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인 당신의 강점에 주목하라 - 내성적인 당신에게 잘 맞는 자기 PR 시크릿
낸시 앤코위츠 지음, 신현정 옮김 / 갈매나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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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쓰는 동안 저자는 근처의 호텔 레스토랑에 자주 갔다. 어느 날 우연히 저자는 빌 클린턴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이책을 스고 있다고 말했고 독자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대통령께서는 확실히 외향적인 성격이시죠? 저의 내성적인 독자들이 자기의 존재를 좀더 부각히키는데 도움이 될 조언을 한마디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클린턴은 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방에 있는 벽들이 모두 사라진 듯했다. '글세요, 실제로 나는 내성적인 성격에 가깝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 그럼 지난 20년간 TV 속에서 보아온 그의 모습은 다 뭐란 말인가?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다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보면 그는 내성적인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내가 그 동안 안다고 생각한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계속에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드리고 싶은 조언은 당신 자신을 안으로부터 끄집어내라는 것입니다. 마치 벽에서 진흙을 꺼내는 것처럼 말이죠. 밖으로 나가에쇼. 그리고 시도해보세요. 안되면 될때까지 계속해보는 겁니다.' 나는 그 순간 얼어버린 채 딸 챌시가 자기 아빠의 손을 잡고 끌고 갈 때까지 마치 호박 안에서 꼼짝하지 않는 큰 나방처럼 서 있었다."

클린턴의 예에서 보듯이 겉보기에는 활달한 외향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실제 외향적인지 내성적인지 알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세상이 외향적 사람에게 유리한 곳이다 보니 내성적인 사람은 뭔가 부족한 사람, 적응을 잘 못하는 사람이란 편견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내성적인 사람까지도 외향적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그렇게 보이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왼손잡이와 마찬가지로 내성적인 성격은 결핍이 아니다. 왼손잡이처럼 많은 내성적인 사람들은 타인을 위해 디자인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이책을 썼다. 이제는 자신의 독창성과 성과를 인식하고 직장생활에서도 더 인정받고 사회에서도 더 큰 기여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책은 내성적인 성격은 단점이 아니라 말한다. 오히려 내성적이기에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당신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빌 클린턴처럼 말이다.

빌 클린턴은 경청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햇다. "당신은 귀만 열어놓아서는 안 된다. 전적으로 귀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클린턴은 이를 완벽하게 터득했다. 그에게는 당신이 주지사이든 벨보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클린턴은 대화하는 동안만큼은 상대를 자신과 대화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대해줬다. 눈빛에서부터 몸짓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부분은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는 '자기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전달했다." ('what got you here won't get you there')

이것은 내성적인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외향적인 사람의 적성이지 않을까 싶겠지만 이것은 내향적인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외향적일수록 오히려 자기중심적일 확률이 더 높다. 내향성과 외향성을 나누는 것은 뇌의 구조에서 어느 부분이 더 활성화되어 있는가이다. "외향적인 사람들이 외부에서 자극을 찾는 반면에 내성적인 사람들은 주로 자기 내면으로부터 자극을 받습니다. 내향성은 학습, 기억, 계획, 언어능력을 책임지는 뇌부분의 활성화와 관련이 있고, 외향성은 감각처리를 관할하는 영역과 관련이 있지요. 외향적인 사람들이 달근 사람이나 어떤 외부 상황으로부터 오는 감각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것은 내적으로는 그러한 자극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성적인 사람들은 내면 세계에 더 집중하고 외향적인 사람들은 외적인 환경에 좀더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외향적인 사람은 사냥꾼처럼 만족을 찾아 밖을 떠도는 사람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들은 혼자 있는 것을 외롭다고 말하고(내향적인 사람은 평화와 고요함을 즐기는 시간이라 말한다) 정신없이 바쁘지 않으면 지루하다고 말하며(내향적인 사람은 잡담하는 자리에 묶여 있는 것을 지루하다고 한다) 시간이 나면 사람들을 찾아 떠돈다(내향적인 사람은 사람보다는 책과 함께 하고 있을 확률이 더 높다). 친구는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고(내향적인 사람에게 친구는 촌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말하다 침묵이 흐르는 시간을 못 견뎌하고(내향적인 사람은 자신이 그러기를 원하듯이 남들도 필요한 일이 아니면 말없이 있는 당신을 내버려두기를 원한다) 집이란 사람들을 초대하는 장소를 말하고(내향적인 사람에게 집이란 밖의 어수선함에서 도피하는 자신만의 공간이다) 인터넷은 자신을 광고하는 수단이며(내성적인 사람에게 인터넷은 다른 내성적인 사람을 만나는 수단이다. 밖에 나갈 필요가 없으니 이상적이다)  사랑은 어떤 것도 혼자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을 말하고(내성적인 사람에게 사랑은 이해받고 제대로 인정받는것이다) 전화는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생명선이며(내성적인 사람에게 전화는 필요악이다. 날 내버려둬!) 외출은 꼭 2명 이상과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하며 다다익선이다(내성적인 사람에게 외출은 혼자서도 가능하고 동행은 옵션이며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은 서로 잘 맞지 않는다. 천성적으로 외향적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경멸하기 까지 한다. 그러니 외향적인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일까?

