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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은 아직 자고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모임 후기를 쓸지 일기를 쓸지 고민하다 일기를 먼저 쓴다. 오늘 아침 일기 쓸 시간을 만들기 위해 이번주 점심시간에 할일 목록 정리를 미리 해두었다. 할일 목록 정리를 하다 순식간에 잊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남편이 전화했었다.


 집 근처에 맛있는 초코식빵 빵집이 있다. 아주 달지 않은 편인데 반죽 부분이 어엄청 촉촉하고 초코 밀도가 적당하고 초코칩이 박혀있는 초코식빵. 초코식빵 거래처로 등록한 빵집. 오늘 아침에 먹고싶을 것 같아서 어제 저녁 배달로 시켜둘까 했는데. 치킨도 많이 시켰고 남편이 시키지 말재서 그래 내일 먹을 빵 가까운데 내일 사서 맛있게 먹자 하고 안 시켰다. 아침에 찾아보니 11시 오픈이다. 이제보니 나는 일기 쓰기 전 아침으로 먹고 싶었다. 세탁기는 돌아가고 있다.


 저번에 교촌치킨을 먹어보자고 했는데 주말은 영업을 안하는지 오픈 예정이라고 돼있었는데 어제도 영업 준비중이었다. 이상한지 남편이 쿠팡이츠에서 배민으로 가서 보더니 쿠팡이츠 연결이 안돼있네 한다. 허니콤보 한마리를 먹어보려고 했는데 최저 주문금액이 많다. 남편은 양이 많아서인지 혼자 살때 주문최저금액 때문이지 겸사겸사인지 되먹임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튼 보통 사이드메뉴를 시키는데. 치킨집 사이드메뉴가 다양해서 수상했다. 이상한거 시키는거보다 그냥 닭 반마리를 더 시키자 남으면 다음에도 닭으로 먹게. 해서 레드콤보 반마리를 같이 시켰다. 레드콤보도 궁금하긴 했는데 좀 맵다고 해서. 한방에 한집에서 궁금한 메뉴를 다 해결해서 오히려 좋아. 맛있었는데 역시 허니콤보가 더 맛있었다. 레드콤보는 양념에서 고추장 맛이 나서 좋았는데 약간 맵다더니 실로 약간 매웠다. 허니콤보는.. 먹어본 치킨 중에 진짜 이런 치킨이..?! 싶은 띠용한 맛. 바삭한 치킨을 별로 안 좋아한는데 맛있었다. 양념이 꾸덕꾸덕 발라져있는데 바삭했어.. 외국인 친구한테 첫 치킨을 사줄 때 꼭 교촌치킨을 사줘야겠다 싶은 맛이었다. 콜라도 치킨무도 필요없는 맛있는 맛이었다. 한국인들은 정말 대단해. 치킨 중에 교촌이 제일 비싸고 양도 적고 가격도 제일 먼저 올린다더니 납득이 가는 맛. 순살 먹었는데 양이 적지 않았다. 아 가격 대비 업계 평균 대비 작을수도 있겠네..?


 이번 이석증은 완전히 끝났다. 새삼스럽게. 끝난 직후라는 걸 알게 되면 세상이 한번 반짝거린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휙- 고개를 돌려 옆을 볼 수도 있고. 침대에 앉은 채로 바닥에서 핸드폰 충전기를 집을 수도 있다. 양치를 하며 양칫물도 두려움없이 뱉을 수 있고. 시야의 글씨도 선명하게 보인다. 원하는 식당까지 걸어갈 수도 있고. 숨이 차게 뛸 수도 있다. 앉아서 컴퓨터도 할 수 있고. 고개를 숙여 글씨를 쓸 수도 있고. 생각정리가 필요한 일들도 처리할 수 있다. 기적처럼. 물리적 손상없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고 주기적이라는 게 수많은 질환 중 이석증이라는 은총이 나에게 온 이유라는 걸 안다.









 ... 우리는 지금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가치 있고 바람직한 것'을 의미하는 은총에 관하여 논한 바, 은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 우리는 스스로 애써 구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것이다.-378p


 늘 시작점에서는 상실인가 죽음의 5단계 그대로. 

부정. 이게 진짜일 리 없어. 지금은 안돼.

분노. 이게 왜??? 또 지금??? 왜??????? 

타협. 어쩔 수 없어. 전면 파업이다. 2주간 모든 걸 취소한다. 취소취소.

우울. 힝.. 또 암것도 못해.. 힘도 없어.. 

수용. 수그리자.. 마음을 편하게 갖자.. 쉬면 괜찮아져. 회복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아직도 늘. 수용할 때쯤이 되면 이석증도 사그라든다. 기다렸다는 듯. 그리고 그 끝에서 반짝이는 세상을 마주하고 해가 멀쩡하게 다시 뜨는 걸 보면 참 삶이 새삼스럽다. 다시 읽고 싶은 책도 많아지고, 공부하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점심시간에는 원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개인적인 일을 하지 않는데. 섞이기 때문에. 이번주는 특별한 경우라서 그동안 미뤄둔 할 일 목록을 다이어리에 쭉 써서 정리했다. 거의 1년만에 다이어리를 꺼내 썼기 때문에. 소회가 있었지만 그럴 시간까진 없어서. 아무튼 못하고 있어서 같은 게 머리속에서 반복해서 맴돌면서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당장 머리에서 꺼내 적은 건 50가지 였는데 그 중 중요한 일은 17가지, 중요하고 급한 일은 4가지 뿐이었다. 


