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의 여왕
김윤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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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영이란 이름을 먼저 접한 것은 단편집에서다. 상당히 평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입해서 가지고 있기만 했지 읽은 적은 없다. 장르문학의 단편도 잘 챙겨 읽지 않는 나의 습관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다 우연히 나의 손에 그녀의 장편이 들어왔다. 제목만 보면 재테크를 다룬 실용서 같다. 책 소개를 보니 아니다. 정해진 예산 안에서 집을 구해주는 해결사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전세에 살고 있는 현실에서 소설이 부동산 문제를 다룬다니 얼마나 흥미로운가! 거기에 예전에 호평을 받은 작가의 작품이라니 말이다. 

조금씩 읽자는 생각을 하고 책을 펼쳤다. 다소 긴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괜히 태국의 꼬창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진짜 작가의 말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조금 이상하다. 벌써 소설이 시작한 것이다. 그녀가 그곳에 간 이유와 하나의 인연으로 한국에 다시 귀국하는 이야기는 짧고 간단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만난 노인은 독특하다. 정 사장으로 불리는 노인은 그녀에게 현재 그녀가 처한 문제점들을 해결해 줄 것을 약속하고 자신 밑에서 일할 것을 종용한다. 이렇게 묘한 만남은 시작되고, 부동산이나 경제에 무지했던 그녀는 낯선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송수빈. 이것은 그녀의 이름이다. 그녀의 남편은 미국인이다. 이 둘의 만남은 운명적이라거나 화려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와 충돌을 거친 후 마음이 통한 경우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사라졌다. 거기에다가 믿었던 사장에게 배신마저 당한다. 그녀의 딸 지니는 실어증에 빠지고, 빚잔치에 꼬창으로 도망간다. 그녀의 이력을 소개한 부분에서 출판 편집과 대필은 하나의 직업이고, 세계를 돌아다닌 것은 경험이자 생활이었다. 이런 경험과 지식이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정 사장 밑에서 일을 하였지만 특별히 일상적인 일은 하는 것은 아니다. 정 사장이 가끔 정해진 금액이나 까다로운 조건에 맞는 집을 찾아주라는 부탁을 할 뿐이다. 그런데 이 부탁이 쉬운 일이 아니다. 가난한 형제가 함께 살 아파트를 구하거나 치매 성향이 있는 노인의 과거 추억을 찾아 새집을 찾아주거나 약간의 질병이 있는 아이를 둔 부부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일 등이다. 집을 구하러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집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집이 마음에 들면 돈이 부족하고, 돈에 맞추면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의 연속이 벌어진다. 그녀의 일도 마찬가지다. 몇 가지 물건을 선택하고, 고민하고, 협의하고, 추론하는 과정은 정 사장의 말처럼 탐정과도 같다. 그녀의 이런 노력과 결과는 좋게 나타난다. 당연하다. 그녀가 집 구하는 일에 쏟은 정성과 노력을 보면 자신의 집 구하기 이상이기 때문이다. 

내 집을 구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녀와 정 사장을 통해 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부동산을 다룬다. 과거의 기록이다 보니 사실적인 부분이 드러나는 곳이 많다. 경제문제에 대한 식견은 깊은 사색과 고민을 통해 나오는 것 같고, 집에 대한 그녀의 시선은 내가 살 곳이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부분은 내가 늘 주장하던 것이라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에 정 사장과 북촌을 거닐 때는 나도 그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 동네에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내 집 마련이란 부동산으로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다루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정 사장을 통해 내 집을 마련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연과 한국 부동산 현실이 교차하면서 흥미와 재미를 유발한다. 한 번 맺은 인연을 통해 따뜻한 인간관계가 이어지고, 아파트 공화국 속에서 우리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을 주목한다. 점점 각박해지는 현실 속에서 금전적 가치만으로 살 곳을 정하고, 사는 곳으로 계급을 나누려는 현실은 너무나도 가슴 아프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20년 후에는 아파트를 무너트리는 일이 최고의 수익사업이 될 것이란 말이 결코 농담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 용기가 아니라 그녀의 삶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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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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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집 한 권을 온전하게 읽었다. 시집 몇 권이 마지막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책탑 속에 숨겨졌다. 개인적으로 시집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시집을 읽을 때면 시인이 보는 세계의 풍경과 그 사이가 나의 가슴으로 머리로 잘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고, 의미를 찾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열린 문은 늘 너무 조그만 했다. 그러니 그 힘겨움을 즐기려는 마음이 적었다. 그럼에도 읽게 되는 것은 역시 메말라가는 감성과 시인의 눈을 가지기 위해서다. 