내성적인 사람이라도 살아남으려면 자신을 알려야 하고 인맥을 쌓아야 한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맞지도 않는 외향적인 사람들의 테크닉을 쫓아가려니 세상살기가 정말 피곤하다. 네트워킹에 관한 책들을 읽어도 도무지 할 자신이 서지 않는다. 입만 살은 떠벌이가 되어야 한다고? 없는 것을 있는 척 잘난 척을 해야 한다고? 별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뜬금없이 다가가 친한척 별 쓸데도 없는 의미도 없는 잡담을 해야 한다고? 네트워킹에 관한 책은 외향적인 성격인 사람이 쓴 것들이라 그책의 말들을 쫓아가다가는 1주일도 안되어 에너지가 방전되어 버릴 것이다.

이책의 저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내성적인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에게 맞는 자기홍보가 있고 네트워킹이 있다고 말한다. 외향적인 사람들처럼 잘난 척할 필요도 떠벌이가 될 필요도 괜히 친한척 할 필요도 없다고 치어리더가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으로 있으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한가지만 고치면 된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습관말이다.

내성적인 사람의 강점은 생각이 깊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것은 자기를 알리는데 방해가 된다. 남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실수에도 실패에도 당신은 너무나 오래동안 매달려 자학을 하는 습관이 있다. 당신의 완벽주의를 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보다 더 과소평가할 수 밖에 없고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

우선 자신을 스스로 욕하는 내면의 욕쟁이 불평쟁이부터 잠재우라. 자신의 장점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라.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누가 인정해주겠는가? 스스로를 인정하는데서 남의 인정이 시작된다.

자신감을 회복했으면 자신이 남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이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타인의 바램에 맞춰 자신을 알리면 된다. 다른 사람은 어떨까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성적인 사람의 강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맺어지는 인맥은 외향적인 사람들의 것보다 양적으로는 작지만 질적으로 더 강하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이다. 스스로를 생각해보면 이책에서 말하는 내향성이 전적으로 맞지는 않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외향적인 면도 있고 내향적인 면도 있기 때문이다. 단지 어느 면이 더 지배적이냐일 뿐 누구나 외향적이기도 하고 내향적이기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당신이 내향적인 면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면 한번쯤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책이라 생각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네트워킹에 관한 책들이 외향적인 사람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책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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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세계 10대 문명 4
마리아 안젤릴로 지음, 이영민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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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사이즈 판형, 아트지, 풀 컬러 인쇄, 글보다 사진이 더 많음. 이 정도면 이책의 성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책은 인도에 관한 개론서라기보다는 화보집으로 만들어졌다.

10권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는 이책이 다루는 인도를 포함해 10대 문명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책마다 저자가 다르기 때문에(10대 문명을 모두 쓸 수 있는 저자는 없으므로 당연하다) 당연히 책마다 성격이 다르다.

