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새벽 4시에 꿈 때문에 깼다. 긴박한 상황이었다. MT인지 수련회인지 모를 새로운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막다른 곳이었다. 곧 외부에서 치명적인 공격이 닥칠 수 있었다. 허름한 나무집의 2층 같은 곳에 나무로 된 창들이 있었다. 우리는 2층으로 뛰어올라가 모든 문들을 걸어잠갔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특히 침입이 예상되는 방향으로 노출된 창틀 3개 정도가 아예 분리되어 있어서 나무문인지 창문인지 모를 그걸 방패처럼 셋이서 하나씩 들고 막기로 했다. 대충 문틀과 비슷하게 끼워 맞춘 곳에서 저지선을 만들기로 했다. 그 순간 바로 기습을 당했고, 약속한 저지선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위급한 상황이라 여러모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서둘러 잠을 깼다.
그런데 잠을 깨는 그 짧은 순간 장면이 전환됐다. 회고 형식의 다큐같은 거였는데, 어떤 사람이 인터뷰 중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공격당한 오두막같은 것과 3D로 재현된 학살장면 같은 게 나왔다. 왜 이런 걸 보고있어. 같은 소리와 그러니까 왜 하필 이런 곳을 골랐어. 같은 소리가 함께 들렸다. 좀비물은 안 보는데. 분명 다음날 훈제오리 먹을 생각으로 자기전 내내 설렜는데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리인지.
외할머니와 엄마는 가끔, 인생에 몇 번쯤 어떤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태어나려고 할 때나(그러니까 나는 수정되지도 않았을 때부터 세트로 같이) 내가 대학 합격 발표가 나기 전 같은 어떤 큰 일이 있을 때쯤. 어릴 때는 그런 얘기를 듣고, 옛날 어른들이 하는 얘기지 하고 말았다. 그럴만도 한게 나는 인생의 대부분 시간동안 꿈을 별로 꾼 적이 없다. 베개에 머리를 대면 1초컷으로 잠들고, 쿨쿨 자면 아무 소리도 못 들었고, 꿈은 안 꿨다. 사주나 꿈같은 헛웃음이 날 것 같은 얘기들에 좀더 귀기울이게 되었을 때쯤인가. 아마 그 전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겠지만 그때는 전혀 연관지을 생각을 못했다.
많은 꿈을 꾸지 않는데, 유독 생생한 꿈들이 있다. 두 가지 타입인데 하나는 예지몽같은 꿈들. 일반적으로 운수좋다는 꿈이나 재수없다는 꿈. 얼마전 치과에 가기 직전에도 어금니 두개가 스르르 연달아 다른쪽도 스르르 빠지는 꿈을 꿨었다. 실제로는 사랑니 하나를 스르르 뽑았다. 이런 경우는 꿈내용 그대로인 시시한 예지몽이지만. 별 인상이 없는 꿈은 개꿈인데, 깨어서도 생생하면서 특징이 있는 꿈은 보통 예지몽이다. 다른 하나는 공포와 불안의 꿈이다. 쫓기고 도망치고. 깨고 나면 온 몸이 경직되있고, 호흡도 가쁜 꿈. 그런 꿈 자체를 안 꾸는 쪽이 아니라 진짜 죽임을 당할 것 같은 직전의 순간에 깨는 쪽으로 진화했다.
7, 8월같으면 쉽게 잠에 들지 못했고 깊이 자지도 못했고 그런 꿈도 꿨을 법 하다. 근데 어제밤에 대체 왜? 아 그래도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참. 쉬면서 좋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민감해지기만 하다 9월이 끝나버리면 큰일이다.