이병률. 사실 잘 모른다. <끌림>이란 산문집을 많은 사람이 호평하길래 사놓고 묵혀둔 것이 몇 년 된다. 지금은 어디에 뒀는지도 모른다. 살짝 펼쳐들고 보았을 때 보통의 책과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줘 빨리 읽어야지 했지만 다른 책들처럼 묻혀버렸다. 그러다 손에 쥐게 된 이 시집은 낯설고 반갑다. 단숨에 읽지 않고 매일 조금씩 몇 편씩 읽었다. 시에 집중은 더 잘되었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잊었다. 읽을 때 느낀 감정들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다시 펼쳐들고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가 <내가 본 것>에서 ‘유리 조각은 내가 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기억의 집>과 <우주의 기억>을 다시 펼쳐들고 읽게 된다. 쌓이고 쌓이는 것을 동굴을 파고 파서 따뜻하게 모으는 그를 보면 내가 본 모든 것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한다. 낯선 여자와 합석 한 식탁에서 하나의 반찬만 두고 앉았을 때 그 민망함과 불안은 공감대를 살짝 형성한다. 표제작 <찬란>에서 ‘다 찬란이다’를 외치는 그를 보면서 삶의 긍정과 희망을 느낀다. 그의 이런 모습이 부럽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내 삶의 비루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사랑은 산책하듯 스미는 자’라고 할 때 가슴 속으로 조용히 찾아왔던 사랑들이 생각나고,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가는 밤은 환하고 착하게 온다고 할 때 신에게 가겠다고 까불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낮에 다리를 절고 밤에 다리를 편다’는 말에 고된 하루가 보이고, 흰 것이 슬프다고 말하고 그 우아함이 죄의 방향을 닮았다고 할 때 생일 날 있었던 일이 무얼까 상상하게 된다. 또 어느 밤 어둠 속에서 만난 두 남자의 사투는 왜일까? 추측해본다. 

가난했던 칠월은 힘겨웠고, ‘눈 감아도 보이고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것’을 ‘나는 나대로 살터 당신은 당신대로 살기를’ 바라며 <절연>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주지 못했’고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질기디질긴 두 척의 시간’이 이별로 이어져 슬픔으로 변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굴레방 다리까지 가서 그렇게 격하게 그리워했던 곳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좋은 풍경은 ’씹을수록 찬 맛이‘ 난다고 한 그 시간은 ’숨을 거둬가버리는 오후 네 시‘가 아닐까?

‘지나가는 것은 아픈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프지도 않으면서 조금 아프다고 쓰려고’하는 그를 보면 ‘시간을 되돌리려 몸을 비트는’ 것이 이해가 된다. 고가도로 위로 쏟아진 물수건의 풍경은 다시 속도에 눌린 나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봉지밥의 추억은 배고프고 가난했던 옛 기억을 되살려준다. 사진 찍겠다고 무릎을 꿇은 그가 ‘시에게 사람에게 세상의 내침에 무릎을 꿇은 적이 있던가’ 묻는 순간 나의 삶이 찬란하지 못한 것이 바로 오만과 위로 향한 욕망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시집 속에서 만난 시들은 나의 감정과 욕망과 그리움과 아픔과 사랑을 조금씩 건드리고 지나간다. 찬란했던 한때를 추억하는 지금 그 찬란이 환상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그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세계의 이미지 속에서 내가 본 것을 찾는다. 그와 내가 만나는 순간 감탄을 하고, 곁을 지나갈 때는 살짝 고개를 돌려 무심한 표정만 짓는다. 다시 시집을 꺼내어 몇 번을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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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빛 - 검은 그림자의 전설 안개 3부작 1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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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폰의 소설이란 것만으로 관심이 간다. 먼저 번역된 <바람의 그림자>를 보고 감탄했다. 극찬을 하는 흔한 광구 문구를 믿지 않았는데 이 소설은 예외였다.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읽은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그 책은 나의 추천목록에 올라갔고, 새롭게 나올 책을 기다렸다. 그러다 나온 신작 <천사의 게임>은 예상외로 평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쉽게 손이 나가지 않았다. 뭐 나중에 읽을 것이 확실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의 3부작 중 첫 번째 소설이 출간되었다. 짧은 한 권이다. 집중을 위해 빈 하루를 선택하여 읽기 시작했다.

