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lor of Water (Paperback, Reissue) - A Black Man's Tribute to His White Mother
James McBride 지음 / Riverhead Books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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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버지니아에 의붓 아버지 가까이 묻어 드릴께요.”
“오 아니야. 날 버지니아에 묻지 마. 난 버지니아에서 도망쳐 나왔어. 다시 그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구나.”
“노스캐롤라이나는 어때요? 아버지 계신 곳에 묻어 드릴께요.”
“아니야. 남부에서 도망치느라 평생을 다 보냈어. 도로 남부에 데려다 놓지 마.”
“알았어요. 그럼 뉴욕 어때요 거기서 40년을 사셨잖아요.”
“너무 복닥복닥해. 난 다른 사람 밑에 눌리고 싶진 않구나.”

죽어서 묻힐 곳도 없는 여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취미는 이사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십 년 내내 이사 중인 유일한 사람이다. 말 그대로 이사는 곧 엄마의 생활양식이 되었다. 동네에 있는 부동산업자라면 누구하고라도 다 허물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묻힐 곳도 없고 정 붙이고 살 곳도 없는 그녀가 태어난 곳은 폴란드의 유대인 게토였다. 폴란드에서 두살까지 산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뉴욕으로 갔다. 랍비였던 아버지는 어렵지 않게 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집불통이고 기익적인 그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를 떠돌아야 했다. 그러다 버지니아의 가난한 촌구석에 가게를 내고 거기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은 그녀의 집이면서 집일 수 없는 곳이었다. 학교에선 예수를 죽인 유대인 계집이라며 따돌림을 당하며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당시 남부에선 인종차별이 심했다. 트럭을 타고 KKK단이 돌아다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고 강에서 ‘니그로’ 시체가 떠올랐다는 말은 심심치 않게 들렸다.

100년전 조상까지 올라가도 노예소유주였던 사람은 드문 그들이 흑인을 깔보고 학대하는 것은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학교에서 그녀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왕따를 당하는 것도 같은 심리였고 그녀는 단지 희생양으로 걸려든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린 그녀에겐 그런 집단폭력에 저항할 힘도 자존심도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환경은 그런 자존감을 키워주지 않았다.

얼마 안되는 유대인들에겐 흑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집안이라며 무시당해야 했다. 가족조차 그녀에겐 의지할 대상이 아니었다. 자기 차는 매년 새것으로 사면서 아이들 옷은 헌옷이어야 하는 이기적인 아버지. 애초에 미국행 티켓으로서 (그녀의 외가친척들이 뉴욕에 살고 있었다) 결혼했을 뿐이며 소아마비 때문에 몸의 왼쪽 절반을 쓰지 못하는 아내에겐 아무런 애정도 없었고 그걸 비열하게 놀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친딸의 몸을 더듬으며 성적 학대를 하는 아버지.

그녀가 의지할 상대는 어머니와 형제들 뿐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오빠도 집을 나갔다. 여동생과는 가깝지만 속을 터놓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혼자인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인간적으로 다가온 것은 가게에 오는 흑인들이었다. 그녀는 차별받고 가난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인 그들이 더 인간답고 밝게 사는 모습을 본다.

그런 그녀가 숨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외가가 있는 뉴욕에 방학동안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가의 이모들은 (내논 자식으로 처분해버린) 불구인 동생의 딸인 그녀에게 무관심했다. 그저 머물게 해주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혼자였다. 혼자인 그녀에게 어느날 이모 공장에 일하는 흑인청년이 들어왔고 그녀는 그와 사랑에 빠진다. 교양이 넘치고 반듯하게 자란 그의 인품과 인간미에 반한 것이다.

흑인과 백인이 결혼하면 남부였으면 죽을 수 있던 시절에 그와 결혼한다는 것은 스캔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겐 잃을 것이 없었으니까.

