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경제학 (반양장)
누리엘 루비니 & 스티븐 미흠 지음, 허익준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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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해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다.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의 책도 적지 않다. 읽은 것만 해도 아타리, 실러, 아글리에타의 책들이 그중의 일부이다. 그러나 루비니의 책은 지금까지 나온 책들 중에서도 특별하다.

우선 루비니의 이책은 분량에서 다른 책들을 압도한다. 이책은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행과정에 대해 어느 책보다 폭넓게 다룬다.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선 이제 상식에 가깝다. 이책의 원서가 나온 2009년에도 그것은 상식이었다. 그러나 이책 이전에 나온 책들은 아직 사건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니었고 위기가 아직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이책이 갖는 시야의 폭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이책에서 저자들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어떻게 발생했고 정책당국의 대응은 어떠했으며 어떻게 정부의 대응에 의해 사태가 진정국면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자세하게 그려나간다.

물론 저자가 다루는 내용은 이미 익숙한 것들이고 낯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3년간의 사태를 다시 정리해 개관한다는 점에서 이책은 지금까지 나온 책들 중 단연 최대의 폭을 자랑한다.

저자는 이번 위기가 과거의 금융위기들과 그 성격에서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금융위기는 민스키가 말하듯 어디까지나 거품이 커지고 거품이 터지는 단순한 사이클을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번 위기가 달랐던 것은 세계화 때문에 전 세계의 금융시장이 하나로 묶여있었기 때문에 그 충격파가 어느 위기보다도 거대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번 위기가 대공황과 비교되는 것은 대공황 역시 세계화로 세계경제가 만들어져 있었던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 위기에선 대공황이 재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정부들의 의지가 강력햇고 재빠르고 강력한 조치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공황과 같은 사태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자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대공황의 충격은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는 합의가 쉽게 이루어졌고 그 합의에 따라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선 위기가 재빨리 진화되었기 때문에 그런 합의가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었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만들어졌다.

저자는 이번 위기의 원인이었던 글로벌 불균형은 균형을 찾아 조정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 결과 미국의 경제적 패권은 무너질 것이고 달러의 지위도 무너질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위기는 그 과정에서 계속 재발될 것이다.

문제는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위기들의 충격파를 줄일 제도적 장치를 만들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몇가지 규제개혁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선 문제가 된 증권화 상품들의 표준안을 만들고 파생상품을 공개적인 거래소에 등록하는 장치와 같은 금융의 투명성 제고를 위한 개혁이 필요하며 이번과 같이 단기적 이익을 쫓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금융업체의 보수체계를 회사의 장기적 이익에 연동되도록 만드는 조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번 사태에서 중앙은행들이 망해야 할 회사들을 구제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문어발 불사(too interconnected to fail) 문제를 풀기 위해 글래스-스티컬 법과 같은 제도가 다시 부활되어 거대금융사들을 분할해 작게 만들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책은 지금까지 나온 어떤 책들보다 더 자세하게 이번 위기를 개관하고 있다. 후에 이번 위기에 대한 기본서적을 꼽는다면 이책이 포함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저자의 목적은 경제사를 쓰는 것에 있지는 않다. 저자의 목적은 위에서 요약한 개혁이 왜 필요한지를 말하기 위해 이번 위기가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고 그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기 위해선 어떤 개혁이 필요한지를 말하기 위해서 이책을 썼다. 저자는 대공황의 비극으로 만들어진 규제 시스템이 그후 80년의 안정을 제공했듯이 이번 위기는 그런 제도적 안정을 만들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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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세상을 삼키다 - 모바일 레볼루션 - 미디어의 새로운 변신
유진평 외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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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내용은 잡다하다. 내용 간에 상호연관성이 크고 전체적으로 스토리라인을 만들어 흐르기는 하지만 하나 하나의 챕터들은 수미일관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식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신문의 특집기사 분량에 글의 스타일도 그런, 개성이 강한 챕터들이 모여 모자이크를 만들면서 큰 그림을 만드는 방식이라 보면 된다.

그러면 이책이 그리려는 모자이크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디어 생태계이다. 미디어 생태계는 2000년대 인터넷 혁명, 그리고 2010년대에는 모바일 혁명을 겪고 있다. 그리고 두번의 혁명을 거치면서 생태계에 거주하는 업체들의 생존논리를 바꾸고 있다.

"기존 미디어의 전달 방식이 독자와 시청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一對多 방식의 放送(broadcating) 개념이었다면 인터넷 미디어는 이를 一對少 방식의 狹送(narrowcating)으로 바꿔 놨다. 스마트폰의 장점은 사용자가 누구인지 특히 위치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수 있다는 엄청난 이점이 있다. 때문에 스마트폰 대중화는 미디어를 사용자에게 콕 찍어 전달하는 多對多 방식의 点送(pointcasting) 시대로 이끌 것으로 예상된다."