<바람의 그림자>에서 독백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이번엔 편지다. 이레네에게 보낸 편지 속엔 과거를 떠올려주는 단어와 문장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문을 연 후 이레네 가족의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아버지가 죽은 후 빛에 쪼달리고, 생계는 막막해진다. 잘 살 때 친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등을 돌린다. 한 지인 르콩트 씨의 도움으로 조그마한 집에 살게 된다. 그러다 르콩트 씨가 아주 좋은 조건의 일을 소개한다. 크래븐무어라는 곳에서 한 장난감 발명가 집을 관리할 가정부 일이다. 독채를 내어주고 급여도 상당한 일이다. 이렇게 그들은 힘겨운 파리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새롭게 도착한 곳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좋은 곳이다. 발명가 라자루스는 친절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약속한다. 이제 그들의 고생이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도착한 조그마한 마을은 앞집 사람이 재채기를 하면 금방 소문이 날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크래븐무어에서 일하는 한나는 이레네와 비슷한 나이고 수다쟁이다. 그녀를 통해 마을 소식을 듣고, 그 마을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레나는 이스마엘이라는 한 청년을 만나고 호감을 가진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이야기는 평화롭고 로맨스로 가득한 소설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등대의 전설과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크래븐무어가 다음에 뭔가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전해준다.

이 소설에서 그림자로 불리는 존재는 초현실적이다. 이런 설정이 단순히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것으로 처음에 생각했다. 라자루스가 만드는 장난감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알 수 없지만 과거 수준을 생각하면 허점이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등대가 있는 곳에서 발견된 알마 말티스의 일기와 한나의 죽음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어두운 힘은 이제 소벨 가족에게 더욱 다가오고, 환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물리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에 대한 단서는 일기와 라자루스의 이야기 속에 담겨있다. 

세계적인 대 히트작 <바람의 그림자>를 먼저 본 탓에 전작에 비해 힘이 조금 딸린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선 비슷한 점이 곳곳에 드러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어른이 아니라 소년 소녀란 점도 비슷하다. 그들이 공포 속에서 정신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모습은 보면 볼수록 대단하다. 로맨스 소설에서 스릴러로 변하고 마지막에 판타지 같은 결말로 이어진다. 약간 당혹스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반전과 설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전체적인 이야기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다른 작품들도 출간될 예정이라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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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대한 백과사전 - 눈보라 속에 남겨진 이상한 연애노트
사라 에밀리 미아노 지음, 권경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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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눈에 대한 백과사전이다. 그런데 진짜 백과서전이 아니고 그런 형식을 가진 소설이다. 하나의 일관된 소재나 주제를 찾는다면 말할 것도 없이 눈이다. 구성은 사전처럼 알파벳 A부터 시작한다. 첫 단어는 ANGEL(천사)이다. 이 이야기 마지막에 <약속>을 보라는 글이 있는데 처음엔 그 의미를 몰랐다. 영화나 소설을 지칭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책을 읽어 나가면서 이 소설 속 다른 단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이 소설은 눈과 관련된 단어와 이야기로 진행되지만 다른 단어들과 연관성을 가진다. 물론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독자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 

눈에 대한 소설이다 보니 눈에 대한 이야기가 끝없이 나온다. 그런데 중간에 페티시즘에 대한 글이 있다. 구두와 모피에 대한 글이다. 이에 작가는 교묘하게 이 두 물건이 눈과 관련된 추위와 관계있다고 말하면서 의뭉스럽게 넘어간다.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눈을 다루지 않지만 눈과 관련된 사람과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하나가 독립된 이야기인 듯하지만 어느 순간 앞에 나온 사람이 다시 등장하여 혹시 전체적인 흐름 속에 관련성을 찾게 만들기도 한다. 

알파벳순으로 진행되지만 눈에 대한 과학적 정의, 고전에서 발췌한 이야기, 역사 이야기 등이 등장하여 하나의 큰 흐름을 이어간다. 개인적으로 그 흐름의 중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했다. 모스와 버터플라이일까? 아니면 후기처럼 다루어진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을까? 고민을 한다. 프롤로그로 돌아가 교통사고가 지닌 의미를 생각하고, 편집자 노트를 다시 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인용문, 일화, 정의, 시 등이 나에게 다가와 가슴 한 곳을 두드리는 경우도 많았다. 사전 같은 구성이지만 잘 읽히고, 재미난 부분도 가끔 만난다. 하지만 역시 나의 독법 속에서 그 재미를 온전히 누리기는 힘들다.

