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1년간의 휴직을 보내고 복귀하려고 했던 달이다. 복직 코앞에서 이석증이 터져 다시 기약없는 휴직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거의 읽지 못했어야 하는데,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을 바꿨다. 그림책을 보면서 마음을 달랬다. 자기치료 경험담을 보면서 나도 치료할 부분을 찾아보고, 적용해볼 게 있나 살펴봤다. 현실 세계가 순간 잊어지는 미스터리 소설로 도망갔다. 그림책 17권, 소설 5권, 심리 4권, 투자 1권, 에세이 1권.
◆그림에세이
비상시를 대비해서 남겨뒀던 <요코씨의 말>을 꺼내먹었다. 작가 사후에 발표되었던 에세이 중 일부를 일러스트를 붙였다. 처음엔 사노 요코의 일러스트가 아니라서 아쉬웠는데 보다보니 느낌이 비슷한 듯도 싶고 작가 일러스트가 많아서 좋았다. 사노 요코가 직접 그렸다면 본인에 해당하는 일러스트를 이렇게 많이는 못 봤을 것 같아 장점. NHK 방송국에서 TV로도 방영되고 인기도 많았다고 하니 역시 사람 마음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아마 대부분 봤던 글일 텐데 대부분 처음 본 느낌. 읽고 난 책이 백지에 가깝게 잊혀지는 능력은 축복이다. 신간이 나오지 않는 애정하는 작가의 작품도 거리두기만 적절하면 다시 처음과 같은 감동으로 볼 수 있다. 평생. 심술도 부리고 고집도 쓰고, 똥강아지 할머니인데 사노 요코 글을 읽으면 왜 따뜻하고 마음이 말랑해지고 충성을 맹세하게 될까? 어제 보던 <당신이 옳다>에서는 솔직함 때문에 모든 아기들이 사랑스럽다고 하던데. 솔직함과 진짜 인생.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현대판 어린왕자 느낌이었다. 길 위의 소년이 친구들을 하나씩 만난다. 단순한 선과 색으로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구나. 거짓말처럼 아름다움은 한장 한장 이어진다. 이야기를 조용히 따라가는 마음도 정화되는 기분.
<100 인생 그림책>은 기대와 다른 책이었다. 제목만 보고 100명의 인생이 한장씩 박물관처럼 모여있는 줄 알았다. 1명의 인생을 1살부터 100살까지 한장에 1년씩 그림으로 모은 책이다. 어떤 면에서는 착각도 맞는데, 많은 사람을 인터뷰하고 그 나이대의 인생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담았으니까. 첫 장은 방금 태어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형식 덕분에 누군가의 평생을 사랑을 듬뿍 담은 시선으로 회고하는 영화같은 인상. 채도 높은 색깔을 많아 눈이 즐겁다.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한국인 편으로 또 보고싶다.
<살짝 욕심이 생겼습니다>는 요시타케 신스케의 올해 나온 일러스트 산문집. 글도 쪼끔. 일러스트도 찔끔이지만 그대로 충분하다.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하지 못한 조각난 생각들을 풀어줘서 참 좋았다. 역시 이런 작가도 모아둔 짜투리가 많이 있구나~ 할 수 있어서. 작가가 살짝 고집부려 넣었다는 스케치 조각들도 좋았다. 볼 수 있는 사람은 보세요.도 좋았다. 그냥 다 좋아. 이 작가 거 안 본 거 많이 남겨놔서 좋아.
<쉬운 일은 아니지만>은 20대 일러스트레이터의 성장 4컷일기. 공감가는 내용이 많았지만 내 또래의 이야기를 더 보고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가만히 자기를 살펴보고 돌보는 작가를 보면서 저렇게 20대를 보낼 수 있었다면 지금 나는 다른 모습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지금부터 지난 시간들을 거슬러서 살펴보고 돌봐주는 일을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일. <당신이 옳다>에서는 살면서 해야하는 일을 미루면 이자를 톡톡히 치른다고 했다. 내가 치르는 대출이자는 마이너스통장이 됐다. 원금에 이자에 이자에 붙은 이자에 물가상승률까지 아주 호된 스노우볼이 돼있었는데 그동안 보지 못했다.