인도를 다루는 이책은 인도 미술사, 그중에서도 종교미술을 인더스 문명부터 무굴제국 이전의 중세까지 다룬다. 그러므로 인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인 타지마할은 이책에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인도미술사에 종교예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업이 일찍부터 발달한 나라이고 교역에는 당연히 예술로 분류되는 수공품들도 대량으로 거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책에서 다루는 종교예술품들도 공방에 주문제작한 것으로 기록된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세속예술품은 거의 남은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종교예술에 한정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책에는 건축도 대량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과 같은 세속건축이 종교건축물만큼은 아니더라도 남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아마도 저자의 전공이 그렇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책에는 수천년의 종교예술이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책을 덮고 나서 머리에 남는 느낌은 변하지 않는 인도란 인상이다. 인더스문명의 유물은 물론 종족이 다른 아리아인들의 작품, 그리고 불교와 자이나교, 힌두교의 유물등 이책이 다루는 범위는 광범위하다. 그러나 시대도 지역도 종족도 종교도 다른데도 머리에 남는 인상은 수천년전이나 몇백년전이나 인도미술/건축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미술이 성립했고 그 이후 많은 기법적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양식은 동북아에도 불교미술을 통해 전해졌고 우리가 수학여행을 가면 보는 석굴암의 조각들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 불교미술을 통해 주변에서 접해왔기에 인도미술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미술 이전과 이후도 전체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도문명의 연속성 때문일 것이다.

아리아인들이 인더스문명의 잔해를 물려받아 지금의 인도문명의 기초를 만들었을 때 그들 자신의 문화는 보잘 것없었다. 그들이 만든 문명은 거의 선주문명인 인더스문명의 잔해를 재조립한 것으로 짐작된다. 가령 요가라든가 윤회란 개념 같은 인도 특유의 것들은 이미 인더스문명 시기부터 있었던 것을 아리아인들이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추정된다.

그들의 종교인 베다교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힌두교 역시 인더스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힌두교의 많은 신들은 그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종교미술을 다루는 이책의 내용이 거의 시대와 상관없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베다교, 힌두교와 종파가 다른 불교, 자이나교의 유물들도 느낌이 별 차이가 없는 것은 왜일까? 시간을 뛰어넘는 인도의 일관성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일관성 이외에 이책의 도판을 보면서 느낀 다른 점은 수다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마치 대승불교 경전을 보는 느낌이다. 대승불교 경전의 특징은 장광설이 심하다는 것이다. 대중이 어떻고 신들이 어떻고 수라 마귀가 어떻고 등등을 떠들고 수다스런 별 의미도 없는 찬양의 수다의 홍수를 뚫고 본 내용으로 들어가기 까기 너무 오래 걸린다. 빨리어로 된 초기불교경전의 간명함과는 너무도 대조된다.

그런 수다스러움은 미술과 건축에서도 그대로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과 신, 동물들이 바글바글하기 때문에 내용 파악에 오래걸리는 조각과 그림, 그런 미술품을 바리바리 빈틈 없이 도배한 건축물. 디테일을 보다보면 눈이 어지럽다.

서구미술에 너무 길들여진 것일까?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서구미술은 고전미를 이상으로 해왔다. 즉 절제와 균형을 미덕으로 한다. 절제와 균형은 중국을 중심으로한 동북아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인도예술 역시 동남아에선 클래식이다. 동남아 사원들을 보면 인도의 영향을 쉽게 볼 수 있다. 클래식의 공통점은 균형미이다. 균형의 개념이 다른 것일까?

