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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ㅣ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평점 :
“여기엔 어떤 신도 보이지 않는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었던 유리 가가린이 우주에서 한 말이다. 이책의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저자는 신이 있다 없다는 지루한 논증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책에서 우리는 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란 질문을 하려 한다. 그런 저자의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한편의 시이다.
천국(Heaven)
Rupert Brooke
(파리를 포식하고 나른하게 오후를 빈둥거리고 있는)
물고기가 말한다. 그들에겐 냇물과 연못이 있다고.
그러나 그 '너머'에도 뭔가가 있을까?
이런 삶이 '전부'일리는 없다.
이게 전부라면, 얼마나 불쾌한 일인가?
물고기라면 누구나 '선(善)'이
'물'과 '진흙'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경건한 물고기는
(물의) '흐름'이 어떤 '목적'이 있음 볼 수 있다.
우리가 부르짖는 '믿음'에 의해
미래는 '완전한 가뭄'은 아니리라.
진흙 위에 진흙! - 죽음의 소용돌이가 가까웠느니라
약속된 '종말'이 여기는 아니다, 여기는 아니야!
그러나 다른 어딘가, '공간'과 '시간' 너머에,
보다 축축한 물, 보다 끈끈한 점액이 있으리라!
거기엔 (이들은 믿었다0 거기엔 헤엄치는 '그분'.
강들이 시작되기 전부터 헤엄친 그분이 계시리라고.
거대한, 물고기의 형태와 정신을 지닌,
비늘 달리고, 전능하며, 자비로운 존재.
그 전능자의 지느러미 아래로,
가장 작은 물고기도 들어갈지니.
오! 낚싯바늘을 숨기고 있는 파리 따위는,
그 '영원의 냇물'에 전혀 없다고 물고기는 말한다.
대신 현세의 잡초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 있고,
그곳의 진흙은 놀라우리만치 맑다고.
통통한 애벌레들이 주위에 떠 다니고,
낙원의 구더기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들지 않는 나방과, 불멸의 파리와,
결코 죽지 않는 지렁이가 잇다고.
그리고 그들 모두가 바라는 그 천국에는,
무엇보다도 땅이 없다고, 물고기는 말한다.
물고기의 눈엔 물만 보이고 구더기만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이란 물고기의 물과 구더기가 아닐까 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그런 물고기의 종교관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 자신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보다 무겁다. 내가 보지 않고 들을 수 없으며 만질 수 없는 세계란 어떤 의미도 없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나'의 죽음은 세계의 종말이며 그런 '나'는 세계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그런 내가 있는 곳은 우주의 중심일 수 밖에 없다.
엘리아데의 종교학(엘리아데 이론에 대한 입문으로는 '성과 속'이 추천할만하다)에선 그런 우주의 중심을 '옴파로스'라 부른다. 우주의 배꼽은 언제나 내가 있는 곳일 수 밖에 없으며 그 배꼽에는 우주의 '거룩함(聖, sacred)'이 現前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거룩함이 현전하는 곳이므로 우주의 공간은 옴파로스를 경계로 코스모스(질서)와 카오스(혼돈)으로 나뉜다. 코스모스의 공간에 사는 나는 '참 인간'이고 코스모스를 벗어난 곳에 사는 다른 인간들은 나와 같을 수 없다.
천동설은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의 자연스런 표현이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고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돈다.
교황청의 입장에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학설이 위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옴파로스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는 공간이 코스모스의 공간이 아니라면, 옴파로스가 우주에 없다면 거룩함이 있을 곳이, 거룩함이 우리에게 나타날 곳이 사라지는 것이며 우리와 신이 만날 현실의 공간이 제거되는 것이다.
옴파로스에 대한 집착은 끈질겼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의 태양이 중심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태양은 은하수의 변방 귀퉁이에 있는 별 볼일 없는 그저그런 별일 뿐이었다. 그러면 은하수가 우주의 중심이길 바랬다. 그러나 우리 은하는 우주에 흔하디 흔한 은하의 하나일 뿐이고 우주의 은하들은 서로 평등할 뿐 어느 은하도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주에 특권의 장소, 옴파로스는 있을 수 없다.
천문학의 발전은 옴파로스 학살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천문학은 우주를 나누었던 특권적인 공간인 코스모스와 그 나머지 카오스로 나뉜 공간의 비균질성을 평준화하여 우주 어디나 다를 것이 없는, 동일한 물리적 법칙이 적용되는 코스모스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코스모스(질서)는 코스모스(우주)가 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옴파로스가 사라지면서 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가능해졌다. 계몽주의 이후 스피노자류의 理神論(또는 범신론)이 교양있는 계층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다윈의 진화론이 나왔을 때 종교계나 신자들의 반발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이신론이 지배적인 정서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옴파로스의 거주자로서 인간의 자격을 없애는 논리이다. 지구 상의 다른 종들에 대해 인간이 어떤 특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문학이 옴파로스를 지워버린 충격보다 진화론이 더 충격을 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옴파로스가 사라졌을 때 인간이 있지도 않은 옴파로스의 거주자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무슨 대수인가?
과학자들이 신을 부정하지는 않았고 과학자가 무신론자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옴파로스를 학살한 과학자들이 믿는 신은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들의 신과 구분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신을 믿었다. 그러나 그가 믿었던 신은 뉴튼역학 + 상대성이론 + 양자역학 + 열역학 + 기타등등일 뿐이며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전통이 말하는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인격신과는 같을 수 없는 신이다. 과학자들의 신은 우주 어디나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과 다르지 않다.
이책의 저자는 자신이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단지 천문학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전통적인 종교관에서 말하는 신이 가능한지를 자신의 세계관에서 검토할 뿐이다.
사실 저자의 견해는 새로울 것이 없다. 이책에서 저자가 위에서 본 것처럼 옴파로스가 사라지고 이신론이 주도권을 잡게 된 과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저자 자신의 생각을 이책에서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관점은 새로울 것이 없다. 위에서 말한 것은 코페루니쿠스 이후 이신론이 주도권을 잡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저자의 생각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저자의 생각은 옴파로스가 있을 수 없다는 한줄로 요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