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은 미룬지 몇년인지 모르는 치과에 다녀왔다. 집 근처에 세 개의 치과가 있었는데 두 곳은 리뷰가 많고 평이 좋고, 한 곳은 리뷰가 적고 악평이 한개 있었다. 지역상품권이 되는 곳은 리뷰가 적은 쪽 한곳이었다. 일할 때 같았으면 (불가능했지만) 리뷰가 많고 평이 좋은 곳으로 갔겠지만, 여유가 있어서 악평이 한개 있었던 곳으로 갔다. 상태가 심각할 걸로 생각해서 처음에는 검진을 두 곳 정도 받아보고 치료를 할 생각이었다. 가보니 악평을 한 사람의 상황이 이해가 갔는데, 나에게는 나쁘지 않아서 그냥 바로 치료를 시작했다. 치아는 기대에 못 미치게 나빴는데, 결제하고보니 지역상품권 적용이 안되었다. 완벽하게 내가 일하기 전에 살아봤던 방식으로 진행이 돼서 묘한 기분이었다.
세상을 인식하고 내 안에 적당하게 저장하는 건 내 생각과 마음이 한다. 일을 마치기 전에는 화요일에 근무를 마치고 나면 머리를 잘라야겠다 몇번이나 다짐했다. 막상 집에서 쉬기 시작한 첫 주에는 머리를 자를 필요를 못 느꼈다. 머리가 길던 짧던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근무를 서던 화요일에 온종일 머리속에 역시 내일 머리를 잘라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수요일은 치과를 가기로 마음먹었고, 무시무시한 치료강도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은 기대감에 당장 잘라내고 싶지만 목요일에 잘라야 할 것 같았다.
특별히 하고 싶은 머리는 없고 자른다는 생각만 있어서 귀찮은 마음에 마음속으로 취소를 한 것도 있다. 그런데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보다가 박완서 선생님 정말 멋진 분이네, 안 웃는 사진을 보면 그렇지 않은데 대부분 사진에서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면 보는 사람까지 마음이 온화하고 평온해지네 싶었다. 그런 표정과 마음들이 머리를 따라 자른다고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행히 사진에 찍힌 선생님의 머리는 사진촬영을 위해 따로 한 머리 같지는 않아서 (실은 꾸안꾸일 수 있다)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미용실에서 이렇게 해주세요 하고 이 사진을 꺼내는게 망설여졌다. 이게 누구에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분이에요. 무슨 책 있어요? ...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은 <그 많던 싱아를~> 한 권 봤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대략적인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느낌뿐이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선생님 머리를 따라하려면 솔직히 소설 한 권은 다시 읽어야 할 것 같고, 그래도 나목은 읽고 따라해야 하지 않을까? 한참 걸릴 거다. 역시 김하나 작가 사진을 꺼내기로 했다.
누구인지 말할 기회는 없고, 내 머리 상태로는 그 머리는 할 수 없어서 미용실 선생님이 뭐라고 한대로 한다고 했다. 당분간은 집에만 있어서 자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염색도 했다. 염색도 하고, 단발도 하고, 히피펌도 하고, 숏컷도 하고 다 해보네요. ㅎㅎ긴 생머리만 빼고요. 긴 생머리도 한번 했어요. 그때 한번 봤어요. 개인적으로는 그 머리가 제일 잘 어울렸어요. 아~ 맞네요. 세상에 기억력이 좋은 선생님이다. 살면서 외부 저장장치가 흩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머리는 아직 낯설지만 마음에 든다. 결과물이 이상할 때도 있는데 항상 마음에 든다. 아마 대부분 어떤 시간을 종료시키고 싶을 때가 아니면 머리를 하러 안 가기 때문일거다. 놀랍게도 과거의 기특한 내가 선결제해놓은 금액이 많아서 이번 종료식은 공짜였다. 전혀 몰랐다. 그대로 이사갈 뻔 했다.
엄마가 고등어 조림을 줬다. 8도막이 들어있었다. 나는 내장 쪽이 있는 도막은 안 먹고, 동거인은 먹는다. 이번에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동거인도 원래는 내장쪽 도막을 싫어했다고 한다. 나는 먹어보지도 않고, 생긴게 살만 있는 도막과 다르기 때문에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안 먹으니까 엄마는 나에게는 안 주고, 동거인에게는 그 도막을 줬다고 한다. 동거인도 처음에는 그 도막이 싫었는데, 막상 먹어보니 일반 살고기 도막보다 살살 녹는 맛있는 부위였다고 한다. 발라내는 게 좀 귀찮지만. 그래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고기 도막은 아빠와 나만 먹고, 살살 녹는 내장쪽 도막은 엄마와 동거인만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 나에게 그 도막이 끝까지 주어지지 않은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내가 어릴 때 아침에 믹서에 간 콩물을 먹기 싫어서 이상한 곳에 숨겨두고 유치원에 가버리면 엄마는 가끔 컵을 찾아 헤매다 잊어버렸고, 그 콩물컵은 어딘가에서 썩어서 냄새가 나면 위치가 밝혀지니까. 이상하게 스무살이 되어서부터는 그 따뜻하고 달콤한 콩물이 엄청 먹고 싶었는데, 아마 콩물도 박완서 선생님의 머리같은 거겠지.