이책을 보면서 든 느낌을 적어봤다. 그러면 이책 자체는 어떤가? 그것은 이책에서 무엇을 바라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책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화보집이다. 이책을 통해 인도 역사나 미술사의 개괄적 지식을 얻겠다면 이책은 잘못된 선택이다. 그러나 인도미술에 관한 개론서를 가지고 잇고 그 개론서의 보조로 이책을 활용하려 한다면 이책은 좋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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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큰 중국책 - CHINA : 풍경, 역사, 인간, 문화, 건축
로널드 냅 외 지음, 최경화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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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한마디로 평하자면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펼치면 달력만한 크기에 아트지라 무겁기도 무거운 이책은 책 이름 그대로 크고 무겁기 때문에 독서대에 받쳐지지 않는다. 책상에 눕혀서 또는 누워서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그 크기와 무게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는가? 물론 중국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화보 성격의 책이 다 그렇듯이 이런 책에는 깊이 있는 내용이 담기지는 않는다. 이런 책의 용도는 깊이 있게 파고들거나 개괄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많은 시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고 시각정보는 글보다 정보전달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각정보는 깊이와 폭이 떨어지는 대신 언어로는 불가능한 강렬하면서 생생한 구체적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책은 사진의 정보전달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중국에 관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전하려 노력한다. 다루는 분야도 표지에 한자로 써져 있는 것처럼 풍경, 역사, 사람들, 문화, 건축의 다섯 분야에 걸쳐 있다. 물론 이 5분야를 이 한권으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글보다는 사진이 더 많은 이책을 보다보면 책을 읽으면서는 그려지지 않던 구체적인 중국에 다가갈 수 있다.

만리장성은 가보았던가 사진으로라도 누구나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항소(항주와 소주)가 왜 지상의 천당이라 불리는지, 황사의 진원지인 황토고원은 어떤 곳인지 운남성의 소수민족들은 어떻게 다른지 등을 제대로 말할 수 잇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책은 책에서 말로만 접하던 중국에 대해 최대한 시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이책이 보여주려는 중국은 모든 중국이 아니다. 이책이 보여주려는 중국은 우리가 중국문화라는 말로 떠올리는 전통의 중국이면서 한족만의 중국이 아니라 중국이란 다민족국가에 사는 소수민족들의 삶과 풍경을 보여주면서 중국의 다양성을 보여주려 한다.

이책의 시작인 풍경 파트는 화북의 황토고원에서 몽골초원, 고비사막, 운남성의 열대지역 등 다양한 기후대에 걸쳐있는 중국의 자연을 두 페이지에 걸친 크기의 대형사진들을 나열해 보여준다. 인터넷의 저해상도 사진으로는 느낄 수 없는 종이인쇄만이 보여줄 수 있는 구체성이다.

그러나 다음의 역사와 뒤의 문화는 그리 좋게 편집되어 잇지 않다. 생각에는 풍경 파트처럼 대표적인 이미지만 골라 사진으로 해결한 것이 더 좋았을 것같다.

그러나 다음의 인간 파트는 풍경 파트만큼 생생하다. 물론 사진 크기때문은 아니다. 상하이나 베이징과 같은 대도시에 사는 사람도 다루지만 주로 농촌과 소수민족의 자치구 지역의 서민들의 삶을 중점적으로 업클로즈 퍼스널하게 다루면서 그들의 일상을 사진과 글로 보여주면서 중국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느끼게’ 해준다. 한 가족 당 몇 페이지 할당량이 많지는 않지만 실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그러한 편집은 마지막 파트인 건축에서도 잘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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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와 불교 - 선과 명상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와 접근
안도 오사무 지음, 인경.이필원 옮김 / 불광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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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당혹감에서 쓰인 것이다. 지난 한 세대가 좀 넘는 동안 서구에선 명상붐이 일었다. 명상붐이 일게 된 것은 68세대 또는 반전세대들에 의한 것이었다. 70년대 이후 40년동안 명상과 요가가 서구에서 뿌리를 내렸고 기독교가 퇴조하는 가운데 불교가 확산되었다.

명상, 요가, 불교. 모두 동양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렸거나 별 거 아닌 것으로 치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예를 들면 해방 이후 한국문화는 기독교가 만들어왔지 불교는 아무 발언권이 없었다. 이책의 저자가 사는 일본의 경우도 서구문화에 밀려 불교나 신도와 같은 전통문화는 화석이 된지 오래다. 그랬던 것인데 우리가 모범으로 삼고 기를 쫓아가느라 바빴던 저들이 명상과 불교에 열광하면서 그들이 해석하고 받아들인 버전으로 역수입된 것이 다시 우리에게 퍼져나간다. 90년대부터 한국에서도 시작되었던 요가와 명상붐 그리고 불교의 부활이란 흐름은 결코 우리 스스로의 발견이 아니었다.

