 살짝 입가에 미소 짓게 한다.

마지막 <션샤인 거리의 내전>은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에서 그가 어떤 존재인지 가장 잘 보여준 단편이다. 새롭게 등장한 조직과 구 조직의 내전을 해결하는 그의 모습이나 첫사랑은 재미와 즐거움을 준다. 가장 많은 분량이다. 마코토의 친구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마지막 장면은 장관이다. 하지만 그 대결 속에 담긴 수많은 사연들과 아이들의 모습은 씁쓸하다. 한창 부모의 보호 아래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야 할 그들이 손에 칼을 들고 적에게 달려가는 모습은 가슴 아리고 비참한 현실이다. 

현재 이 시리즈로 번역된 것은 모두 여섯 권이다. 단숨에 읽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아껴두고 싶다. 변하는 마코토의 모습도 있을 것이고, 어느 순간 실패도 하지 않을까 하고 짐작도 해본다.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이케부쿠로로 대변되는 지역 속에 이 시대 젊은이의 삶이 잘 그려져 있다. 추리적인 재미만 따진다면 좀 약하다.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반면에 캐릭터가 주는 재미는 아주 크다.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다시 드라마를 보고 싶게 만든다. 드라마 속에서 원작이 어떻게 녹아있는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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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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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가의 첫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2008년 영국추리작가협회 이언 플레밍 스틸 대거 상을 받았다. 일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해외 부분도 1위다. 이런 화려한 수상경력 중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맨 부커 상 후보에 선정된 것이다. 분명하게 이 소설을 스릴러로 알고 있는데 후보에 올라간 것이다. 약간 의외였다. 하지만 모두 읽고 난 지금 이 선정에 고개를 끄덕인다. 한 편의 스릴러를 만들기 위해 작가가 촘촘하게 만들어낸 소련의 모습이 너무 사실적이고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1933년 우크라이나 체르보이 마을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 시기는 실제 우크라이나가 엄청난 기근에 시달리던 때다. 초근목피로 삶을 이어가고 있던 중 한 여자가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밖으로 내몬다. 너무 사랑하지만 자신의 배고픔 때문에 고양이를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선택으로 고양이를 내좇는다. 그런데 이 모습을 한 소년 파벨이 본다. 엄마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말하고 고양이를 잡으러 간다. 동생 안드레이와 함께 고양이를 잡지만 그는 다른 어른에게 잡힌다. 동생이 형이 사라진 것을 두려워하며 엄마를 찾아간다. 형은 어디에도 없다. 배고픈 또 다른 사람에게 잡힌 모양이다. 이렇게 과거 속으로 빠져 들어간 후 현실로 나온다.

1953년 현실의 소비에트 연방은 참혹하다. 독재자 스탈린의 말은 곧 하늘이고, 반항은 죽음이다. 위대한 사회주의 국가임을 서방에 알리기 위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통계가 판친다. 당연히 살인사건은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눈싸움을 하던 형제 중 동생이 사라진 후 기찻길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 아이는 주인공 레오의 부하 아들이다. 아버지는 살인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은연중에 드러난 레오의 위협에 아들의 죽음은 사고로 바뀐다. 이 사건이 묻히는 순간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스파이 협의로 감시 중이던 수의사가 도망친 것이다. 

전쟁 영웅이었던 레오가 조금 방심한 그때 벌어진 일이다. 수의사 주변을 수사하던 중 단서 하나를 발견한다. 그를 몰아내고 그의 자리를 탐내던 부하 바실리는 다른 곳을 지목한다. 엇갈린다. 레오는 확신을 가지고 수의사를 뒤쫓고, 그를 잡는다. 수의사를 숨겨준 전쟁 동료는 바실리에게 즉결 처분된다. 섬뜩한 현실이다. 다행히 두 딸은 레오의 저지로 살아남는다. 수의사는 끌려가 고문당하고 약에 취해 고객들의 이름을 말한다. 이때 레오는 그가 무죄임을 안다. 하지만 현실은 국가 권력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죄가 없지만 잘못은 있을 수 없다. 이 사건을 통해 살벌하고 공포에 떨던 스탈린 시절의 삶이 피부로 느껴진다.