작가의 독창적인 구성과 상상력에 많은 점수를 주었다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연애소설이라고 하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그 느낌을 깨닫지 못한다. 작가의 실명을 교묘하게 등장시켜 사실과 허구를 교차시키는데 이 또한 낯선 구성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줄거리를 요약하려는 시도는 이미 포기한지 오래다. 단어에서 시작한 이야기나 인용이나 정의를 읽고 내가 그 순간 느낀 것을 가슴에 담아둔다. 하지만 나른하고 따스한 온기에 그 감정들은 녹아버린다. 아직 내 수준이 이 소설을 제대로 받아들이기에 무리인 모양이다. 언젠가 다시 읽게 되면 지금 놓친 부분을 찾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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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없는 나는?
기욤 뮈소 지음, 허지은 옮김 / 밝은세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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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떤 것일까? 1995년 그해 여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첫사랑이다. 보통의 첫사랑이 아닌 위대한 첫사랑이다. 하지만 남자는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고,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 남아야했다. 그 당시는 이메일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다. 국제전화와 편지로 사랑을 속삭이지만 현실의 벽은 연락의 간격을 뜸하게 만들 뿐이다. 사랑의 불안에 휩싸인 남자 마르탱이 열심히 아르바이트 등을 해서 돈을 모은다. 그 목적은 그녀 가브리엘을 뉴욕에서 만나기 위해서다. 그들을 처음 이어준 편지처럼 이번에도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비행기표를 동봉해서 말이다. 뉴욕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하지만 오지 않는다. 이렇게 이들은 헤어진다.

13년의 시간이 흐른 후 마르탱은 경찰이 되어 유명한 명화 도둑을 잡으려고 한다. 그 도둑은 아키볼드다. 수많은 명화를 훔쳤지만 한 번도 잡힌 적이 없다. 마르탱은 그의 기록을 조사하던 중 화가의 기일에 맞춰 훔친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오르세 미술관으로 침투하는 그를 발견한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그런데 그는 어떤 도움도 요청하지 않는다. 그가 고흐의 자화상을 훔쳐 달아나자 그를 뒤쫓는다. 다리 위에서 그를 체포하려고 한다. 아키볼드는 그림을 강으로 던진다. 그림이냐 도둑이냐를 선택하라는 신호다.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강으로 몸을 던지고 도둑은 유유히 사라진다. 하지만 그 그림은 진품이 아니다. 도둑에게 속은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마르탱은 OCBC(프랑스 문화재 밀거래 단속국)에서 좌천된다. 하지만 아키볼드에 대한 집념은 광기처럼 치닫는다. 그가 아키볼드를 조사하고 뒤좇는 것처럼 아키볼드 또한 그를 조사하고 파헤친다. 그가 대단한 형사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오르세 미술관 사건 전부터 그를 조사했다. 그것은 그가 바로 그의 딸 가브리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두 남자는 한 여자를 통해 이어지고, 무대는 파리에서 캘리포니아로 옮겨간다. 그리고 두 남자의 숙명적이고 치명적인 대결과 함께 사랑의 위대한 힘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이번 작품 또한 전작처럼 속도감이 대단하다. 영화 같은 장면들이 이어지고, 사랑은 두 남녀 사이에서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다. 초반에 설정을 보면 좀더 복잡한 구성이 될 것 같은데도 뒤로 가면 관계는 간단해지고 주요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에 더 집중한다. 이런 집중이 속도감을 더 높인다. 하지만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가가 깔아놓은 설정과 전개들이 왠지 과장되고 중복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전작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마르탱에 많은 중점을 두고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가브리엘의 느낌이 약하다. 사랑이 이기적인 부분이 강하다고 하지만 그녀가 요구하는 것들이 너무 이기적이고 운명적이다. 

도둑과 경찰의 대결에서 왜 13년 전 그녀가 오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으로 넘어가는 순간 사랑은 자신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하루의 기다림으로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마르탱이나 왜 다시 자신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가브리엘을 보면서 그런 느낌은 더 강해진다. 이 불화가 화해로 이어지는 것은 그 사랑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이겠지만 배신으로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설정은 너무나도 과장되고 기적적이다. 그리고 마지막 기적을 위한 설정은 너무 심하다. 13년 전 일을 위한 좋은 변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키볼드를 생각하면 너무 갑작스럽고 충동적이다. 

변함없는 속도감, 영화 같은 장면들의 연속 등 작가의 특기가 그대로 살아있다. 과거의 비밀과 경찰과 도둑의 대결 구도는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맛보게 한다. 하지만 이런 구성들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첫사랑이자 언제나 마지막 사랑 말이다. 이 사랑을 위해서 현실 문제나 장애요소는 간단하게 생략된다. 왠지 모르게 작가가 자신의 틀 속에 갇혀 비슷한 형식과 이야기를 그대로 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직 읽지 않는 초기작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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