그와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흑인과 결혼하면서 유대인 사회에서도 절연당하고 백인들에게 외면당하고 흑인들에겐 백인이라고 외면당했지만 그녀는 행복했다. 그녀가 있을 곳을 같이 있어줄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와 8명의 자식을 남겨둔 채 40대에 남편은 죽는다. “하느님을 먼저 생각해” “머리가 텅 비었는데 돈이 다 뭐냐” 그녀는 목사였던 남편의 방식대로 신앙과 배움을 기준으로 자신만의 성에서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다시 반듯하고 인간미 넘치는 흑인과 재혼해 4명의 자식을 더 얻지만 그녀의 세상은 어디까지나 그녀와 자식들이 머무는 ‘성채’에 머물렀다. 그녀가 있을 곳은 가족이 있는 집 이외에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책의 저자이며 8째인 아들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자신은 흑인인데 엄마는 백인인 이상한 상황에서 흑인들 동네인 할렘에 살아야 했던 저자는 언제나 자신은 누구인가란 물음을 가지고 살았다. 그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저자가 10대를 보냈던 시절은 인권운동으로 시끄러웠던 시절이었고 흑인들의 저항의식과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강하던 시절이었다. 이책은 어릴 때부터 나는 어떤 사람인가란 질문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란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이렇게 보면 이책은 혼혈가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일 뿐으로 들릴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자식 12명을 모두 대학원까지 보내고 교수, 의사, 교사, 기자, 전문직 공무원으로 만든 억척 어머니의 아메리칸 드림 스토리로 말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책이 100주 연속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미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교재로 쓰인 이유는 그런 것에 있지 않다. 위에서 요약한 것과 같이 미국역사에서 어두운 부분인 인종차별을 대공황 시절 남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와 60년대 할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저자의 이야기에서 그 차별을 겪으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상처를 가지고 살아야 햇는가를 평이하고 간결하게 보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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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에서 나만 제정신이야? - 회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상식적인 일에 대처하는 86가지 대처법
앨버트 번스타인 지음, 전미옥 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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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기계발서로 분류되는 책의 요즘 경향을 보면 뚜렷한 변화가 보인다. 미국식 성공학의 퇴조이다. 그 이유는 말이야 맞는 말인데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남을 배려하라 겸손하라 칭찬을 하라 다 맞는 말이다. 그래야 인맥을 만들 수 있고 인간관계가 좋아야 성과를 낼 수 있고 성과가 쌓여야 성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책을 주말에 읽고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보라. 책 내용과는 도저히 맞지 않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다.

미국식 성공학의 문제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시크릿이다. 나는 성공할 수 있다고 믿어라 그러면 성공할 수 있다. 이 말 이외에는 실질적으로 아무 내용이 없다. 그러나 성공이 그렇게 쉬우면 생각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면 누가 성공하지 못하겠는가?

직장에서 성공하는, 아니 성공은 고사하고 생존이라도 하려면 그런 류의 책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냉혹한 현실을 견디고 살아남는 기술이 필요하다. 성공하려면 자신감이 필요하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그러나 자신감이란 어느날 아침 나는 자신감을 가질 거야라고 생각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감은 무수한 실패를 겪고 작은 성공을 하면서 나는 이런 아수라장을 뚫고 나왔다는 경험에서 얻어지는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식 성공학은 무대포 낙관주의에 불과하며 현실의 난장판을 무시하는 비현실적 공리공론에 불과하다. 성공도 좋고 부자도 좋다. 그러나 성공하고 부자가 되려면 현실의 아수라장을 견딜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바로 이책의 저자가 알려주려는 것이 그런 기술이다. 이책이 그리는 직장은 제정신이 아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난장판이다. 이책이 그리는 직장에서 사람들은 남을 이용하고 조종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대고 일이 나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남탓하기 대장이며 남의 뒷담화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남에게 일을 떠넘기며 게으름을 부리며 상사에게 아부를 하기 바쁘고 부하에게 부정을 저지르도록 획책한다.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회사문화 자체도 말과 행동이 다른 착란증에 걸려있다. 유행하는 경영이론에 따라 배려, 감사, 칭찬, 창의성 존중, 권한이양, 자율성 존중을 말하지만 실제 회사가 돌아가는 것은 전혀 딴판이다. 그런 이론들이 나오고 그런 이론을 구호로 외친다는 것 자체가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책은 그렇게 미쳐돌아가는 회사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기술을 알려준다.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일개 직원인 내가 회사를 바꿀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바뀌면 된다. 상황을 나에게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이책은 그런 기술들을 말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을 말하는가? 예를 들어 당신의 상사가 꼬치꼬치 디테일에 신경쓰는 참견쟁이 흔히 마이크로매너지먼트라 부르는 관리 스타일이라고 하자. 이런 사람은 작은 일 하나까지 자기가 확인하고 통제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그런 사람치고 큰 그림을 놓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고 내 문제는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그를 만족시켜라. 그가 지시를 할 때 눈앞에서 메모를 하라. 자신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나중에 말이 달라질 때 근거로 내세울 수 잇다. 그리고 그를 정보의 바다에 빠트려라. 과다한 정보는 그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참견의 손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도록 할 수 있다.

