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 - 우리 시대의 동아시아 고전 읽기
김시천.전호근 지음 / 책세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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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저자들은 재미있는 질문을 제기하고 잇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문고전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란 질문을 던진다.

저자들의 통계에 따르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소위 동양학에 관한 관심이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들의 통계를 보면 논어, 노자, 장자와 같은 기본 텍스트에 관한 번역의 양이 80년대 이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연구서의 양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질은 양을 따른다. 양이 많아지는 만큼 질도 높아지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저자들의 의문이다.

저자들은 동양학계의 수준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준이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한 수준이냐고 묻는다.

동양학이 대상으로 하는 한문고전은 우리의 삶과의 연결이 끊어진 잊혀진 전통이 되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그러면 그렇게 뿌리 뽑힌 고전들이 지금에 와서 의미를 가지려면 번역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더 이상 한문이 필수가 아닌 세상에서 한글로 말을 바꾸어야 읽히는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저자들은 지금까지의 번역이 말만 바꾼 한문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해방 이전은 물론 해방 이후에 간행된 논어의 번역서들을 연도별로 추적하면서 주자의 사서집주의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주자의 문제의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식이 지금에 의미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노자와 장자의 번역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 유학자들도 노자와 장자를 읽었다. 그러나 그들이 본 노자와 장자는 유학의 프리즘을 통해본 노자와 장자였다.

노자의 경우 주석의 전통은 하상공본과 왕필본 두가지의 흐름이 있는데 전자는 한의학과 도가계열의 해석이고 후자는 유가의 입장에서 노자를 보는 해석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에선 왕필의 해석만 받아들이고 있다. 유가경전과 마찬가지로 노자 역시 조선시대의 주자학의 문제틀에서 읽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장자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장자의 현행 텍스트로 정리된 것은 곽상의 편집에서부터이다. 곽상은 유학자였다. 그리고 장자가 본격적으로 읽힌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송대 성리학자들이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성리학 전통의 시작을 알린 한유는 물론 왕안석, 주자 모두 장자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장자는 널리 읽혔다.

저자들은 현재 가장 널리 읽히는 3가지 텍스트의 번역을 검토하면서 조선시대의 독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면 저자들은 어떤 번역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우선 말이 오늘날의 언어여야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저자들은 지금까지 나온 번역에서 최남선의 번역과 70녀대 박영문고로 나온 이을호의 한글논어를 최고의 논어번역으로 꼽는다.

‘교언영색 선의인’이란 학이편 3장을 최남선은 “말 납신납신 잘하고 남의 비위나 살살 잘마추난 사람에 사람다운 사람 업습디다.”로 번역했다.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는 말처럼 누구나 알기 쉽게 잘된 번역이다. 그후에 나온 거의 대부분의 번역이 仁을 번역하지 않고 그냥 ‘인’이라 한 것과 달리 ‘사람다움’이라는 알기 쉬운 말로 바꾸고 있다.

이을호의 학이 1장과 3장의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선생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
선생 “말을 꾸며대며 얌전한 체하는 짓은 아마 사람다운 사람은 하지 않을거야!”

그러나 저자들은 말을 오늘날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 정도가 번역의 다가 아니라 생각한다.

저자들은 함석헌의 노자 해석을 모범으로 든다. 우리가 노자를 말할 때 생태주의, 비폭력주의 등을 떠올린다. 우리의 노자에 대한 상식이다. 그러나 그 상식을 상식이게 한 것은 함석헌이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다석 유영모, 함석헌, 장일순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전통의 재해석을 시도한 것은 한국의 기독교의 특이한 성격때문이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구한말과 일제시대, 해방 이후의 현실에 대처할 수 없었던 유교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심적 도피처였다고 본다. 함석헌은 기독교의 신을 믿고 노자와 장자를 읽으면서 현실 초월의 소망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런 동기가 있었던 함석헌의 노자 읽기는 적극적인 재해석이었고 ‘대화’였다. 그런 함석헌이 읽어낸 노자는 알기 쉬운 평화주의, 생태주의와 같은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이 이책에서 저자들이 하고자 하는 말이다. 이책에는 물론 위에서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가령 장자가 성리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성리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장자가 공문계열의 제자였기에 자신들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논문이나 마지막 장에서 80년대 이후 서구 동양학자들의 저서들이 어떻게 번역되었는가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나 이책의 주논지는 위에서 요약한 것과 같은 번역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번역의 문제의식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개인적으로 동양학 서적을 읽기는 하지만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이책의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사실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책이 대상으로 생각하는 독자는 저자들과 같은 동양학 연구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부사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비전공자로서 동양학 서적을 고를 때 많은 도움이 되는 내용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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