서구의 그러한 흐름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제도권으로까지 퍼져 심리학계에서도 명상을 진지하게 치료법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있다. 임상심리학자인 저자는 이책에서 왜 그런 흐름이 만들어졌는가란 질문을 심리학자로서 답한다.

심리학계에서 실제 치료법으로 명상을 받아들인 것은 스트레스 요법으로서엿다. 명상의 이완효과가 스트레스를 다스리는데 효과가 좋기 때문이엇다. 그러나 명상의 적용은 그 이상으로 진전된다. 명상이 이완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명상의 주목적도 아니고 명상은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잇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터였다.

병자가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게 된 현대심리학의 목표는 자아실현에 있다. 저자는 자아실현이 심리학의 목표가 되었을 때부터 명상은 그리고 불교교리가 심리학에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엿다고 말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실현을 이해하려면 동일화(identification)을 이해해야 한다. 동일화란 정체성(identitiy)을 만드는 과정이다. 아기는 자신과 엄마 그리고 환경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의 젓꼭지는 물어도 아프지 않지만 내 손가락을 물면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과 주변은 분리된다. 이 단계에서 ‘나’와 동일한 것은 몸이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고 자아의식이 만들어지면서 ‘나’는 언어로 생각하는 의식과 동일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전까지 나로 생각했던 몸은 나에 속한 것이 되고 ‘나’와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배제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란 말에는 다양한 역할이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착한 아이’란 말과 동일하게 되면 착하지 않은 ‘나’는 나와 동일하지 않은 것이 되고 학생, 직원, 남편, 아버지가 되면서 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그렇게 나와 동일화된 것과 합치하지 않는 나의 부분들은 배제된다. 중년까지 동일화의 과정은 배제의 과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식으로 배제된 것들이 나가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년 이후 동일화의 과정은 이전에 배제되었던 것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축소에서 확대로 바뀌게 된다. 나는 나의 가족으로 확대되고 내가 속한 조직으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 사회로 확대된다.

그러나 배제에서 확대로의 과정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배제의 과정에서 나가 아니라고 판정된 것들이 무의식에 숨어 문제를 일으킨다. 융은 동일화된 것을 가면, 배제된 것을 그림자라 말한다.

명상은 그리고 불교교리는 그림자에 숨은 나이지만 나가 아니라 부정된 것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을 수용하는 수단으로 효과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은 심리학에서 동일화와 동일한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교리의 무아론을 실제 체험하고 느끼고 집착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명상이기 때문에 심리학에서 자아실현의 방법으로 명상을 수용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프로이트가 고안한 자유연상이라든가 융의 적극적 상상이란 기법도 그후 여러 학파에서 개발한 방법들도 명상과 비슷한 목적을 갖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책에는 다양한 논의가 있다. 명상과 불교교리가 프로이트와 융에게 어떻게 해석되엇고 그후의 심리학자들에게 어떻게 해석되엇는가, 그리고 명상과 불교교리가 심리학에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이책의 목적이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핵심적인 해석으로 보는 것은 위에서 요약한 동일화와 집착의 재해석이라 할 수 잇다.

이책은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초심자를 위해 불교교리에 대해 간략하게 저자가 요약한 부분도 있고 다양한 심리학 이론을 모르더라도 읽는데 지장이 없도록 노력한 흔적이 다분하지만 불교도 심리학도 모르는 사람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특별히 심리학자들을 대상으로 국한한 책은 아니지만 저자가 염두에 두는 독자는 일본의 동료 심리학자 그것도 임상심리학자들이고 그들에게 서구 심리학계가 어떻게 불교를 이해하는가를 소개하는 것이 이책의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목적, 즉 서구 심리학계가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잇는가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불교도 심리학도 초심자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노력을 들이면 잃히도록 쓰여졌다 하겠다. 그러면서 위에서 요약한 것과 같이 이론적 깊이도 갖춘 잘 쓰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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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인문학 서재
크리스토퍼 베하 지음, 이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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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마르소의 오래된 영화 ‘L'étudiante (1988)‘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겟다. 프랑스 영화답지 않게 주제가가 영어였던 이 영화는 국내에선 주제가의 이름을 따 ‘유 콜 잇 러브’로 붙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불어 원제인 L'étudiante이란 말 그대로 학생의 일상을 다룬 영화이다. 단지 그 학생이 보통 학생이 아니라 교수자격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란 것이 다를 뿐이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교수가 되는 길은 두가지이다. 한 가지는 미국이나 한국처럼 회사에 취직하듯이 대학에 일자리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머지 한가지는 독일과 프랑스에 독특한 제도로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하는 것이다. 국가시험을 통과해 교수자격을 취득하면 공무원 신분이 부여되어 국가가 책임지고 교수직을 주는 제도이다.