이책의 내용은 이런 식이다. 이런 식의 테크닉을 86가지 상황별로 4-6 페이지 정도로 설명하는 것이 이책의 구성이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86가지나 된다고? 4-6페이지라고? 책에 일관성이 없겠군 그리고 내용이 불충분하겠어. 그러나 그런 생각은 기우이다.

물론 86가지나 되는 상황에 대한 테크닉을 담다보니 내용간에는 어떤 일관성이 없다. 이책은 일종의 사전이나 매뉴얼이라고 보면 된다. 그때 그때 필요한 부분을 찾아 읽게 되어 잇고 처음부터 통독할 필요는 없게 구성되어 있다. 다루는 상황에 대해서는 목차에 알기 쉬운 제목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든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아주 유용하다. 4-6 페이지에 불과한 지면에 얼마나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겠나 싶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요약한 참견쟁이 상사의 예에서 처럼 이책의 내용은 상황에 대한 명료한 정의와 함께 그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짧고 간명한 언어로 분명하게 쓰여져 있다. 버릴 것이 없는 간명한 언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수십 페이지로 쓰여진 다른 책들보다 내용이 더 풍부하다.

이상에서 이책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런 정도로는 이책에 대해 제대로 파악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이책은 요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책에는 일관된 저자의 생각이 깔려있다. 예를 들어 도마뱀의 뇌에서 일어나는 분노나 짜증 두려움 같은 즉각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전두엽으로 생각을 하라. 그래야 상황에 더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또는 사내정치는 더러울 수도 잇지만 내가 하려는 일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라거나 아부는 비위를 맞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상사를 사람답게 대우한다고 생각하라든가 여러가지 일관된 저자의 생각이 있다. 그러나 이책의 전체를 일관된 스토리 라인으로 요약할 내용은 이책에 없다. 그러나 이 정도로도 이책이 어떤 책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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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에게 중국을 답하다 - 유광종 기자, '회색'이란 색감으로 중국 문명의 속내를 그리다
유광종 지음 / 크레듀(credu)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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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쓰여졌다. 연암의 질문은 왜 중국에는 “3리마다 城이요 5리마다 廓”이 있는가였다. 중국을 대표하는 유적은 만리장성이다. 한 나라 아니 한 문명을 대표하는 유적이 성벽인 것은 왜일까? 단지 그뿐이 아니다. 조금만 길을 가다보면 성을 두른 도시가 나오고 곽을 두른 마을이 나온다.

저자는 중국인들이 두르는 성벽은 도시와 마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중국의 사무실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파티션이라 저자는 지적한다. 물론 중국인들만 파티션을 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을 열자 마자 사람을 압도하는 파티션의 배치와 사람과 책상을 완전히 가리는 파티션의 높이는 중국에서만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도시와 마을을 둘러치는 성곽과 사무실의 파티션은 같은 것이라 말한다.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단절하는 중국인의 폐쇄성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한 폐쇄성은 철저하게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며 개인주의로 나타난다.

누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극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개인주의와 남이 뭘 하건 신경쓰지 않는 무신경함이 중국인의 특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이 축구에 약한 이유를 저자는 개인주의에서 찾는다. 축구는 팀의 예술이다. 개인기보다는 팀웤이 우선하는 스포츠이다. 그러나 중국선수들은 공을 가지고 갈 수 있을 때까지 물고 늘어지다 어쩔 수 없으면 패스를 한다. 이런 개인주의로는 축구에서 이길 수 없다. 중국이 잘 하는 종목은 개인종목인 이유가 바로 개인주의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의 음악은 진정한 전통음악은 독주이다. 중국음악에선 박자가 발달하지 않았다. 중국음악에선 멜로디가 중요하다. 박자는 다른 악기와 합주를 할 때 공통의 약속으로서 필요하다. 그러나 독주가 발달한 중국에선 박자감각이 발달할 수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은 물론 타이완에서도 대기업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를 저자는 개인주의에서 찾는다. 중국에서 대기업은 국영기업이나 민영화된 국영기업만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은 세상을 나의 영역과 나를 뺀 나머지로 나누는 개인주의자들이 모인 사회이다. 그러나 사회는 사람이 모여 이루어지는 곳. 모래알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방법은 누구나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분명한 명분으로 사람들을 묶는 것이다. 그것은 유교이다. 그러나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은 형식적일 수 밖에 없다. 개인주의자들이 모여 겉으로 하나가 되려면 내세울 수 있는 공통분모는 극도로 형식적인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명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불신하는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중국인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겉으로 보이는 명분의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비공식적인 관시(關係)의 네트웍이며 그 네트웤을 움직이는 원칙은 개인의 이익의 연결이다. 밖으로는 유교를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도가의 둥글둥글한 처세술, 더 실질적으로는 법가의 권모술수의 세계라고 저자는 말한다(外儒內法). 중국인들이 (사람의 심리를 능란하게 읽어야 하는) 마작에 열광하고 (궁중의 권모술수를 그리는) 사극에 열광하는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노자를 법가, 병가와 묶어 열전을 지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도가를 중국인들은 법가의 관점에서 이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外儒內法이란 중국인의 성격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저자는 중국의 길고긴 혼란의 역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중국의 역사는 외침이 잦고 왕조의 교체가 잦았으며 가뭄과 홍수와 같은 재해가 잦았다. ‘산은 높고 황제는 멀다’는 말처럼 그럴 때 기댈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엇고 자신과 혈연적으로 이어진 가족, 친척뿐이었다.

