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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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와 두 여자. 그리고 각각 다른 시간. 사랑은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과거의 흡입력은 너무나도 강렬하다. 이 사랑을 수많은 인종들이 복잡하게 얽혀 살아가는 홍콩을 무대로 펼친다. 그 중심에 선 남자는 윌이고, 과거는 트루디, 현재는 클레어다. 하나의 시간은 1941년부터 시작하고, 다른 하나는 1952년에서 시작된다. 이 다른 시간 속에 벌어지는 사랑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그 속엔 수많은 비밀과 잔혹하고 비참한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영국인 클레어는 사랑하지 않는 마틴과 결혼을 한 후 홍콩으로 온다. 정체된 삶과 어머니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홍콩이라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니다. 주변 사람의 추천으로 그녀가 중국 부호 첸 가에 피아노 교사로 들어가면서 변화의 조짐이 시작된다. 박봉에 시달리는 남편의 급여만으로 부족하기에 시작한 일이고, 아이는 피아노를 배우려는 의지가 없다. 친구도 열정도 사랑도 없던 그녀가 우연히 윌을 만난다. 이 만남은 반복되고, 윌은 클레어에게 키스한다. 이렇게 이 둘은 섹스를 한다. 남자가 시작한 것이지만 그는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여자는 남편에게서 느끼지 못한 쾌락과 열정과 사랑을 느낀다.

현재의 윌과 클레어가 전후 홍콩의 모습과 일상을 보여준다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과 함락된 후의 모습은 트루디와의 관계 속에 드러난다. 트루디는 소위 말하는 혼혈아고, 엄청난 미모를 가졌고, 아버지는 더욱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다. 사교 모임의 여왕이자 그녀의 등장으로 모든 사람을 시선을 끌던 그녀가 윌과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은 그 어떤 격렬함도 강렬함도 보여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냥 평범하고 열정 가득한 사랑이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는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고, 그가 수용소로 들어가면서 바뀐다. 일본군의 침략과 잔혹 행위와 강간과 폭력과 살인은 식량 부족과 겹치면서 수용소 안팎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윌은 이런 상황에서 점령군이 요구하는 정보를 구해줘서 얻게 될 수용소 밖의 생활을 원하지 않고, 트루디는 이 정보로 현재의 삶을 이어가려고 한다. 

클레어가 현재 느끼는 삶은 활기차고 더 많은 사랑을 갈구한다. 그 대상인 윌은 만남과 섹스 외에는 큰 관심이 없다. 비록 그가 그녀의 순수함에 끌렸다고 하여도 과거 속 트루디의 그림자가 너무 짙다. 작가는 현재는 클레어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과거는 윌의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이것은 두 사람이 살아있고 진실한 사랑을 하는 순간인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암시한다. 그들은 과거에 붙잡힌 것이다. 이들의 엇갈린 사랑은 좌절을 느끼게 만들 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관심이 간 부분은 사랑이 아니다. 낯선 홍콩의 풍경이다. 홍콩이 일본군에게 점령된 후 발생한 참혹하고 잔인하고 비열한 일들이다. 전쟁이 발생하면 늘 생길 수 있는 상황이지만 왠지 낯설게 다가왔다. 홍콩이기 때문일까? 그리고 크라운 컬렉션이라는 유물도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 유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와 배신이 한 편의 미스터리 같기 때문이다. 화려한 상류사회가 일본 점령 후 급격하게 변하고, 전쟁이 끝난 후 더 빠르게 변하는 것에서 환경에 적응하는 사람들의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된다. 그 이면에 숨겨진 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역시 한계 속으로 몰아간 수용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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