 이번 주말은 중요하고 급한 일들부터 하나씩 처리하고. 사랑하는 남편과 손잡고 초코식빵 빵집까지 산책을 다녀오고. 둘이서 보는 첫 단풍도 보러가고. 미뤄둔 청소, 빨래, 이사짐정리, 분리배출을 해서 집을 단정하게 하고. 같이 얘기하면서 생각 정리도 하고. 일기 먼저 쓰고 시간이 남으면 보고 싶은 책도 좀 읽을 수 있는. 달디단 신혼의 꿈같은 주말이다. 오늘의 카드는 더 썬. 



 남편은 아직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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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은 자고 있다. 


 고요한 시간에 읽을 것인지 쓸 것인지 고민하는 건 결혼해서도 같은 점. 일기를 쓰고 싶었던 지 7번째만에 쓰는데 늘 '남편은 자고 있다'로 시작해서 중간에 남편이 깨면 흐름이 끊길까봐 쓰기 시작하기 싫었다. 이사하고 40일째가 되는 오늘은 남편은 중간에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어제 맛있는 빵집(재오픈함)에서 사온 맛있는 빵을 먹으면서 일기를 써볼까 했는데 맛이 없다. 재오픈하면서 빵이 맛이 없어진건지 아닌데 어제 사오면서 조금 뜯어서 먹었는데 맛있었는데. 싶어서 일단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감동란 하나를 빼서 먹는데 빵이 아니라 내 혀가 문제였다. 계란 맛이 제대로 나지 않고 맵고 까끄럽다. 어제 오아시스에서 받아둔 샌드위치 반절을 뜯어서 먹고 빨래를 돌려놓고 다시 컴퓨터로 온다. 세탁기나 식기세척기를 돌려놓고 뭔가를 할 때 만족스럽다. 어제 이사하고 처음으로 세탁기, 식세기를 돌려놓고 설거지를 하면서 내가 자동기계를 돌려놓고 동시에 뭔가 할 때 굉장히 흐뭇해하고 단정한 행복을 느낀다는 걸 깨달았다. 


 귤을 까먹는데 귤도 맵고 까끄럽다. 어제 처음으로 집에서 같이 고기를 구워먹었는데 파절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다. 파채를 물에 담궜다가 써야 했는데. 씻어서 그냥 바로 양념을 했더니 매워서 . 남편은 조금씩만 먹어서 괜찮았는데 나는 쌈을 쌀 때마다 듬뿍듬뿍 넣어 먹기 때문에 나만. 파절이 양념을 네이버에 검색해서 하는데 간장을 넣은 게 티가 안 나서 세번에 걸쳐 레시피의 3배 용량을 넣었다. 남편은 좀 싱겁게 먹는 편이라 파절이를 눈꼽만큼 넣어 쌈을 쌌다. 

고기파티 준비해줘서 고마워 

그럼 이제 한달에 한번씩 집에서 고기파티 할까? 

한달에 한번만? 

그럼 몇번 먹을까? 

그때그때 내킬때 먹자 

집앞에 마트는 고기 상태가 별로같았어 인터넷에 미리 시켜야되는데?

인터넷에 시킬때가 내키는 때지~


 올해 3번째 이석증에서 회복중이다. 최근 들어 드물게 강도 8이었고 회복 속도는 빠른 편. 덕분에 일주일만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도 쓸 수 있다. 결혼과 이사로 신경 쓸 것도 많았지만 그 이전부터 쌓인 피로와 해소할 시간을 갖지 않은 것에 화룡점정으로 직장에서 두명이나 동시에 바뀌면서 긴장한 탓이다. 남편을 만나고 세번째인데 남편 덕분에 회복이 빠르다고 느낀다. 의지가 되어서 혼자일 때보다 위로와 안정을 받아서라고 생각하고 있다. 용케 만나고 6개월동안 이석증이 없었는데 아마 중간에 왔다면 관계에 집중하지 못했을 거고 그럼 아마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다. 


 책상위 독서대에는 이번주 모임책 그래도 가야 할 길 구판이 올려져 있다. 인증샷이 올라왔던 것처럼 30쪽을 지나고 있는데 단전에서부터 만족감이 올라오는 책이다. 상품 등록을 하다보니 또 헷갈렸는데 다시 가야 할 길. 그래도 가야 할 길. 진짜 제목은 아직도 가야 할 길. 아직도 헷갈린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전체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 영적으로 정신적인 성장은 오직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20p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석증이 오면 2주간은 직장만 다녀오고 모든 시계를 멈춰놓는데. 오늘은 하나씩 직면하는 날이다. 


 남편은 아직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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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건강. 건강 목표는 당연히 이석증 관리로 시작한다. 연 4회 이하로 조절하기. 주2회 근력운동. 10km 연속 달리기. 한 달에 하루 나들이 다녀오기지. 완전한 실패다. 지금에서야 깨닫지만 비중 순서부터 잘못됐다. 나 정도 상황이면 건강을 첫 번째 우선순위로 올려야 한다. 