집 앞이고 머리를 자르기만 하고 올 거라서 핸드폰만 들고 미용실에 갔는데 염색까지 하게 되서 오랜만에 밀리로 책을 봤다. 책읽아웃 삼천포책방 정주행을 하다가 첫회에 이다혜 기자님 편을 듣고 <아무튼, 스릴러>를 봤다. 스릴러 에세이라니 은근한 스포 천국일 것 같아서 보기 싫었는데, 당분간 스릴러는 많이는 안 볼 것 같아서 그냥 봤다. 의외로 안 본 책 천지였는데, 은밀한 스포 천국인 건 맞았다. 그래도 이건 보긴 봐야할 것 같아서 갑자기 보게 된 애거서 크리스티. 몇번이고 볼만한 기회는 있었는데 그때마다 애거서는 포와로지. 근데 아무도는 포와로가 안 나와. 독립편이야. 라고 해서 귀찮네.. 시리즈물도 보고 독립편도 봐야되네.. 하고는 항상 미뤘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분명 좀 시시한 것 같았다. 도입부부터 확 빨려들어가는 힘도 없고, 등장인물도 많아서 소개 부분도 좀 지루하고. 예고되는 동요를 보면 하나씩 다 죽나보네 약간 뻔해보이는 명작. 게다가 인물 파악이 정확하게 안 됐는데 대화가 많아서 누가 누구 말인지 여러 번 다시 돌아가서 찾아야했다. 일단 사건이 시작되니 전개가 매우 빠른 건 좋았다. 반전(!)도 매우 좋았다! 역시는 역시. 이유가 있다. 아마 이후에 많은 작품들이 이 책에서 영향을 받아 가지를 뻗어나가고, 나는 그 세세한 가지들을 먼저 만나서겠지. 더 일찍 봤으면 좋았을걸.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로 자연스러운 겨롸인지 영국 작가들은 정신질환(편의상..)을 소재로 잘 썼던 것 같다. 분명 읽을 때는 별거 아니게 봤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읽은 스릴러여서인지 내적으로는 무척 긴장했나보다. 꿈 속에서 막다른 2층의 오두막에 갇히는 설정은 여기서 따왔다고 추정한다.
<시녀이야기>를 먼저 확인하고 보고싶어했다. 그런데 통 심상치 않은 책이어서 잠정적으로 같이 볼 책 목록에 올리고 나니 먼저 보면 김샐 것 같았다. 그래서 어차피 차례차례 보게 되겠지만 눈먼 암살자를 먼저 보게 됐다. 그런데 기똥찬 책을 같이 읽는 데에는 항상 위험이 따른다. 동시에 같이 보는 재미가 있는데.. 내가 아니면 니가 반칙으로 먼저 볼 위험.. 최전선의 3인방은 아마 이 배신과 위험이었다고 추정한다.
는 억지 억지스러워..
설마 다들 나만 빼고 먼저 보고 있는 걸까.
아니야. 이건 예지몽 타입의 꿈이 아니었어.
후일 100년 전쟁, 혹은 지노어의 전쟁이라고 알려진 전쟁이 구십구 년 째 되던 해였어. 우주의 다른 차원에 위치한 지노어 행성에는 엄청난 지력과 엄청난 잔인함을 갖춘 도마뱀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살고 있었어. 그들 자신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 외모를 보자면, 210센티미터의 키에 몸은 비늘로 덮여 있고 회색이었어. 고양이나 뱀의 눈처럼 눈에는 세로로 긴 선 모양이 나 있었어. - 8부, 눈먼 암살자 - 아어아의 복숭아 여자들, 124p
비교가 되지 않는 전력차와 잔인한 대학살의 비밀은 그냥 도마뱀 인간들 때문인 것 같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체급과 화력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회고와 액자형식은 여기서 가져온 게 틀림없어. 그래도 솔직히 인간적으로 도마뱀 인간 외계인이라니 너무하지 않나 싶은 내면의 소리까지 섬세하게 반영되었으니까.
전작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를 본 적 있다. 왠만하면 별 다섯개를 주는 내가 별 네개를 줬다. 진짜 별 네개였으면 도서관에서 이번 책을 만났을 때 안 빌렸을 거면서. 아마 필요해서 빌린 책을 다 보고 위로를 받았으면서 그런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란 걸 인정하면 안 되니까 아닌 척 별 네개를 준 것 같다. 이번 책도 슬그머니 가져왔지만 막상 빌려와서 보고있으니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네 싶다. 이번 책은 꼭 별 다섯개를 그대로 줘야지. 김형경의 심리훈습 에세이들이 좋았던 것처럼 서늘한여름밤의 책도 자신 스스로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고 있어 참 좋다.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아무래도 나는 열심히 사는 걸 좋아하는 거 같은데.
때로 넘어져도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라도 생각하고 싶은걸.
단지 괴로움을 피하며 살고 싶은 게 아니야.
괴로울지라도 원하는 걸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 - 43p
대충 시간 흘려보내기에 대체로 실패하면서 절절하게 느끼는 건 참 아무래도 나도 열심히 사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너무 열심이라 넘어지는 줄을 모르는 건 좀 문제라는 걸 이제는 안다. 열심 안에 늘 취해 살고 싶고 어떤 괴로움은 반드시 피하면서 살고 싶다.
