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은 대체역사 장르에선 고전에 속하는 책이다. 대체역사 장르의 작품들은 보통 'What if'란 질문에 대한 한가지 가정에서 글을 시작한다. 이책은 이슬람이 역사에 없었다면 비잔틴 제국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란 질문에 대한 저자의 역사적 상상을 그리고 있다. 이책의 저자는 무하마드가 이슬람을 세우지 않고 기독교로 개종해 추기경이 되고 대주교로 삶을 마감한 다음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14세기 비잔틴 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원인은 모든 제국이 그러했듯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다른 거대한 제국들과 달리 비잔틴 제국의 치명상은 잦은 외침이었다.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 등의 외침에 시달리며 힘을 소진하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에 결정타를 가한 것은 이슬람의 팽창이었고 마지막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것도 이슬람이었다. 이책은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14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이슬람이 없었기에 비잔틴 제국은 멸망하지 않았고 프랑스 중부와 북부와 영국과 서독일 지역을 제외하면 로마제국 전성기 시절의 영토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제국이 그러했듯이 비잔틴 제국 역시 밖으로부터의 무너진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Byzantine을 소문자로 쓰면 영어에선 복잡하다, 권모술수에 능하다, 현학적이다, 등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이책은 그러한 부정적 의미가 의미가 왜 생겼는가를 잘 보여준다. 복잡하다는 뜻이 생긴 것은 현실보다는 파피루스(로마제국 시절부터 공문서는 파피루스를 사용했다) 더미를 처리하는 것을 더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제국의 관료들때문이었다. 2천년에 가까운 세월의 무게는 온갖 허식을 퇴적시킬 수 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위관료인 주인공의 업무들을 보여주면서 저자는 왜 그런 말이 생기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권모술수는 모든 궁정의 특징이다. 그러나 비잔틴의 권모술수는 다른 어떤 궁정보다 복잡할 수 밖에 없었다.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기도 한 제도 덕분에 정치는 세속관료와 교회관료까지 참여하는 미로와 같이 되었었다. 이책에서 저자는 우상파괴주의자들을 제지하기 위한 종교회의의 이야기를 다룬 장에서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이 어떻게 얽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현학적이란 의미는 비잔틴 제국인들의 종교성향 때문에 생긴 말이다. 로마제국의 특징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었다. 로마인들의 학문은 정치가의 연설을 위한 수사학, 행정을 위한 법률, 그리고 제국의 인프라를 위한 건축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중심이 철학과 수학 같은 관념적 학문을 낳은 그리스로 옮겨지고 지상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을 말하는 기독교가 제국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서 로마제국의 기풍은 사라진다. 이책의 저자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선 무조건 악마의 짓이다 마법이다는 말을 해대는 제국인들을 묘사한다. 주인공은 망원경을 보고 악마의 마법이라 생각한다. 화약을 처음 사용한 폭탄을 보고 제국군은 악마와 싸울 수 없다며 지리멸렬한다. 물론 이책은 역사소설이 아니다. 대체소설은 보통 미국에선 SF의 하위장르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은 대체역사에 첩보물, 모험물, 로맨스물 등의 테크닉이 동원되어 있고 대중적으로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이책을 아시모프가 추천하고 자신이 주관하는 시리즈에 간행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시모프가 그렇게 한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런 재미 아래에 깔린 비잔틴 제국의 일상들 덕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책은 재미를 주는 대중소설이면서 역사책에선 느끼기 힘든 비잔틴 제국의 일상을 들여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소설로서 재미있게 읽었다.
“왜 아이폰을 기존 핸드폰 업체가 아니라 애플이 만들 수 있었는가?” 이책의 저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전화기를 생각의 모델로 생각하는 핸드폰 업체들은 아이폰과 같은 제품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를 생각의 모델로 핸드폰 역시 작은 컴퓨터일 뿐이라 생각하는 애플에겐 아이폰과 같은 제품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답이다. 물론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실 아이팟이나 아이폰의 컨셉은 컴퓨터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업체들이라면 낯설지 않은 사고방식이다. 애플은 컴퓨터 시장에서 효과적인 접근법을 가전시장에 적용한 것뿐이다. 애플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게임기 시장에 진출한 마이크로소프트는 생활 곳곳에 디지털이 심어지는 미래를 연구해왔듯이 IT 기업들도 컴퓨터 시장이 다른 시장과 융합되는 것을 대비해왔다. 그러나 애플처럼 컴퓨터 시장을 넘어 소비재 시장에 자리를 잡은 경우는 드물다. 그 차이를 저자는 비전의 실행력으로 본다. 아이폰이 매력있게 다가간 이유를 저자는 디자인, 터치패드와 인터페이스로 들고 있다. 