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 ㅣ 1881 함께 읽는 교양 6
토머스 캐스카트 지음, 윤인숙 옮김 / 함께읽는책 / 2010년 8월
평점 :
이책의 저자들이 키어케고어의 말을 비튼 말이다. 불안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불렀던 북구의 철학자의 그말은 이후 실존주의 계열의 철학자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기준이 된 말이다.
개인적으로 죽음이란 것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실존주의 계열의 작가인 시몬 드 보봐르의 소설을 읽었을 때였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뻔한 말이 제목으로 붙은 그 소설의 주인공은 13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왕이었다. 그는 어느 노인을 죽이지 않는 대가로 불사의 약을 얻고 좋아한다. 죽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자신의 도시를 번영으로 이끈다.
그리고 도무지 늙지도 않고 칼을 맞아도 물에 빠져도 죽지 않고 병도 안 걸리고 계속해서 긴 세월을 인간으로서의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도 몇 번 한다. 그러나 당연히 사랑했던 여인들은 모두 먼저 떠나간다. 사랑을 했기 때문에 아이도 낳는다. 그러나 자식을 보면서 그는 괴롭다. 자식이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보장된 영생을 이용하여 인간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최대의 야심을 불태우며 속세에서의 권력을 획득하고 이를 이용하여 세상를 지배해보고자 노력한다. 장군이 되어 전쟁도 벌이고, 왕이 되기도 하고, 예술가로서 살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다...
결국에는 걸인으로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낸다. 길고 긴 젊음을 누리기에 인간일 수 없는 존재이지만 영생의 무게를 짊어지기에는 인간의 평범한 마음을 가졌기에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인간.
보봐르의 이 소설보다 죽음의 의미를 더 설득력 있게 말하는 작품은 보지 못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이 불행한 것은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삶은 한번 뿐이기에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불멸을 얻었기에 무의미에 파묻혀 무너진 것이다.
삶의 의미는 죽음으로 드러난다는 명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유래한다. 하이데거는 잡담(읽었던 영어원서에는 chatting이란 말로 번역한다)을 왜 하는가란 질문을 던진다. 무의미하고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잡담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sein, being)가 無일 수 있다는 것을 잊으려 한다는 것이다. 존재의 의미, 즉 내가 여기 지금 ‘있다는(being)’ 것은 무슨 의미인가를 알려면 우리는 잡담을 그만두고 우리가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자 즉 여기 지금 내가 없을 수 잇다는, 나의 존재가 무일 수 있다는 것,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Being-toward-death)’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봐르의 소설도, 그리고 이책의 저자들이 소개하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항해 조리를 찾는 인간을 그린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도 하이데거의 이런 명제에서 나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의 명제를 그렇게 실존주의적으로 읽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런 독해는 기껏해야 문학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Being-toward-death’는 ‘존재와 시간’에서 어디까지나 존재의 의미를 알고 있는 현존재(dasein, 즉 인간)에게 존재의 의미를 묻기 위한, 즉 비존재의 가능성을 드러내어 존재의 의미를 밝히기 위한 방법론적 질문이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과 프랑스 실존주의를 구분한 것은 실존주의적인 죽음의 자각이 현실성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책의 저자들 역시 동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은 이책을 유머와 위트로 채우고 있다. 죽음을 인정하면서 맨정신으로 생활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적어도 내일은 멀쩡하게 살아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이데거가 잡담으로 죽음을 잊어버린다고 말하듯이 말이다.
저자들은 종교가 그런 망각의 도구라고 말한다. 모든 종교는 죽음 이후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잇다. 유대교 계열에선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고 불교와 힌두교는 윤회를 말한다. 종교의 가장 큰 효용은 죽음을 망각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간에는 호환성이 없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죽음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설명 모두를 믿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망각하기 위해선 내가 받아들인 설명 이외에 다른 설명은 옳아서는 안된다. 다른 설명도 옳으면서 내가 받아들인 설명도 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종교간에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상이 이책의 논의를 나름대로 정리해본 것이다. 물론 이책의 논의는 이보다 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데카르트, 현상학, 헨리 제임스 등 다양한 철학자들의 논의를 짧막하게 요점을 잘 정리해서 보여준다. 이책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말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까지 있어온 죽음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최대한 다양하게 보여주는데 있지 저자들의 판단에 따라 철학자들과 종교들을 재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책의 후반에서 저자들은 현대판 불노초에 할애하고 있다. 불치병을 고친다는 의학계의 노력, 냉동보존요법, 복제인간, 사이버 영생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면서 최대한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다양하게 보여주려 한다. 저자들의 의도는 최대한 많이 보여주고 독자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다면 이책은 단순한 잡동사니에 불과하게 된다. 최소한 저자들 자신의 기준이 없다면 단순한 사전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정리한 것은 저자들 자신의 기준이 무엇일까를 나름대로 추측해 정리해본 것이다. 어쩌면 이책의 내용보다 위에서 정리한 것이 더 어렵게 생각될지 모르겠다. 사실 저자들은 이책의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수많은 위트와 유머를 섞고 있고 최대한 쉬운 말로 철학에 낯선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책을 쓰고 있다. 한마디로 쉽게 재미있게 읽으면서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책을 잃을 나서 위에서 정리해본 내용을 떠올려 본다면 책내용을 정리해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