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칼럼 매캔 지음, 박찬원 옮김 / 뿔(웅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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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수상 경력이 먼저 눈길을 끈다. 대단한 호평으로 가득한 기사들은 읽고 싶은 욕구를 솟구치게 만든다. 그러다 마주한 20세기 최고의 예술적 범죄란 문구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그 범죄가 예전에 얼핏 들은 뉴욕 무역센터 외줄타기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첫 문장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11쪽) 부터 시선을 끈다. 곡예사 필리프 프티의 감동 실화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기대된다. 하지만 소설은 이런 기대를 넘어 그 시대, 비슷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으로 이어지면서 전혀 다른 재미와 감동을 전해준다.

동생 코리건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필리프 프티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줄 알았다. 계속 읽는데 프티의 이야기가 없다. 그러면서 코리건의 삶을 설명하는 형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아일랜드에서 시작하여 뉴욕으로 이어진다. 프티는 언제 나오지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코리건의 삶 또한 흥미진진하다. 청빈과 이타주의로 가득한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이것이 성인이 된 후부터라면 더 싶게 다가올 텐데 10대 초반부터 그렇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한 그 시간은 사제가 되어 뉴욕에 와서도 변화가 없다. 그리고 그 삶의 끝에서 또 다른 인연과 이야기가 펼쳐진다.

코리건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그와 이어지는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한 노부인 클레어 아들의 죽음이 나온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상실과 아픔이 긴 추억과 회상을 거쳐 펼쳐진다. 아들 조슈아는 베트남 전쟁터에서 죽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도 아닌 카페에서 죽은 것이다. 이런 황당하고 안타까운 죽음은 또 다른 부인의 이야기에서도 나온다. 그들이 모여 죽은 아들을 회상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들이 느낀 혼란과 아픔과 죽음에 대한 부정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리고 “더 이상 거울을 들여다볼 수 없는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을 내보내 죽게 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헛됨을 한데 모으는 일이다.”(177쪽)란 말에선 전쟁의 본질과 그로 인해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을 느끼게 한다.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 나오는 도중에 무역센터에서 줄은 탄 곡예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준비과정과 실행 등이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삽입된다. 이 놀라운 곡예가 펼쳐지던 순간의 장면과 그 경이로운 장면을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 속을 스쳐지나갔거나 그 사실을 몰랐던 사람들의 시간도 같이 흘러간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스쳐지나가고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엮인다. 코리건의 차를 뒤에서 박았던 차 주인의 이야기, 코리건과 함께 탄 창녀 재니스의 엄마 창녀 틸리 이야기, 해킹을 즐기면서 경이로운 줄타기 곡예를 중계하는 아이들, 베트남 전쟁을 찬성했다가 그 전쟁으로 외동아들을 잃은 판사, 사제 코리건을 사랑에 빠트렸던 그의 애인, 베트남 전쟁으로 세 아들을 모두 잃은 흑인 노부인,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그 놀라운 줄타기 곡예와 코리건을 중심으로 연결된다. 이 관련성을 작가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처럼 풀어내지만 이들은 엮이고 꼬이고 관계를 맺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 소설은 적지 않은 분량이고, 엄청난 가독성으로 재빨리 읽히는 책도 아니다. 하지만 다양한 환경과 직업과 인종들을 솔직하고 사실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그 삶에 한발 다가가게 만든다.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바로 주변 사람들이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가 필리프 프티의 놀랍고 경이로운 줄타기를 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슬픔과 아픔과 상실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것과 동일선상에 올려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지구가 돌고 있지만 그 돌고 있는 지구 위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상실을 이겨내고, 계속 나아가는 그들이 한순간의 도전과 이벤트보다 더 위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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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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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은 대한민국의 욕망과 허영과 꿈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성공을 꿈꾸거나 성공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하지만 그곳이 이렇게 변한 것이 불과 30여년 정도에 불과하다면 조금 놀랄 일일까? 지금도 가끔 전철이나 다른 곳에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강남이 예전에 얼마나 허허벌판이거나 볼 것 없는 농지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 급속한 변화가 바로 한국의 발전과정과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지표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는 다섯 명을 통해서 한국 근현대사와 자본주의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각각 다른 위치와 입장에서 자신들의 삶을 사는데 그들이 충동하고 교차하는 곳이 바로 강남이다. 강남이란 공간에서 그들이 마주하지만 이들을 이어주는 인물은 박선녀다. 예쁜 얼굴 때문에 스무 살에 소위 잘나가는 롬 살롱 프리랜스로 활동하게 되고, 그곳에 정착하여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러다 재벌급인 김진을 만나 세컨드가 되고, 한 단계 올라선 부의 쾌락을 즐긴다. 이런 삶의 역정은 그 시대에 예쁜 여자가 가장 빨리 성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백화점의 붕괴는 이런 삶의 붕괴를 의미한다.