윈도가 시장을 장악하기 전까지 인터페이스와 디자인으로 시장을 지배했던 애플은 인터페이스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디자인과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만들면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게 할 수 있는지 오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물론 핸드폰 업체들이라고 디자인과 인터페이스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통신업계의 권력구조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핸드폰 업체는 소비자를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동통신사에게 물건을 납품하고 이동통신사가 소비자에게 파는 식으로 유통구조가 짜여져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핸드폰 업체는 을이 되고 통신사는 갑이 된다. 통신사의 비위를 맞추어주느라 바쁘면 애플처럼 자신의 비전을 관철할 힘이 없게 된다. 애플은 처음부터 통신사에 종속적인 위치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고 소비자를 직접 상대해 소비자들의 수요를 무기로 통신사를 압박해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애플은 아이팟이 인기를 얻고 잇는 지역에만 아이폰을 출시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폰의 호소력은 아이팟 사용자들에게 있다고 애플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통신사와의 관계만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제조업체 내의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애플처럼 제품에 대한 일관된 비전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일본의 핸드폰 업체들은 이미 기능과 설계가 다 정해진 다음 디자이너에게 넘긴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식으로는 디자이너의 역할은 장식을 덧붙이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회사내의 모든 부서간의 관계가 이런 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애플처럼 회사 전체가 공유하는 제품에 대한 비전이 없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한 비전과 조직내에서 비전의 공유만 아이폰의 성공에 기여한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애플의 브랜드력도 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애플은 유명한 브랜드이다. 그러나 단지 애플이란 이름만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제품 광고와 홍보전략, 마케팅, 애플스토어의 전략적 운영 등 애플은 신중하게 계획된 브랜드 전략으로 애플의 브랜드를 키워왔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이다. 이책에 소개된 내용은 아이폰을 다루는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은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저자는 그 사실들을 다른 책들보다는 더 체계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이책의 더 큰 매력은 저자가 발로 뛰면서 책을 썼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책의 내용은 기사 같은 느낌을 준다. 애플은 물론 일본 업체의 관계자들과 인터뷰한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저자가 다른 책들보다 더 체계적으로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발로 뛰면서 데이터를 수집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이책의 저자들은 재미있는 질문을 제기하고 잇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문고전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란 질문을 던진다. 저자들의 통계에 따르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소위 동양학에 관한 관심이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들의 통계를 보면 논어, 노자, 장자와 같은 기본 텍스트에 관한 번역의 양이 80년대 이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연구서의 양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질은 양을 따른다. 양이 많아지는 만큼 질도 높아지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저자들의 의문이다. 저자들은 동양학계의 수준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준이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한 수준이냐고 묻는다. 동양학이 대상으로 하는 한문고전은 우리의 삶과의 연결이 끊어진 잊혀진 전통이 되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그러면 그렇게 뿌리 뽑힌 고전들이 지금에 와서 의미를 가지려면 번역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더 이상 한문이 필수가 아닌 세상에서 한글로 말을 바꾸어야 읽히는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저자들은 지금까지의 번역이 말만 바꾼 한문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해방 이전은 물론 해방 이후에 간행된 논어의 번역서들을 연도별로 추적하면서 주자의 사서집주의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주자의 문제의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식이 지금에 의미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노자와 장자의 번역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 유학자들도 노자와 장자를 읽었다. 그러나 그들이 본 노자와 장자는 유학의 프리즘을 통해본 노자와 장자였다. 노자의 경우 주석의 전통은 하상공본과 왕필본 두가지의 흐름이 있는데 전자는 한의학과 도가계열의 해석이고 후자는 유가의 입장에서 노자를 보는 해석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에선 왕필의 해석만 받아들이고 있다. 유가경전과 마찬가지로 노자 역시 조선시대의 주자학의 문제틀에서 읽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장자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장자의 현행 텍스트로 정리된 것은 곽상의 편집에서부터이다. 곽상은 유학자였다. 