◆동화책
열반님 서재에서 받아온 <대혼란>은 너무 좋았다. <아니의 호수>, <개를 원합니다>, <내 안에 내가 있다>도 좋아서 소름. 그러고 보니 알라딘에서 키티 크라우더 엽서 굿즈도 판 적이 있었다.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나 봄. 느낌에 안 예쁘고 거친 그림은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바뀌었다. 역시 담긴 메시지가 중요하다.
<대혼란>, <아니의 호수>, <개를 원합니다>는 모두 하나의 서사를 가지고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내 안에 내가 있다>는 키티 크라우더가 일러스트만 그린 거라 좀 다른데, 나 자신을 다루는 건 같다. 나 자신을 인정하고 이해해가는 과정을 일러스트로 그렸다. 분위기는 좀 기괴하고 컴컴하다. 심리치료 교과서를 그림화한 느낌이라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전체적으로 황량한 느낌이 전체 내용 이해도를 올려줘서 좋았다. 시리즈로 더 여러권이 있다면 좋겠다.
<파도야 놀자>는 이수지 작가의 작품. 이수지 작가가 물을 표현한 걸 보고 있으면 동시대를 살아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파도 주제 탐구의 아름다운 결과물. 꼬마아이가 파도랑 노는 내용에 색도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시원한 바닷가에 다녀온 듯한 청량감. 바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바다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엄청나.
◆그래픽노블
예술가들의 예술가라는 표현에 반대할 수 없는 수작이었다. 아이디어라는 걸 꽉꽉 뭉쳐 반죽하고 살을 붙이고 색감을 넣고 오랜 시간 숙성하며 다듬은 결과. SF의 현재를 반영한 미래사회 실험적 모습을 일러스트로도 잘 보여준다. 역사적이고 몽환적이다. 메세지와 이야기, 강렬한 원색 중심의 일러스트 각각 모두 대단하고, 조합도 뛰어나다.
◆소설
<열대>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데뷔 15주년 기념작. 15주년이라니! 20대 때 내가 술고래가 된 데 모리미 도미히코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확실히 지분이 있다. 이 작가는 재기넘치는 신예 작가와 대학생으로 만나 같이 자란 느낌. 한참 뒤 와 모리미다 모리미! 하면서 <다다미 넉장 반 세계일주>,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을 연달아 읽고 팬심이 한김 식었다. 모리미 색이 확실한데 그래서 비슷한 느낌.. 하지만 역시 묘하게 그래도 응원해야지 싶은 정이 있다. 어떻게 쓰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역시 도쿄에서 출발해도 힝속았지? <열대>도 교토물이었다. 환상 범벅 현세인지, 현세 범벅 환상인지 싶은 기세도 여전하고. B급 정서와 한김 빠진 듯한 솔직함이 군데군데 덕지덕지 붙은 것도 여전하고. 한참 뒤에 또 지나갔던 장면 갖다 쓸 거니까 샅샅이 눈에 불켜고 넘기게 되는 페이지도 여전하고. 이번에 좋았던 건 작가 스스로일 책덕, 이야기덕 냄새를 팡팡 풍겨서.
현실삭제는 미스터리지. 사회파는 부담스럽지. 피, 칼은 굳이 보기 싫지. 그런데 세상에 코지 미스터리라는 장르라니. 나는 신대륙에 오고 말았다. 일상 미스터리의 여왕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자키 3부작 <하자키 목련빌라의 비밀>, <진달래 고서점의 비밀>, <고양이섬 민박집의 대소동>. 살인 사건이 나오긴 하지만 스트레스 없이 코지코지하게 즐길 수 있다. 배경 지역은 하자키라는 가상의 시골 지역. 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 건 같은 지역과 형사 한 명. 왓슨 역할은 권마다 바뀐다. 사건의 주요 인물들도 모두 다르고 독립적인 이야기인데, 각 책의 인물이나 배경이 흐름과 상관없이 등장하는 재미가 있다. 큰 연관은 없지만 소소한 재미까지 잡기 위해 순서대로 보는 걸 추천.