김진은 해방 후 친일파가 어떤 모습으로 변신하였고, 그들이 어떻게 이 시대의 주류로 생존하면서 기득권층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는 삶의 역정은 그의 전력과 맞물리면서 근,현대 정치사의 굵직한 사실들을 건드린다. 왜 해방 후 친일파가 유지되었는지. 그들이 미군정과 엮이면서 어떻게 자리를 유지했는지. 한때 친일파였다가 공산당이었던 박정희의 변절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술이 친일파들과 얼마나 닮아있는지. 해방 후 부의 축적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기보다 정경유착의 유산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정경유착이 영원하지 않고, 얼마나 허망할 수 있는지도 같이 보여준다.

복덕방을 통해 부를 축척한 심남수는 70년대 부동산 불패 현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딱지와 미등기 거래를 통해 뻥튀기처럼 부풀어 오르는 땅값 상승과 고위층에서 흘러나오는 개발 정보를 통한 투기는 왜 우리가 부동산에 목맬 수밖에 없는지 보여준다. 업자들과 복부인들이 자전 거래를 통해 가격을 올리고, 그 거래에 막차를 타는 서민들의 비애가 너무나도 빠르게 진행된다. 자신들의 수십 년 치 소득을 쏟아 부어도 결코 살 수 없는 부동산을 생각하면 이들의 행위가 얼마나 부도덕한지, 반시장적인지, 많은 사회문제를 품고 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부동산 불패 신화 맹신의 결말에 대해서도 말이다. 심남수는 박선녀와 거의 반 동거 하다시피 한 인물이다.

홍양태는 박선녀가 나이트클럽을 운영할 때 만난 깡패 두목이다. 한때 전국을 휘어잡은 조양은을 모델로 했다. 그가 어떻게 성장하고 몰락했는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보여준다. 이들의 성장은 결코 그들만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뒤에는 정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비정하고 잔인한 조폭의 세계가 낱낱이 밝혀지는데 그 속에서 만난 조폭들의 동향과 권력과의 유착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년이 결코 화려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것을 보면 그들의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동시에 적들의 급습이나 살해 위협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생기고, 불안과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박선녀와 같이 붕괴된 현장에 매몰된 임정아는 사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가난하고 힘들고 어렵지만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매몰된 현장의 생존자라는 의미에서 희망의 빛을 본 것이다. 현실과 미래엔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지만 박선녀의 호의를 거절하는 당찬 모습에선 굳센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그녀 집안의 과거를 통해 드러나는 일반 민중의 삶은 위정자들의 거짓과 위선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그녀 부모를 통해 드러나는 도시빈민의 삶은 지금도 현재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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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인공존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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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의 첫 번째 단편집이다. 사실 단편으로 이름을 알린 것을 생각하면 약간 의외의 늦은 작품집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이 이 단편집 속에 나오는 제목 <누군가를 만났어>로 출간된 작품집이었다. 이것은 세 작가의 공동 작품집이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때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다른 단편집에서 그의 재능을 다시 확인했다. 그 공동 작품집에 같이 이름을 올린 김보영이 최근 두 권의 작품집을 냈다. 이것을 생각하면 이 공동 작품집이 지닌 매력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번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이 그의 작품 중 일부임을 생각하면 김보영처럼 언젠간 모든 단편들이 출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 단편집엔 여덟 편이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크레인 크레인>은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다.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게 된 여자를 쫓아 중국에 가고, 그녀가 사는 마을에서 본 이상한 장면에 놀란다. 처음엔 이 장면을 보면서 작가가 중국을 우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뒤로 가면서 비약이 발생하고 분위기가 다르게 바뀐다. 이 작품집에 실린 단편 중 유일하게 처음으로 발표된 것이다. 다시 읽은 <누군가를 만났어>는 역시 흥미롭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른 sf소설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그가 느낀 행복이 가슴 한켠으로 파고든다.

표제작 <안녕, 인공존재!>는 난해하다. 동시에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존재성 제품이란 기발한 발상을 통해 상실과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문구가 제품 설명서를 통해 해석될 때 아직 내공이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인공존재를 태생적으로 외로운 물건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매뉴얼>은 다차원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한 아이가 핸드폰 매뉴얼을 읽는데 그것은 매뉴얼 내용과 상관없는 것들이다. 자신이 사는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다른 세계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현실이 삶의 역설을 그대로 보여준다. 