가끔 나에게 완벽주의자 타입이라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매번 부인해왔다, 정확하게 책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한달동안은 푹 쉬기로 정했고, 그걸 정확하게 지키기 위해서 그다음 6개월과 그다음 6개월, 그리고 그다음 2년을 준비해두고서야 이 큰 일을 벌였다. 그래도 처음 설정해보고 가보는 다가올 7개월이 낯설고 확신하고 외우고 그래도 100% 확신할 수는 없어서 불안한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 이 사단이 났다고 인정해야 하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링크입니다. 실은 저는 제기준선 안에서 완벽주의자입니다. 그래서 가끔 인생이 예상대로일 때 침착하고, 대부분은 무시하면서 지내요.
그래도 이번부턴 다르게 노력하고 있어요.
안 하는 편을 택하고 있다. 열심히 하지 않기를 택하고 있고, 가만히 있기를 택하고 있다. 일찍 깨도 더 자기를 택하고 있다. 잘 하고 있다 싶지만 실은..
귀찮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 그러니까 지금 해보자를 택하고 있다. 그런 것 까지 할 시간은 없어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 시간은 충분해를 택하고 있다. 결국 잘 되고 있지 않다.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그 저항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성격이 비인간적이지 않다면, 그리고 저항을 하는 사람의 소극성이 전혀 무해하다면, 전자는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경우 자신의 판단력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명되는 것을 상상력으로 관대하게 추론하고자 애쓸 것이다. -38p
스물넷에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변호사에 빙의되서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미쳐버릴 것 같았다. 별로 두껍지 않은 책을 보는 동안 속이 너무 답답했다. 구치소까지 가서야 약간의 시원함과 찝찝함이 있었는데, 너무 답답해서 시원하고 찝찝할 겨를도 없었고 끔찍했다. 이번에는 약간 바틀비 쪽에 빙의된 것 같다.
택하지 않았는데 해고당하고, 쫓겨나고, 갇히는 바틀비. 어쩌다보니 걷고 있는 이 낯선 길과 이상한 나 자신이 완전하게 나 때문인 건 아니고, 상황 때문이 크다는 생각. 그래서 아마 유튜브 알고리즘이 엉뚱하고 정신에 해로운 걸 보여줬어, 누군가 잘못된 장소를 골랐어 같은 소리들로 나타났다고 추정한다.
원제는 시냅스적 자아. 번역자가 좀더 쉽게 지금의 제목으로 바꿔보았다고 한다. 시냅스에도 홀리고, 자아에도 홀렸는데. 치밀하지 못하게 대충 홀린 대가를 치르고 있다. 우선 뭐가 나를 나로 만드는건지를 우리 뇌가 어떻게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지로 바꾼다. 그리고 자아를 어떤 것들의 총합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그 어떤 것들과 시냅스가 닿아있는 지점을 풀어가는 중이다.
신경반응에서의 이런 변화는 조건화된 공포행동의 발달에 선행하며, 신경의 변화가 행동학습을 가져온다는 것을 시사한다. ... 방어조건화는 사람과 동물들의 일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은 신속히 일어나며(중립적인 자극과 혐오스런 자극을 한 번 결합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래 간다(경우에 따라서는 평생 간다). ...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이 시스템의 정교한 작동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조건화는 더 이상 우리 삶에서 활용될 일이 없어도 지워 버리기가 어렵고, 이따금 전혀 해롭지 않은 사물들에 대해서까지 그것을 두려워하도록 조건화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진화의 지혜는 종종 비용을 요구한다. - 5장 시간 속의 모험, 218p
예지몽 말고 공포와 불안의 꿈의 경우에는 트렌드가 있다. 어릴 때는 주로 정체모를 괴물에게 쫓길 때가 많았다. 좀더 자라서는 액션영화같은 데 주인공으로 쫓길 때가 많았다. 요즘은.. 오늘 아침 말고는 보편화할만 기억이 없다. 공포행동의 낌새가 있으면, 경험으로 미리 더 발달시켜놨던 시냅스들이 새로운 상황을 더 집중적으로 학습하게 만든다. 그래도. 어차피 대부분의 지혜는 비용을 요구한다. 내가 움켜쥔 작은 지혜들도 그랬다. 조금이라도 쓸만한 지혜는 그만한 비용을 요구했다. 반대로도 작용했던 것 같다. 큰 비용을 치렀을 때, 더 괜찮은 지혜가 더 깊숙이 심어진 것도 같다.
새삼
루틴의 힘에 감탄할 수 있어서
인정하기를 인지하기를 인정해서 감사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