 올해는 드디어 연간 이석증이 온 횟수가 10번을 넘어섰다. 제일 큰 문제는 최근 5년간 이석증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점점 많아질수록 몸이 저항하는 건 사실 당연하다. 하드웨어는 한정돼 있는데 소프트웨어를 자꾸자꾸 욱여넣으려고 도파민 버프써서 밀어붙이니까. 최근에 든 생각인데 이게 카페인이나 도파민이나 생명을 꺼내쓰는게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는 그냥 디카페인 커피라도 먹고 싶어서 하는 아무 말. 이석증이 올 때마다 상실의 5단계를 반복한다. 부정하고, 화내고, 타협하고, 우울해하고, 다 포기하고 수용으로 마무리. 수용까지 빨리 밟아야 빨리 상황이 종료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해지는 거랑 능숙해지는 건 다른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된다. 아직도 늘 상황 시작 타임이면 화가 난다. 갈 길이 구만리인데 또 그런다고?!!!!!!!!!!!!!!!!!!!!!!!!!!!!!!!!! 타자를 치면서도 불길이 치솟는다. 속에서 열불이 나도 부질없다. 모든 일정을 다 취소하고 2주는 쉬어야 한다. 그러니까 올해는 20주는 송장 상태로 살아야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얘기. 그러니까 한 해의 60%만 정상 시간으로 쓸 수 있었다는 얘기고. 그래서 다음해에는 새로운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20%는 미리 놀면서 균질하게 가져가보기로. 그리고 휴식기에는 글자도 못 보고 아무 생각도 하기 싫고 다 꼴보기 싫으니까 명상 레벨만 올릴거야.


 사실은 알고 있다. 욕심이 문제야.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너무 많이 바라고 조급하게 굴어서.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편안한 방식으로 계속 살아가려고 하는 게 문제고. 이제 다른 방식에 적응해서 하고 싶은 걸 조금씩 오래오래 계속 하는 작전으로 가야 되는 거고. 용기를 내서 유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더 멋있는 건지는 알겠는데. 이제 인지는 되는데 아직은 썽이 난다. 나아질 거야. 인지하고 방향성을 입력하면 반복하다보면 출력할 수 있게 될거야. 


 이석증 조절을 못 하면 모든 계획이 다 쓰잘데기없다. 상태가 안좋으면 크런치만 해도 걷기만 해도 부스스 이석이 빠진다. 앉아있거나 서있을 수 있다. 근력이고 달리기고 산책이고 아무것도 못한다. 아까운 근육들이 일년새 다 사라지고 생존근육만 남았을 것.. 


 22년부터 적용해봤던 한달에 하루 나들이 다녀오기는 효과가 좋았는데. 1분기부터 쭉 살인적으로 일이 바쁜 통에 주말에 집 밖으로 나가질 못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갈 수 있는 시기가 되면 몰아서라도 총 회수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걸 더 다 제쳐두고 균질하게 배치하려고 해야 한다. 올해는 총 11번 다녀왔는데 4월 3회. 8월 2회. 10월 1회. 11월 3회. 12월 2회. 정확하게 직장 인력 공백기랑 반비례. 대자연 안에서 휴식하는 게 좋은데. 대도시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주로 공연이나 전시에 치중해서 보완할 부분. 공연전시가 8회로 비중이 높았다. 환기가 되고 새로운 영감도 얻고 욕구도 다시 차오르고 좋긴 한데. 이사하기 전에는 어딜가든 초록초록했는데. 왜 대도시 사람들이 자연자연한 데 환장하는지 공감이 간다. 작심하고 비상시 갈 수 있는 자연지역 목록을 미리 만들어야 한다. 필요할 때 찾으면 늦다. 찾아볼 힘이 없다. 


 계획에 없었던 식단 변경도 있었다. 22년 8월 3년 정도 유지했던 키토식을 포기하고 단백질 위주 건강식으로 전환했는데. 연초에 복직하면서 일이 감당이 안 되면서 다시 아침에 방탄호지를 추가했었다. 그래도 터무니없어서 버터량을 점차 50g까지 늘렸는데. 여름에 복합적으로 문제가 터지면서 결국 지방 비율을 확 낮췄다. 지금은 일반적인 한식에 단백질을 좀더 챙겨먹는 정도. 덕분에 식단에 쓰는 시간과 에너지를 확 아낄 수 있게 됐다. 일주일에 2번 반찬을 배달받아서 먹고 조리는 월 2~4회 정도만 하는 걸로 바꿨다. 기본적으로 집에서 쓰는 원재료 등급은 유지하고 있지만, 사먹는 비율이 올라가면서 실제 섭취하는 총 원재료 등급은 포기.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어쨌거나 식단을 바꾸고 몸 상태가 더 안정이 되는 방향으로 가는 듯한 느낌. 전투에서 한번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전쟁이 중요한 거지.


 건강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5점 이상 매길 수 없다.


 드디어 마지막 관계 부분. 목표는 부모님과 연 4회 보는 것. 책모임을 이어가는 것 정도. 끝에서 끝으로 이사를 하면서 스스로 정했던 목표. 처음부터 내가 분기마다 내려가는 게 무리일 것 같아 두번은 부모님이 올라오는 걸로 목표를 세웠다. 실제로는 둘다 무리여서 연2회로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최소 앞으로 5년 동안 엄마아빠를 보는건 10번 뿐이라고 정했다는 말. 출퇴근 시간에 자주 연락하면 되지. 내가 한번 부모님이 한번. 올해는 2번 만났다.