이책이 그리는 미디어 생태계의 그림이다. 미디어의 채널이 아무리 바뀌어도 미디어를 통해 보내지는 메시지 없이 즉 콘텐츠 없이 미디어는 성립되지 않는다.

'방송 방식'에서 협송, 점송 방식의 채널에 적응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것이 이책이 다루는 업체들의 화두이다.

이책의 1부에선 미국과 유럽의 미디어 업체들이 새로운 채널 방식에 어떻게 적응하려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타임워너, 디즈니, 뉴스코프, 비방디 등과 같은 업체들은 미디어가 아무리 바뀌어도 결국은 콘텐츠가 왕이라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이들 글로벌 그룹들은 방송, 인쇄, 인터넷의 거의 모든 채널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초점은 채널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채널을 통해 보내지는 콘텐츠를 확보한다는 것이다. 채널 간의 차이가 약화되고 하나의 소스로 여러 채널에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콘텐츠 생산에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한다는 전략이다.

2부에선 미디어 산업의 세계화에 한국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결론을 말하자면 비관적이라는 것이다. 미디어법 개정은 미디어산업의 세계화에 대응해 국내에서도 규모의 경제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국내 미디어 산업의 입장에서 미디어법은 생사의 문제였다.

미디어 산업의 근본적인 문제는 국내 시장의 규모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국내 미디어시장의 규모는 미국의 1/18이다. 세계시장에서 점유율은 2%대에 머문다. 규모의 차이가 크다보니 콘텐츠의 질도 열악할 수 밖에 없다. 국내 드라마 편당 제작비는 미국의 1/20이다.

미디어법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자면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략적으로 악용되면서 미디어법은 오랜 시간을 끌었다. 통과되기는 했지만 단지 시작할 조건을 만들어졌을 뿐이다.

3부에선 모바일 혁명을 중심으로 다룬다. 그러나 모바일 생태계는 이제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1부와 2부에서 다루었던 인터넷 혁명이 미디어 생태계를 바꾸어 놓은 것과 같은 내용을 다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책에선 모바일 생태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고 잇는지를 트위터, 애플, 노키아, 블랙베리, 삼성-LG 등의 업체들의 전략을 살펴보면 개관한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이책의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긴 특집기사를 보는 것과 같은 성격으로 되어 있다. 신문보다는 지면의 여유가 많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더 깊이 있는 분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다른 점이지만 신문의 특집기사를 읽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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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컬처코드 - 문화코드를 알면 트렌드가 보인다 알면 보인다
주창윤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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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전과 이후의 문화를 구분하는 가장 큰 라인은 미디어 권력의 이동이다.

미디어 없이 사회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의 머리 속에는. 우리가 자신을 한국인이라 알고 바다 건너 일본이 있다고 아는 것은 TV에서 신문에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근대 국민국가가 미디어와 함께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근대사회에서 미디어를 지배한 것은 물론 신문과 방송였고 사람들은 그런 매체가 공급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소비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터넷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인터넷은 정보의 흐름을 양방향으로 바꾸어 놓았고 사람들은 미디어의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가 되었다.

저자들은 미디어 권력의 이동이 가능하게 한 2000년대 한국의 시대정신을 게릴라 정신과 놀이 정신이라 부르며 그 정신의 주체를 참여세대(또는 P세대)라 부른다.

저자들은 해방 이후 한국의 세대를 10년 단위로 끊어 전후세대, 4.19세대, 청년문화세대, 386세대, 신세대, 그리고 참여세대로 구분한다.

"P세대는 월드컵, 대선, 촛불시위 등을 거치면서 나타난 세대로 사회 전반에 걸친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키는 세대이다." 제일기획의 참여세대에 대한 정의이다.

그러나 대학생이 주축이었던 이전 세대들과 달리 참여세대는 모호한 것이 특징이라 저자들은 지적한다. 이 세대는 10대 후반부터 30대까지 걸쳐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전 세대의 문화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참여세대를 규정하는 힘은 특정연령대의 공유된 경험이 아니라 인터넷이란 새로운 미디어가 열어 놓은 공간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제일기획이 이 세대가 만들어지는 계기로 지적하는 월드컵, 대선, 촛불시위는 구체적으로 붉은 악마와 광장의 응원, 노사모와 같이 인터넷이 열어놓은 공간에서 일어난 이벤트였다. 인터넷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인 연령대가 모두 참여세대의 문화를 만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참여세대는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다. 이들은 인터넷이란 미디어가 주는 힘을 이용해 권위에 도전했다. 그들의 도전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었다. 이 세대를 만든 계기가 된 월드컵 응원도 노사모도 촛불집회도 어떤 동원력 있는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게릴라적인 움직임이 모여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구 미디어가 대표하던 질서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인터넷이란 공간은 놀이의 공간이었다.

