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와 불교 - 선과 명상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와 접근
안도 오사무 지음, 인경.이필원 옮김 / 불광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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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당혹감에서 쓰인 것이다. 지난 한 세대가 좀 넘는 동안 서구에선 명상붐이 일었다. 명상붐이 일게 된 것은 68세대 또는 반전세대들에 의한 것이었다. 70년대 이후 40년동안 명상과 요가가 서구에서 뿌리를 내렸고 기독교가 퇴조하는 가운데 불교가 확산되었다.

명상, 요가, 불교. 모두 동양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렸거나 별 거 아닌 것으로 치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예를 들면 해방 이후 한국문화는 기독교가 만들어왔지 불교는 아무 발언권이 없었다. 이책의 저자가 사는 일본의 경우도 서구문화에 밀려 불교나 신도와 같은 전통문화는 화석이 된지 오래다. 그랬던 것인데 우리가 모범으로 삼고 기를 쫓아가느라 바빴던 저들이 명상과 불교에 열광하면서 그들이 해석하고 받아들인 버전으로 역수입된 것이 다시 우리에게 퍼져나간다. 90년대부터 한국에서도 시작되었던 요가와 명상붐 그리고 불교의 부활이란 흐름은 결코 우리 스스로의 발견이 아니었다.

서구의 그러한 흐름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제도권으로까지 퍼져 심리학계에서도 명상을 진지하게 치료법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있다. 임상심리학자인 저자는 이책에서 왜 그런 흐름이 만들어졌는가란 질문을 심리학자로서 답한다.

심리학계에서 실제 치료법으로 명상을 받아들인 것은 스트레스 요법으로서엿다. 명상의 이완효과가 스트레스를 다스리는데 효과가 좋기 때문이엇다. 그러나 명상의 적용은 그 이상으로 진전된다. 명상이 이완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명상의 주목적도 아니고 명상은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잇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터였다.

병자가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게 된 현대심리학의 목표는 자아실현에 있다. 저자는 자아실현이 심리학의 목표가 되었을 때부터 명상은 그리고 불교교리가 심리학에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엿다고 말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실현을 이해하려면 동일화(identification)을 이해해야 한다. 동일화란 정체성(identitiy)을 만드는 과정이다. 아기는 자신과 엄마 그리고 환경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의 젓꼭지는 물어도 아프지 않지만 내 손가락을 물면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과 주변은 분리된다. 이 단계에서 ‘나’와 동일한 것은 몸이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고 자아의식이 만들어지면서 ‘나’는 언어로 생각하는 의식과 동일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전까지 나로 생각했던 몸은 나에 속한 것이 되고 ‘나’와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배제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란 말에는 다양한 역할이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착한 아이’란 말과 동일하게 되면 착하지 않은 ‘나’는 나와 동일하지 않은 것이 되고 학생, 직원, 남편, 아버지가 되면서 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그렇게 나와 동일화된 것과 합치하지 않는 나의 부분들은 배제된다. 중년까지 동일화의 과정은 배제의 과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식으로 배제된 것들이 나가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년 이후 동일화의 과정은 이전에 배제되었던 것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축소에서 확대로 바뀌게 된다. 나는 나의 가족으로 확대되고 내가 속한 조직으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 사회로 확대된다.

그러나 배제에서 확대로의 과정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배제의 과정에서 나가 아니라고 판정된 것들이 무의식에 숨어 문제를 일으킨다. 융은 동일화된 것을 가면, 배제된 것을 그림자라 말한다.

명상은 그리고 불교교리는 그림자에 숨은 나이지만 나가 아니라 부정된 것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을 수용하는 수단으로 효과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은 심리학에서 동일화와 동일한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교리의 무아론을 실제 체험하고 느끼고 집착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명상이기 때문에 심리학에서 자아실현의 방법으로 명상을 수용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프로이트가 고안한 자유연상이라든가 융의 적극적 상상이란 기법도 그후 여러 학파에서 개발한 방법들도 명상과 비슷한 목적을 갖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책에는 다양한 논의가 있다. 명상과 불교교리가 프로이트와 융에게 어떻게 해석되엇고 그후의 심리학자들에게 어떻게 해석되엇는가, 그리고 명상과 불교교리가 심리학에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이책의 목적이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핵심적인 해석으로 보는 것은 위에서 요약한 동일화와 집착의 재해석이라 할 수 잇다.

이책은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초심자를 위해 불교교리에 대해 간략하게 저자가 요약한 부분도 있고 다양한 심리학 이론을 모르더라도 읽는데 지장이 없도록 노력한 흔적이 다분하지만 불교도 심리학도 모르는 사람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특별히 심리학자들을 대상으로 국한한 책은 아니지만 저자가 염두에 두는 독자는 일본의 동료 심리학자 그것도 임상심리학자들이고 그들에게 서구 심리학계가 어떻게 불교를 이해하는가를 소개하는 것이 이책의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목적, 즉 서구 심리학계가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잇는가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불교도 심리학도 초심자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노력을 들이면 잃히도록 쓰여졌다 하겠다. 그러면서 위에서 요약한 것과 같이 이론적 깊이도 갖춘 잘 쓰인 책이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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