왕조교체기의 혼란이 일어나거나 가뭄이 들고 홍수가 지면 양식을 찾아 (친척이기 마련인) 마을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떼를 지어 다른 마을을 습격하기 마련이었고 낮에는 농부 밤에는 도적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도 아니면 떼를 지어 다른 지방으로 이주를 했다. 그러나 이주를 해가는 곳이 빈땅인 경우는 없으니 결국 약탈이나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지주나 상인과 같은 부자들 역시 공권력을 믿을 수 없기에 스스로 무장하게 마련이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10미터가 넘는 담을 쌓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집을 요새화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시대를 강호라 부르며 미화하고 과장한 것이 무협지의 세계이다.

생존이 당연하지 않은 무질서가 드물지 않았던 역사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만들었고 생존을 위해 혈연을 따라 지연을 따라 뭉치게 만들었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주위에 둘러친 담장에 갖쳐 살 수만은 없다. 새로운 사람과도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는 항상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고 상대의 의중을 따지고 말을 조심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런 공을 들여 만들어지는 사람들의 관계를 관시라는 이익의 네트웤이었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이다. 물론 이책에는 이보다 더 많은 내용이 있다. 가령 천인합일, 무위자연을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만리장성을 쌓고 대운하를 파며 삼협댐을 만들고 기형 금붕어를 양산하며 假山을 만드는 중국인의 문명은 자연과 조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대결하고 입맛에 맞게 개조하는 문명이었다는 내용이나 한족이란 개념은 혈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으로 melting pot으로서 중국문명의 성격을 나타낸다는 내용이나 중용이 도가 아니라 술로 실천되는 중국인의 처세술 등 다양한 내용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외유내법이란 말로 책의 중심내용을 요약하고 거기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내용만 요약햇다.

중국에 관한 책은 많고 많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외유내법(저자가 이말을 쓰고 있지는 않다. 저자는 外方內圓이란 말을 쓴다)이란 말로 요약되는 이책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상기에 그치는 다른 책들과 달리 저자의 오랜 경험과 사색에서 나온 분명한 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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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 1881 함께 읽는 교양 6
토머스 캐스카트 지음, 윤인숙 옮김 / 함께읽는책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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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저자들이 키어케고어의 말을 비튼 말이다. 불안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불렀던 북구의 철학자의 그말은 이후 실존주의 계열의 철학자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기준이 된 말이다.

개인적으로 죽음이란 것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실존주의 계열의 작가인 시몬 드 보봐르의 소설을 읽었을 때였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뻔한 말이 제목으로 붙은 그 소설의 주인공은 13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왕이었다. 그는 어느 노인을 죽이지 않는 대가로 불사의 약을 얻고 좋아한다. 죽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자신의 도시를 번영으로 이끈다.

그리고 도무지 늙지도 않고 칼을 맞아도 물에 빠져도 죽지 않고 병도 안 걸리고 계속해서 긴 세월을 인간으로서의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도 몇 번 한다. 그러나 당연히 사랑했던 여인들은 모두 먼저 떠나간다. 사랑을 했기 때문에 아이도 낳는다. 그러나 자식을 보면서 그는 괴롭다. 자식이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보장된 영생을 이용하여 인간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최대의 야심을 불태우며 속세에서의 권력을 획득하고 이를 이용하여 세상를 지배해보고자 노력한다. 장군이 되어 전쟁도 벌이고, 왕이 되기도 하고, 예술가로서 살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다...