 

 올해 이어갈 책모임은 궁여 정도였는데 의외로 모임이 4번 있었다. 참석은 2번만 했지만. 작년에 사람들이 먼저 서울까지 놀러왔기 때문에 올해는 내가 연말에 내려가기로 했었는데. 결국 바빠서 못 갔다. 미안해요. 대신 내년에 꼭 가기로. 


 그리고 뜻밖의 행운은 백구독서모임을 하게 된 것. 같은 목적을 가지고 느슨하게 좋은 사람들이 모여있고, 스케줄을 진두지휘해주는 나이스 커터가 있어서 순항중이다. 오랫동안 했던 책모임을 마치면서 쏟았던 애정과 시간만큼 힘들었는데. 이렇게 1/n로 적당한 1인분으로 참여하는 책모임도 편안하고 좋다. 대신 틀을 유지해하고 수고해주는 사람에게 늘 고마움을 잘 표현하고, 1인분보다는 약간 더 적극적인 참여자로 모임이 풍성해지도록 최소한의 역할은 해야겠지. 


 이사 2주년을 맞아 지난 시간을 돌아볼 기회가 좀 있었는데. 충격받은 건 그동안 새 친구를 한 명도 안 사귀었다. 첫 해는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느라 집에 거의 있질 않았고. 둘째 해는 일하느라 진이 빠졌다. 무엇보다 필요를 안 느껴서. 다른 필요를 먼저 채웠다면 남는 시간에 생각해 봤을 법도 하다. 당연히 늘 시간이 부족하니 계획 외에 남는 시간 같은 건 없지. 또 기본적인 관계 욕구는 언니랑 해소가 돼서인듯. 이번에 언니랑 이 문제를 얘기해봤는데. 내년부턴 언니도 더 바빠질 거고. 아무튼 그러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나는 지적인 외로움은 심하게 탄다. 방치하면 또 묵어서 큰 문제가 될거야. 지금은 만나던 사람들과 화상으로 가끔 만나는데. 오프에서도 해소를 해야 돼. 대도시니까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거야.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 재밌는 아이디어를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 영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 나한테 부족한 걸 갖고 있는 사람. 내가 가진 게 부족한 사람. 같이 성장할 수 있는 사람.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 


 관계 부분은 목표치만 생각했을 때 50점은 줄 수 있겠다.


 종합적으로는 일, 투자, 독서, 관심사, 건강, 관계 파트에 연초 기준 가중치를 둬서 40:40:5:5:5:5로 보면 52.5점! 정리해보니 가혹한데. 그래서 이게 바로 선생님들이 말하는 열심히와 잘 이 다른 이유.. 방향을 잡지 않고 중간 점검을 하지 않고 피드백하지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열심히 노를 저어가니까.. 셋 다 게을리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1년 단위 방향성을 생각하면 반타작인 한 해였지만 충분하게 애쓰고 많이 성장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는 한 해였다. 길게 보면 주어진 상황에서 정말정말 잘 해냈다. 언제나 최고지. 내년은 더 신나는 해가 될 거야. 거시사 정리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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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투자자로서. 해야했던 것은 앞마당 15개 만들기. 코칭받기. 같이 부자가 될 투자 동료 만나기. 재계약. 앞마당 확보는 5% 수준이라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일에서 체력 소모가 많아서 평일이나 주말이나 앞마당에 집중할 힘이 남지 않았다. 강의 들으며 용산구를 반마당으로 겨우 다녀오고, 엄마랑 휴가 보낼 때 겨우겨우 연수구와 분당구를 맛보기로 다녀왔다. 시간들이 한창 지나고 있을 때 속상하고 스트레스를 엄청 받다가 한계를 생각하면서 포기하고 내려놨다가를 반복하면서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고 판단하질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나는 내 상황 안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하는 데까지 잘 해낸 것 같다. 그게 결과적으로 5%라도. 돌이켜보면 애초에 15개가 무리였는데 욕심은 많아가지고. 신규 9곳, 반마당 6곳을 마무리해서 완성하려고 했던건데. 복직이랑 동시에 진행하기는 무리였고. 3분기부터 앞마당 작업을 했다고 해도 6개를 최대 목표로 수정했어야한다. 2차 목표선은 반마당 6개를 정리하는 걸로 수정했어야 하고. 24년에는 적용해서 대폭 수정할 것. 


 원래 재계약에 맞춰 대비할 겸 코칭을 받을 생각이었는데 이것도 계획과 다르게 흘러갔다. 신청이 밀려서 원하는 시기에 받을 수 없었고, 운이 따르면서 코칭 전에 재계약이 해결됐다. 그래서 오히려 여유있게 앞으로 큰 흐름과 방향에 대해 상담받게 돼서 좋았다. 

 

 투자 동료를 만나는 일은 항상 중요한데. 항상 스스로 한계를 느끼는 부분이다. 관계 유지를 꾸준히 하는 게 어렵다. 투자자로서 갖춰야할 자질이 있고, 나랑 성향도 맞는 동료를 만나기도 어렵지만 만나더라도 유지를 못 한다. 동시에 나도 상대방에게 보완이 되는 자질을 갖고 있으면서 서로 인간적인 호감을 줘야 한다. 그런데 올해 강의를 듣다가 좋은 팀을 만났다. 나에게 부족한 꾸준함과 성실함과 열정을 가지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정기적으로 같이 만날 수 있는 동료. 멋지고 대단한 사람들.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은 같은 길을 2~3년 먼저 지나면서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는 것. 막연히 갖고 있던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선물을 받았다. 