이 자백 중 레오의 아내 라이사가 나온다. 위에서 이것을 조사하라고 한다. 그는 고민하다 아내의 무죄를 주장한다. 실수다. 평소 같으면 시베리아로 유배당할 것이지만 그때쯤 스탈린이 죽었다. 이 때문에 그는 다른 지역 민병대로 좌천된다.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가족의 실체가 드러난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아내가 권력의 두려움 때문에 결혼했고, 이제 그 사실에 그는 폭발한다. 이런 가족 해체 속에서 그와 아내는 숲 속에서 한 구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 시체의 모습이 부하의 아들이 죽은 모습이나 그 마을에 있었던 살인과 비슷하다. 이때 깨닫는다.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연쇄살인사건이 인정될 리가 없다. 이때부터 이 살인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그와 아내의 협력과 노력이 펼쳐진다. 

소련의 과거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유신시절이 생각난다. 안기부가 언제 구둣발로 집을 짓밟고 사람을 잡아갈 줄 몰랐다는 불안과 공포 시절 말이다. 독재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펼치는 폭력과 압제는 불안과 공포를 먹고 자라는 모양이다. 그래도 한국이 민주주의의 탈을 쓴 상태에서 살인과 고문이 자행되면서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은 반면에 철의 장막 속에선 한계조차 없다. 의심은 확정이고, 확정은 곧 죽음이다. 즉결처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일어나고, 감시의 눈길은 아버지와 아들, 형제 사이에도 없다. 조그마한 농담 한 마디로도 충분히 죽을 수 있다.

드러난 현실은 만들어진 이미지로 포장되고, 그 밑에 숨겨진 현실은 불안과 공포로 가득하다. 너무나도 분명한 연쇄살인사건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이것을 조사한다는 것은 곧 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이 말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란 의미다. 소설 후반부는 살인자를 찾으려는 레오의 노력과 독재정치가 깨어지는 틈새를 보여준다. 그리고 레오가 생각한 인민의 이미지가 조금씩 바뀌고, 멀어졌던 아내와의 관계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스릴러 같이 악당과 경찰이 만들어내는 쫓고 쫓기는 대결이 이 작품의 매력은 아니다. 공포에 짓눌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현실과 공포와 불안이 살인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력이다. 한 인물이 변해가고, 깨닫고, 인정하는 그 과정이 매력이다. 나의 과장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주인공 이름이 레오인 것이 영화 <매트릭스> 속 레오와 같이 현실을 깨닫고 싸우는 존재의 오마쥬인지도 모르겠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영화로 만들고 있다니 어떨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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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의 인연 - 최인호 에세이
최인호 지음, 백종하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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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재작년에 읽은 <산중일기>가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 때문에 이번 에세이도 눈길이 갔다. 처음 책을 받고 대충 넘겨보면서 마주한 사진들은 따스하고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거기에 좋은 종이까지 곁들여 있다. 이런 만족스런 감각들을 가지고 책을 펼친다. 목차를 가볍게 훑고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낯익은 이름들도 보인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그의 문학 반세기를 만든 추억과 인연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처음 읽으면서 속도가 빨랐다. 가벼운 이야기에 많은 사진들이 그렇게 만든다. 작가의 과거 추억을 현실로 불러온다. 각각의 이야기 분량이 모두 다르다. 그는 분량의 제약을 받지 않고, 현실로 추억과 인연을 데리고 온다. 이 추억과 인연은 단순히 과거의 재현이 아니다. 현실로 오는 과정에서 작가의 현재 깨달음과 삶이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뒤로 가면서 속도가 점점 더디다. 