그리고 장자가 본격적으로 읽힌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송대 성리학자들이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성리학 전통의 시작을 알린 한유는 물론 왕안석, 주자 모두 장자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장자는 널리 읽혔다. 저자들은 현재 가장 널리 읽히는 3가지 텍스트의 번역을 검토하면서 조선시대의 독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면 저자들은 어떤 번역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우선 말이 오늘날의 언어여야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저자들은 지금까지 나온 번역에서 최남선의 번역과 70녀대 박영문고로 나온 이을호의 한글논어를 최고의 논어번역으로 꼽는다. ‘교언영색 선의인’이란 학이편 3장을 최남선은 “말 납신납신 잘하고 남의 비위나 살살 잘마추난 사람에 사람다운 사람 업습디다.”로 번역했다.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는 말처럼 누구나 알기 쉽게 잘된 번역이다. 그후에 나온 거의 대부분의 번역이 仁을 번역하지 않고 그냥 ‘인’이라 한 것과 달리 ‘사람다움’이라는 알기 쉬운 말로 바꾸고 있다. 이을호의 학이 1장과 3장의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선생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 선생 “말을 꾸며대며 얌전한 체하는 짓은 아마 사람다운 사람은 하지 않을거야!” 그러나 저자들은 말을 오늘날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 정도가 번역의 다가 아니라 생각한다. 저자들은 함석헌의 노자 해석을 모범으로 든다. 우리가 노자를 말할 때 생태주의, 비폭력주의 등을 떠올린다. 우리의 노자에 대한 상식이다. 그러나 그 상식을 상식이게 한 것은 함석헌이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다석 유영모, 함석헌, 장일순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전통의 재해석을 시도한 것은 한국의 기독교의 특이한 성격때문이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구한말과 일제시대, 해방 이후의 현실에 대처할 수 없었던 유교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심적 도피처였다고 본다. 함석헌은 기독교의 신을 믿고 노자와 장자를 읽으면서 현실 초월의 소망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런 동기가 있었던 함석헌의 노자 읽기는 적극적인 재해석이었고 ‘대화’였다. 그런 함석헌이 읽어낸 노자는 알기 쉬운 평화주의, 생태주의와 같은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이 이책에서 저자들이 하고자 하는 말이다. 이책에는 물론 위에서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가령 장자가 성리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성리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장자가 공문계열의 제자였기에 자신들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논문이나 마지막 장에서 80년대 이후 서구 동양학자들의 저서들이 어떻게 번역되었는가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나 이책의 주논지는 위에서 요약한 것과 같은 번역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번역의 문제의식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개인적으로 동양학 서적을 읽기는 하지만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이책의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사실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책이 대상으로 생각하는 독자는 저자들과 같은 동양학 연구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부사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비전공자로서 동양학 서적을 고를 때 많은 도움이 되는 내용의 책이었다.
15권으로 계획된 시리즈의 1권인 이책은 컬럼버스의 항해부터 미국의 독립까지 다루고 있다. 미국사를 다루는 책인데도 1권의 범위는 대항해시대 유럽의 역사를 모두 포함한다. 1권에 포함된 유럽사의 범위는 스페인 제국이 시작한 대항해 시대, 종교개혁, 계몽주의로 나눌 수 있다. 이 3가지를 배경으로 하지 않고는 미국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3가지 주제를 한 사람의 저자가 얇은 한권에 다룬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다룰 수야 있겠지만 그 주제들을 의미있게 제대로 다룬다는 것은 지금의 학계의 수준에서 불가능할 뿐더러 필요한지도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책에서 한가지 작업에 초점을 맞춘다. 미국의 선민의식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이다. 20세기의 패권국으로서 미국은 이전의 패권국들과는 달랐다. 자신들은 인류 보편의 원칙을 세계에 실현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원칙은 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원칙,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역사를 그 원칙의 실천이었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원칙을 인류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타당한 원리로 생각했다. 특이한 생각이다. 미국은 패권국으로서 그 원리를 종교의 복음을 전파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더욱 특이하다. 저자는 시리즈의 첫권을 그런 특이한 사고방식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데 촛점을 맞춘다. 저자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알다시피 미국역사의 처음에는 청교도들의 이민이 있었다. 미국의 선민의식은 그 청교도들의 선민의식이다. 유럽에서 주도권을 쥘 수 없었던 낙오자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 정착하고 주도권을 쥔 땅이 미국이고 이후 미국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그들이기에 그들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미국 청교도들, 또는 장로교, 감리교, 회중파들의 의식은 한마디로 편협함으로 정의된다고 말한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카톨릭의 야만과 광신에 대한 반란이었다. 