결국에는 걸인으로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낸다. 길고 긴 젊음을 누리기에 인간일 수 없는 존재이지만 영생의 무게를 짊어지기에는 인간의 평범한 마음을 가졌기에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인간.

보봐르의 이 소설보다 죽음의 의미를 더 설득력 있게 말하는 작품은 보지 못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이 불행한 것은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삶은 한번 뿐이기에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불멸을 얻었기에 무의미에 파묻혀 무너진 것이다.

삶의 의미는 죽음으로 드러난다는 명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유래한다. 하이데거는 잡담(읽었던 영어원서에는 chatting이란 말로 번역한다)을 왜 하는가란 질문을 던진다. 무의미하고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잡담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sein, being)가 無일 수 있다는 것을 잊으려 한다는 것이다. 존재의 의미, 즉 내가 여기 지금 ‘있다는(being)’ 것은 무슨 의미인가를 알려면 우리는 잡담을 그만두고 우리가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자 즉 여기 지금 내가 없을 수 잇다는, 나의 존재가 무일 수 있다는 것,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Being-toward-death)’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봐르의 소설도, 그리고 이책의 저자들이 소개하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항해 조리를 찾는 인간을 그린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도 하이데거의 이런 명제에서 나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의 명제를 그렇게 실존주의적으로 읽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런 독해는 기껏해야 문학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Being-toward-death’는 ‘존재와 시간’에서 어디까지나 존재의 의미를 알고 있는 현존재(dasein, 즉 인간)에게 존재의 의미를 묻기 위한, 즉 비존재의 가능성을 드러내어 존재의 의미를 밝히기 위한 방법론적 질문이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과 프랑스 실존주의를 구분한 것은 실존주의적인 죽음의 자각이 현실성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책의 저자들 역시 동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은 이책을 유머와 위트로 채우고 있다. 죽음을 인정하면서 맨정신으로 생활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적어도 내일은 멀쩡하게 살아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이데거가 잡담으로 죽음을 잊어버린다고 말하듯이 말이다.

저자들은 종교가 그런 망각의 도구라고 말한다. 모든 종교는 죽음 이후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잇다. 유대교 계열에선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고 불교와 힌두교는 윤회를 말한다. 종교의 가장 큰 효용은 죽음을 망각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간에는 호환성이 없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죽음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설명 모두를 믿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망각하기 위해선 내가 받아들인 설명 이외에 다른 설명은 옳아서는 안된다. 다른 설명도 옳으면서 내가 받아들인 설명도 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종교간에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상이 이책의 논의를 나름대로 정리해본 것이다. 물론 이책의 논의는 이보다 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데카르트, 현상학, 헨리 제임스 등 다양한 철학자들의 논의를 짧막하게 요점을 잘 정리해서 보여준다. 이책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말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까지 있어온 죽음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최대한 다양하게 보여주는데 있지 저자들의 판단에 따라 철학자들과 종교들을 재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책의 후반에서 저자들은 현대판 불노초에 할애하고 있다. 불치병을 고친다는 의학계의 노력, 냉동보존요법, 복제인간, 사이버 영생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면서 최대한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다양하게 보여주려 한다. 저자들의 의도는 최대한 많이 보여주고 독자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다면 이책은 단순한 잡동사니에 불과하게 된다. 최소한 저자들 자신의 기준이 없다면 단순한 사전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정리한 것은 저자들 자신의 기준이 무엇일까를 나름대로 추측해 정리해본 것이다. 어쩌면 이책의 내용보다 위에서 정리한 것이 더 어렵게 생각될지 모르겠다. 사실 저자들은 이책의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수많은 위트와 유머를 섞고 있고 최대한 쉬운 말로 철학에 낯선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책을 쓰고 있다. 한마디로 쉽게 재미있게 읽으면서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책을 잃을 나서 위에서 정리해본 내용을 떠올려 본다면 책내용을 정리해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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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2 - 미국의 건국과 '명백한 운명' 미국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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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권으로 기획된 미국통사의 2권은 건국에서 남북전쟁 이전까지를 다룬다.

2권의 시작은 연방파와 공화파의 대립에서 시작한다. 두 정파의 대립은 새로 건국된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었고 개인과 국가 사이의 균형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공화파의 주장은 국가보다 개인의 권리가 우선한다는 논리였다. 그들의 주장은 권리장전이란 형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수정헌법에 실린다.