어느 문장을 읽다가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힌다. 조용히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모두 마흔세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 인연은 사람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사물과 풍경과 추억과 사람들로 이어져 있다. 사람 이야기가 좀 적어 아쉬운 느낌도 있다. 하지만 나무 한 그루, 난 하나, 칼국수 한 그릇, 개구리 한 마리가 이 아쉬움을 채워준다. 이것들과의 추억과 새로운 경험과 느낌이 나의 닫힌 가슴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점점 삭막해지는 나의 감성을 조용히 두드린다. 몇몇 에피소드는 웃음을 자아내고, 그 힘겨웠을 과거가 머릿속에선 부럽기만 하다. 아마 실제 겪는다면 힘들어할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많은 이야기 중에 가장 가슴 속으로 파고 든 것은 두 인연이다. 하나는 적막이란 단어를 풀어낸 것이고, 하나는 형제에 대한 것이다. 적막이란 가슴에 새소리가 쌓이는 것이란 말에 처음 고개를 갸우뚱했다. 노년에 맞이한 손자들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조금씩 새소리의 의미가 와 닿는다. 나의 삶 속에서 가장 불효가 바로 이 손자임을 생각하면 더욱 가슴 아리다. 형제란 서로 닮아가는 정신의 노력이란 문장에서 다시 한 번 더 나를 돌아본다. 그가 살아온 인생과 내가 경험한 인생이 분명히 다르고, 환경도 다른데도 말이다. ‘형제란 서로 닮은 얼굴이 아니라, 서로 닮아가려는 정신의 노력’(166쪽)에선 내가 과연 그 정도 노력을 했는지 의문이다. 나만 보고 앞으로 달려온 삶이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그가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을 이야기하지만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가족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에 대한 것이 많다. 이미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란 책까지 낸 상태인데도 할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몇몇 이야기는 낯익은 듯하다. 가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자신의 성공을 말할 때는 왠 자랑! 하면서 살짝 콧방귀도 날려본다. 부럽다. 전체적으로 두루뭉술한 표현들이 많은데 삶을 살아오면서 날카로움을 닦아온 것인지 아니면 본래 천성인지 모르겠다. 나 자신이 신을 믿지 않지만 그가 성경에서 큰 도움을 받고 깨달음을 얻은 부분에서 살짝 부럽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실천이 부럽다. 이 모든 이야기가 나로 시작하여 사물과 사람과 추억과 인연으로 나아가지만 결국 모든 것은 우리로 결국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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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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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와 두 여자. 그리고 각각 다른 시간. 사랑은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과거의 흡입력은 너무나도 강렬하다. 이 사랑을 수많은 인종들이 복잡하게 얽혀 살아가는 홍콩을 무대로 펼친다. 그 중심에 선 남자는 윌이고, 과거는 트루디, 현재는 클레어다. 하나의 시간은 1941년부터 시작하고, 다른 하나는 1952년에서 시작된다. 이 다른 시간 속에 벌어지는 사랑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그 속엔 수많은 비밀과 잔혹하고 비참한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영국인 클레어는 사랑하지 않는 마틴과 결혼을 한 후 홍콩으로 온다. 정체된 삶과 어머니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홍콩이라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니다. 주변 사람의 추천으로 그녀가 중국 부호 첸 가에 피아노 교사로 들어가면서 변화의 조짐이 시작된다. 박봉에 시달리는 남편의 급여만으로 부족하기에 시작한 일이고, 아이는 피아노를 배우려는 의지가 없다. 친구도 열정도 사랑도 없던 그녀가 우연히 윌을 만난다. 이 만남은 반복되고, 윌은 클레어에게 키스한다. 이렇게 이 둘은 섹스를 한다. 남자가 시작한 것이지만 그는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여자는 남편에게서 느끼지 못한 쾌락과 열정과 사랑을 느낀다.