물론 종교개혁은 종교적인 사건만은 아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종교개혁은 당시 등장 절대왕정이 성립되던 시기에 후의 국민국가 단위로 역사의 단위가 만들어지던 시기에 중세의 보편주의 원리를 대표하던 카톨릭의 시스템에 반기를 들었던 사건이었다고 저자는 본다. 그러나 사정이야 어땠든 종교개혁은 종교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종교적 사건의 특징은 광신에 대해 더 큰 광신의 싸움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그 예로 칼뱅이 지배한 제네바의 신정정치를 예로 든다. 칼뱅은 예정설로 유명하다. 기든스는 예정설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었다. '그런 설을 주장한 사람은 분명 자신은 선택되어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칼뱅은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악이라 믿었다. 그러나 자신은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의 개신교도들을 규정한 것은 바로 그런 왜곡된 오만함이었다. 그리고 그런 오만한 자들이 오만한 자들과 싸운 것이 종교전쟁이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어한다. 미국으로 건너가 주류가 된 개신교도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도권을 쥔 식민지에서 자신들 이외의 교파는 이단으로 배척했다. 독립 이전 수만명이 죽어간 마녀재판은 그런 사고방식의 결과였다. 그리고 인디언을 인간이 아니라 여긴 것 역시 별 다를 것이 없는 비슷한 사고방식이었다. 청교도들이 지배한 식민지는 칼뱅이 지배했던 제네바처럼 숨막히는 곳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들의 편협함 때문에 미국독립의 아버지들은 기를 쓰고 종교국가가 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저자는 청교도의 역사에 대한 신화 깨기에 나선 다음 독립전쟁에 대해서도 신화 깨기에 나선다. 미국독립전쟁이 일어나기 까지 과정의 저류에 깔려 있었던 것은 식민지인들의 이해관계와 본국정부의 정책이 충돌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신민지인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한 작은 정책들이 쌓이고 쌓여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대표 없이 세금도 없다'는 독립전쟁의 구호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전쟁은 혁명이라 부를 수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독립전쟁의 리더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생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정책에 반영되도록 힘의 균형을 원한 것뿐이다. 당시 투쟁파는 인구의 1/3이었고 1/3은 왕당파였다. 그러나 영국정부가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분위기는 극단으로 바뀌어갔다. 독립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독립 이후 통치체제가 엉망으로 준비부족이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그후의 정치 시스템은 전쟁에서 총을 잡고 싸웠던 가지지 못한 자들이 아니라 가진 자를 위한 정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독립 직후 미국의 정치는 프랑스혁명처럼 공포정치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1/3에 달하던 왕당파는 영국군과 함께 떠나거나 캐나다로 도피해 캐나다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재산이 몰수당하고 폭행을 당해 린치란 말이 이때 생기게 되었다. 이상이 1권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이책에 대한 평을 하자면 쉽고 가볍게 읽을 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알다시피 미국사 전공이 아니다. 전공이 아닌 사람이 이런 기획의 통사를 깊이있게 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책에서 미국사에 대한 권위있는 통찰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이책은 가볍게 미국사의 전체 흐름을 읽는 목적이라면 충분한 책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듯이 미국사에 대한 각론은 많지만 총론은 없는 상황에서 좌우파에 얽매이지 않고 균형을 맞춘 책은 더더군다나 없기 때문에 미국사를 개괄해 보려는 목적으로는 알맞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제가 얻은 것은 도이며 기술보다는 우월한 경지입니다. 처음 소를 해체할 때는 보이는 것이 모두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이제 소 전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금 저는 소를 정신으로 대했을 뿐 눈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 기술자는 힘줄을 다치지 않고 더구나 뼈는 닿지 않습니다. 우수한 백정도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힘줄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다치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소를 수천 마리 잡았으나 칼날은 숫돌에서 새로 나온 것과 같습니다.” 장자, 양생주 편에 나오는 백정에 도에 관한 우화이다. 그러면 누구나 우화의 백정처럼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다. 그러면 그 백정은 가르칠 수 있을까? 할 수 없다. 길을 가리켜줄 수는 없지만 그가 칼을 대신 잡아주지 않는 한 배우는 사람 스스로 알아서 깨우쳐야 하는 ‘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감’을 ‘암묵지(tacit knowledge)’라 부르며 전문가의 ‘직관’이라 한다. 어느 일이건 그 일을 하는 사람만 알고 있는, 말로 할 수 없지만 몸으로 알고 있는 요령들이 있다. 그것은 오랜 경험에서 몸으로 익힌 ‘감’이다. 펜타곤의 의뢰로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연구한 개리 클레인은 ‘의사결정의 가이드맵’에서 우리는 판단을 할때 논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으로 한다고 말한다. 