 올해 가장 중요했던 재계약. 역전세가 심각해서 투자자로서 첫 시험대에 올랐던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는데. 그 운 중 일부는 내가 적립한 것이다. 그래서 재계약을 마무리하고 더 큰 기쁨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조언을 받기 전에 스스로 해결하게 돼서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었고. 비슷하게 큰 게 하나 더 있는데 그것도 협의가 순탄하게 끝나고 내년에 시기 맞춰 계약서만 쓰기로 정리돼있다.


 그리고 계획에 없었던 일은. 누수공사 2건이랑 B샘과 돈공부를 시작한 것. 누수공사는 꼭 경험할 필요는 없지만 해보면 반드시 성장하는 대표적 벼락치는 나라. 이제 막연한 두려움도 없고, 물 흐르듯 처리할 수 있다. 스스로 성장이 정체되고 있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르치는 일이다. 9월에 찾아온 B샘과 다시 처음부터 돈공부를 하면서 기본을 다시 쓰다듬는다. 책에서 반드시 익혀야 할 자질과 태도들을 배우면서 한 권 한 권 깨우치고 폭풍성장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건 무엇보다 가장 도파민이 폭발하는 일. 예쁘고 기특한 사람. 올해 1년이 속절없이 손가락으로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 멍할 때 일도 안정시켜주고 투자자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한방에 해결해준 사람.


 그래서 투자자로서의 한 해는 정량적으로는 80%의 실패와 20%의 성취. 정성적으로는 장.단기 핵심 영역에서 결국 좋은 결과를 냈기 때문에 90%의 성공을 했다. 핵심 영역에 먼저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절하게 깨달은 한 해였다.


 23년은 일과 투자에 너무 용을 썼고, 나머지는 제대로 챙기질 못했다. 완독서는 29권. 연초에 독서 계획은 세우고 들어갔어야 됐는데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타이밍을 놓치고 중간 재정비할 시간도 갖질 못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되면 연중 스트레스와 욕구 불만이 쌓인다. 모임책 6권, 그림책 11권, 소설 9권, 자기계발 3권, 인문 1권, 취미 1권, 뇌과학책 1권. 책 정리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차분히. 아주 가늘고 단단한 실로 묶인 책모임이 아니었다면 더 형편없었을 거다. 내가 갖고있는 최소한의 귀한 샘물. 이제는 패턴이 됐는데 이석증이 오면 그림책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른 점은 해가 누적되면서 볼 수 있는 그림책들이 소진되고 있다는 거. 휴식기에 집어들 그림책 목록도 미리 챙겨둬야 안심이 될 것 같다. 몸과 정신이 박살난 상태에서 그림책까지 찾아 헤매는 게 힘들다. 올해는 기록적으로 투자나 자기계발 책도 완독을 거의 못했다. 정리하다 보니 더 처참.. 다행히 올해의 마지막 책이었던 <뇌는 어떻게 자존감을 설계하는가>가 너무 좋아서 욕구가 지하실에서 훅 채워졌다. 동시에 제대로 된 좋은 책을 엄청 엄청 보고 싶다는 탐욕도 깨워버렸지. 아무튼 구체적 계획은 없었어도 최소한 투자 관련 책은 한 달에 한 권이라도 꾸준히 읽어나갔어야 했다. 직무유기. 내실을 쌓는 노력 없이 부피만 늘어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도 올해 독서 파트에서 새로운 성과가 있는데. 완독하지 않고 참석하는 책모임도 생겼다. 예전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 늘 아주 샅샅이 읽고 같이 얘기하고 싶어하니까. 그 마음은 여전히 같은데도. 상황상 핵심 부분이라도 훑고 같이 책을 스치는 데에도 의미를 둘 수 있게 됐다.


 작년도 그렇고 시간구성을 덜 읽고 더 써보는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올해를 보면 수정할 필요가 있다. 덜 읽는데 더 쓰는 게 좋아지지 않고 있다. 인풋이 빈곤하니 당연한 결과. 읽는 만큼 쓰는 방향으로 바꿔가야할듯. 대신 독서량을 질적으로 올리고 눌러읽고 고쳐쓰기로. 


 아무리 후해보려해도 독서 파트는 10점 이상은 주기 어렵다.


 일, 투자, 독서에 시간을 먼저 쓰고 남은 파트에서 좋은 성과가 나기 어렵지만! 시간은 또 나를 극락으로 이끌어서. 관심사에서는 도파민이 폭발하는 한 해였다. 이석증으로 강제 휴식기를 많이 가질 수 있어서 생겼던 행운. 타로카드에 빠져있다. 투자공부는 정말 많은 새로운 인생을 나에게 선물해주고 있는데 특히 이전의 나라면 절대로 살아보지 않을 삶들을. 타로도 그 중 하나. 아무튼 계기는 다음에 정리할 기회가 있을거고. 올 8월 내 타로카드를 샀다. 오라클까지 3개의 덱(세트)을 쓴다. 지금은 78장의 카드들을 키워드 중심으로 굵직하게 읽는 수준. 지인들 운세를 봐줄 수 있는 수준이다. 가장 강한 부분은 이달의운세. 금전운과 애정운을 구체적으로 보거나 카드를 보고 상담까지 하지는 못한다. 내가 타로카드를 활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 내가 늘 내 세계에만 빠져있어서 눈치가 없고, 상황 파악이 안되는 편이라 반대로 카드를 통해 객관적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카드로 살펴보는게 인지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슈들이 있을 때 카드로 상황 파악을 하고, 위험 대비도 하고, 구체적 계획의 방향을 잡는 데도 도움을 받고, 지금 내 상태에 대한 이해도 한다. 또 하나는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을 받는다. 사주와 다르게 타로는 가볍고 재밌는 이미지라 부담이 없어서. 재미로 봐주기도 하고 지인들이 어떤 이슈가 있나 상황을 봐주기도 하고. 관심사 중심으로만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나에게 내 관심사이면서 동시에 일방적이지 않고 상대방에게로 방향이 향하는 통로가 되는 것 같다. 