<얼굴이 커졌다>는 한 저격수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 위해 자기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버린다. 그 후 그의 얼굴에 변화가 생긴다. 얼굴이 커진 것이다. 그는 커진 얼굴의 원인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프로가 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그가 죽이려는 사람들이나 그를 죽이려는 상대 저격수도 모두 얼굴이 커졌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는 불현듯이 깨닫는다. 행복. 그가 잊고 있던 단어다. 이것을 기억한 순간 주변에 머리가 커진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가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

<엄마의 설명력>은 현재의 과학을 뒤집어놓았다. 지동설을 하나의 음모로 만들고, 묵희를 통해 드러나는 엄마의 설명은 현실과 거짓을 경계를 왔다 갔다 한다. 진실 속에 거짓이 있고, 거짓 속에 진실이 자라 잡고 있다. 이런 장면들은 혼란을 가져오지만 마지막의 멋진 반전은 즐거움을 준다. <마리오의 침대>는 한 남자의 고통스럽지만 사랑스런 잠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가 쓴 동화로 거대한 성공을 거둔 남자가 아내의 유별난 잠버릇 때문에 고생하는데 이것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재미있다. 

<변신합체 리바이어던>은 합체로봇 이야기의 외양을 가진 우리 이야기다. 두 로봇이 합체를 하면서 거대한 적을 무찌른다는 설정인데 적이 거대해짐에 따라 합체하는 로봇수가 늘어난다. 처음엔 두 대가, 다음엔 세 대, 최종적으론 52만 대가 합체한다. 합체한 로봇이 점점 거대해지고 강해진다는 설정이 재미있다는 것을 넘어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힌다. 52만 대가 합체한 리바이어던을 움직이는 것이 결국 소수고, 그 소수를 막기 위해 또 다른 소수가 싸우는 장면은 전체주의의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수에 의해 52만 명이 광기와 폭력으로 상대를 잔혹하고 처참하게 학살하는 장면은 섬뜩하고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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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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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편의 단편이 실린 책이다. 처음에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소식에 장편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읽은 청춘소설 <파랑이 진다>의 이미지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그 이미지 덕분인지 처음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호흡의 문장 때문에 조금 집중이 어려웠던 순간도 있다. 이런 이미지와 다른 문장을 조금씩 걷어내면서 읽다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의 소설을 만나게 된다. 푸름이 사라진 자리는 회색빛의 죽음과 추억이 대신 자리 잡고 있다.

네 편의 단편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다. 죽음과 추억이다. <환상의 빛>은 서른두 살이 된 여자가 회상과 현재를 통해 자살한 듯한 남편의 이유를 끝없이 묻고, 그 답을 갈구한다. 그 과정에 드러나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은 현재를 살짝 뒤흔들기도 한다. 매일 그 이유를 묻고, 감정을 소모하는 삶은 힘겹고 외롭다. 이 글을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감정은 조금씩 정리되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하는 아이와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잔잔한 일상 속에도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 같은 일이 있음을 경계하는 것은 남편의 죽음 때문이다.

<밤 벚꽃>은 아들의 죽음과 전 남편의 방문과 한 남자의 일박을 통해 잊고 있던 추억과 감정을 되살린다.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죽은 아들. 직원과 바람피운 것 때문에 아내와 이혼한 후 새로운 여자와 결혼한 남편의 현실. 그녀가 내놓은 하숙 공고를 보고 하룻밤 잘 것을 요구하는 청년. 이 세 남자는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 특히 갑자기 하룻밤 잘 수 있길 바라며 그 집 전자제품을 고치는 남자의 하룻밤 사연과 일은 아야코로 하여금 어떤 여자로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결코 밝지도 활기차지도 않은 그녀의 현실에 말이다.

<박쥐>는 우연히 만난 친구를 통해 오년 전에 죽은 친구 란도의 소식을 들으면서 시작한다. 자신이 만나는 여자와의 여행을 앞두고 이어지는 과거의 회상은 역시 란도와의 마지막 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만난 여자와 현재의 그녀가 살짝 겹쳐지는 순간이 발생한다. 그 순간 박쥐가 날아다닌다. 이 장면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면서 미래에 펼쳐질 요코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짧은 이야기 속에 만나는 십대의 삶이 현재와 다른 매력을 던져준다.

마지막 <침대차>는 그 기차 안에서 본 한 노인을 통해 초등학교 3학년으로 그를 데리고 간다. 그 앞에 그가 왜 침대차를 타게 되었는지, 그의 현재 삶이 어떤지 알려준다. 이런 작업을 한 후 마주한 그 시절 사고는 또 다른 사고로 이어지면서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월급쟁이의 삶을 간결하게 그려내면서 살아가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묻는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이 그 답을 찾기 위한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그 누군가가 한 말처럼.