전에 책읽아웃 듣고 담아둔 <최애, 타오르다>.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봤다. 힘닿는 데까지 최애가 있는 곳엔 어디에나 있고, 최애를 빼면 내 인생이라고 할 만한 건 어디에도 없어지는 덕자 이야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디에나 있는 덕자를 구석 중의 구석으로 끝까지 몰아붙여본 소설. 등골이 서늘하고 안쓰럽다. 얇아서 쉽게도 읽히지만 쾌락, 욕망, 목적,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심리
어떤 사람과 책은 몇 번이나 피하려고 해도 마주치게 된다. 괜한 오해일 때도 있고, 역시나 역시일 때도 있다. 책모임에서 같이 읽기로 했을 때, 한번 피했는데 다른 모임에서 결국 피할 수 없이 다시 만난 <행복의 기원>. 사람에게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이며, 행복은 강도라기보다 빈도라는 조언이다. 충분히 수긍되는 주장이지만 근거와 내용, 전개는 조금 빈약한 느낌. 당시에 연구가 활발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근거로 대부분 자기 논문만 제시한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쉽고 편리한 책이지만 읽다 오히려 작가가 정신적인, 의미로서의 형체없는 서양 전통 행복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귀납으로 묶어둔 행복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같이 본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치 수용소 생활을 6년 정도 겪고 생존한 정신과 의사의 기록. 처음에는 필명으로 출판했다고 한다. 내가 몸상태가 좋을 때 하기 싫은 일을 처리하는 시스템과 비슷하다. 행복을 주제로 목적한 책은 아니지만 삶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행복보다 상위 개념을 가져와서 손쉽게 해결한다. 하위 개념이기에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말.
책은 좋은 뜻으로 숭고하고 거창하다. 공감가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인생에서 어떤 피할 수 없는 일과 마주하더라도 ㅡ그게 나치 수용소 생활이라도..!ㅡ 그 사건을 마주하는 나의 태도만은 나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 삶의 의미와 목적은 그런 과정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어렴풋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 모든 사건들, 지나온 시간들, 마주했던 어린 내가 했던 일들, 당연히 수용하고 당연히 수용하지 못하면서 생겼던 마음들. 묶어두고 감추려고 했던 감정들. 그런 게 다 촘촘하게 엮여서 내 인생으로 만들어졌고, 내가 만든 거구나.
작가가 창시한 프로이트, 아들러와 정신과의 3대 이론이라는 로고테라피에 대한 설명도 있다. 독자 요청에 의해 개정하면서 추가로 덧붙였다고 하는데 아주 좋았다. 역설 의도 기법 부분도 아주 재밌었는데, 적용해보고 싶어지는 내용이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편 로고테라피에서 활용되는 '역설 의도' 기법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것이다. 즉 마음속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 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 이런 접근법을 통해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환자는 비록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된다.
... 여기서 독자 여러분은 환자의 태도가 반전됐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이 있던 자리에 대신 그 반대되는 소망이 들어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불안이라는 돛대에서 바람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182p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의 결정. 그래서 이어서 같이 보다 만 <자기 결정>. 수용소와 결이 비슷했다. 다른 점은 수용소의 특징은 피할 수 없는 고난 회고 부분이 빠져있다. 얇지만 압축적이고 강의식으로 서술돼 시간면에서는 경제적.