최종시험 직전 3개월간을 다룬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이 치뤄야 할 시험에서 라틴어 구술시험이 있다는 것이다. 라틴어라니? 주인공이 전공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라틴어가 필요한 분야는 아니었다. 그런데 라틴어라니?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유럽에서 라틴어 능력을 요구한 것은 교수급에게만 요구된 것은 아니었다. 대처 전수상이 옥스퍼드에 진학한다고 햇을 때 학교교장은 대처에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옥스퍼드에 추천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대처가 다니던 학교는 중산층을 위한 공립학교였기 때문에 고전어 수업을 하지 않았다. 고전어 수업은 이튼 같은 사립학교에서 하는 수업이엇다. 대처는 옥스퍼드에 가기 위해 고전어를 독학으로 공부해야 햇다.

교육이 대중을 위한 것이 되면서 생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교과목에서 필수가 아니게 되엇지만 엘리트라면 고전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왜 엘리트라면 고전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고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그 고전이 담고 있는 서구문명의 전통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책이 다루고 잇는 하버드 클래식 전집의 기획의도는 엘리트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던 문명의 전통을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엇다.

전집의 기획자인 찰스 엘리엇은 40년동안 하버드 총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찰스 엘리엇이 살던 세계를 오늘날과 비교하면 교육과 문화 의식이 많이 달랐다. 뉴욕이나 LA가 중심지가 되기 전에 19세기 보스턴은 미국 문화의 수도였고 하버드는 그 수도의 의사당이엇다. 그곳이야말로 ‘상류사회 전통’의 중추를 이뤘다ㅓ. 이러한 전통에서는 교육과 문화를 개인의 도덕 발전 수단으로 여겼다. 그러니 영국 비평가 매슈 아널드가 주장한대로 대중에게 ‘최상의 생각과 말’을 접하도록 해주는 것이야말로 지식 엘리트 즉 지식인의 역할로 여겨졌다. 문화는 사회의 기준과 전통을 유지하면서 개인 스스로 비전을 드높이도록 도왔다. 고전을 읽는 독자는 결국 자신의 인생올 되돌아가서 보다 풍부한 세계를 소유하게 된다. 우리는 책을 읽는 내내 3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인본주의의 핵심사상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 지금의 많은 수요와 바람, 혼란이 새로울 것이 없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버드 클래식이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자 미국 노동자 계급 상당수가 이러한 문화 의식을 받아들였고 자발적으로 문화적 소양을 쌓고자 노력했다. 엘리엇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사이의 장벽은 어느 정도 무너졌다. 그 결과는 고급문화의 폭넓은 민주화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버드 클래식인가? 이 전집이 나온 것은 1908년이다. 읽어야 할 고전을 묶어 전집의 형식으로 보급한다는 기획으로는 아마 이 전집이 시초일 것이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100년전에 나온 전집인가? 이 전집이 나온 이후로 브리태니커에서 유사한 기획이 있었고 영어권에서 요즘 흔히 유통되는 것은 낱권으로 팔리는 펭귄 클래식이다. 저자가 하버드 클래식을 선택한 것은 별 다른 이유가 없었다. 단지 외할머니의 서재에 그 전집이 있었다는 것뿐이다.

저자의 외할머니는 접집을 기획한 엘리엇이 목표로 했던 사람중의 하나였다. 가방끈이 짧았던 외할머니에게 전집은 혼자 독학으로 교양을 쌓을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외할머니가 읽었던 책은 빨간 가죽 장정이란 특이하게 육중한 모습으로 5피트 길이의 책장에 꼽혀있었고 어릴 때부터 그것을 보아왔던 저자에게 도전해볼만한 목표가 된 것이다.