 두번째는 관심사라고 분류하긴 어렵지만. 연말까지 사계절 옷장 정리를 끝냈다. 대충 30kg 정도는 버린 것 같다. 새 옷장이 내일 도착할 거라 23년 안으로 완전히 깔끔하게 마무리는 못했지만. 버리기 단계는 끝났고. 이제 당장 꺼내 입고 싶은, 설레는 옷으로 채우는 일이 남아있다. 투자공부를 시작하면서 배우고 삶에 적용한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레버리지. 올해 최고의 선생님들께 기본기를 배웠기 때문에 절대연습량만 채우면 더 좋아질 것. 당장은 집중적으로 개선하기 어려운데. 계절마다 3번 정도 반복되고 나면 옷장 경영도 가볍게 잘 할 수 있을 걸로 생각한다. 


 여름에 시도했던 관심사중 하나는 최면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자기 최면을 통해 더 강력한 무의식의 힘을 구체적이고 집중적으로 원하는 파트에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강의는 결제했는데 현장강의를 듣고 마땅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 우선순위가 밀리면서 흐지부지.. 


 그래도 관심사 파트는 시기상 휴식기를 틈새로 잘 활용했다는 점이랑 도파민 폭발도를 봤을 때 100점~ 너무 너무 신나고 재밌었다. 갖고 있던 관심사에 집중해서 더 키워나가는 것도 재밌지만,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새로운 관심사는 진짜.. 저세상 즐거움. 극락이다. 정상 계획상으로는 관심사는 키워나가기 어려운 상황인데, 큰 상황 속에서 벌어진 작은 상황 안에서 돌발적으로라도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행복했다. 24년에는 반영해서 놀이 시간을 균등하게 배치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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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 돌아보기. 피드백해서 잘 적용하고 수정해서 24년을 더 잘 보내보기 위해서. 


 시작할 때 급하게 준비없이 진입해서 우왕좌왕했지만 새롭게 열심히 보냈던 한 해였다. 구체적인 목표나 계획없이 시간들이 흘러갔지만 좌충우돌하는 와중에 마음 속에 있던 중요한 일들은 차분하게 진행을 시켰던 해였고. 최근 5년중 가장 책을 못 읽었던 해였고. 새로운 장난감을 찾아 행복에 빠졌고. 몸상태는 최근 5년중 역대급으로 가장 엉망이었다. 멀리 있는 중요한 사람들과 1번은 소통을 했고, 새로 사귄 친구는 0명. 중간 중간 정리하면서 피드백할 시간을 못 가졌는데 계속 필요는 크게 느껴서 그 점이 힘들었다. 


 내 1년이란, 분기란, 한달이란, 한주란, 하루란, 시간이란 뻔한 카테고리 구성이다. 일, 투자, 독서, 관심사, 건강, 관계가 전부. 거기에 주요 카테고리에 시간과 에너지의 80% 이상이 집중되는 것도 정해진 구성. 


 먼저 일부터. 올해 가장 큰 키워드는 복직이었다. 가장 중요한 목표도 드디어 일과 투자를 자연스럽게 병행하는 단계로 올리는 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목표는 대차게 실패했다. 1분기, 넉넉잡아 2분기까지 안정적으로 복직을 하고, 3분기부터는 원활하게 병행하고자 했었다. 실제로는 1분기가 끝날 때쯤 일하는 나 자신이라는 자아는 안정이 됐는데, 직장 상황이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면서 에너지 소모가 너무 많았다.


 또 2분기까지 여유있게 잡았던 복직 일정에는 사실 일적으로 더 하고 싶은 공부들을 마무리지으려는 생각도 있었는데, 공부할 시간과 에너지를 업무시간에 다 써버리고 탈진 상태로 집에 오니 골든 타임이 지나갔다. 그런데 지금 내 상황에서 필수적인 공부는 아니고 그냥 커리어를 마무리지을 때를 생각하며 정리하고 싶었던 거라 추가로 시간을 더 할애할 수는 없다. 이 부분이 가장 아쉽다. 하지만 이건 더 중요한 일들이 진행되고 나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공부다. 자아감에 중요한 부분이지만 시급하지 않은 공부. 여기까지가 올해 내가 실패했던 것.


 하지만 어떤 이유라도 결국 내 시간과 에너지를 진심으로 때려넣은 곳에는 언제나 예측하지 못한 경험과 경험치가 선물로 숨겨져 있다. 