얇은 분량에 빠르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호흡이 다른 문장과 죽음과 추억과 빛이 만들어내는 환상들이 그 시간을 더디게 가게 만든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문장의 리듬을 따라가고, 잔잔히 흐르는 감정을 느끼고, 그 밑으로 흐르는 또 다른 감정을 읽는다. 죽음의 추억과 기억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이것들은 현실 속에서 불안과 외로움을 느낄 때면 부쩍 더 힘을 발휘한다. 작가는 그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 감정을 똑바로 보고, 잊고 있던 것들을 되살린다. 최근에 읽은 일본 소설들과 다른 느낌과 재미를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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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메리의 아기 밀리언셀러 클럽 57
아이라 레빈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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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영화로 먼저 본 소설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대표작 중 한 편이다. 아직도 마지막 장면은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소설을 읽었는데 원작의 이미지가 잘 살아있는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인상들이 가끔 원작 소설을 읽을 때 방해가 되기도 하는데 이번 소설은 약간 예외다. 사건을 따라 이야기가 흘러가기보다 로즈메리의 심리에 더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그 심리 묘사가 영화 속 리듬과 묘하게 연결된다. 그래서인지 몰입도가 더 높다.

로즈메리와 가이 우드하우스 부부는 이사하려고 한다. 이전부터 들어가려고 했던 브램퍼드는 빈자리가 나지 않아 다른 아파트로 들어가려고 한다. 이때 브램퍼드에서 연락이 온다. 이미 다른 아파트와 계약을 한 상태다. 하지만 이전부터 살고 싶었던 집이다. 그냥 구경이라도 한 번 가자고 로즈메리가 말한다. 더 좋은 시설의 아파트를 계약했지만 그녀는 이 집에 끌린다. 거짓말로 이전 집 계약을 해지하고 브램퍼드에 들어온다. 이 선택이 이 부부의 삶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한다.

우드하우스 부부가 들어간 집은 예전에 노부인이 죽었던 집이다. 이 아파트는 예전부터 좋지 않는 소문이 있다. 로즈메리의 아버지 같은 은인 허치가 이 소식을 듣고 놀란다. 이상한 소문들과 뉴스가 그를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과거 좋지 않는 뉴스 등을 이 부부에게 알려주지만 이미 푹 빠진 이들에겐 소귀에 경 읽기와 다름없다. 배우인 가이가 조금 더 성공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다. 이런 여유와 상관없이 허치에게 들은 소문들은 로즈메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불안 속에 사귀었던 옆집 아가씨 테리가 어느 날 밤 자살을 한다. 무서움이 몸속으로 조금씩 파고들기 시작한다.

테리의 죽음 속에서 그녀를 돌보던 로만 부부를 만난다. 이 만남은 처음엔 그냥 이웃 간의 의례적인 것이었다. 옆집 할머니의 방문이 달갑지 않지만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들인다. 이 초대가 그들이 선택한 두 번째 잘못이다. 가이도 처음엔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 끝내고 다음을 기약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 가이는 로만과 친해지고 그 집과 왕래가 많아진다. 이 만남이 계속 이어진 것은 로만이 가진 인맥을 이용해 배우로서 성공하고픈 마음이 강한 가이의 욕심과 로만의 욕망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이 결합이 단단해질수록 로즈메리의 삶은 더욱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잘 생기고 능력 있는 가이를 붙잡기 위해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던 로즈메리지만 가이는 아이를 원치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취한 밤 가이가 그녀를 탐한다. 그 상황을 그녀는 꿈처럼 느끼면서 받아들인다. 그 꿈속엔 가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만 부부 외에 다른 입주자들도 같이 있다. 아주 음란하고 괴이한 장면이다.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가이의 행동을 탓하지만 부부란 관계 때문에 그냥 넘어간다. 바로 이 장면이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사건과 상황의 원인을 제공한다. 

사실 이 이전까지가 사전포석이었다면 이후 임신한 것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녀의 임신과 산부인과 의사 소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준비된 상황이다. 이 상황을 그녀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녀의 삶은 더욱 고통스럽고 불안하다. 이 불안감은 고통과 함께 점점 자란다. 이 상황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일들에서도 사건, 사고가 생긴다. 가이의 경쟁자는 눈이 멀고, 가이는 승승장구한다. 임신한 그녀를 방문한 허치는 그녀와의 만남을 약속하고 나오지 못한다. 전날 실신한 것이다. 이런 사건들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이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의심을 싹 틔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했던가! 친절한 의사와 이웃에 대해 의심을 품고, 불안이 점점 자라면서 삶은 위축된다. 허치의 죽음과 그가 남긴 책은 이런 불안을 사실로 만든다. 이런 심리 과정을 작가는 아주 뛰어나게 그려내면서 독자를 끌어들인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책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악마주의가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로즈메리는 그 사실을 하나씩 밝혀낸다. 하지만 그녀를 촘촘히 싸고 있는 환경과 감시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뒤로 가면서 그녀가 마주한 현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리고 과연 그녀의 아기는 어떤 존재일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다시금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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