그러나 공화파의 정치적 기반은 개인의 집합인 유권자가 아니라 더 강한 주정부를 주장하는 지역주의일 수 밖에 없었다.

연방파는 더 큰 시장과 그 시장을 보장하는 (지역주의를 넘어선) 연방정부를 주장하는 것으로 자본가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졌다.

논쟁의 결론은 자연스럽게 연방파의 승리로 예정될 수 밖에 없었다.

연방파와 공화파의 논쟁과 함께 이 시대를 규정한 논쟁의 다른 축은 노예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였다.

저자는 미국의 건국 초기를 규정한 정치적 지형을 두가지 논쟁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잭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미국의 정치지형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연방파/공화파, 그리고 노예제 찬성/반대의 두가지 논쟁은 동부 중심의 귀족정치의 어젠다였다.

그러나 무식하고 가진 것 없이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잭슨의 당선은 그런 사람이 당선된다는 것 자체가 사건이었고 그가 대변하는 계층들이 정치판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자체로서 지진을 일으켰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그의 등장은 소수 가진자들의 것이었던 정치에도 다수 못 가진자들이 끼어들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시작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잭슨 민주주의가 등장하던 시기는 언론의 팽창이 있었다. 1센트 신문이 등장하던 당시 그런 가격에 신문이 팔리려면 독자가 많아야 했다. 독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글을 읽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소비층이 두텁다는 말이다.

잭슨 민주주의는 바로 그 신문을 소비하던 사람들에 의해 가능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그 잭슨 민주주의는 잭슨의 정치는 객관적으로 볼 때 실패작이엇다. 그의 정치는 무식했고 기껏해야 포퓰리즘에 불과했다. 그 정치적 기반인 대중의 수준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분위기였던 경박함, 가벼움, 탐욕, 근거없는 낙관주의, 오만함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란 말로 요약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명백한 운명이란 말이 처음 쓰인 것은 1845년으로 "해마다 증가하는 우리 수백만 미구긴들이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할당해주신 대륙을 온통 뒤덮기 위한 명백한 운명을 이행하자. 우리는 인류의 진보를 추구하는 민족이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란 언론인의 글에서 처음 쓰였다.

마치 종교적 사명처럼 들리는"명백한 운명을 말한 가장 큰 동기는 역시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전대륙을 지배하고자 하는 미국인들의 망상에 가까운 욕심, 즉 탐욕이었다. 미국인들이 세대를 이어오렴 문명의 저변을 점차 넓혀왔듯이, 이 욕심도 겉으로는 열렬한 종교적 구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Davis 2000)

인디언의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뺐고 멕시코의 땅을 절반을 뺐으러 전쟁을 벌이면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마치 신이 내린 사명처럼 정당화하고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저자는 "독일 사람으로서 오늘날 이 말을 들으면 동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이야말로 독일민족의 사명이며 '섭리'라고 외치던 히틀러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독일인 겔페르트(2003)을 인용하면서 미국의 명백한 운명이란 말은 당시 제국주의 시대에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영국은 '백인의 의무' 프랑스는 '문명인의 의무' 독일은 '생활공간을 위한 욕구'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땅 따먹기를 정당화하던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말들을 내세운 미국은 당시 서구열강과 다를 것없는 '제국'이엇다는 것이다. 단지 미국은 바다를 건너지 않은 것뿐이다.

그런 말들을 내세우며 신이 세상을 자신에게 주었다고 믿을 수 있던 근거는 자신감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특히 미국은 더더욱 그랬다는 것이다. 경쟁자라고는 미개한 인디언 뿐이었던 북미대륙은 빈땅에 불과했고 그 빈땅을 차지하면서 농토를 얻고 산업을 일으키며 부를 쌓았고 금을 얻어 노다지를 캐냈다. 승승장구하는 그들은 신이 그들에게 승리할 운명을 주었다고 믿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백한 운명이란 말은 미국은 특별하다는 예외주의와 미국 선민의식의 뿌리가 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상이 2권의 내용이다. 위에서는 요약을 하기 위해 저자의 논점을 분명하게 단정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실제 이책의 서술방식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를 주저한다. 아마도 미국사를 전공하지 않았다는 자신감의 결여때문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사료를 요약하고 다른 권위자의 말을 빌려 자신의 논점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읽기에는 좀 피곤한 방식이다. 그러나 저자의 그런 심리를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그리 혼란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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