 올해 새로 일하게 된 곳은 내가 처음 일해보는 타입이었다. 이제까지는 두 가지였는데, 사장님과 나 둘이서 일하거나(물론 도와주는 샘들은 계시지만) 아니면 내가 사장이거나. 내가 들어갔을 때는 연중 가장 바쁜 시기이면서 기존에 사장님 외 2명이 같이 일하는 구조인데 모두 공석이었던 상황. 내가 1번 자리를 빠르게 채우고 2번 자리가 한달반 동안 구해지질 않았다. 그리고 2명이서 일할 때보다 규모가 커진 상황. 한달반만에 온 2번 자리 T샘은 하루만에 퇴사를 고민하다 10일만에 퇴근후 카톡으로 당일 퇴사했다. 그리고 다시 3월 한달간 혼자서. 4월에 온 Y샘은 4개월만에 퇴사를 정하고 한달뒤 퇴사했다. 그런데 원래 상대적 비수기인 여름 시즌부터 바빠지면서 매출이 한단계 점프했다. 다행히 9월에 온 B샘이 지금까지 같이 일하고 있다. 그다음으로 10월 중순인가 온 J샘이 같이 일하고 있고. 그런데 겨울로 진입하면서 매출이 한번더 퀀텀점프하면서.. 실상 4번 샘, 최소 3.5번 샘이 필요한 상황인데 최악의 구인시기로 사람이 구해지질 않는다. 아무튼 그래서 겨우 최소한의 인력은 안정이 됐는데, 그것보다 빠르게 매출이 늘어나면서 밑빠진 독에 물붓기 상태. 


 아무튼 나는 처음 경험해보는 동료가 있는 직장이라니?! 너무 기대하고 신났었는데. 파트타임 샘과 하루만에 퇴사한 샘들을 제외하고 정규 샘들만 보면 T샘은 1년차, Y샘은 신입, B샘은 4년차인데 여기 타입은 3개월차, J샘은 군대에서 막 돌아온 신입샘이었다. 신입 샘들을 보면서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내 신규 시절 생각이 많이 났었다. 그리고 천둥벌거숭이 시절 생떼같은 나를 같은 일을 시작한다는 이유만으로 환대하고 뭐든 가르치고 귀하게 여겨주고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고마운 분들을 떠올렸다. 일적으로 나를 키워준 샘들에게는 내가 갚을 것이 별로 없다. 이미 삶에서 많은 것들을 이루셔서. 내가 나로 잘 살아가는 모습을 가끔 전해드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그래서 내가 가지게 됐던 소중한 직업에서의 원칙 중 하나는 신규 샘들에게 내가 받았던 호의와 다정을 전달하는 거다. 10년을 채울 때까지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올해 그 기회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갑자기. 


 왜냐면 지금 사장님이 일적으로는 좋은데 약간의 성격장애가 있다. 워낙 작은 공간이다보니 경험이 많지 않은 신입 샘들에게 힘든 부분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지금 새로운 샘이 오신다 해도 같은 문제를 겪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 경험이 많지 않다 일적으로 괜찮은 곳이라는 판단을 하기 쉽지 않았을 거고,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더 감정적으로 크게 느껴졌을 것. 


 여기 와서 새로운 사람을 이해하는데 MBTI가 생각보다 유용한 도구라는 걸 알게 돼서 관심이 커졌다. 들어오면서 한시간반동안 면접을 보면서 MBTI를 물어봐서 여기는 되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내가 들어갈 당시 사장님과 S샘과 나 전원이 T성향이었던 것. 나는 너무 편했다. 처음으로 들어온 T월드에서 나만 이상하게 여겨졌던 지점들이 당연한 지점이 되면서 만족감이 높았다. 이후에 사장님과 퇴사자들에 대해 얘기하다가 내 가정을 듣고 확인해보니 이제까지 큰 갈등을 빚고 퇴사한 사람들이 전부 F타입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T타입이라고 사장님의 그 성격장애 부분이 편안한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F타입이 일적인 부분과 감정적인 부분을 더 동일시하고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더 힘들게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같이 하는 B샘과 J샘은 F타입이긴 하다. 두 분이 반복되는 퇴사위기를 넘어 같이 일하는 이유는 좀 다르지만. 어쨌거나.


 정서적으로 힘들어했던 T샘과 Y샘에게는 특히 더 애정을 쏟았는데. 왜냐면 내가 처음으로 받은 신규 샘들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다져왔던 원칙을 펼쳐볼 기회가 처음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요이상으로 에너지 소모를 너무 많이 했고, 퇴사 당시에도 타격감이 정말 컸다. 그 두 샘들에게 T인 내가 했던 일들은

- 눈치가 없어서 힘든지 안 힘든지 파악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 물어보고 체크하는 것.

- 내가 물어볼 때 솔직하게 나에게 얘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편안하고 의지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 (이 부분이 가장 익숙하지 않아서 힘들었던 부분.)

- 모르는 게 창피하거나 물어보는 게 힘들어서 묻지 못할까봐 업무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묻기 전에 먼저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는 것.

- 크지 않은 실수는 덮어주고 격려하는 것.

- 큰 실수는 내가 사전에 예방하지 못했음을 알려주고 후처리를 하고 다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

-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것.

