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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인문학 서재
크리스토퍼 베하 지음, 이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평점 :
소피 마르소의 오래된 영화 ‘L'étudiante (1988)‘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겟다. 프랑스 영화답지 않게 주제가가 영어였던 이 영화는 국내에선 주제가의 이름을 따 ‘유 콜 잇 러브’로 붙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불어 원제인 L'étudiante이란 말 그대로 학생의 일상을 다룬 영화이다. 단지 그 학생이 보통 학생이 아니라 교수자격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란 것이 다를 뿐이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교수가 되는 길은 두가지이다. 한 가지는 미국이나 한국처럼 회사에 취직하듯이 대학에 일자리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머지 한가지는 독일과 프랑스에 독특한 제도로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하는 것이다. 국가시험을 통과해 교수자격을 취득하면 공무원 신분이 부여되어 국가가 책임지고 교수직을 주는 제도이다.
최종시험 직전 3개월간을 다룬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이 치뤄야 할 시험에서 라틴어 구술시험이 있다는 것이다. 라틴어라니? 주인공이 전공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라틴어가 필요한 분야는 아니었다. 그런데 라틴어라니?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유럽에서 라틴어 능력을 요구한 것은 교수급에게만 요구된 것은 아니었다. 대처 전수상이 옥스퍼드에 진학한다고 햇을 때 학교교장은 대처에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옥스퍼드에 추천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대처가 다니던 학교는 중산층을 위한 공립학교였기 때문에 고전어 수업을 하지 않았다. 고전어 수업은 이튼 같은 사립학교에서 하는 수업이엇다. 대처는 옥스퍼드에 가기 위해 고전어를 독학으로 공부해야 햇다.
교육이 대중을 위한 것이 되면서 생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교과목에서 필수가 아니게 되엇지만 엘리트라면 고전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왜 엘리트라면 고전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고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그 고전이 담고 있는 서구문명의 전통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책이 다루고 잇는 하버드 클래식 전집의 기획의도는 엘리트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던 문명의 전통을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엇다.
전집의 기획자인 찰스 엘리엇은 40년동안 하버드 총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찰스 엘리엇이 살던 세계를 오늘날과 비교하면 교육과 문화 의식이 많이 달랐다. 뉴욕이나 LA가 중심지가 되기 전에 19세기 보스턴은 미국 문화의 수도였고 하버드는 그 수도의 의사당이엇다. 그곳이야말로 ‘상류사회 전통’의 중추를 이뤘다ㅓ. 이러한 전통에서는 교육과 문화를 개인의 도덕 발전 수단으로 여겼다. 그러니 영국 비평가 매슈 아널드가 주장한대로 대중에게 ‘최상의 생각과 말’을 접하도록 해주는 것이야말로 지식 엘리트 즉 지식인의 역할로 여겨졌다. 문화는 사회의 기준과 전통을 유지하면서 개인 스스로 비전을 드높이도록 도왔다. 고전을 읽는 독자는 결국 자신의 인생올 되돌아가서 보다 풍부한 세계를 소유하게 된다. 우리는 책을 읽는 내내 3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인본주의의 핵심사상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 지금의 많은 수요와 바람, 혼란이 새로울 것이 없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버드 클래식이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자 미국 노동자 계급 상당수가 이러한 문화 의식을 받아들였고 자발적으로 문화적 소양을 쌓고자 노력했다. 엘리엇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사이의 장벽은 어느 정도 무너졌다. 그 결과는 고급문화의 폭넓은 민주화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버드 클래식인가? 이 전집이 나온 것은 1908년이다. 읽어야 할 고전을 묶어 전집의 형식으로 보급한다는 기획으로는 아마 이 전집이 시초일 것이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100년전에 나온 전집인가? 이 전집이 나온 이후로 브리태니커에서 유사한 기획이 있었고 영어권에서 요즘 흔히 유통되는 것은 낱권으로 팔리는 펭귄 클래식이다. 저자가 하버드 클래식을 선택한 것은 별 다른 이유가 없었다. 단지 외할머니의 서재에 그 전집이 있었다는 것뿐이다.