그리고 50권짜리 전집을 읽기 위해 직장도 관두고 1년을 투자한다는 황당한 계획을 세운다. 이책은 그 계획의 결과이다. 한주에 한권씩을 읽고 쓴 독후감이 이책이다. 그러면 저자는 100년전의 기획물을 읽으면서 무엇을 찾았는가?

이 전집이 대상으로 한 것은 ‘문학’이었다. 그러나 목차를 보면 종의 기원, 국부론, 플루타르크 영웅전, 쿠란, 불교경전과 같이 문학이 아닌 것들이 포함된 것을 알 수 잇을 것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문학은 지금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기번은 ‘로마제국흥망사’를 쓰면서 문학작품을 쓰고 있다고 생각햇다. 당시 문학은 오늘날과 달리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역사도 정치가의 연설문도 정치 팜플렛도, 종교서도 문학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런 문학을 읽는 것은 소일거리나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닌 진지한 일이었고 거기서 교양을 얻었다.

‘“20세기 교양인이 되려면 고대와 근대 문학의 지식은 필수인데 나는 그 지식을 습득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엘리엇이 언급한 20세기 교양인이라는 개념은 정확히 무엇인가? 교양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은 인문 정신, 즉 인문적 사고방식이다. 그러려면 야만 상태에서 문명으로 진보하면서 인류가 겪은 길을 따라가며 엄청난 양의 기록과 발견, 경험, 성찰들도 아울러 습득해야 한다. 하버드 클래식 전잽을 읽다보면 문화란 형질의 집합이나 지식의 축적이라기 보다는 내면의 발전이라는 엘리엇의 생각에 더욱더 공감하게 되엇다. 플라통에서 에머슨까지 전집에서 가장 빼어난 저자들은 단순히 사실을 전달한 게 아니라 앎에 다가가는 특별한 접근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전집의 첫권에 ‘프랭클린 자서전’이 놓인 것이다. 오늘날의 분류로는 전기라기 보다 자기계발서가 더 합당한 책이 놓인 것은 지금과 다른 문학과 교양의 개념에 따른 것이엇다.

오늘날 프랭클린 자서전을 문학으로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문학성을 갖춘 훌륭한 문학은 교훈적이서는 안되며 적어도 노골적으로 교훈을 드러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우리에게 인생의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언정 자기계발서처럼 일상을 위한 규칙을 정하지는 않는다.”

저자가 1년동안 하버드 클래식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100년의 시간이 바꾸어 놓은 교양과 문화, 그리고 문학이란 개념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엇는가이다.

이 전집이 나올 당시까지만 해도 “’상류사외 전통은’ 여전히 미국을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몇 년 되지 않아 1차대전의 참상을 겪으며 이러한 전통은 무너졌다. 그때 유럽 명몇 나라에 한정되어 잇던 모더니즘 문화가 미국이란 무대에서 꽃을 피웠다. 예술의 역할은 이제 전통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급격히 단절하고 뒤집는 것이 된다. 문화는 ‘고급’과 ‘저급’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고급’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전파되지 않고 엘리트만을 위해,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졌다. 많은 이들이 최상의 문화 전통을 누리기를 원하는 엘리엇 같은 사람은 ‘중간급’ 정도로 매도되었을 것이다. 지식인 계급이 문화를 통해 대중의 내적 성장을 돕던 시절은 오래전에 끝났고 이런 시절은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작품은 그 자체로 즐겨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인, 밀실의 예술이 되엇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보다 우리를 즐겁게 하고 우리를 위로하는 겸손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책이 대상으로 하는 하버드 클래식이 나왔을 때만 해도 아직 문학은 광장의 예술이었다. 그 시대의 문학은 밀실에서 속삭이는 연애편지가 아니라 광장에서 큰 소리로 웅변하는 연설문이엇다.

두가지 다른 문학의 개념 중 어느 것도 진리일 수는 없다. 시대가 달라지면 개념도 변하는 것이고 기능도 변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100년전의 개념이 더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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