개리 클래인은 소방관들이 실제 어떻게 진화작업을 하는가 참여관찰을 했다. 1초를 다투는 화재현장에서 논리적으로 진화방법을 따지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래도 진화작업의 성공률은 높은 편이다. 그 이유를 추적한 저자는 소방관들이 오랜 경험에서 나온 ‘감’에 따라 순간적으로 결정을 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의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랜 교육을 받지만 실제 의료현장에서 부딪히는 환자들은 모두가 개별적인 사건들이다. 의대에서 배운 교과서대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 사람의 의사가 배출되는 과정은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을 제각각인 임상사례들에 맞춰가면서 스스로의 암묵지를 만들고 ‘감’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지금의 의료환경이 과거와는 너무나 달라졌다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매년 한 분야에 쏟아지는 의학지의 논문만 수만편이다. 깔려죽기 좋은 양이다.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총량이 폭증하면서 의학도 전문화의 길을 걸어야만 했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지휘하는 영웅 의사의 시대는 예전에 가버렸다. 의료환경 자체가 하나의 복잡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의료환경이 복잡계가 되면서 일어난 문제는 의료상의 실수, 그리고 사고이다. 저자는 인간이 통제하기에 의료환경의 복잡도가 지나치게 높아졌기 때문이라 본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마찬가지로 복잡계가 되어버린 건설업에서 해답을 찾는다. 예전의 건설업은 건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건축청부업자가 모든 공정을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건축업이 기술적으로 복잡해지면서 건설의 모든 분야를 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게 되면서 건설작업 자체가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그 시스템의 중심에서 전체 공정을 조율하는 것은 체크리스트이다. 체크리스트를 작성할 때 모든 관계자가 협의를 하고 그 리스트에 따라 전체 프로세스가 체크된다. 그리고 공기 중 언제든 문제가 생기면 관계자들이 모여 체크리스트를 수정해나간다. 간단한 방법이다. 그러나 간단한 아이디어 하나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전문가들이 하나의 팀으로 모여 규율을 가지고 하나의 작업에 매달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모여 하나의 작업을 하는 수술실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저자는 WHO의 프라젝트를 맡아 안전한 수술을 위한 프로토콜로서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책은 어떻게 의료현장에 체크리스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WHO의 프라젝트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는 작업을 해나가면서 건설현장과 수술실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건설을 적어도 몇 달이 걸리는 작업이다. 그러나 수술실은 분초를 다툰다. 수술실에 필요한 것 역시 팀 워크을 위한 규율을 세우기 위한 체크리스트이지만 건설업과는 다른 형태의 체크리스트가 필요했다. 저자는 항공업에서 모델을 얻는다. 항공업에서 체크리스트가 만들어진 것은 1935년 보잉사가 제작한 모델 299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기종은 항속거리, 속도, 폭탄탑재량 등에서 그때까지의 모든 기종보다 우월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조종하기가 너무 복잡했다. 시험비행에서 조종사는 방향타와 승강타를 해제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륙하다 추락사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 공군은 복잡한 비행조종을 안전하게 표준화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었고 이후 항공업계의 표준 시스템이 된다. 저자는 항공업계를 모델로 수술실에 적용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었고 2009년 발표된 체크리스트는 보급 중이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이러한 체크리스트가 마찬가지로 복잡계와 씨름하고 있는 금융분야에서도 성공적으로 적용되는 예를 보여준다. 3명의 노회한 헤지펀드 매니저와 만난 저자는 그들이 투자결정에 체크리스트를 이용해 높은 수익률을 올린 것을 소개한다. 가치투자방법론을 사용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코카인 브레인에 걸리지 않도록 체크리스트를 사용한다. 대박의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하면 우리 뇌는 코카인을 흡입했을 때와 비슷한 상태가 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런 상태에선 투자후보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 비합리적인 결정을 하기 쉽다. 그런 상태를 제어하기 위해 그들은 투자대상을 검토하는 둘째날에 제무제표의 각주를 읽는다. 셋째날에 10년간의 재무제표를 읽는다와 같은 식의 강제적인 절차를 지정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고 예를 든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을 풀어본 것이다. 저자가 체크리스트를 제안하는 것은 인간의 기억력과 판단력은 그다지 신뢰하기 어렵다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환경이 갈수록 복잡계가 되어갈 때 그런 인간의 취약성은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다. 의료 실수와 사고가 나는 것은 결코 몰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취약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취약한 것이 당연히 의료계뿐만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책은 생각해볼 가치가 충분한 문제를 던지고 잇다. 평점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