- 지금 직장에서 업무 규칙들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이 카테고리에서 있을 수 있는 다른 직장의 규칙들도 같이 알려주는 것. 그리고 지금 업무 규칙이 어떤 의미인지 왜 이런 규칙을 세우는지 이 규칙을 지키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설명해주는 것. 또 그 경우 어떻게 후처리해야 하는지까지.

- 그리고 지금 여기 규칙들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어떤 관점이고,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규칙은 어떤 건지. 그리고 내가 구현하고 실험해봤던 이상적인 규칙들은 실제로 적용했을 때 어떤 점이 장점이었고, 단점이었는지. 내 주변에 다른 규칙을 가진 샘들은 어떤지. 스스로 직업관을 형성해가는데 시행착오를 덜했으면 해서. 그런 고민의 시간들이 한 명의 전문가로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 그래서 지금 여기 장점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

-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가면 좋은지. 공부하다 빠질 수 있는 함정들과 시기와 중요성에 따라 우선순위를 두고 공부해야 할 것과 좀더 나중에 공부해도 되는 것 구분해주는 것.

- 힘든 점에 대해 공유한 부분은 내 선에서 최대한 예방하거나 막을 수 있는 부분은 범퍼 역할을 하고, 불가능한 부분은 사장님과 얘기해서 조정하기.

- 사회 초년생일때 내 경험과 상황에 맞춤함 돈에 관한 조언.

 이 모든 걸 진행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필요를 느끼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할 수 없어서 언니와 의논을 많이 했다. 내가 눈치없는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도 체감하고, 일반적인 사람들과 생각의 차이가 얼마나 클지도 많이 얘기하고, 이걸 실행할 때 예상되는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정말 많이 얘기했다. 그때도 지금도 보통 나는 상대의 뜻을 모르겠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 말해도 돌려서 말하거나 은유적으로 말하거나 비꼬아서 말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어.. 

 

 지금 돌이켜보면 특히 우리가 일하는 규칙에 대해서 가이드를 하면서 나 스스로도 흩어져 파편으로 있던 직업관을 정리하는 계기가 돼서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당시 내가 가졌던 오만한 생각. 사장님이 모든 걸 뚫는 창이라면 내가 모든 걸 막는 방패라는 것. S샘은 내가 들어가기 직전 한해 동안 퇴사로 스쳐지나간 샘들은 자기가 아는 정규 샘들만 10명 이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실패하기 전까지 사장님이 아무리 이상해도 좋은 사람이 있으면 같이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좋은 사람마저도 없는 곳도(아무런 장점도이 없는 곳도) 있기 때문에. 그런데 아니었다. 왜냐면 입사와 퇴사를 결정하는 건 각자 자기한테 정말 중요한 80%인데,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나머지 20% 부분이어서. 이 중요한 걸 나는 몰랐기 때문에 내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와 말이 무한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두 샘들의 퇴사가 이중으로 나를 휘청이게 했던 것 같다. 샘들이 결국에는 퇴사한다는 사실과 내 생각이 틀리고 내가 실패했다는 것.


 내가 애쓰면서도 주의했던 건 미묘하게 두 샘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면서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거였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에서는 샘들이 스스로 여기 장점과 단점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정말 애썼지만, 맞지 않아 퇴사해야될 사람인데 나 때문에 자기 인생의 결정들이 지연되고 그것 때문에 힘든 시간을 추가적으로 소모하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는 T샘은 막판까지 난장판을 치고 퇴사했고, 나는 그런 분에게 내 에너지를 그렇게 많이 써서는 안 됐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사람 경험이 너무 적어서 그 경험을 하지 않고는 그런 사람을 구분하기 어려웠을 거고 동시에 굉장히 짧은 기간에 인연이 끝나서 여러모로 나에게 좋은 기회가 됐던 것 같다. Y샘은 내가 봤을 때는 좋은 재료와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금도 가까이서 Y샘이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아쉽다. 사장님과 맞지 않아 결국 퇴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어디서든 멋지게 자기 몫을 하면서 성장할 사람. 한달만에 퇴사하려고 했는데 내가 하는 얘기들에 한번 더 있어보자 생각했지만 결국 안 맞아서 나간다는 얘기를 사장님께 전해듣고 또 한번 충격을 받았었다. 결국에 퇴사 분위기를 모르고 지나친 것, 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것 때문에. 물론 배움과 경험의 시간은 있었겠지만.


 나한테 관계를 맺는 일은 너무 어렵다. 개인적인 관계야 내가 취사선택할 수 있지만, 일적으로 돕고 이끄는 상황이 되니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에 너무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8월까지 나도 그 방면으로 실패하면서 성장을 하고 이후에 B샘과 J샘을 만나면서 달라졌는데. 너무 길어져서 다음 기회에. 


 아무튼 23년에 누가 나한테 맡긴 것 아닌 새로운 역할을 경험했다. 일반 회사에서 능력있는 실무자에서 관리자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보통 팀장급이라고 하는건지..) 겪는 문제들을 일부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일이라 의욕도 넘치고 재밌었고, 고민하고 애쓴 만큼 더 많이 배웠다. 원원했던 결과는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이 성장했다. 


 일적으로 목표했던 것들은 모두 실패했다. 내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고, 스스로는 경험하지 못했을 부분에서는 뜻밖의 기회로 폭풍 성장했다. 그래서 80%는 실패했고, 20%는 성과가 있었는데, 1년이 아니라 인생 전체로 보면 훨씬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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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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