<꾸뻬씨의 행복여행>과 <행복의 지도>는 행복사전 느낌의 여행기. <꾸뻬씨의 행복여행>은 좀더 현대동화적이고, <행복의 지도>는 좀더 문화 탐방기에 가깝다. 행복여행도 정신과 의사가 쓴 책. 행복의 지도는 나라별 문화적 다양성 관찰기인데 빌브라이슨 느낌과 비슷하다. 재미있었지만 내가 찾던 책과는 거리가 있었다.
8월의 또다른 수확은 휴머니스트의 <자기만의방>시리즈. 지식실용서를 표방하는 에세이 시리즈다. 일본의 자기치료 경험담 에세이 3권 번역본은 모두 기대 이상으로 아주 좋았다. 아무래도 시리즈라 편차는 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는 표지의 약간 못난이 일러스트가 아니었다면 펼쳐보지 않았을 책. 삐죽삐죽한 네거티브 여왕 일러스트가 절묘해서 맘에 쏙 든다. <미움받을 용기>컨셉으로 현자 힐러 역할로 대인관계치료 전문 정신과의사가. 뿔난 젊은이 역할로 아닌데요? 이건데요? 아닌데요? 를 외치는 작가가. 자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솔직하게 그려 속시원한 대리치료 느낌이다. 그냥 이대로 괜찮아도 괜찮아요 말고. 이대로 괜찮아도 괜찮아요~~
<오랫동안 내가 싫었습니다>가 <이대로 괜찮습니다>보다 약간 세다. 자기혐오에서 빠져나오는 경험담. 자기혐오까지의 개인적인 역사가 극적으로 질질 끌며 그려지지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담백하고 솔직하고 간결하다. 단계적으로 7가지 행동 스위치를 실행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투자
실수요자, 투자자 모두 한 번은 읽어야할 투에이스님의 부동산 절세 기술 개정판. 하루가 멀다하고 관련 법이 바뀌고 있는데 기본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 각 주제별 세법의 취지와 원리, 역사를 같이 다루고 있어 두고두고 볼 가치가 있다. 정권교체 이전의 최신 세법까지 모두 반영했다. 열심히 공부하면 책값의 수천배는 금방이다.
◆에세이
<타인의 기원>은 1993년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리 모리슨이 쓴 자기 소설에 대한 설명. 미국 사회의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에 대한 통찰. 타인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간 역사와 흔적에 대한 추적. 이방인을 설정하는 본질적인 이유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사유를 쉽고 간결하게 전한다. 어떤 말도 안되는 위대함은 어떤 말도 안되는 역사와 마주하며 태어나는 것 같다. 결정적으로 소개된 소설들의 스포가 꽤 함유돼있다. 소설 작품도 꼭 보고싶은 작가.
갑자기 시간의 틈에 주어진 선물같은 한 달이었다. 나를 찬찬히 바라보며 알아주고 이해해주면 되는데. 낯선 일이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했나 뚤레뚤레 쳐다보고 더듬어 따라해보려고 노력했던 시간. 나는 늘 근본적으로 나는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안다. 과녁만 제대로 찾으면.
9월은 어떤 계획도 없이 맞이한다. 마주했던 일들을 끄집어내 내 감정도 살펴보고 알아주고. 그래서 다음 앞으로의 태도로 진행할 수 있게. 스노우볼을 살살 녹이면서.
사노요코처럼 솔직하고 유쾌하고 진솔하게.
요시타케 신스케처럼 기발하고 귀엽게.
홍화정처럼 찬찬히 소중하게.
키티 크라우더처럼 어떤 힘과 마음을 글과 그림에 담아서.
이수지처럼 단순한 몇 가지에 집중해서.
뫼비우스처럼 뜻을 담고도 넘치는 상상력으로.
모리미 도미히코처럼 잘하고 좋아하는 걸 꾸준하게.
와카타케 나나미처럼 심각한 일도 편안하게.
우사미 린처럼 무거운 주제도 쉬운 언어로.
보내보자.
8월 한달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