현재의 윌과 클레어가 전후 홍콩의 모습과 일상을 보여준다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과 함락된 후의 모습은 트루디와의 관계 속에 드러난다. 트루디는 소위 말하는 혼혈아고, 엄청난 미모를 가졌고, 아버지는 더욱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다. 사교 모임의 여왕이자 그녀의 등장으로 모든 사람을 시선을 끌던 그녀가 윌과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은 그 어떤 격렬함도 강렬함도 보여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냥 평범하고 열정 가득한 사랑이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는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고, 그가 수용소로 들어가면서 바뀐다. 일본군의 침략과 잔혹 행위와 강간과 폭력과 살인은 식량 부족과 겹치면서 수용소 안팎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윌은 이런 상황에서 점령군이 요구하는 정보를 구해줘서 얻게 될 수용소 밖의 생활을 원하지 않고, 트루디는 이 정보로 현재의 삶을 이어가려고 한다. 

클레어가 현재 느끼는 삶은 활기차고 더 많은 사랑을 갈구한다. 그 대상인 윌은 만남과 섹스 외에는 큰 관심이 없다. 비록 그가 그녀의 순수함에 끌렸다고 하여도 과거 속 트루디의 그림자가 너무 짙다. 작가는 현재는 클레어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과거는 윌의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이것은 두 사람이 살아있고 진실한 사랑을 하는 순간인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암시한다. 그들은 과거에 붙잡힌 것이다. 이들의 엇갈린 사랑은 좌절을 느끼게 만들 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관심이 간 부분은 사랑이 아니다. 낯선 홍콩의 풍경이다. 홍콩이 일본군에게 점령된 후 발생한 참혹하고 잔인하고 비열한 일들이다. 전쟁이 발생하면 늘 생길 수 있는 상황이지만 왠지 낯설게 다가왔다. 홍콩이기 때문일까? 그리고 크라운 컬렉션이라는 유물도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 유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와 배신이 한 편의 미스터리 같기 때문이다. 화려한 상류사회가 일본 점령 후 급격하게 변하고, 전쟁이 끝난 후 더 빠르게 변하는 것에서 환경에 적응하는 사람들의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된다. 그 이면에 숨겨진 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역시 한계 속으로 몰아간 수용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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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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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특별봉사대의 아인슈타인이야.”(272쪽) 이 문장을 읽는 순간 판탈레온 판토하 대위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게 된다. 상사들의 말도 되지 않는 요구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수많은 병사들의 욕구를 충족시킨 그의 노력에 대해 이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특별봉사대는 너무나도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그럼 그 놀라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판토하 대위는 바른 생활맨이다. 중위에서 대위로 승진한 날 그의 상사는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그것은 밀림 속으로 들어간 병사들이 수많은 겁탈과 강간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마을의 촌장이나 면장들이 이것을 군 상층부에 말한 것은 당연하다. 지역 주민들과 충돌이 있으니 군의 본래 목적이 무색하다. 고민을 하다 젊은 군인들의 성욕을 해소할 부대를 창설할 계획을 세운다. 당연히 이 부대는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매춘이 불법이고, 군이 이것을 운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판토하 대위가 선택된 것은 그의 업무 성적과 바른 생활 때문이다. 그의 아내와 어머니는 승진과 더불어 좋은 곳으로 갈 것을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간 곳은 이키토스란 마을이고, 그곳에서 그들은 군인 가족임을 나타낼 수 없다. 당연히 상대적으로 시설이 좋은 군인시설도 이용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판토하는 비밀업무란 것으로 무마한다. 그리고 밤의 세계를 모르는 판토하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길 원한다. 이전에 술도 마시지 않았고, 여자도 사겨보지 못한 그가 이제 매춘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군인인 그는 위에서 내려온 일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일선 부대에 전문을 보내 필요한 성 회수와 시간 등의 자료를 수집하고, 이것을 토대로 필요한 봉사대원의 수와 회수를 추정한다. 여기에 피 끓는 젊은이들의 욕망과 거짓이 숫자로 표시된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시범적으로 운용한다. 대성공이다. 봉사대원들을 조금씩 늘리지만 군인들의 거대한 욕망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다섯 명에서 시작하여 오십 명에 이르게 되지만 부족하기만 하다. 거기에 이 놀라운 시스템을 부러워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반병과 상사 이하만 대상인 것에 불만인 상사 이상 계급과 지역 주민들이 등장한 것이다. 

특별봉사대가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프란시스코 형제는 미신과 광기와 열정에 휩싸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흉내낸 그의 모습을 성인의 모습으로 추앙하고 경배한다. 이 형제들 집단은 밀림 속에서 자라 도시로 옮겨가고, 원래의 목적을 벗어나 광기 속에 동물을 못 박든 것을 인간까지 확대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경찰이 잡으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다. 이 형제단이 이키토스와 밀림 곳곳에 자리 잡고, 은연중에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이 이야기는 큰 줄기에 붙어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판토하 대위가 조직한 수국초특(수비대와 국경 및 인근 초소를 위한 특별봉사대)은 처음 목적한 것 완전히 달성한다. 그런데 이 목적 달성 과정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긴다. 판토하 대위의 이름을 본따 판타랜드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수많은 매춘여성들이 참여하려는 곳으로 변한 것이다. 초기에 많지 않은 여성을 거느린 곳이 이제 환상을 키우고, 안정된 직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유명한 방송국 MC는 뇌물을 요구하고, 강간 등의 피해가 사라지자 이제는 옛날 문제는 잊고 매춘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거기에 이 봉사대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질투와 부러움까지 나타난다. 웃기지만 씁쓸한 전개다. 

작가는 이 과정을 기존의 소설 문법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화와 대화 속에 움직임을 넣고, 다른 이야기와 상황들이 펼쳐진다. 하나의 사건을 신문 기사로 길게 보여주고, 정보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려준다. 딱딱한 군 문서로 어떻게 판타랜드가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고, 그 운용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 처음에 읽으면서 난감하고 어리둥절했는데 이런 전개와 구성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면 바른 생활맨 판토하 대위가 업무를 달성하기 위해 집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와 그의 탈선과 완고함이 만들어내는 재미에 빠지게 된다. 

책 소개를 보고 우리의 아픈 과거인 위안부를 먼저 생각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다. 다행이다. 독특한 구성과 신랄한 풍자와 다양한 인물이 만드는 넘치는 유머와 익살은 재미있다. 그의 의도가 곳곳에서 웃음과 더불어 드러난다. 하지만 악의적으로 이 소설을 이용할 경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 점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명시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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