<어린이라는 세계> 표지를 보면서 책과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표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게 책을 볼 준비를 해주고, 본 다음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림 그린 사람 그림 더 보고싶다 인스타같은거 하겠지? 생각했는데 신간 코너에서 결국 만났다. 마음 귀퉁이가 몽글몽글해지고, 한가운데는 포근포근해진다. 오늘의 단어가 3~6컷 정도의 짧은 만화로 3편 정도 실리고, 짧은 글이 붙는다. 처음에는 그림만 쭉 보면서 정화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보다보니 단정하고 소박한 글도 좋았다. 사계절로 네 장으로 나눠지는데 여름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았다. 지금이 한참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라 막 휴가를 시작할 때는 불만이 대단했다. 쨍한 한여름쯤은 쉴 걸로 계획했어서.
지금은 한낮에도 너무 덥지 않아서 역시 이래저래 좋다.

여, 여기부터
행, 행복해진다!
라니!
나는
여, 여기가 끝이려면
행, 행동을 시작할때야.
주문을 외우고 머리를 잘랐는데?
그리고
휴, 휴~ 그동안 참 고생했다
가, 가장자리에서 조금 쉬자
주문을 외운다.
어쨌거나 머리스타일은 둘다 비슷하다.
나도 9월 말쯤에는 대충 한달의 일기같은 게 남겠지.
작가의 말을 보면서 처음으로 소설가 라는 직업 참 멋지다~ 감탄한다. 이렇게 하고싶은 말을 쏙쏙 뭉쳐서 하나의 요소로 집어넣고, 그걸 또 솜씨좋게 섞어서 재미진 전체를 만들고. 역시 배경이 하와이라서 읽기 편했을까 싶다. 작가가 열심히 숨겨뒀다는게 나에게도 비슷한 값어치의 보물이라서 보는 내내 즐겁고 편안했다. 주말 저녁 밥먹고 tv앞에 앉아 보는 가족드라마. 억지스럽지 않고 내 몸에 딱 맞아서 속시원하고 재밌는.
(웃음)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의 이십 년을 버텨내세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모퉁이가 찾아오면 과감히 회전하세요. 매일 그리되 관절을 아끼세요. 아, 지금 그 말에 웃는 사람이 있고 심각해지는 사람이 있군요. 벌써 관절이 시큰거리는 사람도 많지요? 관절은 타고나는 부분이 커서 막 써도 평생 쓰는 경우가 있고 아껴 써도 남아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불공평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모든 면에서 닳아 없어지지 마십시오. - XX미술학부 졸업 축사 녹화본(1995)에서, 229p
모퉁인가 아닌가. 꼭 모퉁이인 것 같은데 진짜 맞나. 에이 아닐거야 아니겠지. 좀더 가야 나올거야. 이 정도면 모퉁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십년을 넘어서 막 과감히 회전을 한 것 같다. 타고난 부분이 다름이야 알고는 있었는데 어쨌거나 총량적으로 보면 인생이 참 공평하다는 것을 작년서부터 느낀다. 네, 어쨌거나 남은 십년도 잘 버텨내고 절대로 닳아 없어지게 가만두지 않을거에요. 모든 면에서.
어떻게 이럴수 있어.. 이런 이야기가 있을수 있어.. 완벽한 이야기인데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로라는 책을 별로 읽지 않았다. 대신 그림을 베끼거나, 여행과 역사에 관한 두껍고 학구적인 책에 있는 흑백 삽화를 색연필로 색칠했다.(바이올런스 선생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로라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 271p
가슴이 철렁. 그래도 그래서는 안돼. 지루해서 그림만 보며 넘길 수도 있지만. 색칠까지 해서는 안된다고.. 야수파적 색감은 상관없지만 책에다 해서는 안된다고. 이 책 1권에서 불만인 부분은 딱 두 가지다. 딱 저부분 한가지와.. 오탈자? 개정판은 사정이 좀 나을까.
이야기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세살 차이인 체이스 자매를 중심으로 보게 된다. 동생이 생겼을 때 첫째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많지 않다. 하지만 둘째는 첫째가 먼저 취하고 남은 전략 중에서 골라야 한다. 내가 본격적으로 다루어보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책이다. 본격적으로 읽는 시간을 가진 것에 충분히 감사한다. 다행스럽게도 마거릿 애트우드 선생님의 첫 작품이다. 아직 남은 이야기가 더 많다. 부커상에도 관심이 생긴다.
요즘 다니는 큰도서관에는 페미니즘 책이 6칸이다. 올해 나온 책들도 몇 권 알아봤다. 대부분 살벌해보이는 와중에 (얇아서) 눈에 띄었다. 꼼꼼하게 다시 쓰고, 생각보다 글씨가 많고, 실루엣만 가득한 그림이 책과 잘 어우러진다. 엘라의 발이 커져서 흐뭇했는데, 실루엣 그림들은 한결같이 마르고 긴 목이었다.
"집에서 나와도 된다고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으셨어요?"
신데렐라가 물었어. 대모 요정이 말했지.
"다른 애들 돕느라 나도 엄청 바빴거든. 그러다가 너희 집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어. 또 나는 사람들을 도와주지만 그러려면 일단 그 사람이 도움을 청해야 돼. 너는 무도회 날 밤 전에는 도와 달라고 한 적이 없잖아."
(도움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게 좋다는 건 정말 사실이야.)-36p
정말 사실이다. 스스로에게, 남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려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인생 총량의 공평함이란 대부분 어떤 각성의 필요조건에 기대고 있다.

강아지는 사랑이지. 케이크는 직접 근사하게 구워야지!
살살 녹는 고등어뱃살을 먹어보고 감탄하고
여성 작가가 쓴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들을 재밌고 편안하게 읽고
끝!을 자꾸 자꾸 기념해서 감사한 며칠.
꺄 아껴보자~~ 신났다가
날도 짧은데 뭘 얼마나 아껴~~ 그냥 보기로 한 감사한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