"광우병 촛불집회는 게릴라 특성을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진지한 놀이로서의 문화도 만들어냈다. 촛불집회에서 게릴라적 싸움만 있었다면 그것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의 저항은 투쟁이 아니라 놀이였다. 1987년 6월 항쟁은 독재타도를 외치며 광화문과 시청거리를 메웠지만 모두 투쟁에만 몰두했지 놀이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촛불집회는 게릴라로서의 놀이족, 놀이족으로서 게릴라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참여세대에게 인터넷은 장난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터넷 게임, 블로그, 글 올리기와 댓글쓰기 모두 놀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그러면 그들이 인터넷이란 장난감으로 갖고 논 것은 무엇인가? 저자들은 그들이 갖고 논 것들을 5가지 코드로 읽어낸다. 유목민 코드, 참여 코드, 몸 코드, 섹슈얼러티 코드, 역사적 상상력 코드.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갔을 때의 느낌은 우울하다. 몸짱, 야오이, 위버섹슈얼, 도피로서의 민족주의, 된장녀, 신상녀 등과 같은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좌절의 에토스이다.

저자들은 고구려를 소재로 한 사극이 대대적으로 유행한 것을 특징적으로 말한다. 왜 하필 고구려인가? "우리 민족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 우리 민족이 세계의 중심이었던 시간" '주몽'의 제작의도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이 별볼일 없기에 잘 나가던 옛날을 소환하는 것이 아닌가?

저자들은 촛불시위에서 표출된 반미감정도 역시 고구려 민족주의의 이면일 뿐이라 말한다. 2000년대의 반미는 약자로서의 반감이다.

현실의 '우리'에 대한 욕구불만, 또는 좌절은 '나'의 차원에서의 좌절 때문에 있는 것이다. 몸짱 얼짱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외모에 대한 집착이 왜 있었을까? 보상심리가 아니었을까? 야오이는 왜 유행했는가? 왜 그렇게 소녀 소년 팀이 많은가? 로리를 원하기 때문이 아닌가? 현실에선 되지 않는 것을 이미지로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아닌가? 모두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이 가상에서 충족되는 것들이 아닌가?

좌절은 분노를 낳는다. 그 분노는 미국을 향했고 기성정치질서로 향해 노사모가 되었다.

그러나 그 분노는 공적 대상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저자들은 개똥녀 사건이나 강사녀 사건에서 드러난 폭력성이나, 된장녀, 신상녀와 같은 여성을 지칭하는 말들에서 개인을 향해 분출된 분노를 읽는다.

물론 참여세대가 2000년대에 만들어낸 문화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이란 구호로 광장에 모였던 월드컵 응원은 그 시절의 꽃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을 돌아볼 때면 왜 그렇게 좌절과 분노가 지배적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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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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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어떤 신도 보이지 않는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었던 유리 가가린이 우주에서 한 말이다. 이책의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저자는 신이 있다 없다는 지루한 논증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책에서 우리는 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란 질문을 하려 한다. 그런 저자의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한편의 시이다.

천국(Heaven)

Rupert Brooke

(파리를 포식하고 나른하게 오후를 빈둥거리고 있는)
물고기가 말한다. 그들에겐 냇물과 연못이 있다고.
그러나 그 '너머'에도 뭔가가 있을까?
이런 삶이 '전부'일리는 없다.
이게 전부라면, 얼마나 불쾌한 일인가?

물고기라면 누구나 '선(善)'이
'물'과 '진흙'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경건한 물고기는
(물의) '흐름'이 어떤 '목적'이 있음 볼 수 있다.

우리가 부르짖는 '믿음'에 의해
미래는 '완전한 가뭄'은 아니리라.
진흙 위에 진흙! - 죽음의 소용돌이가 가까웠느니라
약속된 '종말'이 여기는 아니다, 여기는 아니야!

그러나 다른 어딘가, '공간'과 '시간' 너머에,
보다 축축한 물, 보다 끈끈한 점액이 있으리라!
거기엔 (이들은 믿었다0 거기엔 헤엄치는 '그분'.
강들이 시작되기 전부터 헤엄친 그분이 계시리라고.