저자의 외할머니는 접집을 기획한 엘리엇이 목표로 했던 사람중의 하나였다. 가방끈이 짧았던 외할머니에게 전집은 혼자 독학으로 교양을 쌓을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외할머니가 읽었던 책은 빨간 가죽 장정이란 특이하게 육중한 모습으로 5피트 길이의 책장에 꼽혀있었고 어릴 때부터 그것을 보아왔던 저자에게 도전해볼만한 목표가 된 것이다.
그리고 50권짜리 전집을 읽기 위해 직장도 관두고 1년을 투자한다는 황당한 계획을 세운다. 이책은 그 계획의 결과이다. 한주에 한권씩을 읽고 쓴 독후감이 이책이다. 그러면 저자는 100년전의 기획물을 읽으면서 무엇을 찾았는가?
이 전집이 대상으로 한 것은 ‘문학’이었다. 그러나 목차를 보면 종의 기원, 국부론, 플루타르크 영웅전, 쿠란, 불교경전과 같이 문학이 아닌 것들이 포함된 것을 알 수 잇을 것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문학은 지금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기번은 ‘로마제국흥망사’를 쓰면서 문학작품을 쓰고 있다고 생각햇다. 당시 문학은 오늘날과 달리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역사도 정치가의 연설문도 정치 팜플렛도, 종교서도 문학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런 문학을 읽는 것은 소일거리나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닌 진지한 일이었고 거기서 교양을 얻었다.
‘“20세기 교양인이 되려면 고대와 근대 문학의 지식은 필수인데 나는 그 지식을 습득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엘리엇이 언급한 20세기 교양인이라는 개념은 정확히 무엇인가? 교양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은 인문 정신, 즉 인문적 사고방식이다. 그러려면 야만 상태에서 문명으로 진보하면서 인류가 겪은 길을 따라가며 엄청난 양의 기록과 발견, 경험, 성찰들도 아울러 습득해야 한다. 하버드 클래식 전잽을 읽다보면 문화란 형질의 집합이나 지식의 축적이라기 보다는 내면의 발전이라는 엘리엇의 생각에 더욱더 공감하게 되엇다. 플라통에서 에머슨까지 전집에서 가장 빼어난 저자들은 단순히 사실을 전달한 게 아니라 앎에 다가가는 특별한 접근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전집의 첫권에 ‘프랭클린 자서전’이 놓인 것이다. 오늘날의 분류로는 전기라기 보다 자기계발서가 더 합당한 책이 놓인 것은 지금과 다른 문학과 교양의 개념에 따른 것이엇다.
오늘날 프랭클린 자서전을 문학으로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문학성을 갖춘 훌륭한 문학은 교훈적이서는 안되며 적어도 노골적으로 교훈을 드러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우리에게 인생의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언정 자기계발서처럼 일상을 위한 규칙을 정하지는 않는다.”
저자가 1년동안 하버드 클래식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100년의 시간이 바꾸어 놓은 교양과 문화, 그리고 문학이란 개념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엇는가이다.
이 전집이 나올 당시까지만 해도 “’상류사외 전통은’ 여전히 미국을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몇 년 되지 않아 1차대전의 참상을 겪으며 이러한 전통은 무너졌다. 그때 유럽 명몇 나라에 한정되어 잇던 모더니즘 문화가 미국이란 무대에서 꽃을 피웠다. 예술의 역할은 이제 전통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급격히 단절하고 뒤집는 것이 된다. 문화는 ‘고급’과 ‘저급’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고급’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전파되지 않고 엘리트만을 위해,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졌다. 많은 이들이 최상의 문화 전통을 누리기를 원하는 엘리엇 같은 사람은 ‘중간급’ 정도로 매도되었을 것이다. 지식인 계급이 문화를 통해 대중의 내적 성장을 돕던 시절은 오래전에 끝났고 이런 시절은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작품은 그 자체로 즐겨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인, 밀실의 예술이 되엇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보다 우리를 즐겁게 하고 우리를 위로하는 겸손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책이 대상으로 하는 하버드 클래식이 나왔을 때만 해도 아직 문학은 광장의 예술이었다. 그 시대의 문학은 밀실에서 속삭이는 연애편지가 아니라 광장에서 큰 소리로 웅변하는 연설문이엇다.
두가지 다른 문학의 개념 중 어느 것도 진리일 수는 없다. 시대가 달라지면 개념도 변하는 것이고 기능도 변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100년전의 개념이 더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