거대한, 물고기의 형태와 정신을 지닌,
비늘 달리고, 전능하며, 자비로운 존재.
그 전능자의 지느러미 아래로,
가장 작은 물고기도 들어갈지니.

오! 낚싯바늘을 숨기고 있는 파리 따위는,
그 '영원의 냇물'에 전혀 없다고 물고기는 말한다.
대신 현세의 잡초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 있고,
그곳의 진흙은 놀라우리만치 맑다고.

통통한 애벌레들이 주위에 떠 다니고,
낙원의 구더기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들지 않는 나방과, 불멸의 파리와,
결코 죽지 않는 지렁이가 잇다고.

그리고 그들 모두가 바라는 그 천국에는,
무엇보다도 땅이 없다고, 물고기는 말한다.

물고기의 눈엔 물만 보이고 구더기만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이란 물고기의 물과 구더기가 아닐까 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그런 물고기의 종교관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 자신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보다 무겁다. 내가 보지 않고 들을 수 없으며 만질 수 없는 세계란 어떤 의미도 없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나'의 죽음은 세계의 종말이며 그런 '나'는 세계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그런 내가 있는 곳은 우주의 중심일 수 밖에 없다.

엘리아데의 종교학(엘리아데 이론에 대한 입문으로는 '성과 속'이 추천할만하다)에선 그런 우주의 중심을 '옴파로스'라 부른다. 우주의 배꼽은 언제나 내가 있는 곳일 수 밖에 없으며 그 배꼽에는 우주의 '거룩함(聖, sacred)'이 現前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거룩함이 현전하는 곳이므로 우주의 공간은 옴파로스를 경계로 코스모스(질서)와 카오스(혼돈)으로 나뉜다. 코스모스의 공간에 사는 나는 '참 인간'이고 코스모스를 벗어난 곳에 사는 다른 인간들은 나와 같을 수 없다.

천동설은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의 자연스런 표현이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고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돈다.

교황청의 입장에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학설이 위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옴파로스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는 공간이 코스모스의 공간이 아니라면, 옴파로스가 우주에 없다면 거룩함이 있을 곳이, 거룩함이 우리에게 나타날 곳이 사라지는 것이며 우리와 신이 만날 현실의 공간이 제거되는 것이다.

옴파로스에 대한 집착은 끈질겼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의 태양이 중심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태양은 은하수의 변방 귀퉁이에 있는 별 볼일 없는 그저그런 별일 뿐이었다. 그러면 은하수가 우주의 중심이길 바랬다. 그러나 우리 은하는 우주에 흔하디 흔한 은하의 하나일 뿐이고 우주의 은하들은 서로 평등할 뿐 어느 은하도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주에 특권의 장소, 옴파로스는 있을 수 없다.

천문학의 발전은 옴파로스 학살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천문학은 우주를 나누었던 특권적인 공간인 코스모스와 그 나머지 카오스로 나뉜 공간의 비균질성을 평준화하여 우주 어디나 다를 것이 없는, 동일한 물리적 법칙이 적용되는 코스모스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코스모스(질서)는 코스모스(우주)가 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옴파로스가 사라지면서 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가능해졌다. 계몽주의 이후 스피노자류의 理神論(또는 범신론)이 교양있는 계층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다윈의 진화론이 나왔을 때 종교계나 신자들의 반발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이신론이 지배적인 정서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옴파로스의 거주자로서 인간의 자격을 없애는 논리이다. 지구 상의 다른 종들에 대해 인간이 어떤 특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문학이 옴파로스를 지워버린 충격보다 진화론이 더 충격을 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옴파로스가 사라졌을 때 인간이 있지도 않은 옴파로스의 거주자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무슨 대수인가?

과학자들이 신을 부정하지는 않았고 과학자가 무신론자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옴파로스를 학살한 과학자들이 믿는 신은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들의 신과 구분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신을 믿었다. 그러나 그가 믿었던 신은 뉴튼역학 + 상대성이론 + 양자역학 + 열역학 + 기타등등일 뿐이며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전통이 말하는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인격신과는 같을 수 없는 신이다. 과학자들의 신은 우주 어디나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과 다르지 않다.

이책의 저자는 자신이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단지 천문학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전통적인 종교관에서 말하는 신이 가능한지를 자신의 세계관에서 검토할 뿐이다.
사실 저자의 견해는 새로울 것이 없다. 이책에서 저자가 위에서 본 것처럼 옴파로스가 사라지고 이신론이 주도권을 잡게 된 과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저자 자신의 생각을 이책에서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관점은 새로울 것이 없다. 위에서 말한 것은 코페루니쿠스 이후 이신론이 주도권을 잡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저자의 생각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저자의 생각은 옴파로스가 있을 수 없다는 한줄로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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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피고아 - 어떤 조직에서도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의 비책
장동인.이남훈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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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치가 그렇기 때문이다. 공자는 60에 귀에 거슬리는 것이 없게 되었다(耳順)고 했다. 살다보니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구나 알게 되고 허허 웃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노인의 지혜란 그런 것을 말한다.

이책은 지혜로워 지라고 말한다. 남 탓을 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라고(攻彼顧我) 말한다.

직장은 스트레스의 장이다. 하루에도 수십번 스트레스 쌓일 일이 널려 있다. 퇴근하면 어깨가 뭉쳐있고 몸은 무겁다. 일의 피로보다는 사람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큰 이유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해가 진다고 화를 낸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이책은 말한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한다. 그러나 무엇을 알아달라는 말인가? 내 능력은 남달라서? 내가 한 일을 몰라줘서?

이책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분노하기 전에 내가 교만하지 않았는지 돌아보라고 말한다. 당신은 능력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능력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조직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은 조직의 일은 한 사람만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이 없어도 회사는 돌아간다. 알아달라고 하기 전에 당신은 자신을 정말로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었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했었는지 돌아보라고 이책은 말한다.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조직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조직을 중심으로 나를 움직이면 당신은 정말로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될 것이고 당신을 알아줄 것이다고 이책은 말한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가? 남이 나를 배신했다고 분노하기 전에 나는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이익을 주었는가를 생각하라고 이책은 말한다. 어차피 인간관계는 이해관계이다. 단 맛이 안나면 떠나게 되어 잇다. 너무 각박한 말이라고? 그렇지 않은 죽마고우도 있고 가족도 있다고? 그런 관계도 이해관계이다. 나와 함께 있으면 이익이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다. 같이 잇으면 편안하다 즐겁다도 이해관계이라고 생각하면 사는 것이 더 편해진다고 이책은 말한다.

아무리 전에 대단한 것을 해주었더라도 지금 별 볼일이 없거나 앞으로 별 볼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멀어지게 되어있는 것이 인간관계이다. 의리를 말하기 전에 자신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라고 이책은 말한다.

이책의 내용은 이런 식이다. 뻔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뻔한 말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뻔한 말이 상황에 맞게 말해질 때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책은 바로 그렇게 직장이란 환경에서 그런 누구나 아는 뻔한 말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런가? 그러나 그런 책은 많지 않은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책은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아름다운 말로 가려버리는 책들과는 거리가 멀다.

위에서 언급한 겸손이나 배신과 의리에 대한 내용은 다른 책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책은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직장의 현실에 대한 분명한 전제가 있다. 직장은 민주주의가 왕정사회라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잇지만 직장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민주주의보다는 예전에 사라진 왕조국가와 더 가깝다.

회사가 민주주의라면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는 최대한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회사에서 동료나 부하에게 아무리 인기가 많아보았자이다. 물론 유능한 관리자로 여겨져 인사고과에 반영될 수는 있지만 정말 중요한 관계는 당신의 윗선이다. 윗선으로 올라갈 수록 더 많은 자원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책이 전제로 하는 것은 그런 조직의 현실이다. 이책이 말하는 덕목들은 윗사람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이지 만인을 전제로 한 도덕론이 아니다. 이책이 말하는 것은 윗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생각을 어떻게 읽어야 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리고 내가 윗사람인 상황에서 아랫사람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와 같이 상하관계에서 자리를 지키는 방법을 논하는 것이고 그 방법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에선 왕조시대의 고사들이 예로 사용된다. 오히려 평등하지 않은 사회라는 것이 분명한 시대의 사례가 조직이란 사회의 생리를 더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책은 적나라하다. 위에서 겸손하라고 하는 것은 전략으로서이지 사람이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논리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책은 실용주의자의 책이다. 어떤 도덕이든 도덕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효과로서 논해야 가치가 있는 자의 책이다.

이런 류의 직장이란 사회에서 생존술에 관한 책이 올해는 특별하게 쏟아진다. 살기가 팍팍해지면서 생존을 구체적으로 논하는 책이 많아졌다. 얼마 전에 리뷰한 랜덤에서 나온 '이 회사에서 나만 제정신이야?'도 그런 류의 책이다. 올해 나온 직장 생존술에 관한 책 중에서 이책은 그 책과 어깨를 겨룰 수준의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책은 랜덤의 책과는 다른 책이다. 랜덤의 책은 직장 생존술 전반에 대한 것이라면 이책은 상하관계에서의 생존술에 특화된 책이다. 그리고 부사장 직책까지 오른 사람의 시야에서 상하관계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의 현실감각이 돋보인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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